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성지순례/이스라엘[종합]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1

영국신사77 2009. 2. 28. 15:17
                          이스라엘의 독립국가 창설과 중동의 갈등-1

                                                                                                 

 

 1948년 5월 15일. 유엔에게는 최악의 순간이었다.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5개 아랍국가가 이스라엘이라는 신생 국가를 침공했다. 이스라엘은 불과 하루 전에 자랑스럽게 독립을 선포했었다. 물론 유엔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유엔은 눈을 가리고 어쩔 수 없다고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유대인들은 다시금 비극을 맞이하게 됐다.

 그러나 수 주 후에 이 전쟁은 유대인의 승리로 끝났다. 놀란 유엔은 눈을 크게 뜨고 전쟁에 패한 아랍인들을 바라보았다. 유엔은 특별 총회를 소집하고 폴크 베르나도트 공작을 평화사절단으로 유대인들이 카이로를 점령하기 전에 이스라엘에 파견했다.

 유대인들은 역사의 다락에서 다윗의 방패와 코흐바의 무기를 끄집어냈던 것이다. 다시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명령을 내리는 유대인 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유대인들이 유순하다는 서구의 통념이 깨지고 어떤 사태가 발생했을까? 진짜 어떤 일이 있었을까?

 유대인은 코흐바가 로마에 대항하는 제3차 항쟁을 일으킨 A.D. 6세기 이래 팔레스타인에서 소수 민족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다수 민족이 되었다.

 1900년 말까지 팔레스타인은 돌과 선인장이 사막의 풍경을 이루고 있던 황무지였다. 이제 그 사막에는 풍요로운 농지가 곳곳에 있고 아름다운 도시가 건설되었다. 과연 어디에서 이런 변화를 주도한 농학자, 산업 노동자, 경영 전문가들이 온 것일까?

 이스라엘은 의회, 대법원, 독립된 사법부가 있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이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하루 아침에 이룩될 수 있었을까? 세계는 과거에도 혁명을 경험했지만 이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일반 대중들의 생각과는 달리, 혁명은 압박 받는 대중에 의해 시작된 것도 하룻 밤 사이에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혁명은 부르조아 계급과 귀족 출신의 지식인들이 주도했고 오랜 배양 기간이 있었다.


 

 성공적인 혁명이 이루어지기까지는 3단계의 수태과정을 겪는다. 매 과정에는 “지성인”, “선동가”, “관료” 등이 있었다.


 

 맨 먼저 기존의 제도에 의문을 가진 지성인들이 그 비효율성을 지적하고 새로운 사회를 위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프랑스 혁명의 모태가 되는 지성인으로 볼테르, 루소, 몽테스키 콩도르세 등이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을 선동한 관념은 로크, 홉스, 베이컨, 버크와 같은 영국 4인방 철학자들에 의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지성적인 아버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이다. 이 지성인들은 노동자와 농민의 후손이 아니라 부르조아와 귀족의 자식들이었다.


 

 이런 지성인들의 관념이 서서히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지게 되고 선동자들에 의해 잉태된다. 선동자들은 새로운 관념을 대중들에게 전달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장한 반대자가 되도록 하여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동가들은 다혈질로 사건을 계속되는 소요로 몰고 가고 안정된 정부가 설립되는 것을 방해한다. 시기에 맞추어 프랑스, 미국, 러시아의 선동가들이 각각의 정신적 지도자로부터 사사 받은 관념을 잉태하고 혁명을 일으켰다. 이들은 프랑스의 로베스피에르, 당통, 마라이고, 미국에서는 아담스, 제퍼슨, 해밀턴, 메디슨, 프랭클린이고, 러시아에서는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이었다. 이들은 아무도 노동자나 농민이 아니었다.


 뒤이어 선동가를 대신할 관료들이 나타난다. 이들의 임무는 급진적인 새로운 관념을 제도화시키고 안정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등장하고 프랑스 혁명사는 매우 복잡하게 뒤얽혀 한 마디로 말할 수 없지만 나폴레옹이 주창한 혁명의 관념은 확고한 것이어서 1세기에 걸친 소요를 겪고도 살아 남았다. 미국 독립전쟁이 있고 50년 후에 1776년 혁명의 원칙들이 민족의식 속에 확실하게 뿌리내리고 선의의 시대가 미국의 다양한 인종의 다양한 요소들을 한 곳에 모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그 관료는 혁명이 끝나고 30년 후에 확고하게 되어 러시아 수상은 자신이 자리를 비워도 권력을 찬탈당할 염려가 없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전쟁도 똑같은 혁명의 과정이 있었다. 시온주의도 한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전형적인 틀에 적용될 수 있다. 그 예외는 제 4의 전문가들로 이들은 동기 유발자들이고 시온주의 혁명에 필연적인 것이었다.


 “계란을 개지 않고서는 오믈렛을 만들 수 없다”는 로베스피에르의 경구에 따라 국민들 없이는 혁명이 있을 수 없다는 경구를 만들 수 있다. 시온주의자들은 국가를 설립할 만큼의 충분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없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시온주의 동기 유발자들의 역사적 임무는 디아스포라(이산) 유대인을 자극하여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켜 새로운 유대 국가의 구성원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 미국, 러시아 혁명과 같이 시온주의 혁명은 지성인들의 업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이칼라 시온주의자들이 바로 시온주의 혁명의 지성인이었고, 이들은 기존 국가의 유대 문제 처리를 비판하고 새로운 국가의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 다음에 동기 유발자들이 작업에 착수하여 유럽의 이민 파도를 팔레스타인 쪽으로 유도했다. 뒤이어 선동자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복음을 전파했다. 그들이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하고 역사의 전례에 따라 관료들이 권력을 잡는다.

 

 실제로 시온주의는 옛날의 이념에 현대적인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즉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의미로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말한다. 이같은 회귀의 관념은 초기 디아스포라 시절부터 유대인들의 사고 속에 있었다. 비록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대한 물리적인 소유권은 박탈당했지만 언젠가는 시온에 국가를 세우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현대 시온주의는 고대의 생각과는 중요한 점에서 다르다.

 현대 시온주의가 출현하기까지 대부분 유대인들은 언젠가 메시야가 유대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리라고 생각했다. 이 책임을 스스로 떠맡은 시온주의자들은 이 말을 시온이 유대인의 미래의 고향이라고 재평가한 것이다.

 

 A.D. 135년의 바르 코흐바의 항거 실패 이후 팔레스타인에는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로마의 황제 하드리안이 사망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고 3세기 로마 제국에 감돌았던 선린 정신을 공유했다. 알렉산더 시베리우스 황제의 진보주의로 대표되던 평온했던 이 시기는 기독교인들에게 권력이 승계되면서 325년에 종말을 고한다. 알렉산더 시베리우스 황제는 개인 교회에 모세와 예수의 성상을 모셔두고 있었다.

 40년 후 두 왕족 형제 발렌스와 발렌티안은 로마제국을 둘로 나눴다. 그리스 로마의 영향을 받았던 팔레스타인은 당시 로마 제국의 동쪽 절반을 통제하던 비잔틴 제국에 의해 동양에 넘겨진다. 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2세기 반 동안, 유대인들은 자연사와 이민으로 소수 민족으로 전락한다. 팔레스타인은 비잔틴과 페르시아 군대의 전쟁터가 되었다.

 성자, 성부, 성신의 삼위일체설과 관련된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논쟁이 특별하게 가열되었다. 에드워드 기번의 말에 의하면, 단 한 마디의 말 차이만을 가진 이 격렬한 논쟁으로 수 만명의 기독교인들과 논쟁에 방해가 되는 유대인들이 눈에 띄는 대로 살해당했다.

 기독교 교리가 강화되면서 성인과 순교자의 일부분이라도 교회나 성당에 모시고 있다면 그 종파는 성장하게 되고 그 교회는 성전화되었다. 초기 성인들이나 순교자들은 성지에서 사망했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은 이들의 유적을 찾으려는 열풍에 시달렸다.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제단에 모시거나 봉헌할 수 있는 팔, 손가락, 발가락, 심지어는 뼈 조각 하나까지 찾는 탐사가 진행되었다.

 팔레스타인에 남아있던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614년 페르시아 전사들을 환영했지만, 그들은 서로 친숙해질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 638년 이 지역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그 후 500년간 아랍의 지배를 받다가 1100년 십자군이 성지를 탈환하고 200년 가까이 십자군이 중요한 전초기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마멜룩족에 의해 이곳에서 십자군이 축출된다. 마멜룩족은 이집트에 거주하던 터키 노예에게 붙여진 아랍식 이름이다.

 마멜룩족은 1250년 이집트 주인에게 항거하여 이집트의 권력을 찬탈하고 십자군을 쳐부수고 팔레스타인을 이집트의 영지로 만들었다. 이들은 징기스칸의 침공을 저지하고, 267년 간 이집트의 변경이 외부의 침략을 받지 않게끔 했다. 그들은 능숙한 기병이었지만 정치 조직에는 무능했다. 47명의 마멜룩 술탄은 문맹이거나 정신 이상자들로, 평균 6년도 채 안되는 왕권을 잡았고, 왕권을 차지할 때와 마찬가지로 살해당하고 왕권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거대한 대학과 사원을 건설하고 카이로를 국제적인 도시로 탈바꿈시켰다.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의 인구는 3분의 1이 감축됐다. 이들은 오스만 터키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합병시키면서 종말을 고했다.

 1세기에 걸친 터키의 지배로 안정을 회복하게 되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마라노, 카발라주의자, 탈무드주의자들이 몰려들어 팔레스타인에서 기업을 경영하며 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서적을 출판했다.

 

 부정과 부패로 오스만 제국은 점차 퇴조의 길을 걷게 되었다. 1789년 유대인들은 상황이 호전될 것이라는 희망을 잠시 동안 가질 수 있었다. 당시 넬슨 제독이 지중해의 안개 속에서 함대를 이끌고 지나갔고, 나폴레옹은 32,000명의 군대와 함께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했다. 과거 알렉산더 대제는 고대 동양의 세계를 정복할 때에도 32,000명의 군대를 상륙시켰었다. 나폴레옹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북쪽 아크레로 진격하지만 요새를 점령하지 못하고 퇴각한다.

 

 팔레스타인은 터키인들이 다시 정복하고, 1860년 경에는 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12,000명의 유대인들이 사는 황야로 변했다. 바로 유대 디아스포라 역사의 바로 이 싯점에, 팔레스타인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겠다는 시온주의에 자극을 받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역사에 새롭게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출처:http://blog.naver.com/yousunpark/175884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