◈ 이스라엘 성지순례/이스라엘[종합]

★ 간추린 이스라엘사 <이스라엘문화원>

영국신사77 2010. 11. 14. 00:46

                   간추린 이스라엘사
 iscc  ( HOMEPAGE 06-06 

 

 

 유대인의 고향은 이스라엘 땅(에레츠 이스라엘)이다. 오랜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가운데 초기 몇 천 년의 역사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었고 문화적 종교적 민족적 동질성이 형성되었으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쫓겨난 후에도 수세기 동안 이스라엘에 유대인들이 명맥을 지켰다.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도 이스라엘과 유대민족간의 유대감을 잃지 않았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의 성립으로 2000년 전 잃어버린 이스라엘의 독립은 다시 찾게 됐다. 국가 수립으로 2000년 전에 빼앗겼던 유대인의 땅을 되찾게 된 것이다.

                                 1. 성서시대

 유대인의 역사는 약4000년 전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기원전 2000년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기록으로 그들의 유목생활의 양상이 창세기에 기록된 것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여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민족의 시조로, 또한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앙의 종으로 부름 받았는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기근이 나라를 덮치자 야곱과 열 두 명의 아들과 그 가족들은 이집트의 나일 삼각주 동쪽 지방인 고센에 정착했다. 그들의 후손은 노예로 전락하여 강제 노역을 했다.

                              ■ 출애굽과 정착

 400년 동안의 노예 생활 후에 이스라엘은 모세에 의해 자유를 찾았다.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모세는 하나님께 선택받아 그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한 땅(에레츠 이스라엘)으로 인도(기원전 12~13세기)했다. 이스라엘인은 시나이 사막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십계명을 포함한 모세 5경을 받고 국가를 세웠다.

 

 출애굽(기원전 1500년경)은 유대인들의 국가에 대한 기억 속에 유일신에 대한 신념을 담은 위대한 흔적을 남겼으며, 자유와 독립의 상징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해마다 유월절과 율법을 받은 날, 그리고 광야의 방황을 기념하는 날을 당시의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경축하고 있다.

 

 다음 두 세기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그 땅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유목 생활을 청산, 농민과 장인으로 변신하면서 경제적 , 사회적으로 다소 기반을 잡았다.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가 마감된 것은 사람들이 '사사'로 알려진 지도자들 주위에 몰려든 전쟁의 시대가 시작되면서였다. 사사들은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능력과 함께 정치적, 군사적으로 역량을 발휘하여 이러한 지위로 추대되었으며, 적을 정복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간 동안만 헌신하였다.

 

 이어서 블레셋(해안에 터를 잡은 소아시아 민족)의 위협에 직면하자 부족 조직의 타고난 나약함은 부족들의 통합과 영구적이고 세습적인 왕권의 지위를 가진 지도자를 갈망하게 되었다.

                         ■ 왕국 시대 ( 기원전 1020년)

초대 왕 사울은 흐트러진 부족 시대와, 그의 후계자 다윗에 의해 정비된 완전한 군주 시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다윗 왕 ( 기원전 1004~965년경 ) 은 블레셋 정복을 끝으로 군사 원정에 성공하고 주위 나라들과 우호 동맹을 조직하여 이스라엘을 강대국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이어서 그의 왕권은 이집트 변경과 홍해에서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확장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새로운 행정 제도를 확립했으며,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12부족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하여 예루살렘과 국왕이 국민 생활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성서에 의하면 다윗 왕은 많은 재능을 가진 인물로,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시편에서 그의 시와 음악에 대한 재능을 알 수 있다. 솔로몬 왕 (기원전 965~930년경)은 부왕 다윗이 세운 제국을 계승하여 그의 능력을 왕국의 부흥에 쏟았다. 정략 결혼을 하여 힘을 증강한 이웃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왕국 내부의 평정을 유지하고 당시의 열강들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솔로몬은 외국과의 통상을 강화하고 동을 채광, 철을 제련하는 등 주요 사업을 발달시켜 경제를 부흥 시켰다. 솔로몬 왕은 전략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들을 요새화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솔로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왕궁과 예루살렘 신전의 건축인데, 신전은 국민의 국가적 종교의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성서의 잠언과 아가서는 솔로몬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왕국의 분열

 솔로몬의 치세는 민중들의 고조된 불만으로 파국을 맞았는데, 그의 계획이 백성들에게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부족과 다른 부족에 대한 차별은 왕국과 부족 분리주의자들 사이의 적대감을 높였다. 솔로몬이 죽자(기원전 930년) 반란이 일어나 북쪽의 부족들이 떨어져나가, 나라는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10개의 이스라엘 부족의 영토로 둘러싸인 이스라엘 왕국은 수도를 사마리아로 정하고 19대 왕까지 200년 동안 이어졌다.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부족으로 구성된 유다 왕국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다윗의 대를 이어 같은 수의 왕에 의해 350년 동안 이어졌다. 앗시리아의 확장과 바빌로니아 제국의 영토확장으로, 이스라엘이, 유다가 차례로 정복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앗시리아 제국에게 점령되었고(기원전 722년), 백성들은 유배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그로부터 백년 후에 바빌로니아는 유다 왕국을 점령하고 신전을 파괴하였으며(기원전 586년), 주민의 대부분을 유배하였다.

                        ■ 바벨론 유수 ( 기원전 586 ~ 538년)

 바빌로니아의 정복으로 제 1 유대왕국은 망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정복이 유대인들의 땅에 대한 애착은 끊지 못했다. 그들은 바빌론 강가에 앉아 밤낮으로 고향을 기억하자고 언약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시편 137장 5~6절)

 

 1차 성전 파괴(기원전 586년)후에 바벨론의 유수가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독특한 이상의 체계와 이스라엘 땅 밖에서 유대교의 체계가 발전하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 민족의 생존과 정신적인 동질성이 확고해 지고 한 국가로서 민족의 장래를 보장하였다.

                                   2. 외국의 지배

                     ■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기원전 538 ~ 142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왕 고레스의 칙령에 따라 일부 유태인들은 그들의 땅으로 돌아왔다.

 

 제1차 귀환 때(기원전 538년) 배를 탄 약 5,000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은 다윗의 직계후손인 스룹바벨에게 인도되었으며,

 

 1세기가 채 못되어 행해진 제2차 귀환은 율사 에스라에 의해 인도되었다.

 

 그 후 4세기가 넘도록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제국(기원전 538 ~ 333년)과 후의 그리스 시대(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시대)의 대군주(기원전 332 ~ 142년) 밑에 여러 가지 계급으로 나뉘어 자치하는 법을 배웠다.

 

 유태인들의 귀환, 에스라의 지도력, 두 번째 성전의 건축, 예루살렘 성벽의 중건과 유태인의 종교적, 사법적 최고 기구인 크네세트 하그돌라 (의회)의 설립은 두 번째 공동체의 시작을 의미한다.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는 유다는 예루살렘이 중심인 국가가 되고 대제사장과 장로 회의에 지도력을 위임하였다.

 

 그리스 시대를 거치는 동안 시리아에 본거지를 둔 셀레우코스 왕은 그의 백성들에게 그리스 문화와 관습을 강요하기 위해 유태교 행사를 금지하고 성전을 모독하였다. 그 반발로 거대한 항거 운동이 일어나고(기원전 166년) 강한 전투력이 생겼다. 이 항거 운동은 처음에 하스모니안 왕조의 성직자인 마타티아스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유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는 셀레우스코군에 대항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성전을 정화하였다(기원전 164년). 이 성전 탈환을 매년 하누카 축제(수전절) 동안 경축하고 있다.

                       ■ 하스모니아 왕조 ( 기원전 142 ~ 63년 )

 하스모니안의 승리가 잇따르자 셀레우코스는 유다 왕국(이때 이스라엘 땅으로 불리었다)에게 정치적, 종교적인 자치권을 부여하였고(기원전 147년), 셀레우코스 왕국의 붕괴로(기원전 129년)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졌다. 하스모니안 왕들은 세습하여 왕이 되었는데, 솔로몬 시대의 영토에 버금가는 영토를 차지하였다. 약 80년간 지속된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동안 유태인의 생활은 풍요로웠다.


                        ■ 로마의 지배 ( 기원전 63 ~ 서기 313년)

 로마인들은 그 지역의 강한 지도자로서 셀레우코스를 대체하게 되었으며, 하스모니안 왕 히르카누스 2세에게는 다마스쿠스의 로마 총통의 지배 아래 제한적인 왕권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새로운 정부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이전의 하스모니안 왕조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노력이 마타티아스 안티고누스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로마에게 패하고 사망(기원전 40년)함으로써 이 땅은 로마 제국에 예속된 한주가 되었다.

 

 기원전 37년에 로마는 히르카누스 2세 고문의 아들이자 히르카누스 2세의 딸과 혼인한 헤롯을 유다왕에 임명하였다. 헤롯은 외교에서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했지만 국내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제한적인 자치권을 부여받았으며,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왕 중의 하나였다. 그레코로만 문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헤롯은 거대한 건축 계획을 세워 가이사랴와 세바스테스의 도시들, 헤로디움과 마사다의 요새를 세웠고, 당시의 가장 웅장한 건축물인 성전을 재건했다.

 

 이러한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유태 백성들의 신임과 지지를 받지 못했다. 헤롯이 사망한 후 (기원전 4년), 주로 헤롯 왕조에 대한 대중들의 반대로 인해 그의 후계자들의 권위는 점차 소멸되었고, 유다는 로마가 직접 지배하게 되었다(6년).

 

 점점 가혹해지고 이성을 잃은 로마의 지배를 견디다 못한 유태인들은 로마 황제 네로의 후기에는 항거 운동을 시작했다. 그 항거 운동은 예루살렘의 완전한 함락(70년)과 유다의 마지막 요새였던 마사다의 붕괴로 막을 내렸다.

 

 로마군의 대장 티투스에 의해 함락된(70년) 예루살렘과 성전은 유태 민족에게 중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유태 역사가인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함락만으로도 백만명의 유대인들이 몰락하고, 그 밖의 곳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고 수만 명이 노예로 팔렸다.

 

 마지막의 짧은 유대인 군주 시대는 시몬 바르 코크바의 반란(132년) 후에 이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유다와 예루살렘이 수복되었다. 그러나 로마군의 막강한 힘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3년 후 로마 관습에 따라서 예루살렘은 '황소의 멍에로 갈라 젖혀졌으며' 이 땅에 대한 모든 유대인의 끈은 점차 소멸되고 유다는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다시 불리게 되었다.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모두 불타버렸지만, 유태인들과 유태정신은 로마와 만남으로써 살아 남았다. 작은 유대인 공동체는 점차 힘을 회복하고 망명에서 돌아오면서 때때로 힘을 길렀다. 제도적인 공동생활이 재건되어 국가와 신전의 통합체 없이 새로운 환경과 만나게 되었다.

 

 최고 의결 기구이자 사법의 주체인 산헤드린(크네세트 하게돌라의 후신)이 야브네(70년), 그 후에는 티베리아스에서 재소집 되었다. 제사장은 랍비들이 대신하였고, 중앙성소가 없는 상태에서 가버나움, 고라신, 바람, 감라, 그밖의 장소에 웅장한 건축물로 정형화된 유대교 회당은 분산된 각 집단 사회의 중추가 되었다. 할라카(종교법)는 유태인들을 맺어주는 공통의 끈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 비잔틴의 지배 ( 313년 ~ 636년 )

 4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과 비잔틴 제국 건설에 이어 이스라엘 땅은 범기독교의 나라가 되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갈릴리 등 기독교의 성지에는 교회가 세워졌으며 도처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유태인들은 이전에 가졌던 자치권을 빼앗기고 공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으며, 단지 일 년 중 하루만 성전 파괴를 애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었다.

 

 614년 페르시아가 침입해 오자 유태인들은 석방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이를 지지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페르시아는 예루살렘 정부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3년밖에 지탱되지 않았다.

 

 곧이어 비잔틴 군은 예루살렘에 재 입성하여(629년) 다시 유대인들을 축출하였다.

                           ■ 아랍의 지배 ( 636년 ~ 1099년)

 무하마드가 죽은(632년) 지 4년 후부터 아랍의 지배가 4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다마스쿠스에서, 다음에는 바그다드와 이집트로부터 칼리프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 지배 초기에는 유태인의 예루살렘 거주권이 회복되고 유태인 공동체는 '보호' 아래 사는 것이 승인되었는데, 이것은 특별 선거와 지세의 납부에 대한 보상으로 생명과 재산, 예배의 자유를 보장 받는 보호막으로서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비 회교도들에 대한 관례적인 지위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비 회교도에 대한 제한법의 도입(717년)으로 유태인의 공적인 행동, 종교 의식, 법적 지위 등은 제한을 받았다. 그 와중에 내려진 경작지에 대한 세금의 중과로 그들 대부분은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으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사회적, 경제적인 차별 대우가 심해지자 많은 유태인들은 이 땅을 떠남으로써 11세가 말경 이스라엘 땅의 유태인 집단은 상당수가 사라지고, 유기적이고 종교적인 응집력이 점차 상실되어 갔다.

                           ■ 십자군 시대 ( 1099년 ~ 1291년)

 다음 200년 동안 교황 우르만 2세의 호소에 따라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유럽 각국의 십자군의 지배를 받았다.

 

 5주간의 포위 후 1099년 7월 제 1차 십자군 원정의 기사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라틴 왕국을 세웠다. 도시의 비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학살당했다. 회당 안에 장벽을 쌓고 유태인들은 그들의 거점을 방어했으나 모두 죽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그 후 수 십 년 동안 십자군은 조약과 협정으로, 그러나 대부분 유혈 군사 정복으로 이 나라의 다른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해 갔다. 십자군 왕국은 대부분 요새화된 도시나 성에 한정된 소수 정복자들의 왕국이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땅은 기독교의 지배 아래 들어갔지만, 기독교 국가가 되지는 않았다.

 

 십자군이 유럽에서 성지까지의 교통로를 열어 순례의 길이 대중화되고 인기를 얻자, 동시에 늘어나는 유태인들은 그들의 옛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갈구하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무리를 지어온 300명의 랍비들중 몇몇은 악고에, 나머지는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십자군이 쿠르드 살라딘에게 격파 당하자(1187년), 유태인들은 예루살렘에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하여 어느 정도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들의 거주는 요새화된 몇몇 성에 한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은 이슬람 군의 엘리트 계급인 마므룩에게 패하자, 이 땅의 십자군 지배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 마므룩의 지배 ( 1291년 ~ 1516년 )

 마므룩의 지배아래 이 땅은 다마스쿠스의 지배를 받는 벽지가 되었다. 악고 ·욥바, 그 밖의 항구들은 새로운 십자군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무역은 단절되었다.

 

 중세 말에는 이 나라 도시의 중심은 파괴되고 예루살렘의 대부분은 황폐해졌으며, 유대인들은 궁핍해졌다. 마므룩의 쇠퇴기는 정치적·경제적인 격동과 질병·탐욕스러운 자들의 침입과 지진 등으로 암울한 시기었다. 

                        ■ 오스만 제국의 지배 ( 1517 ~ 1917년)

 다음의 4세기 동안 이스라엘 땅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지배를 받았다. 이스라엘 땅은 네 부분으로 분할되고, 행정적으로는 다마스쿠스의 한 지방으로 예속되었다.

 

 오스만제국의 초시에는 약 1000호 정도의 유태인들이 이 땅에 살았는데, 주로 예루살렘 ·나블루스· 헤브론·가자·츠파트·갈릴리 마을에 거주했다. 이 유대인 공동체는 북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 이 땅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유대인의 후손으로 이루어졌다.

 

 오스만 술탄 술레이만 1세가 죽을 때까지(1556년) 자리 잡힌 정부에 의해 유태인의 생활은 개선되고 유태인의 이주를 자극하였다. 새로운 이주민들 중 몇몇은 예루살렘에 정착했지만, 대부분은 츠파트로 갔다. 그리하여 츠파트[로마에 항거한 전쟁기의 요새로, AD 67년에 요세푸스에 의해 요새화됨]서 는 16세기 중반에 유태인 수가 1만명에 달하는 직물의 중심지로 번창했을 뿐 아니라 유태학문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카발라(유대의 신비주의)가 번성했으며, 동시에 슐란 아루크에 성문화된 것과 같이 유태 법률은 츠파트 학파에서 디아스포라(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 전역에 퍼져 나갔다.

 

 오스만제국의 지배가 소홀해지면서 18세기 말에는 많은 토지가 부재 지주의 소유가 되어, 가난한 소작 농민들에게 일괄성 없는 세제로 임차되었다. 갈릴리의 대삼림과 카르멜 산맥은 벌목되고, 늪지와 사막이 경작지를 침식하였다.

 

 19세기에 서양 세계의 진출이 시작되자, 유럽 열강들은 선교활동을 통해 그들의 지위를 획득했다. 영국·미국·프랑스의 학자들은 성서의 지리와 고고학 연구에 착수하고, 영국·프랑스·구소련·오스트리아·미국이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개설했다. 정기 기선이 이 땅과 유럽 사이를 왕래하고, 우편과 전신이 개설되었다. 예루살렘과 욥바를 연결하는 도로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세 개의 대륙을 연결하는 전통적인 교두보로서 이 땅의 재 탄생은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가속화되었다. 따라서 이 나라의 유태인들의 생활 조건은 서서히 개선되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세기의 중반에는 예루살렘 성안의 인구가 과밀하기 때문에 유태인 거주 지역을 세웠으며(1860년), 다음 25년 동안 그 새 도시를 핵으로 하는 교외 지역을 추가로 7개 더 건설하였다.

 

 1880년에 예루살렘에는 많은 유태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농지가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매입되고, 시골 정착민들이 새로 생겼다. 오랫동안 예배의식과 문학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해오던 히브리어가 다시 부활되었다. 아울러 시온주의의 토대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시온주의에 고무된 두 개의 이주 집단이 19세기 말기와 20 세기 초에 동유럽으로부터 이땅에 도착했다. 땅을 일구어 그들의 고향을 다시 찾으려는 희망으로, 이들 개척자들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세우고, 나중에 꽃피우게 된 농업경제의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새로운 이주민들은 극히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오스만제국의 행정부의 태도는 적대적이고 압제적이었다. 통신과 교통 수단은 여전히 원시적이고 불안정했다. 늪지에서는 치명적인 말라리아균이 번식했고, 토양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상태였다. 토지 매입은 제한되었고 건축은 콘스탄티노플의 특별 승인 없이는 금지되었다.

 

 이러한 어려움과 그 밖의 어려움들은 나라의 발전을 방해하였지만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이전 1500년대에 5,000 명에 불과했던 유태인의 수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1914년) 때 85,000명에 이르렀다.

 

 1917년 12월에 알렌비 장군의 지휘아래 영국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써, 4세기에 걸친 오스만제국의 지배는 끝나고 말았다. 영국군에는 수천명의 유대인 의용군이 포함된 3개 대대의 유태인 여단이 있었다. 

                                ■ 영국의 지배 ( 1918 ~ 1949년)

 1922년 7월에 국제 연맹은 영국에게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를 수락하고 '유대 민족과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연결' 을 인정하고 유대국가 건설을 촉진했다. 9월 국제 연맹 이사회와 영국은 유대국가 건설 촉진 계획에 위임통치 지역의 4분의 3인 지금의 요르단 왕국을 포함시키지는 않는다는 제안에 동의하였다.

 (1) 이주 : 시온주의와 벨푸어 선언(1917년)에 고무되어 1919년과 1939년 사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유대인 공동체를 다른 양상으로 발전시켰다.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에 주로 러시아에서 온 3만 5천 명의 이주민들은 몇 년 동안 공동체의 성격과 조직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 개척자들은 포괄적인 사회적, 경제적 구조의 토대를 세웠으며 농업을 발전시키고 키부츠와 모샤브를 설립했으며, 집을 짓고 도로를 건설하였다. 1924년에서 1932년 사이에 주로 폴란드에서 온 약 6만 명의 이주민들은 도시 생활을 발달시키고 풍요롭게 하였다. 이들은 주로 텔아비브, 하이파, 예루살렘에 정착했는데, 그곳에서 소규모의 사업체와 건축회사 경공업체를 설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의 1930년대에 마지막으로 중요한 이주의 물결이 일어났는데, 히틀러가 등장했기 때문에 독일에서 온 약 16만 5천명이다. 이들 중에는 전문가들과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중서부 유럽으로부터 온 가장 큰 규모의 이주였다. 그들의 학력과 기술, 경험은 비즈니스의 수준을 높이고 도시와 농촌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였으며,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생활을 더욱 풍부하게 했다.

 (2) 행정 : 영국의 위임 통치 당국은 유태인과 아랍 집단 사회에 그 집단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권한을 이용하여 유태 사회는 정당 기구를 선출했다(1920년). 그것은 `선출된 의회'라 불렸는데, 매년 활동을 점검하고 정책과 계획을 수행하는 집행부인 '국가 평의회'를 선출했다. 지방의 자원과 세계각지의 유태인이 보낸 기금을 재원으로 이 기구들은 전국의 유태인을 위한 교육, 종교 , 보건, 사회 복지 시설을 위한 조직망을 발전시키고 유지해 나갔다. 1922년에 영국의 위임 통치령에 명기된 대로, '유태인 대리 기관'이 구성되어 영국 당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외국정부와 국제 기구에 대해 유태 민족을 대표하게 되었다.

 (3) 경제 발전 : 30년의 영국 위임 통치기간 동안이 나라의 발전은 박차를 가했다. 농업은 괄목할 만하게 성장하였고 공장들이 세워졌으며, 요르단 강의 물을 이용해 전력을 공급하고, 세 도로가 전역에 건설되고 사해의 광물자원이 개발되었다. 유태인 노동 총연맹인 히스타드루트가 설립되어(1920년 산업 부문에서 공동 농업의 주민들을 위해 복지를 증진시키고 일자리를 제공했다.

 (4) 문화 : 유태 공동체의 독특한 문화 생활은 날이 갈수록 더욱 활기를 띠게 되어 미술 ? 음악? 무용 활동이 전문 학교와 스튜디오의 설립과 함께 점점 발전되었다. 화랑과 음악당이 세워져 각종 전시회와 연주회가 열렸다. 새로운 연극의 개막, 새로운 책의 출판, 지방 화가의 회고전 등이 언론에 소개되고, 커피숍이나 사교적인 모임에서 즉시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히브리어는 영어와 아랍어와 함께 이 나라의 세 가지 공용어로 인정되었으며, 서류, 동전?우표?라디오 등에서 사용되었다. 출판이 증가하고 이 땅은 당시의 히브리 문학 활동의 유력한 중심지로 떠올랐다. 여러 가지 형태와 장르의 극장이 열광적인 청중에게 개방되었고, 히브리어로 쓰여진 희곡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5) 아랍의 반대와 영국의 통제

 유대 국가를 재건하려는 유대인 공동체의 노력은 극단의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그들의 강한 적개심은 1920년, 1921년, 1929년과 1936~1939년에 걸쳐 격렬한 폭동으로 분출되어 유태인의 교통수단이 공격당하고 들과 숲이 불타 버렸으며 유대인 거주지 또는 개인에 대한 이유 없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립인들과 대화를 이끌어내려는 시온주의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하여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는 양극으로 치달아 폭발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두 국민 운동의 반대되는 목표를 인지한 영국은 일찍이 위임 통치하의 지역을 분할했듯이(1922년) 요르단 강 서쪽 땅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유대 국가로, 다른 하나는 아랍국가로 분할할 것을 권유했다(1937년). 유태인 지도층은 분할 권유를 받아들여 유태인 대리 기관에 영국 정부와 협상하여 그 제안을 재공식화하는 국면으로 유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아랍인들은 어떠한 분할 계획에도 강경하게 반대했다. 계속되는 아랍의 대규모 반 유대 폭동으로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나치의 박해에 대한 피난처 제공을 부정한다는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의 이주에 단호한 제한을 가하는 백서를 제출했다(1939년 5월). 이러한 정책 때문에 후에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이 된 다비드 벤 구리온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백서가 없더라도 전쟁을 하고, 전쟁이 없더라도 백서와 싸울 것이다." 전쟁 동안 약 2만6천명의 유태인 공동체 남녀가 나치 정권에 대항, 연합군에 지원하여 유대인 여단뿐만 아니라 육군 해군 공군으로 영국 부대에서 복무하였다. 



                            (6) 3개의 유대인 지하 조직

 영국의 위임 통치 기간 동안 세 개의 지하 조직이 활동하였다. 가장 규모가 컸던 '하가나(1920년에 결성됨)'는 유태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자위 단체로서 유태인 공동체의 공식 기구에 의해 설립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아랍의 공격에 대한 보복을 단행하고 유태인의 이민에 대한 영국의 통제 조치에 대규모 시위와 사보타주로써 항거했다. '에쩰(1931년에 결성됨)'은 하가나에 대해 유대 지도층이 내린 자치제를 거절하고 아랍과 영국의 두 목표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레히'는 가장 소규모의 호전적인 단체로 주로 반영국적인 동기를 가지고 조직되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유태인 공동체의 모든 무장 지하 활동 금지를 에쩰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에쩰로부터 분리됐다 (1940년). 이 세 개의 조직은 1948년 5월 이스라엘 방위군(IDF)이 설립되자 해산됐다.


                        (7) 2차 대전 동안의 유대인 지원병들

 이스라엘 내 유대인 공동체 26,000명이 넘는 남.녀 유대인들이 영국군의 육군, 해군, 공군등에 자원입대 하여 나치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동맹국에 맞서 싸웠다. 1994년 9월 유대인 기구와 해외의 시온주의 단체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전쟁에 참가했던 노력을 인정 받아 영국군에 유대인여단을 두게 되었고, 유대인여단은 차제 깃발과 휘장을 가졌다. 약 5,000명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이집트, 북 이탈리아, 북서 유럽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945년 연합군의 승리 후에 많은 부대원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시키는 일에 참가하였다.


                           (8) 홀로코스트(대학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나치 정부는 유럽의 유태인 사회를 말살하려는 세부적인 계획을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수행했다. 그 계획 아래 그들은 150만 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600만 명의 유태인을 살해했다. 나치 독일 군대가 유럽을 휩쓸 때 유태인들은 잔인한 박해 아래 온갖 고통과 굴욕을 받았으며 유태인 거리로 내몰려 그곳에서 산발적인 무장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거센 탄압을 받았다. 유태인 거리로부터 수용소로 옮겨져서 무차별 사격을 받았으며 가스실에서 대량 학살되었다. 소수의 사람만이 대학살에서 벗어나 몇몇은 다른 나라로 가고 몇몇은 게릴라로서 살아 남았으며, 그 밖의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비 유대인들의 도움으로 숨었다. 결국, 한때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유태인 사회를 구성한 약 9백만 명의 인구 중 전쟁 전에 유럽으로 떠난 사람들을 포함하여 3분의 1만이 살아 남았다. 전쟁 후 영국은 이 땅에 와서 정착하는 유태인의 수를 더욱 제한하였다. 유태인 사회는 이에 대해 폭 넓은 '불법 이민'활동 단체를 조직했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약 5천 명의 난민들이 비밀리에, 대부분 위험한 경로를 택해 이 땅에 들어왔다. 영국은 해안을 봉쇄하고 국경 순찰대를 만들어 난민들이 이 땅에 도착하는 것은 차단하여 사이프러스 섬에 있는 수용소에 포로로 가두었다.


                                (9) 독립으로 가는 길

 유태와 아랍 사회의 상충된 요구를 조정하지 못한 영국 정부는 유엔 총회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의제로 상정할 것을 요구했다. 마침내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어 이 나라의 장래에 관한 제안을 준비하였다. 총회는 투표로서 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1947년 11월 29일) 요르단 강 서쪽 지역에 세우도록 제안했다. 유태인 사회는 그 분할 계획을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거절했다. 유엔의 투표에 이어 주로 아랍 국가들로부터 비정규적인 지원군의 지원을 받는 지역의 아랍 전투병들은 유태인 사회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여 그 분할 결정을 좌절시키고 유태 국가의 수립을 방해하려고 애썼다. 여러 번의 후퇴 끝에 유태 방위 단체는 공격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유태 국가에 할당된 지역을 모두 되찾았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난 후(1948년 5월 14일)에 약 65만 명의 유대인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이미 충분히 기반을 이룬 조직적인 사회로 명목상의 국가 명칭을 제외하곤 사실상 하나의 국가였던 것이다.

 


                                   3. 현대이스라엘

                                       ■ 독립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은 곧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 이스라엘은 선조들의 옛 땅에서 되찾은 주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독립 전쟁 기간 동안에 조직되어 매우 빈약하였으나 15개월 동안 지속된 맹렬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이스라엘의 사상자 수는 당시 이스라엘인구 1%에 해당하는 6천 여 명 이상이었다. 1949년 초 수개월간 유엔의 후원으로 이라크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과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서 종전 상황을 반영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해안 평야 지대인 갈릴리와 네게브 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다.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요르단이 통치하게 되었고, 가자지구는 이집트의 행정권 아래 편입되었다. 예루살렘은 양분되어 요르단이 구 시가지가 포함된 동부를 관할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서부를 관할하게 되었다.

                                        ■ 정부 수립

 전쟁이 끝나고, 오랫동안 힘겨운 투쟁으로 되찾은 국가의 건설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유권자의 85%가 참가한 총선(1949년 1월 25일)으로 초대 의회인 제1회 크네세트가 개원하였다. 이스라엘 독립의 주역이 되어온 두 명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태인 사무국의 사무총장 다비드 벤구리온이 초대 총리로, 세계 시온주의자 협회 의장 하임 와이즈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국회에서 선출되었다. 1949년 5월 11일 에는 유엔의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모든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돌아와 아무런 제한 없이 살 수 있는 권리가 오랜 투쟁으로 주어진 것이다. 독립 후 4개월 동안 나치 대학살의 생존자들 5만 여명이 이스라엘로 왔다. 1951년 말까지 아랍 각지에서 피난 온 30만 여명 이상을 포함하여 모두 68만 7천 여 명으로 유대 인구가 급증하였다. 아랍 인구는 60만 명 이상이 독립 전쟁 동안 떠나고 16만 7천 여 명이 남거나 가족 재결합 계획에 따라 돌아갔다. 이후 몇 년 동안 아랍 각국에서 온 30만 명 이상의 이민자들은 이스라엘을 떠난 아랍인들 간에 실질적인 인구교환을 하게 되었다. 독립 전쟁에 의해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야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급격히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만큼 이스라엘 국내에서의 내핍은 물론이며 외국으로부터의 재정적 원조가 불가피하였다. 미국의 원조와 미국 은행들의 차관, 재외거주 유태인들의 기부금, 전후 독일의 배상금 등이 모두 주택 건설, 농업의 기계화, 상선대 제작, 국영항공사 설립, 자원 개발, 산업 발전, 도로, 전기, 통신망의 구축 등에 사용되었다. 건국 10년 후에는 산업 생산과 고용은 2배로 늘고 산업 수출은 4배로 증가하였다. 농업의 큰 발전으로 곡물과 육류를 제외한 기초 농산물을 자급하게 되었으며, 경작지가 놀랄 정도로 늘어나 대부분 황무지였던 약 5만 에이커(2만 헥타르)가 조림되었으며, 거의 5백 마일(800km)에 이르는 고속 도로 변에 나무가 심어졌다. 건국 이전부터 유태인 공동체에 의해서 개발되었고, 이제 아랍계도 포괄하는 교육 제도가 크게 확산되었다. 5~14세의 모든 아동들에게 우상 의무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1978년부터는 16세까지는 의무교육, 18세까지는 무상 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이주해온 유태인들이 자손 대대로 거주해오던 국가의 각 분야의 문화와 함께 그들 공동체의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옴에 따라 문화 ?예술 활동이 중동, 북아프리카, 서유럽의 여러 요소들과 혼합되어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 10주년 무렵에는 인구는 2백만 명 이상이 되었다.

                                ? 1956년 시나이 분쟁

 심각한 안보 문제들이 건국 후 수년 동안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1949년의 휴전 협정은 처음에 의도한 대로 영구적인 평화에 이르는 길을 닦지 못했으며, 협정 위반 사례가 빈발하였다. 1951년 9월 1일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반하여 이스라엘 선적 및 이스라엘 행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가 금지되었으며, 티란 해협의 봉쇄가 강화되었다. 살인과 방해 공작이 목적인 인접 아랍 국가들의 테러 공격대의 이스라엘 침투가 날로 증가했다. 게다가 시나이 반도는 점차 거대한 이집트의 군사 기지로 변모해 갔다. 1956년 10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이 3국 군사 동맹을 체결함에 따라 이스라엘의 생존에 긴박한 위협이 대두되었다. 이에 8일간의 전투로 이스라엘 방위군은 시나이 반도 전역과 가자지구를 점령하였으며, 수에즈 운하의 동쪽 10마일(16km) 선상에서 정지하였다. 이집트의 에일랏 만 자유 항행에 대한 보장과 유엔의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선에 대한 유엔 긴급 파견군(UNEF) 배치 결의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몇 주 전 점령했던 지역에서 1956년 11월 ~ 1957년 3월의 위치로 철수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석유를 수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동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교역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티란 해협이 개방되었다.

                                        ■ 확립기

 이스라엘의 제2기 10년간(1958년 ~ 1968년)에는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강조되었다. 수출은 급증하였으며 GNP는 매년 10%씩 증가하였다. 수입해오던 종이, 타이어, 라디오, 냉장고 같은 품목들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갓 태동한 금속, 기계, 화학, 전자 분야에서도 대단히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농산물에 대한 국내 시장이 급속히 포화 상태에 이르자 농업 부문은 수출용 청과물뿐만 아니라 가공 산업을 위하여 매우 다양한 곡물 재배에 착수하였다. 급증하는 교역량을 소화하기 위하여 기존의 하이파 항 외에도 지중해 해안 아슈돗에 수심이 깊은 항구를 건설하였다. 이스라엘은 미국, 영국,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 그리고 거의 모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국가들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음에 따라 외교 관계가 꾸준히 확대되었다. 이 10년간은 수백 명의 이스라엘 의사 엔지니어 교사 농학자 관개전문가 청소년 조직원 등이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개발도상국들로 기술을 이전하여 광범위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1956년 나치 정권 아래에서 행해진(1933~1945년) 유대인들에게 가해졌던 범죄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에 그때까지 지연되어 온 독일연방공화국의 대사 교환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양국의 국교 정상화에 앞서 격렬한 반대와 대중의 논란이 있었다. 예루살렘에는 국회 의사당이 지어졌으며, 하다사 의료 센터와 헤브루 대학교의 부속 시설들이 독립 정쟁 후 스코푸스 언덕 위에 버려져 있던 옛 건물 터에 세워졌다. 유대민족의 문화 유산과 보물들을 수집하여 보존 연구하고 전시할 목적으로 이스라엘 박물관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 1967년 6일 전쟁

 이집트와 요르단 국경, 너머 아랍 테러 단체들의 기습이 격화되고, 북부 갈릴리 지방의 농경 정착촌에 대한 시리아 포대의 지속적인 포격과 인접 아랍 국가들의 막대한 군비 등으로 이스라엘의 평온이 깨지게 되었다. 1967년 5월, 이집트가 시나이 사막으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1957년이래 그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유엔 평화유지군에게 철수를 요구하고, 티란 해협에 대한 봉쇄를 재개하였으며, 요르단과 군사 동맹을 체결했을 때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적대 받는 아랍 군대들과 대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56년 시나이 분쟁 뒤에 합의된 협정을 회복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고유란 자위권을 발동하여 1967년 6월 5일 남부의 이집트에 대하여 선제 공격을 가했으며, 뒤이어 동부의 요르단에 대하여 반격을 가했다. 그리고 시리아 군대의 진로를 북부 골란고원에서 저지시켰다. 6일간의 전투 뒤 기왕의 휴전선은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새로운 휴전선, 즉, 유다 ?사마리아 ?가자? 시나이 반도? 골란고원 등으로 대체되었다. 결과적으로 북부의 촌락들은 19년간 계속되어온 시리아의 포격에서 드디어 해방되었으며, 이스라엘 선적과 이스라엘 행 선박의 티란 해협 통과가 확보되었고, 1949년이래 이스라엘과 요르단간에 계속 양분되었던 예루살렘이 재통합되었다.


                                      ■ 전쟁에서 전쟁으로

 1967년 여름 이스라엘 외교의 지향점은 그 지역 내 모든 국가들의 주권, 영토의 통합, 정치적 독립, 군사적 위협과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국경과 안전 속에서 각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 권리에 대한 상호 인정을 촉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호를 기초로 자국의 군사적 성과를 항구적인 평화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랍의 입장은 1967년 8월 하르툼 정상회담에서 공식화된, '이스라엘과의 비평화, 비협상, 비인정'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1968년 9월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의 둑을 따라 산발적이고 정적인 군사 행동으로 소모전을 개시하였으며 양측에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그 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를 따라 새로 그어진 휴전선을 수락한 1979년 여름에야 적대 행위는 막을 내렸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3년간 지속된 평화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합동 기습 공격을 가했던 욤 키푸르(유대력 속죄일)에 산산조각이 났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 군대가 수에즈 운하를 건넜으며, 시리아 군대는 골란고원을 돌파하였다. 이후 3주 동안에 이스라엘 방위군은 전제를 역전시켜 침략자들을 격퇴시켰으며, 수에즈 운하를 넘어 이집트에 진격하였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20마일 이내까지 육박하였다. 이후 2년 동안 이스라엘과 이집트,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에 부전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전쟁동안 점령했던 일부 영토에서 철수하였다.


                                ■ 전쟁에서 평화로

 1973년 10월 전쟁의 비용은 이스라엘의 1년간 GNP(국민 총생산)에 해당되었으나 1974년 하반기까지 경제는 1968~1973년의 경제 회복기에 기록했던 성장과 산업 팽창의 수준으로 돌아왔다. 외국의 투자가 크게 늘었으며, 1975년 이스라엘이 유럽 공동 시장의 준회원이 됨에 따라 이스라엘 상품에 대해 새로운 잠재 시장이 문을 열었다. 관광객이 급증하여 이스라엘의 건국 30주년 즈음에는 방문객 수가 1백만 명을 넘어섰다. 1977년 의회 선거 결과 거의 30년에 걸친 노동당의 집권에 종지부를 찍고 자유주의적이고 중도적인 정당들이 제휴한 리쿠드 연합 정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신임 수상 메나헴 베긴은 그 지역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하여 일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전임 수상들의 헌신을 되풀이 강조하고, 아랍 지도자들이 협상에 임해 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이스라엘의 평화 호소와 이에 대한 아랍의 끊임없는 거부라는 순환고리는 1977년 11월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의 예루살렘방문으로 깨어졌다. 이집트는 1948년 이후 처음으로 내민 이스라엘의 손을 평화롭게 잡은 첫번째 아랍 국가가 되었다. 1978년 9월 캠프데이비드에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초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정상 회담이 열렸는데, 복잡한 협상과정에서 타결책이 제시되었다. 평화를 위한 기본 틀이 된 캠프데이비드 협정은 이집트와 이스라엘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다른 인접 아랍 국가들 간의 평화를 위한 토대의 역할도 하였다. 게다가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1967년 이래로 통치하고 있는 유다, 사마리아, 가자 지구와 그 지역 거주민의 지위에 대한 협상을 위한 상세한 제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979년 3월 26일 워싱턴의 백악관 잔디밭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수상은 양국간의 30년에 걸친 전쟁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공적으로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스라엘은 평화로운 10년간에 대한 희망과, 다른 인접 아랍국가 들과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1980년대를 맞이하였다. 1981년, 세계는 양국 간에 강화된 협력을 토대로 마련한 미국과의 전략적 협력에 관한 양해 각서에 조인하였고, 두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 수주일 전에 이스라엘 공군에 의하여 이라크 원자로가 파괴되었으며, 그에 따른 핵 박멸 위협이 제거되었다. 이 시기의 10년 동안에 1973년 석유 위기 당시 아랍의 강력한 압력에 따라 이스라엘과의 유대 관계를 단절했던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재수립했을 뿐만 아니라 상호 경제적 관계와 과학적, 기술적인 원조에 다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스라엘- 이집트 평화 조약의 조항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전의 휴전선 및 두 나라가 인정한 국경선에 대한 휴전 조약을 교환하면서 1982년 4월 시나이 반도에서 철군을 완료했다.


                         ■ 갈릴리를 위한 1982년 평화 작전

 1948년 독립 전쟁 이후 설정된 레바논과의 휴전선은 결코 어느 쪽에 의해서도 도전 받지 않았었다. 그러나 레바논 남부에 위치한 강력한 PLO거점으로부터 반복되는 총격, 로켓 공격, 그리고 테러 행위에 직면하여 이스라엘 방위군은 1982년 6월 국경을 넘어 레바논으로 진입하였다. '갈릴리를 위한 평화작전'은 1970년 PLO에 대한 요르단의 추방이래 남부 레바논에 자리잡은 PLO조직과 하부 군사 조직을 그 지역으로부터 제거 시켰다. 작전은 수천 명의 이스라엘인이 살해되거나 부상당하고 끊임없이 위험에 처했던 10년간을 종결 시켰다. 그러나 레바논 정부의 무기력으로 이스라엘은 그 지역에 강력하게 자리를 잡아야 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85년 초까지 대부분의 이스라엘 방위군 부대들이 안전지대로 설정된 이스라엘 국경의 인접지역에 제한된 수의 군대만을 남겨 놓은 채 레바논에서 철수하였다.

                                   ■ 이스라엘 국내 시련

 1984년 의회 선거에서 여러 정당으로 분산되어 안정 다수 의석을 차지만 정당이 없게 되자 리쿠드 당과 노동당이라는 양대 정치권으로 구성된 연립 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새 정부는 연간 400% 이상 뛰어 오르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적극 나섰다. 임금과 환율의 동결을 비롯, 정부 지출의 과감한 삭감을 포함한 경제 조치들은 1986년까지 인플레이션 율을 19%가지 끌어내렸으며, 원활한 경제 성장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미국과의 자유 무역 지역 협정 체결은 이스라엘의 국제 교역의 지위를 더욱 강화 시켰다. 1989년이래 소련과 에디오피아로부터 유대인들이 들어오면서 유태민족에 대한 조국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새로운 이민들을 국민 생활의 모든 면에서 성공적으로 흡수하는 것이야말로 2천 년대에 이스라엘 사회가 당면한 주요한 도전의 하나일 것이다.


                              ■ 중동의 평화를 향하여

이스라엘과 이집트간 평화조약 체결(1979)이후로, 중동평화를 진전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이 기울여져 그 결실로 미국과 소련의 후원으로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1991년에 마드리드 평화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이 회담 후에 양자간 또는 다자간의 협상이 마련되었다.

                                 ■ 양자간 협상

(1)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 이스라엘과 PLO 간의 수개월간 오슬로 막후접촉 이후에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역에서의 자치정보수립에 대한 초안이 마련되었다. PLO 는 테러행위를 중단하고 PLO 헌장에 이스라엘의 주권과 존재를 부정하는 적대조항을 삭제할 것 등을 약속하고 이스라엘 땅에서 뿌리박은 두 민족간의 오랜 갈등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갈 것 등을 명시한 문서인데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과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1993년 9월 협정서에 서명을 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A,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를 팔레스타인 민족의 대표로 인정을 하였다. 1993년 9월, 이스라엘과 PLO는 워싱턴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이행 사항에 서명했다. 팔레스타인의 자치는 4단계로 이행되었다. 첫 단계는 1994. 5월 가자지구와 여리고에 팔레스타인 자치권이 주어졌다. 같은 해 8월, 요르단강 서안지역에 관광, 조세, 사회복지, 문화, 보건분야에 팔레스타인에게 대표권을 부여하게 되었다. 1995년 9월 선거를 통하여 팔레스타인 내의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1997년 1월에는 헤브론 대부분 지역과 서안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철수를 규정한 협정에 서명하였다. 1998년 10월에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로 양측의 지도자들이 다시 회담을 시작하여 1995년에 서명한 잠정 자치안 이행에 대한 세부 항인 와이 리버 협정에 서명했다.

(2) 이스라엘과 요르단 : 요르단과 이스라엘은 마드리드 평화회의 후에 3년간의 협상 끝에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과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1994년 7월 46년간의 전시상태를 종식하고 양국간의 평화를 선언했다. 이스라엘-요르단 평화협정은 아라바에서 1994년 10월에 클린턴 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서명되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평화협정 이후에 많은 분야에서 협력을 하고 있다.

(3) 이스라엘과 시리아 : 마드리드 협정을 토대로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의 평화회담은 미국 고위급 관료가 참가한 가운데 양국의 대사급으로 워싱턴에서 가진 바 있다. 1995년 12월 ,1996년 1월 두 차례의 회담이 안보와 다른 주요 주제로 진행되었다. 매우 상세하고 포괄적인 범위로 앞으로 검토와 양국 협상에 고려될 중요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 다자간 협상

 다자간 협상은 중동의 지역적인 문제해결 모색을 목표로 하는 중동평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를 이룰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다. 1992년 1월의 모스크바 다자간 중동 회의는 36 국제단체와 국가들이 대표단을 파견하여 5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환경, 무기 감축, 지역 안보, 수자원, 경제개발등의 공동관심사에 대해 논의하였다.


                             ■ 21세기를 향한 이스라엘
 1995년 11월 라빈 총리의 암살이후 다음선거까지 시몬 페레스 외무부 장관이 총리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총리 대행은 반시 국회의원 중에서 임명되며 각료를 임명할 권리를 가지고 총리와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나 국회해산권은 없고 차기 선거까지 총리업무를 수행한다.1996년 5월 선거에서 리쿠드당의 벤야민 네타냐후가 총리로 선출되어 민족주의 및 중도정당으로 연립내강을 구성하였다. 새로이 들어선 정부는 국가의 목표와 국가적 관심이 쏠린 분야를 위해 많은 업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특히 그 중에서 중동평화협상을 계속하는 일은 새 정보가 직면한 도전이다. 이스라엘 안보의 보장, 세계 각국과 외교관계 확대, 학교 수업시간 연장 및 소규모 학급으로 교육체계의 강화, 균등한 교육 기회의 제공, 이스라엘 산업에 기여하는 과학기술의 발전도모, 정부의 적은 개입으로 경제 경쟁력의 강화, 낮은 인플레이션, 능률적이고 합리적인 정부 관료 조직, 국가 재정의 적자를 낮추는 일, 조세부담과 주택문제의 해결, 국가기반시설의 강화, 계속 유입되는 이민, 중동평화협상의 진전 등 이러한 사항들은 다가오는 새로운 세기를 향한 이스라엘의 발전과 계속된 성장에 긍정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3-4. 역사 연표

                     ■ 기원 전

17세기 ~ 6세기
성서 시대
17세기경 족장 (아브라함, 이삭, 야곱)시대

13세기경
모세의 주도 하에 출애굽이 이루어짐
13 - 12세기 히브리인(고대 이스라엘인)의 팔레스타인 정착
1020 군주제 성립 : 초대 왕 사울
1000 다윗 왕국의 수도로 예루살렘이 건설됨
960 유대 민족의 국가적, 정신적 중심인 첫 번째 성전이 솔로몬왕에 의해 예루살렘에 세워짐
930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왕국으로 분열됨
722-720


앗시리아에 의해 이스라엘 왕국 멸망 ;

10개 지파가 흩어짐

586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게 정복됨.
예루살렘과 첫 번째 성전이 파괴됨.
유대인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감(바빌론 유수)
538-142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538-515 바벨론으로부터 제1차 귀환; 성전 재건
5세기 중엽 제 2차귀환; 에즈라와 느헤미야
332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함; 그리스의 지배
166-160 하스모니안의 마카비가의 반란
142-129 하스모니안 왕조 지배 아래 유대인 자주권 획득
129-63 하스모니안 왕국 안에서 유대인 독립

기원전 63 ~

기원후 313

로마제국의 지배
BC 37 - BC 4 헤롯왕이 통치

 

                     ■ 기원 후

66 유대인 로마에 항거
70 예루살렘과 두 번째 성전 파괴됨
73 마사다에서 유대인 최후 항전
132 - 135 바르 코크바, 로마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킴
210 미쉬나(구전법 모음집) 완성
313 - 636 비잔틴 지배
390 예루살렘 탈무드 (미쉬나의 주해서) 완성
614 페르시아의 침입
636 - 1099 아랍 지배
1099 - 1291 십자군의 통치 ; 라틴계 예루살렘 왕국
1291 - 1516 마믈룩 지배
1517 - 1917 오스만 제국 지배
1860 예루살렘 성곽밖에 최초의 유대인 마을이 생겨남

1882 - 1903

제 1차 알리야 (대규모 이민)가 있음 ;

주로 러시아로부터 옴

1897
스위스의 바젤에서 제 1회 시온주의 총회 개최
1904 - 1914 제 2차 알리야(주로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1909  최초의 키부츠인 데가니아와 최초의 근대적인 유대인도시 텔아비브 건설됨
1917 400년 동안의 오스만제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영국이 종식시킴.
영국, 벨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의 민족적 조국 건설을 보장' 한다고 약속함
1918 - 1948 영국의 통치
1919 - 1923 제 3차 알리야(주로 러시아에서)
1920 히스타드루트(노동조합)와 하가나(유대방어조직체) 창설.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국가 평의회 구성됨
1921 첫 번째 모샤브 나할랄 설립
1922 대영제국, 국제연맹의 결의에 따라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 통치권을 부여받고 유대인 이민과 그들의 팔레스타인 정착을 촉진하는 임무를 맡게됨. 유대국가 창설, 위임 통치권에 대하여 유대인 공동체로 대신함
1924 이스라엘 공업협회 창설
1924 - 1932
제 4차 알리야(주로 폴란드에서)
1925 예루살렘의 헤브루 대학 스코푸스산에 설립
1929 헤브론 유태인들이 아랍군들에 의해 학살
1931 유대인 지하조직인 에쩰 창설
1933 - 1939 제 5차 알리야(주로 독일에서)
1936 - 1939 아랍군의 반 유대 폭동 개시
1939 영국 백서, 유대인 이민을 제한
1939 - 1945 제 2차 세계대전 :유럽의 유대인에 대한 대학살
1940 - 1941 레히 지하운동 조직, 에쩰에서 분리
1944 영국군 소속 하에 유대인 여단 조직
1947 국제연합, 팔레스타인에 아랍. 유태인의 개별
국가를 건설하여 예루살렘을 국제연합에서 분리
1948 이스라엘 국가
1948 영국의 통치 종료(5월 14일)
이스라엘 건국 선포(5월 14일)
아랍 5개국, 이스라엘 침공(5월 15일)
독립전쟁(1948년 5월 - 1949년 7월)
이스라엘 방위군(IDF) 조직
1949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이라크는 제외)
휴전협정 조인, 초대 크네세트(의회) 선출
이스라엘, 국제연합의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1948 - 1952 유럽및 아랍각국에서 대규모 이민
1950 귀환법 제정
1956 시나이 분쟁
1962 아돌프 아히만 처형
1967 6일전쟁 : 예루살렘 재통합
1968 - 1970 소모전
1973 욤 키푸르 전쟁
1975 이스라엘, 유럽 공동시장(E.C.M)의 회원국에 가입
1977 리쿠르당 승리, 노동당 집권 종료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 예루살렘 방문함
1978 캠프 데이비드 협정 조인
1979 이스라엘과 이집트, 평화조약 조인
1981 미국과 합의 각서에 서명
이스라엘 공군기, 이라크의 원자로 폭파
1882 이스라엘, 시나이로부터 철수 완료
이스라엘, 레바논으로부터의 PLO 공격을 종식시키기 위해 갈릴리를 위한
평화작전수행에 착수
1985 미국과 자유 무역 협정 조인
1987
팔레스타인의 폭동(인티파다) 시작
1989 이스라엘, 4개조 평화안 제안.
구소련 유대인의 대이민 시작.
1991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걸프전동안 지대지 미사일로 이스라엘을 공격.
미국과 소련의 후원으로 마드리드에서 공동평화회의 개최됨.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팔레스타인 대표단 참가
1992
중국 및 인도와 외교관계수립
노동당의 라빈이 이끄는 새 정부 출범
1993 미국과 러시아 입회 하에 이스라엘과 PLO, 잠정 자치안 협정에 서명
이스라엘과 교황청, 기본 동의 안에 서명.
1994 가자지구와 여리고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인정
모로코와 튀니지에 대표사무실 설치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르파트 노벨 평화상 공동 수상
1995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역의 팔레스타인 자치확대
평화를 위한 집회에서 이츠하크 라빈 총리 암살
시몬 페레스 총리직 계승
1996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 회교 원리주의자 테러
자행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북부지역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분노의 포도(Grapes of Wrath)"작전
오만과 카타르에 무역대표 사무소 설치 총선
리쿠드당 집권 텔아비브에 무역대표 사무소 개설
1998 와이리버 협정 서명


 

 

출처:이스라엘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