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양화진묘원· 선교사

[여의춘추―손수호] ‘義人 베델’을 추억함

영국신사77 2009. 4. 30. 15:09
[여의춘추―손수호] ‘義人 베델’을 추억함
                                                                                              2009.04.29 21:40:55


햇살 눈부신 날, 서울 양화진의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가보셨는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엔 이국 땅에서 거룩한 생애를 마친 수백의 영혼이 잠들어 있다. 흙길 따라 늘어선 묘비명을 읽노라면 가슴에 "쏴∼" 파도가 지나간다. 이영훈 목사는 "천 개의 생명이 있어도 한국에 바치겠다"는 루비 켄드릭을 신앙의 사표로 삼을 것을 설교했다.

눈을 돌려 켄드릭 대각선에 자리한 베델 무덤엔 묘비명이 없다. 수난이 스친 듯 비석 뒷면의 절반은 하얗게 지워져 있다. 앞을 보아야 주인공의 신원을 알 수 있다. 'Ernest Thomas Bethell. Born at Bristol England Nov.3rd 1872, Died at Seoul Korea May 1st 1909. 大韓每日申報社長大英國人裵說之墓'. 교과서에 나오는 그 베델(배설)이다.

그는 격동기 국권상실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위해 젊음을 바친 언론인이다. 무역 위해 일본에 갔다가 러일 전쟁이 터지자 영국 신문의 통신원 자격으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초기에는 비즈니스 차원에서 신문업을 생각하다가 조선을 유린하는 일제의 만행을 보고는 떨쳐 일어선다. 신문사 사무실 문에 '일본인과 개(犬)는 출입금지'를 써 붙여놓고 항일에 앞장서 대중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조선 위해 목숨 바친 선교사이자 언론인…100주기인데 이토록 무심해도 되나”

베델은 안중근 의거를 크게 다루고,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실은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이 반향을 일으키자 즉각 신보에 전재했으며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해 일본의 미움을 샀다. ‘기독교 구국론’을 갈파하기도 했다. “기독교는 그 주의가 널리 사랑함이요, 그 제도는 평등이요, 그 방법은 새 지식 새 문명을 수입하기 때문에 국가 민족에 이익이 된다. 이천만 인종이 한 가지 살 길은 기독교를 믿는 데 있다.”

일본이 가만 있겠나. 치외법권을 박탈하기 위해 재판에 회부했다. 원고는 통감부 서기관 미우라. “대한매일신보가 소요와 무질서를 선동했다”는 죄목을 들었다. 친일 미국인 외교관 스티븐스 암살사건을 다룬 논설, 이토 히로부미를 오스트리아 독재자 메테르니히에 빗댄 글, 함흥 학생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쓴 혈서 기사를 증거로 제시했다.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던 영국은 외교마찰을 피하기 위해 재판을 열었다. 장소는 서울 정동의 주한영국총영사관. 상하이에서 파견된 영국인 판사와 영국인 피고, 일본인 원고, 한국인 증인 등이 법정에 선 한국 최초의 국제재판이었다. 복도에는 청중들로 가득했다.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사흘간 계속된 재판에서 베델은 3주의 금고형과 6개월의 근신형을 받아 상하이에 있는 영국인 교도소에 투옥됐다. 만기출소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을 재개했으나 심신이 쇠약해진 나머지 서른일곱에 세상을 떠났다. ‘我붲死願申報永生救韓國同胞(내가 죽어도 신보는 영원히 살아남아 한국동포를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긴 채.

베델은 6년 동안 신념과 열정의 삶을 살며 아무 연고도 없는 한국에 헌신했다. 우리는 어떻게 보답했나. 부음이 들리자 고종은 “하늘은 무심하게도 왜 그를 이다지도 급히 데려갔단 말인가!”라며 슬퍼했고 백성들이 애도했다. 이듬해 장지연이 비석을 세웠고, 일제가 비문을 갈아냈으며, 1964년 편집인협회가 비문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1968년 정부가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그게 전부다.

내일이면 베델 100주기를 맞는데도 어찌 이리 조용할까. 육영과 의료분야의 선교사들과 비교해도 너무 무심하지 않은가. 그를 제대로 기리는 일은 언론계와 기독교계의 몫이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