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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48.셀주크 투르크 제국

영국신사77 2010. 9. 30. 14:20

48. 셀주크 투르크 제국                                                             이길상

 

가. 유목사회의 명암

 

(1) 중앙 아시아의 유목사회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아시아 대륙에서 유목민들의 생활무대가 된 곳은 대륙의 북쪽,

 

모래나 자갈로 이루어진 사막 내지는 반사막화,

 

혹은 초원지대로 이루어지는 몽골고원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일대,

 

선사시대부터 스키타이족이나 흉노(匈奴)족들이 유목(遊牧)을 하면서, 힘있는 지도자를 만나면 농경민을 약탈하고 이웃 부족을 정복해서 유목국가를 건설하고 나름 데로의 유목문화를 이루기도 하였는데,국가 운영에 필요한 재정(財政)은 약탈이나 교역, 상인이나 여행자의 숙영지(宿營地)를 제공하고 얻어지는 수입으로 충당하였다.

 

스키타이족은 이란계 아리아족, 즉 인종학적으로 백인종에 해당하며, 흉노족은 몽골로이드, 다시 말하면 황인종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이들 자신들은 체계적인 기록으로서의 역사자료를 남긴 것이 없고, 고대 그리스나 로마, 중국측의 사료(史料)에서 이들에 관한 편린을 엿 볼 수 있다.

 

북방의 유목민을 중국측의 기록에서는 시대에 따라 이름을 달리 하여 주(周)나라 때는 험윤, 진(秦)·한(漢) 시대에는 흉노라고 하다가 남북조 시대에는 유연, 동호(東胡), 철륵(鐵勒) 등으로 명칭이 바뀌고 수(隋)·당(唐)시대에는 돌궐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유연이나 철륵의 한 부족이었던 돌궐을 이란 인들은 투르크(Tu rk)라고 불렀고, 중국에서는 그대로 음사(音寫)해서 돌궐(突厥)이라 하였으며, 이들이 살고 있는 땅을 투르키스탄(Turkistan / 투르크의 땅)이라 했다.

 

언어학의 분류에서 알타이어계(語系)에 해당하는 몽골어, 퉁구스어, 한국어와 더불어 투르크어가 중요한 어파(語派)로 등장하는 것을 보면 우리들의 먼 조상과도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들의 최대 장점은 기마군사력, 이런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때는 세력을 키워 동으로는 만주지방, 서로는 중앙아시아 일대를 지배하기도 하였으나, 동족간의 내분과 중국의 이간(離間)정책으로, 파미르고원을 중심으로 동·서 투르키스탄으로 분열(583),

 

동투르키스탄은 몽골고원을 서투르키스탄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다가 결국 당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으로는 처음으로 문자를 만들어 사용, 이른바 돌궐비문을 남기고 있다.

 

이 때 까지 이들은 가한(可汗)을 중심으로 한 상층계급에서는 불교를 신봉하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원시적인 샤머니즘을 믿었고, 그러다가 이슬람화되어 셀주크 투르크는 술탄을, 오스만 투르크는 술탄 - 칼리프를 칭하고 이슬람세계를지배하였다.

 

이것은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족이 서아시아로 이동, 그곳에 자리잡고 있던 이슬람세계를 지배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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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막과 오아시스, 이슬람교

 

중앙아시아 서남쪽, 지금의 소아시아반도, 메소포타미아, 이란고원, 아라비아반도 그리고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일대에는 베두인(Bedouin)족을 비롯한 셈어계와 햄어계의 종족들이 외형상으로는 인도 - 유럽어계인 사산조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부족단위로 낙타와 소, 양 등을 유목하거나 대상무역과 오아시스 농업 등에 의존하면서 부족간의 반목(反目)과 질시(嫉視)를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었다. 이런 복잡한 유목집단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 이슬람 교단국가,...

 

이슬람교가 아라비아반도의 메카에서 예언자(nabi) 마호메트(Mahomad : Muh ammad)에 의해서 창시되고(622), 그 후계자(chliph : 후계자 즉 이슬람세계의 정치, 군사 및 종교의 최고 지배자)들에 의해서 삽시간에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들을 유럽에서는 사라센(Saracen / 사막의 자식들)이라 불렀고, 이슬람교를 믿는다 하여 이슬람제국(무술림 혹은 모슬렘이라고도 함), 또는 아리비아어를 공통어로 사용한다 하여 아랍제족이라고도 부른다.

 

이들 이슬람세계에서 그 출발은 아라비아의 상업과 종교도시 메카였지만, 이 후 중심 무대가 된 곳은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이라크의 바그다드, 이집트의 카이로, 스페인의 코르도바 등으로 옮겨지면서 여러 왕조가 교체했고, 그 양상 또한 매우 복잡 하다.

 

이를 간략히 추려서 정리해 보면, 마호메트의 후계자들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정복(651), 이로서 이란과 이집트 등이 이슬람화되었고, 교도들의 총의(總意)에 의해서 선출된 후계자를 정통칼리프라 하여 그 본거지를 메카에 두고 있었으나, 제 4대 칼리프 알리가 시리아의 총독 우마이야 가(家)의 무아위야와 싸우기 위해서 본거지를 메카에서 쿠파로 옮기면서 이후 이슬람세계의 중심이 메카를 떠나게 되었다.

 

알리가 암살 당하고, 무아위야가 칼리프가 되었는데 이때 부터를 우마이야왕조 혹은 옴미아드왕조라 하며(661 ~ 750), 본거지를 다마스쿠스에 두고 세습왕조를 열었다. 이것을 정통(正統)으로 본 이슬람세계를 수니파라하고, 수니파에서 분파(分派)되어 나간 것을 시아파라 한다.

 

시아파의 주장은 칼리프는 모하메드의 혈통을 이어야 하고, 따라서 유일한 마호메트의 사위인 알리와 그 후손들이 이맘(이슬람교의 지도자)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란 인들의 다수가 시아파에 해당한다.

 

(3) 이슬람세계의 분열과 이란계 이슬람 왕조의 성립

 

우마이야 왕조에서는 정복을 통해서 이슬람교를 확대,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를 거쳐서 이베리아반도에 까지 들어 갔고(711), 동쪽으로는 서투르키스탄 일대의 이란계 제족(諸族)과 투르크계의 여러 부족들에게 빠른 속도로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아바스 가(家)에서 우마이야왕조를 타도,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아바스왕조(750 ~ 1258)를 열었다. 아바스가의 쿠데타 명분은 칼리프는 예언자 마호메드의 가계(家系)에서 이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우마이야 집안 사람들은 깡그리 죽여버렸다.

 

그러나 살아 남은 사람은 있게 마련이고, 이들이 서쪽으로 도주, 이베리아반도의 코르도바에서 우마이야 왕조를 부활하는데, 이를 후우마이야왕조(756~ 1031. 후 옴이아드왕조)라고도 하고, 서쪽에 위치한다 해서 서칼리프 제국이라고도 한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는 동 칼리프가 되었고 이래서 이슬람 세계는 크게 둘로 갈라졌다.

 

아바스왕조의 동방진출 정책은 당시 세계적인 대제국 당(唐)나라와의 충돌을 가져와 탈라스강 전투(751)로 이어졌는데, 당(唐)의 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 고선지(高仙芝)와 아바스왕조의 호라산 총독, 압 무슬림이 보낸 자아드 이븐 살리프의 제 1군 간의 싸움에서 고선지의 패배로 당나라의 세력은 소그디아나에서 물러났고, 실크로드의 통상로도 잃게 되었다.

 

고선지가 고구려 후예라는 것과 이 싸움에서 이슬람군의 포로가 된 한 기술자가 제지법(製紙法)을이슬람 세계에 전했다는 이야기는 앞에서도 여러 번 밝힌 바와 같다.

 

탈라스 강 전투의 승리 후 아바스왕조의 세력은 그야말로 욱일승천(旭日昇天), 수도 바그다드는 번영의 극치를 이루었으나, 힘으로 억압한 다양한 유목민족을 정치기술 없이 오래 동안 지배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아바스 왕조가 백년을 지나 9세기 중엽이 되면, 칼리프의 권위는 떨어지고, 노예 용병들에 의해서 정권이 농단 되는가 하면, 각처에서 독립한 부족들이 공공연히 반기를 들었다.

 

실제로 13대 칼리프 무타즈(866 ~ 869)는 투르크계군벌에 의해서 암살되었고, 이를 계기로 아바스 왕조를 뿌리 채 흔든 것은 이른바 잔지의 난(Zanj rebellion : 869 ~ 883), 잔지란 아프리카 동해안에서 데려온 흑인노예를 일컫는 말인데, 지금의 탄자니아 잔지바르(Zanjibar)가 그들의 고향으로서 이들은 이라크 남부 저지대 에서 수백 명씩 집단으로 농사에 사역되고, 짐승 같이 취급 당하면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런 잔지들을 이용, 권력을 잡기 위해 그들에게 반란의 기름을 부은 것은 알리 이븐 무하마드(Ali ibn Muhammad)라는 자로서, 자기는 마호메드의 혈통을 이은 알리 가문의 한 사람이라고 자칭하고, 이들 잔지들을 선동하자, 그의 선동을 받아들인 잔지들은 그를 지도자로 세우고 계급투쟁을 전개, 전국에서 모여든 하층민을 주체로 바스라·와세트·누마니나 등의 도시를 차례로 공략하고, 본거지를 바스라 남방의 무프탈라에 정하고, 견고한 요새를 둘 씩이나 만들어 정부군과 대결하였다.

 

그러나 제 15대 칼리프 알 무타미드(870 ~ 892)가 그의 동생 알 무와파크를 보내어이 본거지를 점령하므로써 난은 평정되었다(883)

 

880년 10월 요새 중 하나인 알 마니아(잘 지킨 성)를 격파했을 때는 흑인들에게 잡힌 아녀자 5천 여명을 구출해 냈고, 883년 8월에는 마지막 요새인 모흐타라를 어렵게 격파, 주모자인 알리는 전사하였으나 그 목을 잘라 오자 칼리프 무타미드는 땅에 엎드려 알라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15년 간 계속된 이 반란으로 무수한 인명이 희생(犧牲)되었으며 티그리스강 하류에 사는 백성들에게는 깊은 상처를 남겼고, 중앙집권적인 아바스왕조는 이후 칼리프의 권력이 더욱 약화되고 말았다.

 

잔지의 반란을 계기로 호라산과 아무강 이북의 중앙아시아에서는 발흐 출신의 이란계 귀족 사만의 증손 나스르 빈 아마드가 트란스옥사니아를 근거지로 독립, 사만왕조(Samanids-王朝 / 874∼999)를 열고 각종 모피류·종이·철제품·슬라브인노예·가축 등으로 동서무역(東西貿易)을 관장하여, 요충지인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는 바그다드를 능가할 정도로 번창하였다.

 

이런 부(富)를 바탕으로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학자들을 보호, 학문 분야에서도  시(詩)를 비롯하여 페르시아어가 사용되는등 크게 발전하였는데, 그 흔적이 지금도 남 러시아에서 북 유럽에 걸쳐 사만왕조의 화폐가 대량으로 발견되므로써 그들의 발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카스피해 남서 쪽 해안, 다일람(Dailam) 지방에서는 이란인 시아파가 세운 부이왕조(Buyid dynasty, or Buwayhid / 945 ~ 1055)가 나타나, 사만왕조와 함께 이란계 제족(諸族)이 이슬람세계에서 급부상하였고, 다시 세월이 지나 11세기부터는 투르크족이 부상(浮上), 세상 형편이나 문화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는데, 이슬람세계의 헤게모니는 아랍 족에서 이란 족으로 다시 투르크 족에게 인계되었고, 이 세 민족은 서로 엉키고 떨어지면서 오늘날까지 연속되고 있다.

 

부이왕조를 건설한 알리와 하산, 아흐마드라고 부르는  삼 형제는 미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군에 복무하던 중, 이스파한(이란 중부의 도시)과 파르스(이란 남서부 지방)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945년 막내동생 아흐마드가 바그다드에 입성, 칼리프로부터 대장군(아미르 알 우마라)의 칭호를 받았고, 이란과 이라크의 지배권을 장악, 사실상 바그다드의 아바스조 칼리프는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는데, 다시 아흐마드가 국가의 자랑(Mu izz al-Dawla)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칼리프의 통치는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이 존칭 때문에 당시의 칼리프 알 무스탁피(al-Mustakh944 ~ 946)는 두 눈을 뽑히고 거지가 되어 바그다드 시내를 돌아 다녔다고 하는데 ,이런 잔학(殘虐) 행위가 그전에도 흔히 있었다.

 

부이왕조의 최성기는 하산의 아들 아두드 앗 다울라(Adudal- Dawla : 949 ~ 983)의 치세 35년간으로 영토는 타바리스탄·케르만에서 오만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였고, 초기의 군주들은 산적이나 다름 없는 무식 한이 었으나, 그는 문화에도 큰 관심을 보여 그와 그 후손들에 의해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 중에는 하룬 알 라시드의 궁정에서 애창 되었다는노래책(Kitab al-Aghani)은 아랍 연구의 최고 문헌으로 알려져 있으며, 알 나딤(Ibnal-Nadim)은 목록서(目錄書 : al-Fihrist)라는 문화사를, 그리고 철학자 이븐 시나(IbnSina : Avicenna 980 ~ 1037)는 많은 철학서와 함께 의학규범(醫學規範 : al- Qanunhl-Tibb)과 같은 불후(不朽)의 저술을 남겼으며, 당대의 대 서정시인 알 무타나비(al-Mutanabi : 915 ~ 965)등도 이런 학예보호에 힘 입어 크게 활약하였다.

 

바그다드에는 메머드 병원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아두드가 죽은 후 경제력의 악화와 지배자 일족간의 내분 및 투르크계 군벌의 대두로, 10세기무렵부터 점차 약화되어 가즈니왕조·대(大)셀주크왕조에게 영토를 빼앗겼고, 왕조의 주력이 시아파 이슬람으로서, 수니파와의 갈등도 겹쳐, 셀주크 투르크에게 멸망하였다(1055)

 

나. 투르크족의 이슬람화

 

(1) 고원지대의 아시아 유목민

 

롯 플라 모스크의 야경(이스파한 . 이란)고원(高原) 지대의 아시아 유목민이 투르크란 명칭을 분명하게 내건 것은 6세기 경,

 

투르크를 철륵(鐵勒)이라고도 하는데, 중국의 사서(史書)에는 6 ~ 8 세기에는 돌궐, 8 ~ 9 세기에는 위구르(回紇 : Uighur), 12세기 경에는 몽골등으로 명칭을 다르게 쓰고 있으나,

 

 모두 같은 계통으로서, 우두머리인 칸의 조정은 외몽고에 있었으나 서 돌궐 등은 중앙아시아를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아바스 이슬람 왕조 때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족이 노예병사(Mamluk)로서이슬람에 봉사하는 일이 거듭됨에 따라 집단적으로 이슬람화하는 현상이 일어나기시작,

 

그 선봉이 된 것은 불가르족(Bulghars), 흑해에 인접한 아조프해(海) 연안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이들 중 일부는 5∼7세기경 볼가강 중류로 이주하여 불가르한국(汗國)을 형성하였고, 10세기경에는 모스크(이슬람의 사원)를 세워 이슬람에 귀의하였다.

 

이들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 방면으로 중계무역에 종사하면서 11∼12세기에 최성기를 맞이하다가, 13세기 몽골족에게 정복되었고(1237), 다시15세기 이래 남하한 러시아의 압박으로 멸망하였는데, 이들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다.

 

중앙아시아에서 최초로 이슬람계 유목 투르크족이 세운 나라는 카라한 왕조(Karakhanid dynasty : 992 ~ 1232), 이리크한 이라고도 부르는 이 유목국가는 왕을 비롯한 전 부족이 이슬람에 귀의하고, 남방의 카슈가르를 병합, 다시 서쪽의 이란계 사만왕조를 멸망시키고(999), 실크로드의 요충지며 옥(玉)의 산지로 유명한 호탄(Khotan : 화전 혹은 우전)을 정복하여 파미르고원 동서에 걸친 큰 나라가 되었으나 셀주크투르크에게 병합되었다(1232)

 

(2)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

 

오랫동안 몽골 고원에서 살았던 투르크족 가운데 오구즈(Oghuz: 백성이란 뜻)족은 8세기 중엽에는 중앙아시아의 이르티시(Irtyah)강과 시르다리야(SyrDarya)강 하류로 이동, 오구즈족 가운데 셀주크가(家)의 시조 두카크는 티무르 야리그(鐵弓)란 별명을 가지고 세력을 키웠으며, 그 아들 셀주크는 부족원 백명과 낙타 천 오백 마리, 양 오천 마리를 데리고 이슬람에 귀의,

 

10세기 말 셀주크의 아들 때에는 부하라 근처로 다시 이동, 그 손자가 되는 투그릴(Tughril Beg)과 차그리(Chagri) 형제가 1035년 부족을 이끌고 아무강을 건너 호라산으로 들어가, 가즈니 왕조의 군사를 격파(1037)하고 호라산의 중요도시 니샤푸르(Nishapur)를 점령, 대(大)셀주크왕조를 열었는데, 그지배 영역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아제르바이잔·이라크·시리아·소아시아에까지 확대하는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 후 테헤란 근교의 레이에 수도를 정하고 이란 본토경략에 착수하고 있었는데, 바그다드에는 부이(부와이) 왕조가 945년부터 사실상 지배자가 되어 칼리프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다.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부이왕조를 내몰고 칼리프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서 셀주크에게 부이왕조의타도를 요청함으로써 이리를 쫓기 위해 호랑이를 불러 들인 것이다.

 

칼리프의 요청으로 바그다드의 부이왕조를 내몰고, 이라크 북부지역을 정복한 후 1055년에는 투그릴 베그(토그릴 베그라고도 함)는 칼리프로부터 술탄(이슬람 세계의 정치 지배자)의 칭호를 받았고, 이로써 이란 이라크 지방의 실질적인 제왕이 되어 대 셀주크왕조를 열었다.

 

셀주크 왕조의 제 1대 술탄이 된 투그릴 베그는 1063년 후사(後嗣)없이 나병(癩病)으로 죽고, 그의 조카 즉 차거리의 아들 알프 아르슬란(AlpArslan 1063 ~ 1072)이 2대 술탄으로 그 뒤를 이었고, 아르슬란의 아들 말리크 샤가 3대 술탄이 되어 그 뒤를 이었는데, 이 시기가 대 셀주크 투르크의 전성기가 되었다.

 

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이란인 니잠 알 물크를 재상(宰相)으로 기용, 내정과 군사를 정비하고, 이집트의 파티마왕조로부터 시리아북쪽을 빼앗았고, 다시 아르메니아에서 비잔틴 군대를 격파하여 비잔틴(동로마) 황제를 포로로 잡아 소아시아의 동반부를 점령, 이때부터 아나톨리아 고원일대에 이슬람화내지는 투르크화가 진행되었다.

 

이는 이슬람 세계가 소아시아 반도를 침공한 사실은 여러 번 있었지만 지배한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서, 이로써 동서간의 세력 균형이 깨어지고, 가깝게는 십자군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였고, 멀게는 오스만 투르크의 비잔틴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아르슬란이 죽고 그의 아들 말리크 샤(Malik - Shah/ 1072∼92)가 18세의 나이로 3대 술탄이 되었고, 그 역시 니잠 알 물크를 아타 베그(父侯라는뜻)라 부르면서 그의 보좌를 받아 황금시대를 이룩하였는데, 이때 말리크 샤의 위엄은 동으로는 파미르고원에서 서로는 시리아까지 미치는 대제국으로 발전하였다.

 

국가체제와 행정조직 등이 잘 갖추어졌으며, 흩어진 이슬람세계를 수니파로 다시 통합하고, 비잔틴제국및 이집트의 파티마왕조와 국경을 접하였다.

 

그러나 셀주크왕조의 이런 종교 정책에 대해서 끝까지 저항한 것은 시아파, 그 중에서도 이스마일파가 가장 적극적이 였는데, 시아파의 아성이었던 이집트의 파티마왕조가 내분으로 무너지고, 이스마일파 운동을 치열하게 만든 것은 재상 니잠 알 물크의 옛 친구 하산 이 삽바흐(Hasan- I -Sabbah), 그가 보낸 자객(刺客)에 의해서 피살 당했다(1092)

 

같은 해 술탄 말리크 샤도 죽었고, 이들 명재상과 술탄이 죽은 후로는 동족끼리의 내분으로 왕조가 분열되어 쇠퇴의 길을 걷다가, 12세기경 제 8대 산자르(Sanjar)의 죽음과 더불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바람처럼 일어 났다가 바람처럼 사라진 것이 되고 말았지만 그러나 대 셀주크 왕조외에도 각지에 지방 셀주크 가문, 즉 분가들은 소령(所領)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을 케르만 셀주크왕조(1041? ~ 1187), 아나돌 셀주크왕조(1077 ~ 1307), 시리아 셀주크왕조(1094~ 1117), 이라크 셀주크왕조(1117? ~ 94) 등으로 불렀다.

 

그 가운데 룸 셀주크왕조(al-Rum Seljuk)라고도 불리는 아나톨 셀주크는, 투르크족의 가장 강력한 전위대로서 십자군의 공격에 과감히 저항하여 그리스도교 세력의 동진(東進)을 저지하였고, 십자군의 침범 이후 처음 도읍지였던 니케아에서 내륙으로 이동하여 코냐(Konya)로 천도,

 

1219년에 알라에딘 케이 쿠바드 1세(1219 ~ 37)가 즉위하면서 황금기를 맞이하여 건축·공예·학술·종교 등 각 방면에서 문화의 꽃을 피웠고, 통상에서도 번영을 누렸으나, 그의 사망 후 반란과 몽골군의 침입 등으로 쇠퇴, 1308년에 멸망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소아시아의 투르크화 및 이슬람화 촉진에 크게 이바지하여, 후일 오스만 투르크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다음 이야기 - 셀주크 투르크제국과 오스만 투르크제국(2)-이슬람 세계에서 본 십자군 전쟁과 몽골의 침입, 오스만 투르크의 성립과 발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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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길상의 세계사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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