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장로회 의료선교사 켈러(Keller) 부부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전주선교사묘지에는 미국 남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12년간 예수병원 소아과장, 부원장, 원장으로 헌신한 켈러(Keller, Frank Goulding)선교사의 묘가 있다.
전주 예수병원장 푸랭크 G. 켈러(1912-1967, 55세)
푸랭크 G. 켈러(Keller, Frank Goulding, 한국명: 계일락)는 1912년 10월 1일 미국 앨라배마 주 버밍햄에서 출생했다. 1934년 어번대학교와 워싱턴 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앨라배마 주 모빌(Mobile)에서 잘 운영되는 소아과 병원을 그만두고 모든 장비, 자동차를 처분하여 남 장로회 한국선교사로 1955년 5월 29일[43세] 배편으로 내한하였다. 전주에 도착하자 곧바로 예수병원에 부임하여 소아과(小兒科)과장을 맡아 의료선교사로 충실하게 봉직했다.
그의 의료 활동에 대하여 데이비드 존 실(Seel, David John, 한국명: 설대위)은 “후랭크 G. 켈러 박사는 미국에서 한국에 저녁 늦게 도착하여 다음날 아침 6시에 출근한 의사이다. 그는 병원내의 약부의 책임을 맡고 일했으며 말없이 충성하는 의사였다. 이로 인하여 병원에 외래환자가 상당수 늘어났고, 160개의 입원실 침대는 언제나 환자로 차 있었다. 예수병원은 좋은 평판으로 성장하여 모두가 기뻐하며 맡은 일에 더욱 충실하였다.
그는 땅딸막하고 머리가 회색인 40대 남자로서 항상 미소와 유머 감각이 뛰어난 분 이었다.”고 했다. 이 무렵(1961) 예수병원 의료진은 크레인(Paul S. Crane, 한국명; 구바울), 실(David J. Seel) 켈러 등 남성 의료선교사와 여성 의료선교사(Elizabeth, Ocie 등)들이 활약했다.
1963년 병원 이사회는 ‘다가산’에 위치한 병원만으로는 완전한 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으로 발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병원 부지를 넓히기로 했다. 이때 켈러선교사는 ‘용머리고개’ 맞은편 지역을 그 확장 대상지로 제안하였다.
이 땅은 2차대전 이전부터 선교부가 운영해오던 정흥초등학교(사립) 부지였는데, 정부의 초등학교 공립화(公立化) 정책에 따라 문을 닫았던 자리를 종합병원 후보지로 물색하여 선교부 허가 절차 등 주도적으로 노력하여 병원 확장에 기여했다. 이 부분을 실 선교사는 “하나님께서는 병원을 위해 다른 부지를 준비해 두셨던 것이며, 켈러 박사의 깊은 안목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하는 바이다.”라고 했다.
켈러는 1957년 일시적인 대뇌혈류 장애로 고통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리고 1959년 미국 휴가 중일 때 대뇌 혈전증이 있었다. 이때 그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앨라배마(Mobile)에서 소아진료소를 운영하는 것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안전한 선택이었을 터인데, 그는 선교사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병원의 부원장과 별세하기 전 8개월간은 내과의 책임도 겸하였다. 그는 자신의 병의 예후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그의 삶을 하나님께 의지하며 조용한 영웅처럼 살았다.
1967년 1월 3일[55세] 오후 집 뒤 언덕길을 산책하던 중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크레인 박사 등이 심폐 소생을 시도했으나 순직하여 전주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삶에 대하여 “켈러박사는 꾸밈없이 소박하고, 자제력이 있었으며 성실한 분이었다. 신속과 간결은 그의 신조였으며, 설교를 짧게 하고, 모든 약속시간과 장소에 먼저 나오는데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이들을 많이 사랑했다. 동료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대할 때는 그의 엄격한 생활양식이 유연해지기도 했다. 그는 일생을 부드러운 손길과 열린 마음으로 살았다.”고 했다.
간호선교사 탤마지 (Talmage)부인
켈러선교사의 부인 탤마지(Talmage, Janet Crane 한국명:打藉愛)는 1910년부터 1957년까지 미국 남 장로회에서 활동한 선교사(J. V. N. Talmage)의 딸로 출생했다.
1947년 미국 남 장로회 간호선교사로 내한하여 전주에서 활동했다. 1956년 푸랭크 G. 켈러와 결혼하고, 부부가 함께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외아들 프랭크 2세를 낳았다.
특히 그의 친정아버지(J. V. N. Talmage)는 1940년 11월 16일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일제의 강압으로 모두 철수 할 때에도, 한국에 남아 선교부 총무직을 담당하면서 선교부 소유 자산을 일본 당국에 양도하라는 압력에 굴하지 않고, 121일간 독방에 감금되면서 까지 거절하여 오늘 날의 전주예수병원, 광주기독병원, 윌슨 나환자병원 및 재활센터와 7개 중ㆍ고등학교의 부동산을 수호하여 법적 소유권을 보존 할 수 있게 한 특별한 공적이 있다.
탤마지 부인은 1967년 남편과 사별한 뒤 전주와 목포에서 의료 활동을 계속하다가, 1976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선교문화신문 기자 2005-11-23 (171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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