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 호남 지역의 선교사

김제 금산ㄱ자교회

영국신사77 2009. 6. 8. 23:00
                                   김제 금산ㄱ자교회
출처 빅벨 | 빅 벨
원문 http://blog.naver.com/bigbell00755/130011604558
 
 전북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에 있는 금산교회는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가 우리 문화에 토착화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운데 하나인 기역자(ㄱ)형 예배당이다.
 
 이 예배당은 1908년에 지었는데 한수(漢水) 이남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1997년 10월 전북 문화제 제 136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말을 타고 전주와 정읍을 오가며 전도하던 미국 남 장로교 테이트(L. B. Tate, 한국이름 최의덕)선교사가 전주와 정읍의 중간지점이며 마방이 있던 이곳 금산리에 머물면서 유창한 한국말로 “예수 믿으세요”라며 전도하였다.
 
 그렇게 복음이 이곳 금산리에 처음 복음이 전해졌고 마침내 마을의 유지인 조덕삼, 박화서, 왕순칠, 강평국, 이자익 등이 예수를 믿어 1905년에 두정리(또는 팟정리)에 교회가 세워졌다.
 
금산교회는 점점 부흥하여 1908년에 다섯 칸짜리 예배당을 지을 때, 당시 남녀 칠세 부동석이란 유교 문화의 영향을 벗어 날 수 없어 남자석과 여자석을 구분하여 예배당을 기억자(ㄱ)자형으로 지었다.
 
이것은 당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서양문화가 동양의 문화 곧 한국의 유교문화와 대립하지 않고, 우리 토양에 맞게 토착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증거로 큰 의미가 있는 교회이다.
 
 
 금산교회는 ㄱ자형이라는 외형적인 특징뿐만아니라 한국의 초대교회가 가지는 또 금산교회만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들이 있다.
 
첫째는 철저한 신앙교육이다. 학습과 세례 문답이 엄격하여 우선 성경을 읽으려면 한글을 알아야 하고,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면 학습과 세례문답에서 합격 할 수 없었다. 양조장을 경영하는 사람은 양조장을 처분하여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으며, 첩이 있는 사람은 정리하지 않으면 세례교인이 될 수 없었다.
 
둘째는 그리스도안에서 반상(班常)의 벽을 뛰어 넘은 교회였다. 금산교회의 장로였던 조덕삼은 할아버지로부터 물러 받은 많은 유산으로 그 지방의 재력가였다. 그는 성격이 호탕하고 한학에도 조예가 있어 명성을 날리고 있었지만, 자기 집에 마부로 있던 이자익과 함께 예수 믿고 교회를 이끌어 갔다.
 
 아무리 교회라고 하지만 머슴과 양반이 함께 교회생활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교회가 성장하여 장로를 선출할 때 마부였던 이자익은 피택되고 지주였던 조덕삼을 떨어졌다. 그러나 조덕삼은 불평하지 않고 교회를 잘 섬겨 그 다음해 장로가 되었다.
 
 셋째로 금산교회는 마부를 총회장으로 키워냈다. 이자익의 성실함을 본 최의덕 선교사는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보내 목회자로 만들고자 했으며, 이런 이자익의 뒤를 돌봐주며 섬긴 것이 바로 조덕삼 장로와 금산교회였다.
 
 그렇게 금산교회는 일개 마부에 불과했던 사람을 목회자로 만들었으며, 이자익 목사는 한국기독교 역사에 전무후무한 세 번의 총회장을 지낸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자익 목사가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신분의 벽을 허물고 진정한 사랑과 섬김을 실천한 조덕삼 장로와 금산교회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금산교회는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교회였다. 교회가 설립된 지 1년이 지나서 민족의 고난을 보며 민족의 지도자를 배출하기 위해 1906년에 유광 학교를 설립하여 한글과 역사를 가르치며 민족교육의 산실이 되었지만, 일제말 극심한 탄압으로 강제 폐교당하였다.
 
 모악산 자락에서 대대로 미신과 우상을 섬기며 가난에 찌든 채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던 동족의 가슴에 복음을 전하며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을 개화하여 잃은 나라를 되찾도록 민족혼을 일깨워 주었던 금산교회와 유광 학교는 이 땅에 기독교의 뿌리를 내리게 한 한국교회의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