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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세 유럽의 변화(1)-로마가톨릭교회와 십자군 원정, 이단운동과 종교 재판

영국신사77 2010. 9. 11. 14:23

중세 유럽 변화(1) - 중세 유럽의 신앙공동체 로마카톨릭교회               이길 상

 

가. 중세유럽과 로마 가톨릭(카톨릭)의 세계

 

(1)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

 

베드로 성당의 원형광장로마 가톨릭교회는 나사렛예수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가르침에 따르고, 이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라고 믿는사람들이 모여 신앙 생활을 영위하고 제례와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만든 것인데,

 

그 출발은 예수의 12 제자 중에서 수장(首長)에 해당하는 베드로가 로마로 건너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 한데서 부터 시작한다.

 

베드로는 예수로부터 전체 교회를 통치하는 권위를부여 받고(마태 16 : 18∼19), 예수의 가르침을 널리 펴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 시리아 지방의 안티오키아 등을 전전(展轉)하다가, 로마에 정착하여 교회를 세우고 사도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던 중 네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순교하였다.

 

베드로(Peter the Apostle : ?~AD 64 ?)가 세웠다는 이 로마교회가 베드로의 권능과 함께 가톨릭교회의 수위권(首位權, Primacy)을 지키는 것은, 이 교회의 초대 주교가 베드로였고, 이후의 로마 주교는 베드로를 계승한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 사후 2000년이 지난 지금 까지 연면히 이어 오면서, 그 수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단순히 가톨릭교회라고 할 때에는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 : 그리스정교회)까지를 포함하게 되는데, 가톨릭(카톨릭)이란 원래 그리스어로 보편적(普遍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가톨릭이라는 용어가 2세기 무렵부터 교회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 시작하다가, 니케아(325)와 콘스탄티노플(381)의 두 공의회(公議會)에 서채택된 신앙선언에서 "가톨릭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그 이후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로마교회가 다른 가톨릭교회와 구분하기 위해서 앞에 로마를 붙여서 로마가톨릭교회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은 로마교회가 모든 가톨릭교회의 수장임을 표현하는 선언적인 의미가 있고, 따라서 로마의 주교는 교황이라는 이름으로 그 정점에 서서, 모든 교회를 지휘, 통솔하여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실제에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은 특정한 개인·인종·시대를 초월한 전체 인류를 위한 것이므로, 보편적 의미를 가진 가톨릭교회에서 이러한 교단조직은 필수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현재 가톨릭교회는 약 6억의 신도를 가진 종교단체로, 유럽·남북아메리카·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의 여러 나라에 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이 거대한 집단은 조직화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 조직을 만드는 원리를 히에라르키아(敎階制度)라 부르고, 이 말은 "상·하 관계에 따른 계급"을 뜻한다고 한다.

 

이러한 교회조직을 피라미드에 비유하면 그 하부구조로서 가장 폭넓은 신자 층이 있고, 그 위에 단계별로 성직자(사제, 주교 등)층이 있다. 그리고 통할의 편의상 많은 교구로 나뉘고 이를 관리하는 성직을 주교(主敎)라 하며, 교구는 다시 소 교구로 분할되어 사제(司祭:신부)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신관(神觀)에 대한 요체는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이라 하여, 하느님의 본성은 하나이지만 위격(位格)은 셋(성부·성자·성령)이라고 하여, 성부(야훼)와 성자(예수) 성령(心神)을 동일 선 상에 두고, 여기에 맞추어 의식을 행한다.

 

이것은 4세기 니케아·콘스탄티노플의 두 공의회에서 채택, 확립된 후 배타적인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어 다른 교파를 이단으로 몰아 탄압하였으며, 또한 아담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은총을 잃었고, 아담의 후손인 인간도 아담의 죄(원죄:原罪)를 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였는데,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하여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속죄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회복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과의 중개자가 되어,성사(聖事)에 의해 그 은혜를 사람들에게 베푸는데, 은혜를 베푸는 의식으로서 "성세""견진(堅振)" "성체(聖體)" "고백(告白)" "혼인(婚姻)""병자(病者)" "신품(神品)" 등 일곱 가지를 두고 있다.

 

교회사를 보면 초대 성 베드로 교황부터 현재의 요한 바오로2세까지 264대에 걸친 교황의 이름이 나타나며, 교황 밑에서 각각 지역 교회를 관리하는 것은 주교와 사제(司祭:신부)로서

 

주교는 그리스도가 제정한 바에 따라 사도(그리스도의 제자)의 후계자가 되며, 일정한 자격이 있는 신부가 성성식을 받아 주교가 되고, 주교는 사제로서의 완전한 권능을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으며, 자신의 사제직을 다른사람에게 전할 수도 있게 된다.

 

한편 사제 서품(敍品)에 의해 사제(신부)가 된 자는 제한된 사제의 권능만을 지니게 되는데, 교회를 관리하고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게 하고, 성화(聖化)를 돕는 일을 그 본래의 책무로 한다는 점은 주교나 사제가 같다고 한다.

 

가톨릭 신자가 되려면 성세성사(聖洗聖事 :洗禮)를 받아야 하고,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생활할 것을 그 사명으로 삼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성상파괴문제로(726) 동로마 황제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하여, 프랑크왕국과 제휴하고 서유럽에서 부동의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이것은 게르만족의 개종(改宗)이라는 사명을 완수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이 게르만족에 의해서 형성된 중세유럽의 봉건사회를 이끌고 간 하나의 축(軸)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게되었다.

 

특히 정치적 통일체를 형성하지 못한 봉건사회의 정치권력에 맞서, 방대한 교회조직을 갖춘 로마가톨릭은 그 의례(儀禮)에서 라틴어를 공용으로 채택(採擇)하여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그리스 정교회)와 완전 분리하여(Schisma: 離敎) 독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1054)

 

(2) 성직 임명권 문제 - 교회 개혁운동

 

봉건제도라는 이름으로 수 세기를 지나온 유럽사회가 11세기를 지나면서 그 변화의 조짐이 서서히 들어 나기 시작했는데, 여러 가지 모순과 변화의 사실중에는 성직(聖職)의 서임(敍任)권을 둘러 싼 교황과 황제간의 충돌이 변화의 기류를 타고 표면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지금은 신앙의 자유라 하여 믿음의 선택은 개인의 의사에 맡기고 있지만 중세의 유럽에서는 모든 사람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영주가 선택한 종교를 의무적으로 따라야 했는데, 게르만족이 로마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사실상 유럽 전체가 로마가톨릭의 신자가 되어 거대한 교단을 형성하고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따라서 교회는 신자들로부터 헌금과 헌납, 인간원죄에 대한 사면(赦免)의 특권 등으로, 많은 재산과 권위를 동시에 갖게 되었는데 이러한 시대에 성직(聖職)은 최고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세속(世俗)적인 부를 창출할 수있는 기능까지 동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선망하였고, 그것이 정도(正道)를 넘어서면 여러 가지 병리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를 것이 없다.

 

봉건제도하에서 장원에는 반드시 교회가 있고, 장원의 주민들은 교회에서 찬송과 기도를 통하여 영육(靈肉)의 고달픔을 달래는 수도(修道)의 장소가 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잇 권에 개입하여, 교회의 관리를 맡은 성직자들로부터 잡역(雜役)에 종사하는 집사(執事)에 이르기 까지 그 직(職)을 상품처럼 매매하거나 상속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성직자도 결혼을 하였으며, 황제나 국왕이 교회정치에 간섭하여 교황을 비롯한 성직을 마음대로 갈아치우는 일도 허다하였으므로, 본말(本末)이 전도(顚倒)되어 교회 본연의 임무 수행이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순수한 신앙을 지키고자 한 사람들에게는 교회개혁을 바라고 있었고, 또한 이런 상황에서 개혁없이 그대로 간다는 것 자체가 어떤 한계 상황에 도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 개혁에 대한 폭 넓은 지지기반이 성숙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고, 그 개혁의 대상물은 세속적인 간섭에서 벗어나 교회의 권위를 세우는데 1차적인 목표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교회의 전통과 관습에 대하여 반대하고 나선 것이 클뤼니수도원(Cluny, L?bbaye de)의 "클뤼니의 개혁"으로 불리는 개혁운동이였는데,

 

클뤼니수도원은 프랑스의 아키텐공이 세운(910) 수도원으로, 모든 세속권력의 지배에서 자유롭고 원장의 선거는 완전히 교회법대로 행하도록 하고 오직 베네딕투스의 계율을 힘써 실행해야 한다는 것이 초기부터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클뤼니수도원은 이런 전통에 따라 엄격한 신앙생활을 지켰음으로 그 명성이 유럽전역에 퍼져 각지의 왕후 귀족은 기꺼이 자재(資財)를 기진(寄進)해서 클뤼니계 수도원을 세우고 개혁에 동참하였다.

 

이 클뤼니 개혁운동에 세속군주들이 동참한 것은 영지내의 교회를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나, 성직자는 오로지 신앙생활에만 전념하고 그 수입은 당연히 자기들의 몫이 되어야 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기 때문인데, 결과는그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클뤼니 개혁이라는 것이, 봉건제후 등 세속권(世俗權)으로부터의 간섭 배제(排除)를 골자로 한 수도회칙 보칙(補則 : 콘스에투디네스)에 근거를 두고 있었고, 그와 관련하여 성직매매·수도사의 결혼 금지 등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앞에서 이야기 한대로 당시의 제후들이 다른 이해관계에서 이를 지지하였으나, 신성로마제국(독일)의 황제 하인리히 3세는 광신적이라 할 정도로 종교적인 열정에서 이 운동을 더욱 지지하였다.

 

따라서 이 개혁운동은 독일의 로망스어(Romance languages)사용 지역(고대 라틴어가 분화 변형되어 사용된 지역?)을 중심으로 깊이 침투하였고, 이것이 화근이 되어 뒷날 그의 아들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늪에서 한동안 애를 먹었으며, 이 사건에서 같은 주역이었던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비롯하여 개혁을 주도한 교황이나 주교들 가운데는 이 수도원 출신이 많았다.

 

교회의 개혁운동은 교황 레오 9세(1049-1054) 때 막을 열기 시작했는데, 그의 고향 프랑스의 랭스에서 성 레미의 유체 천좌(遷座)식을 거행하면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성직을 돈으로 산 성직자를 용서 없이 추방하였다(1049).

 

이러한 교회 개혁은 하인리히 3세가 죽고 그의 아들하인리히 4세가 다섯 살에 황제가 되어 모후(母后)인 아그네스(Agnes)의 섭정(攝政)기의 혼란을 틈타 급속히 전파되었는데, 1059년 교황 니콜라스 2세(Nicholas Ⅱ:?-1061)는 추기경회의(樞機卿 : 교황직속의 자문회의)에서 교황을 선출하는 새로운 규정을 정하였다. 이것은 세속의 권리가 교황선거에 간섭할 수 없게 한 것이다.

 

본격적인 교회 개혁운동은 그레고리우스 7세(GregoriusVII : 1020 ?~1085. 5. 25) 때 였는데, 그의 재위(1073~85) 기간 중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황제권에 치명상을 입히고, 이 후 로마가톨릭교회의 전성기를 마지하는 길을 열었다. 그의 본명은 힐데브란트, 북이탈리아의 소아나 출생으로서 클뤼니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의 개혁이념은 세속 권력에 대한 교황권의 우월, 교회의 통일, 이를 위한 성직자들에 대한 규율의 확립에 두고, 이 이념에 따라 1075년 27개조 교황령(敎皇令)을 발표하였다.

 

당시 독일의 사정은 아직도 게르만의 부족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황제라고 해도 제후들의 연합체에 불과했고, 황제가 할 수 있는것은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각 사교의 교회나 직속 수도원장의 임면권을 장악하고 그럭저럭꾸려 나가고 있었는데, 교회나 수도원에서 황실의 재정 절반을 부담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의 지휘를 받는 군대의 대부분을 교회나 수도원에서 제공하였고, 관료조직이 따로 없었던 당시로서는 교회의 조직을 국가의 행정조직으로 원용하여 여기에서 일정기간 서기(書記)로 일하면, 황제로부터 사교로 임명되어 교회를 관리하는 절차를 밟고 있었다.

 

(3) 교권과 속권의 대립 - 카노사 사건

 

더구나 11세기 독일에서도 대대적인 개간(開墾)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 개간을 주도한 것은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였다. 제후들이 토지를 제공하면 수도원에서 이를 개간하고 제후의 보호를 받으면서 서로간의 공생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수도원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수도원이 불어나자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는 새로이 건설되는 수도원에 대한 보호권(바꾸어 말하면 지배권)을 설정하려 하였고, 여기에서 수도원에 토지를 기진하고 그 보호자로 되어 있던 제후들은 당연히 이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신종례를 거친 제후들이 직접 황제와 맞설 수는 없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에서 황제에게 압력을 가하여 자기들이 개간한 수도원에 황제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공작을 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제후와 황제는 거리가 멀어졌고, 반대로 제후들과 로마교황청과는 가까운 관계가 새로이 정립되었다.

 

이를 즈음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등장하여 단순히 돈으로 성직을 산 것만이 아니라, 국왕과 제후를 포함해서, 모든 속인(俗人)이 성직을 임명하는 것 까지도 성직매매라고 확대 해석하고 황제권에 도전하였다.

 

이에 가장 타격을 받는 것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로서 그는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황 페위를 선언하였고, 여기에 맞서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인리히 4세를 파문에 처했다. 이래서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의 우열(優劣)적 지위를 비교하는 단순 논리가 등장하여 세인의 관심을 집중 시켰는데,

 

유럽이라는 하나의 세계에 황제와 교황이라는 두 개의 지배층이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으로서, 황제가 정치권력의 정점에서 많은 교회를 보유하고 종교상의 권력까지 보유한 반면, 교황도 교회 세력의 최고 권위인 동시에 정치권력도 보유한 대 영주였기때문에, 재판권만 하더라도 분명히 선을 갈라 놓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미분화된 중세 초기 사회에서는 통용이 가능했으나, 성숙된 사회에서는 어떤 힘에 의해서도 통합은 불가피한 상황이 이르게 마련이다. 이래서 시작된 황제와 교황간에 시작된 타이틀 매치가 어떻게 결판이 나는지 그 이야기를 따라가 보기로 하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황제와  제후(속인)의 성직자 서임권을 부인하고, 교황권의 지고(至高)성을 선전하는 교황 칙서를 발표하자(1075.초) 독일 황제 하인리히 4세(Heinrich Ⅳ: 1056-1106)는 왕권도 신이 직접 창설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를 부인하였다.

 

이에 교황은 그해 12월 순종을 명하는 서한을 하인리히 4세에게 보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보름스에서 제국 의회를 소집하고(1076. 1월) 그레고리우스 7세의 폐위 결의안을 통과 시켰다. 이에 맞서 교황은 같은 해 부활절 직전에 소집된 공회의에서 하인리히 4세의 파문(破門)을 선고하고, 누구나 황제와의 접근과 충성을 금지 시켰다.

 

이렇게 되자 독일의 제후들은 수도원문제로 황제와의사이가 좋지 않았고, 보름스의회에서 국왕을 지지했던 사교(司敎)들 중에서도 황제에게 등을 돌리는 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제후들은 트리부르(Tribur)에서 모임을 갖고 하인리히 4세가 1년안에 사면(赦免)을 받지 못하면, 파문 선고가 내려진 1주년에 해당하는 이듬해(1077) 2월에 교황이 주최하는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의 국회에서 하인리히 4세를 추방하기로 결정하였다(1076. 10).

 

 이에 당황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사면을 구하기 위해, 몰래 왕비와 왕자, 그리고 약간의 종자(從者)만을 거느리고 제후들의 추격을 피해, 성탄절 전후 혹한(酷寒)의 알프스를 넘어 롬바르디아에 도착했다.

 

황제 일행이 롬바르디아로 들어가자, 여기에서는 독일과는사정이 딴 판으로 이 독일 황제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어 그 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이 때 교황은 자기가 소집해 놓은 아우그스부르크 국회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로 향하던 중,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서 예정을 바꾸어 그가 신임하는 토스카나백작의 부인 마틸타(Matilda)의 성새(城塞) 카노사(Canossa)로 들어 갔다.

 

이때부터 황제는 교황에게 사절을 보내어 사면을 애원(哀願)을 했지만 교황은 접견(接見)을 완강하게 거부했고, 다급해진 황제는 몸소 3중의 성문 가운데 제 2문 까지만 혼자 들어가서 모자도 없이, 맨발로, 거친 털로 짠 수도의(修道衣)만을 걸친 체 꼬박 3일 동안 눈 속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애걸하여, 겨우 사면을 받았다고 한다. 이를 가르쳐 카노사의 굴욕(Penance at Canossa)이라 부르는데 이시기는 1077년 1월 25일에서 27일까지 3일간으로 알려져 있다. 황제가 교황에게 빌었다.그것도 3일동안이나...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당시 교황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가는 쉽게 짐작하는 판단의 기준이 될 것이다.

 

일단 파문에서 사면된 하인리히 4세는 당당히 귀국하여 왕권의 재건에 힘을 기울여, 교회 세력을 확보하였으나, 제후들은 대립 국왕으로 루돌프를 세우고 이에 반발하자, 독일은 다시 혼란에 접어들게 되었고, 이에 그레고리우스7세는 다시 하인리히 4세를 파문에 처했다(1080. 3)

 

그러나 이 때는 이미 하인리히 4세가 세력을 만회하고 있어서 교황의 파문 선언이 먹혀 들지를 않았는데, 그것은 독일의 교회들이 적극적으로 황제 편에 섰기 때문이다. 교회로서는 간섭 많고 이 눈치 저 눈치 살펴야 되는 교황보다는 대우 받고 속도 편한 황제편이 났다는 것인데, 결국 속권(俗權)의 우두머리인 황제가 그의 지지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제후들로부터 외면당했고, 교권(敎權)의 수장인 교황은 교회로부터 외면당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세상 일이란 알 수 없다는 논거가 성립되며, 이념, 의리, 신앙에 앞서 사적인 이해관계가 공적인 조직에 우선한다는 인간 심리의 저변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보면 편할 것 같다.

 

하인리히 4세는 그를 지지하는 독일의 사교들과 북부이탈리아의 사교들 30 여명을 소집하여 공의회를 개최하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폐위와 파문을 결의하고 클레멘스 3세(Clemens Ⅲ)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1080년 10월에는 대립 국왕 루돌프와 반대파를 전멸시키고, 다시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로마를 점령하고(1082) 그리고리우스7세를 추방하여 그가 세웠던 클레멘스 3세의 교황 취임을 강요하였고, 자신은 1084년 3월 클레멘스 3세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았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살레르노(Salerno)에 피신해 있다가 "정의를 사랑하고 부정을 증오했기 때문에 여기 유적지에서 죽는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하였다(1085) 국내에서 다시 반대파의 기운이 높아지자 하인리히 4세는 급히 귀국하여 반대파를 진압하여 독일의 재 통일에 성공하였다(1091)

 

이렇게 성직 서임권 문제로 야기된 성·속간의 갈등은 1122년 8월 황제 하인리히 5세와 교황 칼릭투스 2세가 보름스협약(Worms, Concordat,Konkordat of W)을 체결하여 일단락되었는데, 사교의 지위를 성(聖)적인 것과 속(俗)적인 것으로 구별하여, 황제권에 포함되어 있던 "황제의 것과 신의 것을 분리해서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돌려준다는 것이 골자로 되어 있다.

 

주교·대수도원장직은 성직자가 뽑도록 하나, 후보가 여러 명일 때는 황제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고, 선거는 황제 앞에서 행하고, 성직에 뽑힌 자는 그 자리에서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봉신(封臣)으로서 권력·특권 등을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독일 내에서의 문제였고, 프랑스나 영국에서는 성, 속간의 갈등을 계속하다가 큰 파탄없이 타협이 이루어져, 프랑스에서는1097년에 영국에서는 1107년에 이미 성직 서임권 문제가 마무리 되었으며, 이 보름스협약의 체결로 그때까지 황제의 서임권은 형식상으로 많은 제한을 받았으나, 사실상의 권한은 상당히 유보되었고, 또 부르군트와 이탈리아에서는 독일과 다른 방식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이 협약은 교황과 황제 쌍방을 만족시키지 못하였고, 문제의 궁극적 해결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협약으로 황제는 신정(神政) 정치를 포기하고, 세속적인 군주로 차별화되어 사실상의 권력은 많이 약화되었고, 이를 즈음에 다시 십자군 원정이 나타나 만사는 교황권에 유리하게 처리해 나가게 되었다.

 

나. 십자군(crusades) 원정

 

(1) 유럽의 팽창

 

십자군의 목적지 예루살렘7세기부터 시작된 이슬람의 침략은 지중해 세계를 석권하고 유럽을 위협했으나, 11세기에 와서는 이슬람세계 자체의 세력약화와 유럽의 팽창으로, 유럽이 수세(守勢)에서 공세(攻勢) 나가게 되었다.

 

이런 징조가 먼저 나타난 곳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던 이베리아 반도로서, 711~1492년까지 780년 동안 이곳의 그리스도 교도가 이슬람교도에 대하여 벌인 실지(失地) 회복운동 혹은 국토회복운동(Reconquista : 國土回復運動)을 전개했는데,

 

그 반격에 가장 적극적이 였던 것은 두 개의 그리스트교 왕국, 즉 아라곤(Aragon)과 카스티야(Castilla)였다. 이 국토회복운동은 동부와 서부에서 각기 일어나 중심부에서 다시 남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먼저 서부 방면에서는 718년 펠라요라는 서(西)고트족 귀족이 이슬람군을 격파하고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건설하였고, 그 후 레온을 수도로 삼고 두에로 계곡까지 진출하였으며, 10세기에는 레온왕국과 카스티야왕국이 성립되었다.

 

카스티야는 1085년 이슬람세력의 중심지 톨레도를 점령하고, 1212년 라스 나바스 데 라 톨로사 결전에서 승리, 과달키비르강 유역에 도달하였다. 한편 동부 방면에서는 피레네산맥 주변에서 활동이 개시되어 10세기에나바라가 독립하고, 11세기에는 아라곤이 독립하였는데, 아라곤은 1118년 사라고사를 점령하고, 에브로 계곡을 장악하여 세력을 넓혔다.

 

13∼15세기에 이들 운동은 에스파냐 통일국가 건설운동의 형태로 추진되었고, 라스 나바스 데 라 톨로사에서 승전한 아라곤은 코르도바(1236)·세비야(1248)·알헤시라스(1343) 등을 잇달아 회복하였으며,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결혼하여 에스파냐 통일왕국이 탄생하였다.

 

1492년 페르난도와 이사벨은 이슬람 최후의 거점인 그라나다를 함락시킴으로써 이베리아반도에서 국토회복운동은 완성되었고, 에스파냐의 종교통일도 동시에 이루어 졌다.

 

지중해에서는 노르만인 모험기사 오트빌의 형제들이 남부이탈리아, 시칠리아, 모올타, 등지에서 이슬람 및 비잔트 세력을 몰아냈고, 11세기 후반에는 피사, 제노바, 나폴리, 베네치아 등의 이탈리아 도시들이 여기에 합세하였다.

 

이렇게 해서 11세기 후반은 지중해 세계의 재정복의 막을 올리고, 이어서 이들 노르만과 프랑스의 기사들 그리고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십자군 원정의 전면에 포진하여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희망에 찬 동방 원정의 길에 올랐다.

 

그 명분상의 이유는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인 이슬람으로부터 회복한다는 것이 였는데, 이 문제의 땅 예루살렘은 현재도 유다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치열한 접전지역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곳이다.

 

(2) 성지 예루살렘(Jerusalem)

 

옐루살렘 전경예루살렘은 그 이름이 말해주 듯 대표적인 일신교 신앙의 성도(聖都)가 되어, 세계 역사만큼이나 그 변천도 매우 다양한 곳이다.

 

현재는 이스라엘 공화국의 정치적 수도(행정수도 텔아비브야파)로 되어 있고, 아라비아인들은 쿠드스(신성한 도시)라고 부른다.

 

 인구 약 56만 7천(1994). 동부는 요르단령이며, 서쪽은 1948년부터 이스라엘령이 되었고, 1950년에는 그 수도가 되었다.

 

1967년 6월 중동전쟁 이후로 유대교도·그리스도교도·이슬람교도가 저마다 성지(聖地)로 받들고 있는 동쪽 지역도 이스라엘의 점령지로 되어 더욱 복잡해졌다.

 

사해(死海)로부터 25 km, 지중해 연안으로부터 55km, 높이 790 m 가량의 팔레스타인 중앙산맥의 분수령상에 있는 이 도시는, 지중해성기후와 사막기후의 영향을 두루 받기 때문에 북위 31°41'에 위치 하지만 겨울에는 몹시 춥고 봄·가을에는 이따금 37 ℃의 더위를 몰고 오는데, 동(東)예루살렘에는 통곡의 벽(유대교), 성묘(聖墓)교회(그리스도교), 오마르사원(이슬람교) 등 일신교의 대표적인 유적(遺蹟)과 함께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많으며, 순례자와 관광객이 연중 붐비고 있고, 서(西)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문화의 중심지로서, 정부청사와 헤브라이대학·국립박물관·미술관 등이 유명하다.

 

오늘날까지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는 이곳의 역사를 살펴보면, BC 3000년대 말경에 에브스(여부스)라는 가나안인(人)의 한 부족이 그동부에 성시(城市)를 지어 거주한 것이 이 도시의 기원이라고 한다. 처음 이 도시를 우루살림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라고 하며, 그러나 도시의 이름과는 걸맞지 않게 정복과 탈환의 악순환이 기원전부터 시작되어, BC 2000년대 중엽부터는 이집트의 파라오(王)의 세력하에 들어가, BC 1000년 무렵까지 이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 후 헤브라이인이 이곳을 점령하였고, 다윗왕이 에브스인을 쫓아내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북쪽 현재의 바위사원(쿠바트 앗사흐라)이 있는 곳에 다윗은 야훼의 성전을 건립하였고 다음 솔로몬왕은 지금의 아크사 이슬람교사원이 있는 지점에 궁전을 지었는데, 이 무렵에는 주민들도 늘어났고, 도시 둘레에 성벽도 만들었다.

 

 BC 935년 솔로몬왕국이 이스라엘과 유다로 양분되자 예루살렘은 유다의 중심지가 되었다가, BC 586년 신(新)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느부갓네살)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과 궁전을 파괴하였으며, 시민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가서 BC 538년까지 억류하였는데 이것을 바빌론의 포수라고 한다.

 

그 후 아케메네스조의 페르시아제국 키루스(고레스)왕이 이들을 석방해 줌으로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야훼의 성전도 재건하였으나, 옛날의 번영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예수가 십자가를 매고 간 골고다 언덕 길그 후 여러 차례 파란을 겪은 끝에 BC 63년 폼페이우스가 지중해의 해적 소탕을 목적으로시리아에 상륙하였다가, 유다 교도간에 분쟁을 이용하여, 그가 거느린 로마군이 성벽을 파괴하고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BC 37년부터 헤로데스(헤롯)왕이 이곳을 차지하고 야훼의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솔로몬왕이래의 번영을 되찾았으나, 이 무렵에는 이미 헬레니즘 문화의 색채가 농후하여 옛날과 다른 점이 많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무렵(AD 30년 4월)에는 처형장인 골고다 언덕과 매장지가 북서부의 성벽밖에 있었는데, 10여 년 후에는 이지역을 둘러싼 새 성벽이 만들어졌고,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70∼71년에 이 도시를 공격함으로써 헤로데스 시대의 번영은 사라졌고 다시 도시는 파괴되었다.

 

유대교도들은 헤로데스가 지은 성전의 벽을 "통곡의 벽"이라 이름 짓고 이곳을 찾아가서 통탄하는 풍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후에도 유대교도의 반란이 거듭되었기 때문에 로마인은 135년 야훼의 성전을 파괴하였다.

 

이 후 로마에서는 예루살렘을 콜로니아 아이리아 카피토리나라 부르고 직속지로 삼아 유대교도들을 몰아냈다가, 로마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자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도의 순례자로 붐비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 306∼337)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의 성묘(聖墓) 등에 최초의 교회가 건립되었다.

 

614년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호스로 2세가 비잔틴 제국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뒤, 많은 교회를 불사르고 다수의 시민을 끌고 갔으며, 638년 이슬람제국의 2대 정통칼리프 우마르가 이곳을 다시 함락시켰으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도 비잔틴 제국에서 이탈하여 이슬람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현재 바위사원에 있는 큰 바위는 마호메트가 천사 가브리엘의 안내로 제7천에 있는 알라신(神) 앞까지 갔다는 이른바 승천(미라지)의 장소로서 이슬람인들은 이곳을 성지로서 신성시하고 있다. 아랍인들은 솔로몬의 궁전이있던 곳에 "아득한 회교사원(아크사의 마스지드)"을 지었으며, 우마이야왕조의 칼리프, 압둘 말리크(재위 685∼705) 때에는 다윗이 제단을 마련한 곳에 바위사원을 건립하였다.

 

이때부터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도는 서로 상대방의 성지를 존중하였으나, 예외적으로 이집트의 파티마왕조의 칼리프, 하킴(재위 996∼1020)이 비잔틴제국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성묘를 비롯하여 그리스도교도의 성지를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셀주크 투르크가 이슬람세계의 지배자로 등장하여 시리아를 점령하여, 유럽인들의 성지 순례의 길을 막고 비잔틴제국을 위협하자 비잔틴의 황제는 서유럽에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이래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다.

 

(3) 십자군 원정의 동기 및 배경

 

셀주크투르크(Seljuk Turks)의 등장으로 다급해진 비잔틴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 ~ 1071)는 서방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이 때 서방에서는 대대적인 교회 개혁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1054년 이후 그리스정교의 반항 내지는 독립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이 요청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셀주크투르크의 세력은 날로 확장되어 1090년 경에는 시리아 마져 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유럽인들은 동방의 성지 예루살렘에 갈 길을 잃고 말았다. 이에 비잔틴황제 알렉시오스 1세(1081 ~ 1118)는 제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성지 순례의 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서방에 구원을 요청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구원을 요청하게 되었다(1094).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수중에서 탈환해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세계의 최고 책임자인 로마교황으로서는 당연한 의무라고 하겠으나, 그에게는 전쟁을 치를만한 군대도 장비도 없었기 때문에 별도리가 없었다. 그러나우르바누스 2세에게 닥친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는데, 그것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비잔틴제국의 황제 지배하에 있는 그리스정교회를 통합하여 그리스도세계를 재 합일 시키고, 동시에 비잔틴 황제권을 제압하여 실질적인 유럽세계의 최고지배자가 되고자 했던 다른 목표가 있었고, 셀주크투르크도 자체 분열로 인하여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믿었다.

 

교황이 군대를 동원하는 데는 단연 신성로마제국(독일)의 군대가 그 첫째였으나, 독일의 하인리히 4세와는 카노사 사건 후 아직도 대립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하였고, 당시는 교황권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시기였으므로 교황 자신이 독일 황제에게 애원하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프랑스 기사단을 동원하기로 했는데, 이것은 교황 자신이 프랑스 출신이 였고, 봉건 기사단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고 믿고 있었기때문이였다. 이래서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말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공회의를개최하고, 그의 뛰어난 웅변술로 예루살렘을 잃은 그리스도 교도의 비참과 동방에서 투르크인이 가해오는 위험을 조리있게 설명하고, 성지 회복을 위한 성전(聖戰)과 순교(殉敎)의 영광을 강조하였다. 이 때 감동한 청중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구동성으로 "신이 그것을 바라고 계시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십자군을 일으키기 위한 우르바누스 2세의 노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선동자(煽動者)를 각지에 보내어 성지 탈환의 대의를 알리고, 동방에는 성유골(聖遺骨) 외에도 금은(金銀) 재보(財寶)와 미녀가 많다는 것을 잊지않고 멋대로 선전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종군한 사람들의 가족과 재산은 교황청에서 직접 보호해 줄 것이며, 성전에서 희생(犧牲)된 자는 모든 죄를 용서 받고 천국에 간다는 등 다른 세계에 대해서 전혀 캄캄한 밤중이었던 당시의 유럽 사람들에게는 실로 매력적인 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에 편승해서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선동자이 외에 자진해서 선동자가 된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은자(隱者) 피에르(Pierre)로서 그가 예루살렘에서 직접 목격했다는 이야기, 즉 1073년 이래 여기를 점령한 셀주크 투르크족이 성묘를 마구 헐어 부수는 모습이라든가 성묘에 가는 순례 기독교도에 주는 강탈, 학대 등이 이 지상에서 볼 수 없는 비참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돌아다녔는데, 맨발로 허술한 옷을 걸치고 나귀를 탄 이 사나이는 커다란 십자가를 메고 프랑스, 독일 지방을 두루 돌아다녀 가는 곳마다 많은 군중에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 밑에 수 천명이 모여 들었다.

 

이렇게 모여든 사람들은 성지와 성유골 탈환을 위해 혹은 금은 재보와 미녀를 얻기 위해 종군을 지원하고 어깨에는 십(十)자의 표시를 달았는데, 이로 인해서 그 군대를 십자군(영: Crusades, 독: Kreuzzuge, 프: Croisades, 에스: Cruzada)이라고 불렀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의 속사정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성지 탈환이라는 종교적 열정 이외에도 국왕이나 영주는 영토의 확대를, 하급기사들은 금은 재보를, 농민들은 봉건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상인들은 값비싼 상품을,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새로운 무역로 개척을, 때 마침 불어 닥친 기근과 역병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부랑자는 먹을 것을 찾아서 이 원정에 동참하게 되는데, 노르만의 약탈 풍습은 이 새로운 신천지를 향해서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다.

 

(4) 십자군 원정의 경과

 

군중 십지군


최초의 원정군은 이른바 군중 십자군이라 하여 회화적이고 극적이며 흥미있는 소설과도 같은 것이 넘쳐 흐르고 있다. 이들 최초의 동방 이동군은 선동에 심취된 군중의 행렬이었다. 이들은 지도자도 규율도 없이 신의 가호와 사명감에 젖은 체, 무조건 길을 재촉하여 가다가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면 약탈을 자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난폭하여 헝가리에 향한 군중 십자군은 모조리 맞아 죽었고, 또 다른 집단은 라인란트지방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막연한 복수심에 불탄 나머지 유대민족을 보는데로 학살하고 헝가리에 들어 가다가 그들도 거기서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다행히 피에르가 인솔하는 또 한 집단은 콘스탄티노플까지 갔는데 이들이 도중에 얼마나 행패를 부렸는지 비잔틴 황제가 기절 초풍 할 지경이였다. 그리하여 비잔틴 황제는 이들을 배에다 태워 투르크군에 보내서 전멸을 당하게 하였다. 이것이 신의 가호와 맹종의 종교사상이 만들어 낸 민중의 불행한 모습의 중세 유럽의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제 1회 십자군 (1096 - 1099)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정규 십자군의 주력은 프랑스와 노르만의 기사들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는 세 개의 지휘 계통을 갖추고 있었다. 로트링겐 후(候) 고드프리를 비롯한 불로뉴 백(伯) 일가가 지휘하는 부대는 독일과 헝가리를 거쳐서 집결지인 콘스탄티노플에 가기로 되어 있었고, 노르만인들로 구성된 북부 프랑스의 기사단과 남부 이탈리아의 기사단은 함께 배를 타고 집결지에 가기로 하였으며, 남부프랑스 기사단은 북부 이탈리아를지나 집결지인 콘스탄티노플에 가기로 약정하고, 1096 여름과 가을에 각각 출발지에서 목적지를 향해 진군을 시작하였다.

 

이 중 북부프랑스 기사단과 이탈리아의 기사단, 그리고 남부프랑스의 기사단은 그럭저럭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으나, 피에르 일행이 다녀갔던 독일과 헝가리 길을 택한 로트링겐 후와 부르고뉴 백 일가의 군대는 피에르의 만행에 진저리를 낸 연도 주민들의 반발로 모진 고생을 하였는데, 결국 이들도 혹한(酷寒)과 기아(飢餓)에 견딜 수 없어 피에르와 같은 만행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래서 십자군은 출발부터 일부 민중에게는 약탈자나 폭력배로 인식되게 되었고, 이렇게 되면 구원을 요청했던 비잔틴의 황제에게는 후회가 막급 했고, 이슬람이라는 폭력을 물리치기 위해 새로운 폭력배를 끌여 들인 결과가 되어 막상 이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을 때 비잔틴제국의 반응은 냉담할 수밖에없었다.

 

그러나 집결된 군대는 당시로서는 매우 큰 군세 였는데,기병 5천, 보병 1만 5천, 비전투원을 포함하여 5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렇게 되자 비잔틴 황제는 그의 군대로 십자군을 감시하고, 이들에게 신종례(臣從禮)를 요구하였는데, 신종례가 무엇인가?  황제의 발에 입 맞추고...충성을 맹세한다는 일종의 의식으로서, 신종례를 마치면 좋든 싫든그의 신하(부하)로서 책무를 수행해야 할 의무가 부과된다.

 

이 때 만약 십자군에게 뚜렷한 목표, 이를테면 성지를 회복하고... 금 은 재보와 미녀를 얻고...성유물을 가질 수 있다는 벅찬 희망이 없었다면, 살벌한 광경이 연출될 수도 있었으나, 먼길을 마다 않고 찾아온 보람도 없이 그 희망을 버리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나머지 이 불손한 비잔틴황제의 요구를 받아들여 신종례를 그럭저럭 마치고 비잔틴군을 포함해서, 4개의 군단으로 편성하여 1097년 소아시아반도로 건너 갔다.

 

그들의 1차 공격 목표는 안티오키아 였다. 비잔틴군은 해안을 따라 쉽게 행군을 했지만 십자군은 내륙을 가로질러 가는 바람에 한 여름사막의 띄약 볕에 얼굴은 그을리고, 투르크군과 소규모 전투를 치루면서 "약속의땅"입구에 해당하는 킬리키아(Cilicia)에 도달하여, 일부는 유프라테스강 상류의 에뎃사(Edessa)를 점령하고, 주력부대는 노르만의 기사 보에몬의 지휘하에 안티오키아로 향했다.

 

그러나 비잔틴군이 약속을 버리고 제멋대로 철수하므로써,할 수 없이 십자군은 이탈리아 도시들이 제공해 주는 식량과 무기로, 2개월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안티오키아를 점령하였다(1098. 6) 안티오키아의 점령은 두 가지 사실을 새롭게 하였는데 그 첫째는 비잔틴군의 배반으로 이 후 성지탈환은 십자군(유럽)단독으로 이루었다는 것과, 둘째는 이탈리아 도시들의 지원을 받게 되므로써, 그들이 요구하는 재화의 약탈이 더욱 공공연하게 이루어 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십자군 내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안티오키아의 점령을 두고 북프랑스 기사단은 보에몬의 용맹 때문이라고 하였고, 남프랑스 기사단은 툴루스 백(伯) 레이몽 휘하의 기사 피에르 바르돌로메오(PierreBartolomeo)가 사막에서 발견한 성창(聖槍:Holy Lance -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찌른것)의 기적 때문이라고 맞서게 되었다.

 

피에르 바르돌로메오는 스스로 신명재판을 택해서샤쓰 한 벌만을 입은 채, 손에는 문제의 성창을 들고 오리브 장작 불 더미 위를 밟고 넘었다가 12일 만에 사망하였다. 이를 두고 남프랑스 기사단에서는 군중이 환희에 젖어서 그를 밟아 죽였다고 하였고, 북프랑스 기사단에서는 화상(火傷) 때문이라고 주장하여, 이 하잘 것 없는 일을 두고, 반목과 질시는 날이 갈수록 더해 가서, 자칫하면 이 머나먼 이국 땅에서 프랑스 판 남북전쟁이 일어날 번 하였다.

 

이 무렵 한편에서는 마라의 학살이 자행되었다. 보에몬이 지휘하는 십자군 일부가 해질 무렵 마라에 도착하여 성벽을 점령하고 시중에 난입하여 마음 놓고 약탈하고, 사라센인들을 보는대로 살해하거나 노예로 팔기 위해 잡아서 안티오키아로 대리고 갔다. 십자군이 마라에 머문 1개월 동안 식량이 모자라자 사라센인들을 죽이고, 톱으로 그 배를 갈라 혹시 입으로 삼킨 금화가 있는지를 확인하기도 하고, 그 고기를 썰어서 요리해 먹기도 하였다고 하는데...어디 까지 믿어야 될지 모르겠지만, 십자군이 잔학했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살인과 약탈을 계속하면서 십자군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1099년 6월, 지금까지의 반목과 질시가 예루살렘 성벽 앞에 이르자 기적같이 없어지고, 때 맞추어 도착된 이탈리아 도시들이 보낸 다량의 물자와 병력이 보급되자 예루살렘 공격이 시작되었다.

 

6주간의 전투 끝에 드디어 예루살렘이 함락되어(1099.7)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이 예루살렘 함락 때에도 마라의 학살 이상으로 처절하여 비전투원까지도 보는대로 살해하였고, 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신전, 회랑, 거리에서 피의 향연을 벌인 후 대 약탈을 감행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울면서 구주(救主) 예수의 묘지에 참배하고, 각자가 약탈한 물건 가운데서 공물(供物)을 추려서 묘 앞에 늘어놓고, 신의 은총과 영광을 찬미했다.

 

이렇게 많은 재보를 얻게 해준 하나님이 너무나 감사하다는 것이다. 약탈과 살인까지도 신의 섭리로 받아들인 중세 유럽인들의 사고(思考)를 지금 우리들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야 없을 것이다. 다만 열광적인 신앙과 이교도에 대한 격한 증오심이 한 덩어리가 되어, 강건한 십자군 정신을 형성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마음이 편할 것 같다.

 

당초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십자군 병사들의 일부는시리아에 정주(定住)하였다. 정복지에는 예루살렘 왕국·안티오키아후령(侯領)· 트리폴리 백령(伯領)·에데사 백령등 4개국이 들어섰고, 유럽의 봉건제도가 그대로 옮겨졌으며, 왕국 안에는 요한기사단· 템플기사단 ,조금 늦게 독일기사단 등의 종교기사단이 편성되어 성지 방위의 주요 군사력이 되었다.

 

영주는 성을 거점으로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상인은 도시에서 특권을 얻어 이익을 증대시켰으나 농민은 희망도 없이 예속상태에 놓였다. 교회와 수도원이 건립되고 교회조직도 정비되어 유럽의 제도와 관습이 그대로 이곳에 옮겨졌다.

 

제 2회 십자군 (1147)


십자군이 성지를 탈환하고 그 곳에 왕국을 수립할 수 있었다는 것은 십자군 자체의 힘도 있었겠지만 이들을 막아 낼만한 조직적인 힘이 상대에게는 없었다. 당시의 시리아일대는 시어파 이슬람국가인 이집트의 파티마왕조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 파티마왕조가 쇠락의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물리칠 만한 힘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12세기가 되면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시리아 탈환을 두고 유럽측에서도 성전(聖戰 :Holy war)이라고 했지만, 이슬람측에서도 성전(Jihad)으로 생각하여, 두 유일신 세계가 맞 붙게 되었을 때, 모술(Mosul)의 태수(atabeg) 잔기(Zangi ?-1246)는 알렙포를 탈취하고(1218) 이어서 에뎃사를 점령해버렸다(1244)

 

예루살렘이 위험하다는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클레르보의 수도원장 베르나르두스의 제창으로 십자군이 편성되었다.

 

이때는 프랑스왕 루이 7세(LouisⅦ :1137-1180)와 독일왕 콘라드 3세(konrad Ⅲ: 1138-1152)의 지휘하에 출발하게 되었고(1147) 이슬람에서는 잔기가 죽고 그의 아들 누레딘(Nureddin: 1118-1174)이 등장하여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격 목표는 다마스쿠스(Damascus)였다.

 

1회 십자군으로 출정하여 시리아 일대에 정착하고 있었던 시리아·프랑크인(시리아의 유럽인)들이 이슬람 편을 들게 되자 사태의 심상함을 눈치챈 독일왕 콘라드 3세는 곧 철수해 버렸고, 프랑스왕 루이 7세가 분전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결국 그도 돌아오게 되었다.

 

제 3회 십자군


다마스쿠스의 누레딘이 가장 신임한 장군의 조카에 해당하는 살라딘(Saladin, Alahal-Din:1138-1193)이 파티마조의 재상이 되었다가, 얼마 후 자신이 군주가 되어 아바스의 칼리프로부터 술탄(세속 군주 즉 왕)의 칭호를 받고, 이슬람인들의 종교적 열정과 전투 열을 고취해서 예루살렘왕국을 점령해 버렸다(1187)

 

이 패전 소식이 유럽에 전해지자 다시 십자군을 편성하게되었다.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왕 필립(필리페) 2세, 영국왕 리차드 1세가 각각 군대를 이끌고 성지 탈환이 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 때는 연합이 잘되지 않아서,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단독으로 먼저 시리아에 갔다가 냇물에 빠져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이렇게 되자 독일군은 곧 철수해 버렸다(1190)

 

뒤 늦게 출발한 프랑스왕 필립 2세는 소아시아 해안의 아크레(Acre)에 상륙하였고(1191. 4) 영국의 리차드 1세도 같은 해 6월에 아크레에 상륙하여, 서로가 버티게 되자 프랑스왕 필립 2세는 여기에서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하고 노르망디(프랑스내의 영국왕령)를 탈취하기 위해서 재빨리 귀국해 버렸고,영국왕 리차드 1세도 혼자서 몇몇 도시를 점령하고, 유럽인들의 성지 순례를 보장한다는 확약을 살라딘으로부터 받고, 휴전을 선언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귀국도중 오스트리아에서 독일 왕 하인리히 6세에게 사로잡혀서 막대한 몸값을 지불한후 1194년에야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그의 아들 존(無地王 : 대헌장에 서명한 영국에서 가장 못난 왕), 프랑스와 독일의 왕들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이렇게 해서 풀려난 리차드 1세가 귀국 후에는 노르망디 문제로 프랑스왕 필립 2세와싸우다가 1199년 전사하여, 후일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로마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제 4회 십자군


십자군이 종교적인 열정 보다는 세속적인 정치문제로 치중되었다는 것은 2회와 3회때도 그 싹을 보였으나, 4회 때는 더욱 극명하게 그 사실이 나타난다.

 

우르바누스 2세 교황 이후, 가장 위대한 정치가인 인노켄티우스 3세(Innocentius III: l198∼1216 본명 Lothario di Segni)가 35세의 나이로 새로운 교황에 선출되었다.

 

그는 복잡한 유럽의 정정(政情)을 최대한 이용하여,십자군의 대의를 강조하고 유럽 내의 각국을 화해 내지는 단결시켜서, 그 위에 교황의 패권(覇權)을 구현하려는 원대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행동으로 옮겨 독일, 프랑스, 영국을 교묘(巧妙)히 조정하여 패권을 확립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십자군을 동원하는데는 실패했다.

 

그의 십자군운동에 호응한 것은 상파뉴 백(伯)과 프랑드로백(伯) 등의 북부 프랑스 기사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황의 요청에 따라 이집트를 정복하여 이슬람세력을 몰아내기로 하고, 기사 4천 5백, 기마 4천 5백, 보병 2만, 종졸(從卒) 9천 및 9개월 분의 식량을 베네치아에서 수송하기로 계약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집결된 병력을 그 절반 정도에 불과했고, 베네치아에 지급해야 할 수송비용이 조달되지 않았다. 계약을 이행하지 못한 십자군측에서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거기에 더해서 이래저래 기다리는 동안에 진 빚이 점점 많아졌다.

 

여기에서 베네치아가 기발한(?) 제안을 내 놓았다. 헝가리측에서 점령한 아드리아해안(달마티아 지방)의 그리스도교 도시 자라(Zara)를 빼앗아 주면, 계약 위반도 그 동안의 빚도 불문에 부치겠다고 하자 궁지에 몰린 십자군측이 이에 동의하여 자라를 점령했고(1202. 11), 십자군이 자라를 점령하기 전, 이런 소식을 들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격노하여 이들 십자군을 파문에 처해 버렸다.

 

이 파문당한 십자군이 자라에서 겨울을 보내고, 그 이듬해가 되자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에서 추방되어 유럽에 망명 중이던 이삭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시우스 4세가,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자기들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베네치아에 진 빚을 모두 갚아주고, 이집트원정에 필요한 재정과 군사를 지원하며, 그리스정교회를 로마교황청에 귀일 시키고, 등등의 제안을 해 왔다.

 

이런 제안은 베네치아 상인들과의 이해 관계도 일치하여 이 어처구니 없는 파문당한 십자군은 다시 이집트 대신에 콘스탄티노플을 향하여 진군했다.

 

1203년 8월에는 이삭 2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 주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삭 2세의 부자가 살해 당하자, 십자군은 직접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드디어 양측이 전쟁이 일어나 격전끝에 십자군은 이 유서 깊은 도시를 함락하였다(1204. 4)

 

여기에서 십자군과 베네치아 상인들은 약탈 품을 분배하고 ,플랑드로 백 보드앵이 황제로 추대되어 이른바 라틴제국(Latin Empire : 1204 - 1261)이 성립되었다.

 

이때 십자군이 차지한 곳은 내륙이고 베네치아 상인들이 차지한 곳은 당연히 해안지대였으며, 이들이 다수의 성유체와 재보를 가지고 유럽에 들어가자, 헝가리의 자라 공격문제로 격노하여 이들을 파문했던 교황 인노켄티우스3세는 물론이고, 일반인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이 열열히 이들을 환영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 유럽에서 정치 경제상의 이해 관계가 종교적 정열에 우선한다는 것을 반증한 것이고, 비잔틴제국의 교회가 로마카톨릭교회로 귀일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교황은 만족해야 했으며, 지중해의 도시들이 마음 놓고 항해의 길을 열게 되어 상업의 발달을 더욱 촉진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어찌되었던 역사의 발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이 번에는 "소년십자군"이라는 또 하나의 웃지 못할 일이 일어 나고 있었다.

 

소년십자군(Children's Crusade : 少年十字軍)

 

1212년에 프랑스와 독일 두 곳에서 소년·소녀들이 십자군을 일으켰는데, 이를 두고 서유럽 십자군의 역사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고도 비극적인 에피소드가 일어 났다. 대체적으로 국왕과 영주, 그리고 이들의 많은 부모들은 눈물로 이들을 만류했으나, 당시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이를 권장하였다.

 

프랑스에서는 오를레앙 지방의 목동 에티엔이 성지회복을 주장하여 3만의 소년·소녀를 모았고, 독일에서는 쾰른 지방의 소년 니콜라우스가 2만의 아이들을 집결시켰는데 이들의 나이는 대개 12 ~13 정도였다고 하며, 결과는 모두 악덕상인들의 꾐에 속아 아프리카 등지의 이국 땅에서 노예로 팔리거나, 후덕한 주인(?)을 만나 돌아오기도 하였고, 도중에 배가 난파하여 바다에서 생명을 잃은 아이들도 많았다.

 

이 소년십자군은 그 당시 사회 전반에 고조되었던 환각(幻覺)과 기적(奇蹟)의 난맥상을 대표하는 광신(狂信)을 잘 보여주는 비극이라고 볼 수 있다.

 

1212년 여름 에티엔이라는 양치기 소년이 북부프랑스의 한 마을에서, 가난한 순례자처럼 허술한 옷차림을 한 사람을 보았는데, 그의 모든 양들이 이 허술한 순례자 차림의 사람에게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이 소년은 그를신(神)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널리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각처에서 수천명의 소년 소녀들이 모여들고, 에티엔이 그 지도자가 되어 성지 회복의 기치를 들게 되었는데, 사제나 그 부모들은 이 어처구니 없는 모험에 놀라 적극 만류하여 더러는 탈락했으나, 고집을 걲지 않는 무리들이 계속 늘어나자, 프랑스 국왕 필립 2세는 이들의 귀가를 명령했다.

 

그러나 국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많은 소년들은 그들의 고집을 버리지 않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어른들이 못했던 일을 어린 아이들이 하는구나! 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역시 아이들은 어른 스승...어쩌구 저쩌구...하면서 이들을 높이 찬양하였다.

 

이렇게 되자 에티엔을 보기 위해서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고, 에티엔의 몸을 만져보고, 옷을 찢어가는 등, 신의 사자로 착각되어 많은 물자와 금전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남으로 내려가, 마르세이유에서 7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출발했는데, 도중에 2척은 난파되어 모두 수장(水葬)되었고, 나머지 5척은 악덕 선주들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끌고 가서 이슬람 인들에게 모조리 노예로 팔아 버렸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술탄은 다행히 소년시절에 파리에 유학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소년 노예들을 함부로 다루지는 않았고, 그후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알렉산드리아의 술탄과 화해 하여 이 중 7백명이 노예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소년십자군 운동이 같은 해 독일에서도 일어 났다. 이 독일의 소년십자군을 이끈 것은 킐론의 니클라우스라는 겨우 10세의 소년이었다.

 

이들 역시 배를 타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 남부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브린디시에 닿았고, 여기에서 사교의 강력한 반대에 굴복하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배고픔에 지친 이들에게 왜 십자군이 되었느냐고 물어보면 그저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후에도 십자군은 계속되었다.

 

제5회 이후의 십자군


제5회 십자군은 또다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의 제창으로 이루어졌다(1218), 이 십자군은 아콘으로부터 이집트에 원정하고, 다미에타를 포위하여, 작전은 성공하였으며 17개월간의 긴 공방전에 지친 카이로의 술탄은 다미에타와 시리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그러나 알바노의 추기경은 이를 거절하고 카이로에 진격하였으나 나일강의 홍수로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은 빈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제6회 십자군

 

제 6회 십자군은 신성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행해졌다(1227)  프리드리히는 "세례를 받은 시칠리아의 술탄"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라비아의 풍습에 매혹된 황제였다. 그는 무력이 아닌 외교수단으로 이슬람측으로부터 예루살렘과 그 밖에 영토를 양보받았고, 소년 십자군이 노예에서 풀려 난 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러나 그가 돌아간 뒤에는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들 사이에 내분이 격화되어 그 사이에 예루살렘도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회 십자군이 결성되었고(1248). 루이 9세는 키프로스섬에서 이집트로 건너가서 다미에타를 점령했다. 이때에도 이슬람측은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제안해왔으나 전과 같이 이를 거부하고 카이로를 향해 진군했으나 만슬러전투에서 대패하여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잠시 시리아에 머물면서 약간의 항구와 요새를 탈환하고 결국 철수하였다. 그 후 안티오키아가 이슬람군에게 함락되자 루이 9세는 최후의 십자군을 이끌고 출발하였는데(1268), 튀니스를 공격하였을 뿐 그곳에서 죽었다. 시리아에서는 요새가 잇따라 함락되었고, 1291년 아콘마저 빼앗기자 십자군 국가와 그 운동은 무려 3세기에 걸친 긴 장정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다. 이단 운동 - 종교 재판

 

(1) 교황권의 전성과 이단 논쟁

 

지금 까지 로마가톨릭교회가 주체가 되고 여기에 영합한 세속의 여러 세력들이 결합하여 여러 차례 십자군을 일으켰던 그 과정을 살펴보았으나, 결과는 실패했다고 많은 역사가들은 논평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의 군사력 없이 전쟁을 수행한 로마교회의 진정한 힘은 이들 세속 군주들을 신앙의 틀 속으로 불러 들여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므로써 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유럽은 거대한 신앙공동체를 이룩하였고 그 공동체의 윗자리에 교황이 있어서 분쟁을 조정하고 이탈을 방지하여 그 영속성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필수적으로 따르게 마련인데, 이 때 까지 이것을 가능하게 했던것은 로마교회의 막대한 수입과 성무 정지 내지는 파문이라는 처방만으로도 가능했기때문이다.

 

교황권의 전성기라고 이야기하면, 우르바느우스 2세와 인노켄티우스 3세, 보니파키우스 8세를 연상하게 된다. 이 시기는 대략 12 ~3세기에 해당하며, 이 시기에 대외적으로 십자군 원정이 있었으며, 대내적으로도 교회의 의식, 전례 및 교의 확립에도 노력하여야 하였고, 교회법을 정비하여 이단 소멸, 전도 등에도 신경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세속 군주들과 일반 민중들, 그리고 수 많은 교회 종사자들 모두에게 만족을 줄 만한 훌륭한 제도란 본시부터 없기 때문인데, 형편에 따라서 파문도 하고, 은급으로 보상도 하여 이 거대한 조직체를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하나의 유럽세계에 두 개의 지배구조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을 포함하고 있어서, 교황중심의 피라미드 조직이 언제 까지 건재할지는 그야말로 미지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시기만은 교권의 우세가 확실하여 영국 왕이 파문을 당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전성기라는 것은 어느 한쪽의 힘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 반동내지는 아류(亞流)의 세력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적인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이 유럽세계가 십자군 전쟁을 수행하면서 안으로는 이단(異端) 단속이라는 초비상 사태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것을 학자들에 따라서는 제 2의 십자군 운동이라고도 한다.

 

(2) 이단 운동

 

이단(heresy : 異端)이란 어떤 종교집단의 내부에서 정통(正統)교리에서 크게 벗어나는 주장에 대하여 정통 자측에서 부르는 배타적 호칭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스어의 하이레시스(hairesis)가 그 어원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고집, 또는 선택을 의미한다고 하며, 그리스도교에서는 원시교회 시대부터 이단 논쟁이있었으나, 가톨릭교회로서 조직 권력이 굳어진 이 시기, 즉 교황권의 전성시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이단 가운데는 유대교도가 전면에 부상하여 그 박해를 받은 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 달았다는 단순한 신앙 열정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고, 유대교는 이단이라기 보다는 이교(異敎)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로마교회에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으나, 발도파(Valdesi/Waldenses)나 카타리파(Cathari)라는 이단이 나타나자 그 단속에 많은 힘을 쏟아 부었는데 이것을 꼼꼼히 살펴보면 진짜 이단이 누군가가 의심스러운 점도 허다하다.

 

발도파라고 하는 것은 12세기 말경 프랑스 리옹에서. 발데스(발두스)란 사람에 의해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순복음적인 신앙노선의 일파로서,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 발데스 복음주의 또는 왈도파(派) 등으로도 불린다.

 

부유한시민 발데스는 1176년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전재산 모두를 빈민들에게 나누어준 후 그리스도의 사도 처럼, 또는 아시시의 성자프란체스코처럼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설교에 전심하였다.

 

이것을 일반 속인(俗人)들이 보기에는 참으로 성자다운 태도라고 할 수 있으나, 많은 영지와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교회내지 수도원에서는 자기들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고도 보았다. 그러나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것을 나쁘다고 트집 잡을 수는 없고,...그래서 처음에는 팔짱만 끼고 다만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가 프랑스어 번역 판인 성서를 가지고 설교하는데 감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자, 그들은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자청하며 2명씩 조를 짜 각지를 설교하며 돌아다녔고, 급기야는 북이탈리아, 독일,스페인, 보헤미아 까지 전파되었다.

 

이렇게 그 세력이 불어나게 되자, 로마교회에서는그들의 부족한 지식으로 복음이 잘못 전해질까 우려한다는 명분으로 설교를 금지시켰는데, 그들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자 교황청은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 단죄하기시작하였다.

 

이래서 그들은 로마교회와 결별하고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고, 교리도 로마교회와는 다르게 순수한 성경에 따랐는데, 성경에 없다고 하여 지옥과 연옥(煉獄)을 부정하였고, 죽은 자를 위한 연미사, 속죄를 위한 보속(補贖)행위, 서약이나 유혈(流血)도 거부하였다.

 

그러나 1217년 발데스의 사망 후 이들에 대한 박해가 더욱 심해졌고, 특히 종교재판에 의해 그들에게 가해진 엄한 조치로 말미암아 점차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또 하나의 이른바 이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카타리파(Cathari)로서, 이들은 철저하게 육식을 금하고, 장기간 단식하며, 결혼을 기피하고, 자살을 찬양하는 등 다른 이단에서 볼 수 없는 과격한 경향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 운동에는 시민뿐만 아니라 봉건 귀족까지 가담했다.

 

카타리파를 영지 내에 가지고 있던 툴루스 백(伯)은그 자신은 카타리파가 아니 였지만 그의 영지에 사는 주민들이 이것을 신봉하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툴루스백의 영지에서 교황청의 사절이 카타리파에 의해서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노발대발하여 즉시 프랑스 국왕 필립 2세에게 이단을 타도하기 위한 십자군 출정을 요청하였으나, 필립 2세는 영국과의 전쟁중이라는 이유를 대고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부 프랑스의 기사들이 정치적인 반목 때문에 남프랑스의 원정을 결심하고 교황의 요구에 응했다. 이 십자군의 원정은 세 차례에 걸쳐 무려 20년간 계속되었고, 그 사이에 툴루스 지방은 철저하게 약탈되고, 주민의 대부분은 학살되었고 도시나 마을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이것은 종교 전쟁인 동시에 프랑스판 남북전쟁으로서 프랑스가 남북간의 대립은 벌써 제 1회 십자군원정 때 시리아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는데, 이단이 아니었던 툴루스백은 물론이고, 북프랑스 세력의 남하를 싫어한 아라공왕도 카다리파에 가담하여 싸웠다. 그러나 이 카타리파의 소멸과 함께 남프랑스의 문화도 소멸되고, 프랑스 국왕의 권한이 남프랑스에 까지 미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3) 이단 심문과 종교재판(inquisitio : 宗敎裁判)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단자(異端者)를 탄압하기 위해 13세기에 전 그리스도교 국가를 대상으로 하여 제도화한, 비인도적인 혹심한 재판을 종교재판 혹은 이단심문(異端審問)이라고 한다. 이것은 단순한 재판이 아니라 이단자의 탐색·적발·체포·재판·처벌을 포함하는 이단자 박멸을 위한 일체의 활동을 그임무로 하였는데, 이단자에 대한 탄압은 4세기 그리스도 교회의 성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교회의 태도는 관용적이었다. 그러나 12세기에 이르러 그 태도가 경화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위에서 이야기 한 남프랑스에서 일어난 대규모적인 이단운동, 즉 발도파와 카타리파가 교회에 준 심각한 위기감에서였다.

 

그 심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 국가(지리적으로는 서유럽 전역과 그 속령)에서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지위를 알아야 하는데, 요컨대 가톨릭교회는 ‘가톨릭(세계적·보편적이라는 뜻)’이라는 호칭대로 세계교회이며, 그 수장(首長)인 로마 교황은 서유럽 각국을 지배하는 서유럽의 원수(元首)이고, 교황청은 세계의 정부였다.

 

남프랑스의 이단운동이 세계정부의 체제 변혁을 목표로하는 혁명운동을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교회 당국이 받았던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고, 로마 교황은 일종의 십자군을 결성해서 20년에 걸친 이단자 박멸전쟁을 일으켜 어렵게 진압하였으나, 사후 대비책으로서 이단박멸 강화책을 강구할 필요성을 통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단자와 신학적 논쟁을 전개하는 데 충분한 학식과 종교적 열의를 가진 적격자를, 교황대리로서 치외법권적(治外法權的) 권한을 부여하여 전 그리스도교국에 파견, 전적으로 "이단 사냥"에 종사시키는 전문적이고도 항구적인 조직을 만들 것을 결의하였다.

 

1233년 4월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교황교서로서 이를 발표하고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사를 "이단 심문관"에 선임하였다. 이같이 해서 제도화된 종교재판의 조직은 이단 심문관의 진주(進駐)에 따라 전 그리스도교국가에 퍼졌으며, 특히 에스파냐에서의 종교재판 활동은 에스파냐 국왕의 적극적인 영합에 힘입어 가혹의 극을 이루었고, 종교재판에서 피고에게 유리한 변호는 일체허용되지 않았고 불리한 증언만 허용되었으며, 밀고는 비록 친자식 형제 사이의 것이라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칭송을 받았다.

 

또한 다종다양하고 처절한 고문에 의해 자백이 강요되거나 날조되어, 용의자는 반드시 유죄판결과 처형으로 귀착되도록 짜여졌던 일종의 암흑재판이었다.

 

이단 탄압은 국가의 의무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종교재판은 각국의 국왕·영주(領主)·지방자치단체 등의 세속적인 재판으로도 행해졌다. 그후 종교개혁시대에 이르자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도 종교재판이 성행되었는데, 그 재판방법은 가톨릭측의 방법과 같았으며, 이러한 암흑적인 종교재판 제도는 나라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었으나 1820년경에는 거의 폐지되었다.

 

(4) 십자군, 그 결과

 

십자군의 실패의 원인이나 영향에 대한 교과적인 이야기는, 어느 서적에 실려 있는 내용 모두가 비슷하다. 어느 문서에 담겨 있는 내용을 가감없이 전재해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1회 십자군의 성공은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한 데에 큰 이유가 있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이 통일되자 반격을 당하는 상태가되었다. 십자군은 전력도 충분하지 못하였지만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와 종교 기사단, 새로 도착한 십자군병사, 상인 등은 상호간, 또는 각 내부에서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거기에는 영토문제와 경제적 이익의 문제가 있었고, 또한 형성되어가고 있던 국민적 감정 등에 의한 대립이 얽혀 있었다. 또 십자군 국가에서는 소수의 정복자가 많은 피정복민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그 기초는 항상 흔들리는상태였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무지와 광신과 편협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슬람교도들의 증오심만 부채질하였다. 그리스도교도를 성지로 가게 한 서유럽의 팽창운동은 그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십자군도 종말을 고하였다.

 

십자군운동은 우선 유럽에서 교황권의 후퇴, 국왕권력의 강화와 중앙집권화, 도시와 상업의 발달,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문화의 발달 등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 즉 교황에 의해 제창된 운동의 실패는 그대로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전사(戰死)에 의해 단절된 귀족가의 소유영지는 왕령(王領)에 편입되어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십자군운동으로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본 것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였다. 십자군에 참가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이질적인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향을 과대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왕권의 강화는 봉건사회 내부전개에 기본적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 봉건적인 분열상태에 있을 때에만 유럽세계를 관념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교황권은 왕권에 의한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쇠퇴할수 밖에 없었다.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십자군운동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먼 곳까지 보낼 수도 없었고 다량의 식량과 무기를 모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동방문화 유입의 중심지는 시칠리아와 에스파냐였다. 유럽인은 이교문화(異敎文化)에 접하면서도 최후까지 관용의 정신을 배우는 일이없었다. 또한 제4회 십자군에 의해 와해된 비잔틴제국은 다시 부활하지만 이미 소국에 지나지 않았으며 몰락은 결정적이었다. 그 때문에 비잔틴제국은 이제까지 수행해오던 유럽의 방벽 역할을 잃게 되었다.

 

이슬람세계에 대한 영향도 컸다. 이슬람교도는 관용의 정신이 풍부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공격을 받게 되자 그들 사이에 점차 비관용성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었으며, 성전(聖戰)에 대한 정열은 높아갔다. 등등.....

 

다음 이야기 -중세 유럽의 변화(2) -중세 도시, 중세대학, 연금술, 기사의 생활, 여성과 중세의 사랑, 중세의 건축과 학문 등



이탈리안 콘체르토 BWV.971 中 presto-안드라스 쉬프(Pf)



출처 : 이길상의 세계사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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