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 호남 지역의 선교사

★★★ 테이트 선교사 부부와 여동생 매티 선교사 이야기

영국신사77 2009. 6. 8. 23:14

                  테이트 선교사 부부와 여동생 매티 선교사 이야기

          

 오늘은 호남 선교의 개척 선교사이신 테이트 선교사님과 그의 여동생 매티 선교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테이트 선교사님은 대학에서 의과를 전공하고 선교사로 헌신하여 시카코의 멕코믹 신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는 1891년 내쉬빌에서 열린 전국 신학교 해외 선교연합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당시 유학생이었던 윤치호의 한국 선교에 대한 강연을 듣고 한국 선교를 결심하고 여동생 매티와 함께 한국 선교사로 1892년 11월 3일에 한국에 오셨습니다.

 그는 1893년 호남선교의 개척 선발대로 전킨 선교사와 함께 전주에 처음 오신 선교사입니다. 그는 전주를 중심으로 익산 , 정읍, 금구, 태인, 고부. 흥덕, 부안, 임실, 남원 등의 각 지방에서 꾸준히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의 열성적인 선교활동으로 그가 전도하여 설립된 교회가 78처 , 장립한 장로가 21인 , 목사가 5인이었으며, 세례를 베푼 교인의 수는 무려 1500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는 전라노회와 전북노회 , 그리고 총회에서도 오랫동안 봉사하였고, 신학교와 , 성서공회, 예수교서회, 세브란스의학교의 이사로 봉직하면서 한국선교의 기초를 잘 다져 주었습니다.

 

                                         예수 병원장 잉골드 여의사와 결혼
  테이트 선교사는 오늘날의 전주 예수 병원의 모체가 되었던 진료소를 개설하여 열심히 일하고 있던 잉골드 여의사와 8년의 열애 끝에 1905년 9월에 결혼하였는데, 결혼후 그녀는 남편과 더불어 농촌 선교에 진력하는 한편, 부녀자 성경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1925년 심장병이 악화되어 한국 선교 33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귀국하여서도 , 미국 각처를 순회하며 한국 선교를 위한 강연을 하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한국 선교사로 동원하였고, 수많은 미국 교회가 한국선교를 도울 수 있도록 , 최선을 다해 동원가의 삶을 사시다가 1929년 67세를 일기로 소천하였습니다.

 

 

 

                     전주예수병원 설립자 잉골드(1867-1962, 95세) 선교사 
 마티 잉골드(Mattie Ingold)는 1867년 5월 31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르노아에서 출생하여 윈트롭(Winthrop)대학을 졸업하고, 의료선교사 되기를 결심하여 1896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전례 없는 2개의 금메달을 받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1897년 9월 15일 내한하여 같은 해 11월 3일 전주에 도착, 은송리 초가집에 부녀자와 어린이를 위한 진료소를 설치했다. 개소 첫날에 6명을, 첫 달에 100명 정도를 진료하였다. 그의 의술(醫術)은 훌륭해서, 기초 위생과 청결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환자를 완치하였으며,  침을 놓았던 자리의 고름을 제거하고 비누와 물로 충분히 씻어내는 것만으로도 진료의 효과가 있었다. 종기의 절개, 백내장 제거, 흉터의 수술과 화상 등을 치료했다.
그 후 이 진료소는 새 선교부지로 이전되고, 1902년 남편의 노고로 예수병원이 건립되었다.

 잉골드는 진료 중에 복음을 전하며, “소아 요리 문답”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한국 어린이들이 암송하는 책이 되었다. 1903년 전킨의 진료를 위하여 군산에서 활동한 일이 있으며, 1904년 5월 안식년 휴가로 전주의 의료선교사업은 일시 중단되었다.

 

  1905년 9월 테이트(Lewis B. Tate)와 8년의 열애 끝에 결혼하였으며, 결혼 후에는 남편과 더불어 농촌선교에 진력하는 한편,  진료소 책임을 사임하고 부녀자 성경교육에 치중하였다.

 한편 그는 1905년 딸기(Strawberry) 종자(Dewey품종)를 처음 한국에 들여와, 예수병원 근처인 “화산동”을 딸기의 본고장으로 정착시켜 전국에 보급했다. 이 근거는 “딸기는 한국의 토종(Native)이 아니며, 잉골드(Mrs. Tate)가 1905년 50쪽을 들여와 전주 뿐 아니라 전국에 확산 보급했다”라는 랭킨(Rankin, Nellie B.)의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1925년 남편 테이트와 심장병 악화로 함께 귀국하여 ‘플로리다’에 정착하고, 1962년 10월 26일 별세하여 남편 묘 곁에 안장되었다. 잉골드의 고증에 도움을 준 김천식 역사 사료실장(예수병원)께 감사한다.


                                                                                                         by:송광우 http://cafe.daum.net/sumgi2/ELEp/98

 

 

  한편 전주 선교사 묘지에는 미국 남장로회 개척 선교사 테이트(Tate)와 잉골드(Ingold)부부의 딸(Tate, Baby) 묘가 있다. 1910년 9월 15일 출생하여 당일 사망했다. 어머니 잉골드는 “나는 9월 15일 여자 아이를 사산했다. 그것이 우리에게 마음 아프고 비통하며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원했던 작은 생명을 잃어버렸다.”고 슬픈 사연을 일기로 썼다. 

 

                                                                                                                                       신호철 장로(양화진선교회장)

 

 

                                  여동생 메티 선교사 

 테이트 선교사의 동생 메티 선교사도 오빠 테이트 선교사와 한국에 들어와 한국인 가정심방과 축호전도를 하며 한국 선교를 위해 최선의 삶을 사셨습니다.

메티 선교사는 특별히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였고, 우리말 속어까지도 능란하게 구사하면서 부녀자와 어린이 선교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녀는 오빠 테이트 선교사와 말고 가마를 타고 육로로 전주에 와서 여성으로 호남선교의 선두주자 역할을 용감하게 담당하였습니다. 동학농민혁명군의 난리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굴하지 않고 전주에서 최선을 다해 선교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주일학교와 성경학교를 세웠으며 , 또한 여학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녀가 시작했던 여학교를 1907년 교육 담당 여선교사 랜킨에게 맡기니 이것이 전주 기전 여학교였습니다. 그녀는 한국 선교 초기에 내한한 여선교사로서 다른 이가 당해보지 않은 많은 고난의 경험 때문에 선교사 가운데서도 , 베테랑 선교사의 권위를 지니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오로지 한국 여성 선교에 44년간 헌신하였습니다.

 일제의 극심한 교회 탄압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한국을 누구 보다도 사랑하였던 매티 선교사님은 은퇴할 나이까지 사역을 잘 감당하였습니다. 매티 선교사는 처녀의 몸으로 한국땅을 밟아 한 평생 그의 젊음과 생애를 다 한국을 위해 바치고 77세의 나이로 소천하였습니다.

실로 호남 선교의 개척 선교사였던 , 테이트 선교사와 메티 선교사 남매가 한국 땅에서 이룬 선교의 열매는 컸습니다.

많은 동료 선교사가 병으로 순교하고 사고로 순교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 그들은 끝까지 나이 많아 은퇴할 때까지 건강하게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순교도 아름다운 것이지만 , 이렇게 건강하게 끝까지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출처  ★기독자료최강★ | 임마누엘
                                                                                                           원문 http://blog.naver.com/hdchae91/140010355546

 

2002-10-14 09:56:02

 

                                                                                                                                            http://wmc.or.kr[이용남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