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1.國內 성지순례歷史교회文化탐방

★ 논산 병촌교회 <성화>

영국신사77 2009. 4. 24. 00:42
                                        논산 병촌교회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

                                                                          병촌교회

 

  1935년 5월 7일 강경성결교회를 모(母) 교회로 설립된 병촌교회는 1943년 일제 탄압으로 교역자와 신도 대표들이 구속되었고 교단이 해산될 때 교회도 폐쇄 매각되었다. 이 후 가정교회 형태로 유지되던 병촌교회는 해방과 함께 우제학 집사, 노미종 권사, 김주옥 집사 등 평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교회를 재건하였다. 

 

  충청도 논산 지역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일찍이 선교의 후보지로 선정하여 답사하고 선교하였던 지역이다. 이 지역은 풍요로운 삶을 누린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으나, 6.25로 인한 사상 분쟁은 무고한 희생자를 양산하였다. 공산당들이 정부군의 후퇴 이래 여러 지역을 장악하면서 민주 우익인사들을 체포, 감금, 구타, 고문 심지어는 죽이는 등 갖가지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러다가 유엔 연합군의 인천상륙과 더불어 불리해진 공산군들이 도주에 앞서 1950. 9. 27-28일 양일간  병촌교회 신도 16세대 66명(남 27명, 여 39명) 을 한꺼번에 흙구덩이를 파고 쇠스랑과 삽과 몽둥이로 죽여 매장하였다.

 

 이러한 처참한 상황에서도 정수일(여) 집사는 시부모와 3남 1녀의 자녀 그리고 시동생과 어린 조카등 11명은 둘러앉아 기도와 찬송을 했으며 죽음 앞에서 "공산군은 패전하니 이제 회개하고 예수 믿어 구원받으라" 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고 한다. 김주학 집사의 모친과 부인, 자녀 등 가족 전체가 몰살당한 가정이 5가정이었고, 교회적으로는 직원1명, 세례인 14명, 학습인 12명, 구도자 8명, 학생 및 유아 31명 등 66명이 순교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김주옥 장로 (당시 집사)와 붙잡히기 전 어린 동생과 함께 도망 친 김 장로의 딸 김명호 사모(영광교회)의 증언을 통해 알려졌다. 반동분자라는 죄목으로 온갖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켰던 김주학 집사는 미군 비행기 폭격을 틈타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하였다. 

 

  66인의 대 학살 사건이 후 김주학 집사 등은 교회 재건에 매진하였다. 1956년 3월 현재 위치에 52평의 순교자 기념예배당을 신축하였으며 교회 뜰에 "6.25 동란 순교자 기념비"를 세웠다.

 

  1981년 5월 "순교자 기념교회"로 현재의 교회를 신축하였다. 교회의 모습은 면류관의 모습으로 건축 되었다. 1989년 병촌교회와 교단은 "66인 순교기념탑"을 건립하였다.  

 

    주소:충남 논산시 성동면 개척리 228-1번지

 

 

병촌교회

 

순교기념탑과 병촌교회

 

병촌교회 구 예배당(우)와 현 순교자 기념성전(좌)

 

병촌교회

 

구 순교자 기념예배당(1956년 3월, 52평) 교회 뜰에 "6.25 동란 순교자 기념비"를 세웠다. 

 

6.25 동란 순교자기념비 (1956년)

 

현 순교자 기념성전 (1981년 5월, 교회의 모습은 면류관의 모습)

 

기념성전 머릿돌

 

현 성전 내부

 

66인 순교기념탑 (1989년) 

 

66인 순교기념탑

 

66인 순교기념탑, 교회 2층에서 내려다본 모습 

 

66인 순교기념탑

 

66인 순교기념탑  

 

기념탑 봉헌문 (기념탑 하단 부분)  

 

순교자 명단

 

순교자 명단

 

 순교자 명단  

 

기념탑 제막식 사진

 

1942년 국어 연성숙

 

1942년 야학 사진

 

1955년 교회종탑

 

1956년 구 예배당 건축 후

 

1964년 부흥회

 

1968년 부흥회

 

교단 순교지 안내 책자  

 

교단 홍보물의 병촌교회 소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순교교회

 

 교단 역사편찬위원회 주관으로 교단 순교지 복원 사업에 적극 나섰다. 기성은 전체 사업비 4억여원을 들여 교회터 매입, 순교비 제작 및 정화사업,안내표지판 설치,영상물 등을 제작할 계획이다. 이번에 기성이 순교지로 복원하는 곳은 강원도 철원교회를 비롯해 충남 논산 병촌교회, 전남 신안의 중동리·임자진리교회, 전북 정읍의 두암교회, 전북 익산의 하리교회 등 모두 6곳이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역사

 

                                    6·25 사변과 교회의 재수난(1950-1953)

  해방을 맞아 민족의 자유는 얻었지만 연합군은 38선을 그어 남과 북이 갈라졌다. 남한은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대한민국이 수렵되자 미군이 전면 철수해버린 남한 땅에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불시에 남침을 감행하여 일시에 서울을 빼앗기고, 계속 남하하여 부산에 임시수도를 설치, 경상남북도의 일부만이 남아 위기일발의 전황이었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맥아더 장군이 이끈 유엔군과 국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탈환하였다. 3년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한국사회는 목불인견의 참상과 막 대한 피해를 입었고, 성결교회는 불타버린 교회가 27교회, 무너진 교회가 79교회였고, 순교 한 교직자가 20여 명, 행방불명된 교직자가 20여 명에 이르는 큰 손실을 입었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부산으로 피난하였으나 서울에 남아 교회와 신학교를 지키고 있던 당시 총회장 박현명목사, 이 건 교장, 박형규 교단총무, 김유연 교수, 최석모 교수, 유세근 목 사 등 실로 교단의 중추인물들이 체포되어 북으로 납치당했고, 전남 도서지방의 전도 어머 니였던 문준경 전도사는 모래사장에서 학살당하였고, 전남 임자도의 진리교회 이판일 장로 의 일가족 13명을 포함한 성도 48명과 전북 정읍 두암리교회 김용은 목사의 일가 23명, 충남 논산 병촌교회 성도 66명이 집단학살, 순교를 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빨치산, 6·25 당시 13만 주민 학살


                               ‘바닥빨갱이’, 목사*장로*신부 등 종교인 포함 원시적 학살

  6·25 당시 빨치산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바닥빨갱이’로 불리며 양민학살을 주도했고, 북한 인민군 퇴각 이후에는 지리산을 거점으로 우익인사 살해 등을 벌여왔다.

 

  빨치산들이 6·25 당시 인민재판을 통해 학살한 양민의 수는 13만으로, 남경대학살, Warsaw Getto의 유태인학살과 함께  20세기 세계적 학살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붉은 완장을 차고 다니던 바닥빨갱이들은 대개 총이 없었으므로 죽창이나 도끼, 쇠스랑, 괭이 곤봉 등으로 무장하고, 곡괭이와 삽으로 우익인사들을 찔러 죽이는 원시적 학살행위를 자행했다. 전쟁사학자들은 6·25 당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13만 양민학살’이 세계적 학살로 기록되는 이유는 피해자 수는 물론, 그 잔혹성에 있다고 지적한다.

 

 경남 남해군에서는 경찰관들을 살해해 배를 갈라 간을 꺼내 씹거나 절명한 경찰관 경찰관의 배에 1척이나 되는 소나무 말뚝을 박기도 했다. 

 

 경기도 양평군에서는 반공인사 600여 명이 철사줄로 묶어져 휘발유를 끼얹어 지고 웅덩이에 생매장됐다. 전주형무소에서는 감옥에 있던 우익인사들이 살해된 후 도랑에 던져졌고 도랑이 시체로 가득 차자 우물에 던져졌고, 우물이 가득 차자 뒤뜰에 버려졌다. 대전형무소에서는 수감돼 있던 1,742명의 우익인사와 가족들이 모두 학살됐다.

 

  바닥빨갱이들에 의한 가장 큰 피해자집단 중 하나는 종교인들이었다. 지금까지 정리된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6·25 당시 인민군과 바닥빨갱이들에 의해 학살당한 목사·신부·장로·수녀들은 신원이 밝혀진 사람만 174명에 달한다. 또한 인민군이 퇴각하며 납북된 종교인들도 184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기독교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남 영암읍 교회사건 등 3개월 이하의 인공치하 동안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전남 영압읍 교회에서는 신도 24명이 집단 학살됐고, 옥구에서도 20여 명의 신도가 학살됐다.

 

 전남 서쪽 바다에 있는 임자도에서는 150여 명이 구덩이를 파고 양민과 교인이 학살됐고, 충남 논산 병촌교회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육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66명의 교인들이 학살됐다.                                                                                                                                   (미래한국 200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