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에 인천(제물포)은 있지만 부산은 없다? 1884년 9월20일 호레이스 N 알렌의 입국과 1885년 4월5일 호레이스 G 언더우드, 헨리 G 아펜젤러 등의 초기 선교사들이 첫발을 디딘 곳이 인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탁지일 부산장신대 교수(교회사)는 구한말 당시 부산은 조선의 관문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일본을 통해 조선에 왔던 선교사들이 맨 먼저 밟은 곳은 제물포가 아니라 부산이라고 주장한다. 탁 교수는 "한국 선교의 기원은 1884년 9월20일 제물포가 아니라 1884년 9월14일 알렌이 부산에 들어온 날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규 고신대 신학대학장은 "부산시 좌천1동 부산진교회(통합)와 초량1동 초량교회(합동)사를 보면 한국 선교의 기원과 부산·경남 지역 교회사를 바로 볼 수 있다"면서 "두 교회는 한국 장로교의 대표적인 교단 소속으로 부산 앞바다의 거센 바람을 막아주는 모교회로 쌍벽을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예장 통합과 합동으로 갈라졌지만 뿌리가 같은 두 교회는 최근 장애인복지관 공동 운영 추진 등 동구지역 다른 교회와 힘을 모아 연합사업을 펼 계획이다.
◇부산 최초의 조직교회 부산진교회=가마꼴(釜山)을 닮아 부산이란 지명이 유래된 좌천1동 언덕에 우뚝 솟아 있는 빨간 벽돌 건물의 부산진교회(이종윤 목사). 부산역에서 지하철 1호선 노포동행 지하철을 타고 좌천동역에서 내려 일신기독병원 방향으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교회를 세운 이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 소속 윌리엄 M 베어드(한국명 배위량). 그는 1890년 부산진에 한옥 한 채를 짓고, 그해 11월 부인과 함께 당시 공관에서 일하던 미국인 가족들과 자기 집에서 일하던 한국인 몇 사람과 예배 드린 것이 부산교회(부산진교회 전신)의 시작이다. 이듬해 정식으로 교회를 창립한다. 이후 1900년 10월 G 엥겔(한국명 왕길지) 목사가 초대 당회장으로 부임하면서 교회의 모습을 갖췄다.
1904년 5월27일 부산 최초의 세례자였던 심상현의 동생 심취명이 장로로 장립됐다. 부산진교회의 당회가 조직된 날이다. 3·1독립만세운동 때는 교회의 자매학교라 할 수 있는 일신여학교 교사였던 박시연 등 7명이 부산진교회에 출석했다. 이 밖에도 최상림 목사와 최재화 목사가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피난민이 부산으로 밀려들었다. 교회가 위치한 좌천1동 지역에만 2만채의 판잣집이 들어섰다. 53년 11월에는 큰 화재가 발생해 3000채의 판잣집이 잿더미로 변했다. 교회는 화재 지역에 위문금 2만5000환을 보내 재건에 동참했다. 81년에는 현재의 건물인 새 성전 기공식을 갖고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했다.
2007년에는 1904년 당회가 구성된 이래 1000회 정기 당회를 맞아 감사예배를 드렸다. 교회는 동구지역 독거노인들에게 요구르트 나눔 운동을 펼치고 있다. 매주 경로대학을 통해 나이 많은 분들의 건강을 돌보고 있다.
이종윤 목사는 "동부산 지역의 쪽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고 있다"면서 "포도나무 정원을 통해 지역 주민들과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을 찾고, 국가적·국제적 어려움이 갑자기 발생할 때 물적·인적 자원을 동원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기철 목사의 정기가 서린 초량교회=부산역에 내리면 거대한 성처럼 둘러싸인 산동네가 처음 방문하는 이들을 압도한다. 7∼8부 능선까지 크고 작은 집들로 빈틈이 없어 답답해보이지만 등 뒤로 바다가 탁 트이게 펼쳐져 있다는 생각을 하면 답답함은 이내 사라진다.
초량교회(김대훈 목사)로 가는 길은 그림 찾기처럼 흥미롭다. 부산역 지하도를 건너 10여분 골목길을 오르면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이 나온다. 교회는 초량초등학교 오른쪽, 소림사 왼편 언덕배기를 베개 삼아 우람하게 서 있다. 교회 머릿돌에는 1963년이라고 적혀 있다. 회색과 갈색톤의 벽돌로 지어진 예배당은 고개를 힘껏 들어올려야 십자가 끝이 보일 정도로 우뚝 솟아 있다. 교회 지붕 위의 하늘은 푸른 바다를 옮겨놓은 듯 구름 한 점 없다.
교회를 창립한 사람은 부산진교회를 세운 베어드. 그가 1892년 5월 영선현 부지(현재 코모도호텔)에 선교센터를 짓고 '사랑방'을 연 것이 교회(영선현교회)의 모태가 됐다. 1902년 예배당 아래 영주동 사무소를 매입해 주일학교로 사용하다 영주동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이후 1920년 호주 선교부가 소유한 땅을 추가로 매입, 교회를 새로 짓고 초량교회로 불렀다.
교회 1층 역사관에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부산의 버팀목이 됐던 유물들이 고스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20년대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온몸을 던져 나라와 교회를 지켰던 강대상에 서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부산으로 피란 온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이 교회에서 구국기도회를 갖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초량교회는 10년 전부터 사회복지법인 '빛과소금복지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김대훈 목사는 "우리는 하늘 위를 머물며 뽐내는 빛이 아니라 그늘진 삶을 찾아가는 빛이 돼야 한다"면서 "소금이 자기 몸을 녹여 짠맛을 나눠주듯 우리들의 사랑을 녹여 소외된 이웃들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글·사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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