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성지순례/이스라엘[종합]

★ 이스라엘의 역사 <네이버>

영국신사77 2010. 11. 13. 11:23

 

 

                                                                             이스라엘의 역사

  이스라엘이라는 민족명은 이집트왕 메르엔프타하의 전승비문(:BC 13세기 후반)에, 메르엔프타하에게 정복된 한 종족의 이름으로 처음 나타난다.

 

 이스라엘인(헤브라이인)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 땅(팔레스타인, 오늘날 이스라엘의 땅)에 들어온 것은 약 4,000년 전으로, 이곳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에 종사하고 야훼(여호와)의 신앙을 확립하였다.

 주위의 강대한 씨족에게 압박당하여 일부 부족은
이집트로 이주하였으나, 그 후 이집트의 생활에 견딜 수 없어, 모세의 인도로 팔레스티나로 귀국하였다. 전술한 메르엔프타하가 이스라엘을 격파한 것은 이 때였을 것이다.

 

 BC 11세기 사울은 이집트의 지배가 쇠약하여진 틈을 이용하여, 가나안 땅의 선주민 펠리시테인(필리시티아인)과 싸워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사울의 뒤를 이어 다윗은 예루살렘을 왕국의 수도로 정하고, 이 곳에 왕궁과 야훼의 성전을 세웠다. 그 뒤부터 다윗 왕가와 야훼의 성전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민족적 자각의 중심이 되었다.

 다윗 시대의 이스라엘 왕국은 전성시대를 이룩하였으나, 솔로몬왕이 죽은 뒤 왕국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한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대(유데아) 왕국으로 나누어졌다.

 

 이스라엘 왕국은 BC 722년에 아시리아왕 사르곤 2세에게 멸망당하였고, 유대 왕국도 BC 586년 신()바빌로니아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에 의하여 수도 예루살렘을 점령당하고 멸망하였다. 유대인은 사로잡혀 유명한 바빌론 포로생활에 들어갔다.

 BC 538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고레스) 대왕 때 유대인들은 해방, 귀국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유대교를 성립시켰으나, BC 4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군대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BC 1세기에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로마 지배하에 있기는 하였어도 반독립정권을 형성하고 로마 제국에 저항하였으나, 티투스 황제 때 탄압당하여, 세계 각지로 흩어져 오랫동안 표류하며 박해받는 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19세기에 들어서자 세계 각지의
내셔널리즘이 발흥하는 가운데, 동유럽러시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민족 억압이 드세졌다. 이에 유대인들 사이에 자신들의 조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성지()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 조국을 세워야만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끝난다고 믿는 시오니즘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시오니즘은 1887년 오스트리아의 테오도르헤르첼이 스위스 바젤에서 시오니스트 대회를 연 것을 계기로 정치운동화되었다. 그러나 지지부진한 진행으로 발전을 보지 못해 1882년 최초의 유대인 이민이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지 35년 뒤인 1917년까지, 겨우 3만 2000명밖에 이민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영국은 당시 중동에서의 영국군 작전기지 역할을 맡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을 지키기 위해, 전세계 유대인의 협력을 얻고자 ‘밸푸어 선언’을 발표하고, 전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조국 건설을 허락한다는 약속을 하였다.

 

 이와 함께 전후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유대인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고 1930년대에는 독일에 히틀러나치즘이 등장하여 유대인에 대한 대학살을 개시하면서 시오니즘 운동은 급속히 발전하였다.

 

 팔레스타인은 1918년 영국의 군정하에 놓여 있었고 1920년에는 영국의 위임통치하에 있었으나, 그 무렵 팔레스타인에의 유대인 이민은 격증하여 제1차 세계대전 당시 7만 정도였던 유대인 인구는 세계 각지로부터 돌아온 이민을 맞아들여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약 40만으로 늘어났다. 

 유대인 이민의 증대는
아랍인과의 대립·항쟁을 가져왔다. 소수파로의 전락과 토지상실을 두려워한 아랍인은 19년부터 종종 반()영국·반()유대 폭동을 일으켰고, 1938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1939년까지는 전국적으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두 민족의 대립은 한때 가라앉기도 하였으나, 대전 말기에는 다시 격화되어, 이번에는 유대인 쪽이 독립을 억제하려는 영국에 반발하여 반영()·반아랍 투쟁을 하게 되었다. 전후에 대립은 한층 격화되었다.

 영국은 두 민족의 대립을 진압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위임통치 방기()를 결의, 1947년 문제를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 이관하였다.

 

 UN 총회는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에 아랍·유대 연방을 조직하게 하는 연방화안()과, 아랍·유대의 개별국가를 건설하여 예루살렘을 국제관리하에 두도록 하는 분할안() 중 후자를 2/3 이상의 다수로 채택하였다. 이 안()에는 팔레스타인을 대소() 전략의 일환으로 삼으려는 미국과, 시오니즘에 반대하면서도 유대·아랍 양 민족의 민족자결을 승인하는 소련이 함께 찬성하였다. 이 안을 유대인 쪽은 찬성하였으나, 아랍 쪽은 반대하여 팔레스타인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개시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통치가 끝나고 영국군의 철수완료와 함께 유대 국가건국위원회 의장 벤 구리온이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하였다. 동시에 아랍연맹에 가입한 아랍 제국의 정규군이 팔레스타인에 침입하여 제1차 중동전쟁(팔레스타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개전시()에는 열세였으나 마침내 아랍을 압박하여 1949년 정전()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아랍 대 이스라엘의 대립은 계속되어 1956년 10월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10월전쟁) 등 모두 4차례에 걸친 전쟁을 하였다.

 

                    * 밸푸어선언 [Balfour Declaration]

 

 

유대인의 송환 /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밸푸어선언에 따라 팔레스타인으로 향한다.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A.J.밸푸어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겠다는 것을 지지한 선언.

 

 밸푸어는 그것을 시오니즘운동의 재정적인 후원자인 로스차일드경()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혔다.

 

 여기서 영국이 노린 것은, 유대인의 여론을 연합국측으로 끌어들이고, 아울러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입식()을 통하여 중동정책의 포석을 굳히려는 데 있었다.

 

 이 선언은 1920년 산레모회의에서 영국의 정식 정책으로 채택되었으며, 1922년 국제연맹팔레스타인 지방을 영국의 위임통치령으로 결정하였을 때, 그 전문()에 이 선언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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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다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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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송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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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미니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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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로마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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쿰란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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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주민
기도서를 읽는 유대인 /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유대인. 예수가 죽은 뒤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데 이같은 비극을 지켜 본 이 성벽은 밤이 되면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스라엘 유대인은 기본적으로는 지중해 인종아르메니아 인종의 혼혈이었으나, 세계에 흩어져 살게 됨으로써 여러 인종과의 혼혈을 나타내게 되었다.

 

 1948년의 건국 당시 유대인의 인구는 약 60만이었으나, 그 뒤 아랍 여러 나라와 해외 70개국으로부터 대량 이주해와서 크게 늘어났다. 

 전인구에 대한 유대인의 비율은 1948년의 83%에서 1965년의 87.5%로 늘어났다가 2000년 이후 77.8%로 줄어들었다. 1990년대 이후 구소련에서 약 85만의 유대인이 유입되었다.
아랍인은 건국 이전에는 120만이었으나 난민으로 유출되고, 팔레스티나 전쟁 후로는 20만 이하로 격감하였다. 그 뒤에는 조금씩 증가하여 1977년에는 약 57만, 2000년 이후에는 113만이 되었다.

 1970∼1976년의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약 3%, 인구밀도는 174명/㎢으로 높은 편이다. 2001년의 인구증가율은 1.58%로 추정된다. 가난한 이민의 증가와 함께
인구 압력은 대외 팽창의 한 원인이 되었다. 실업자는 1967년에 약 10만이었으나 1976년에는 약 4만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언어는
헤브라이어아랍어가 공용어이며, 영어도 흔히 사용된다. 또한 동유럽중앙 유럽, 미국 등지에서 온 유대인 이민 사이에서는 독일어와 뒤섞인 이디시어가 사용되고, 남아메리카에스파냐 등지에서 온 이민들은 대부분 에스파냐어와 합쳐진 라디노어를 사용하며, 아랍인은 아랍어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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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서를 읽는 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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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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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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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싸이다 지역의 꽃 /
 이스라엘의 국토는 남북으로 길죽하며 지형과 지세는 매우 다양하다. 북쪽 끝에 레바논산맥에 이어지는 갈릴리 고원()이 있는데, 이 고원은 동쪽은 요르단 계곡, 서쪽은 지중해 연안평야, 남쪽은 에스드렐론 평야의 3방향으로 경사를 이룬다.
 
 에스드렐론 평야는 고원에서 하이파 부근까지 이르며, 연강수량이 500mm에 달하는 상당히 비옥한 곡창지대를 이룬다. 에스드렐론 평야 끝에서 남쪽으로 160km에 이르기까지 일대는 평평한 1,000m 높이의 고원지대로서 요르단 지구대와 평행하게 달린다. 

 고원의 북부는 강수량도 적당하여 많은 계곡을 이루며 그 가운데 몇몇은 에스드렐론 평야에는 미치지 못하나 비옥하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강수량은 적어지며 바위도 두드러진다. 또 남동부는 유데아 황지()로서 반사막지대이다.
 
 최남단은 네게브 지방으로 이스라엘 면적의 1/2에 가까운 광대한 사막성 고원이며, 동쪽은 요르단 계곡, 서쪽은 시나이 사막에 접해 있다.
 
 하이파 남동쪽 갈멜산은 지중해에 접근해 있다. 여기에서 이집트 가자지구까지의 지중해 연안은 샤론·필리스디아 두 평야인데, 이 평야도 건조하며 사막성 토양이 계속되다가, 시나이 사막으로 들어간다.

 시리아령()에서 발원하는 요르단강훌라호()에서 갈릴리호로 흐르며, 다시 200km를 급강하하여 수심이 깊어지면서 사해()로 흘러든다. 이 강은 배를 타고 갈 수는 없으나 수력발전관개용수로는 유용하여, 수리를 둘러싸고 이스라엘과 아랍 여러 나라 사이에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사해는 남북 75km, 동서 16km에서 수면이 해면보다 392m나 낮으며, 25%의 염분을 함유하고 있어서 생물이 살 수 없기 때문에 사해라고 불린다. 근래 칼리 등의 공업화에 이용되고 있다.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건조하고 기온이 30℃ 이상에 달하는 반면, 겨울에는 강수량도 많고 온화한 기후가 된다. 겨울철에 북쪽 고원에서는 강설을 볼 수 있으며, 강수량은 북쪽의 800mm 이상에서 남쪽 네게브 지방의 100mm 이하까지 심한 차이가 있다. 남부가 건조해지는 까닭은 남서 탁월풍이 시나이 사막이나 북아프리카 사막지대의 건조한 공기를 몰아오기 때문이다.
 
 경작 가능지는 15.45%, 농경지 3.88%, 기타  80.67% (200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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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싸이다 지역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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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북부의 카쿰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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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북부의 카쿰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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