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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교회―⑩ 인천 내리감리교회] 감리교 선도 124년

영국신사77 2009. 1. 22. 09:41
2009.01.16 18:10:28
[한국의 역사교회―⑩ 인천 내리감리교회] 감리교 선도 124년… 새 세상 밝힌 ‘복음 등대’


인천 내리감리교회(옛 제물포 웨슬리예배당)는 인천항 개항과 더불어 시작된 교회로 도심 한가운데에 있는 한국의 '어머니 교회' 가운데 하나다. 이 교회는 창립 125주년 되는 내년을 '비전2010'으로 선포하고, 한국 교회사를 새롭게 정리하면서 미래의 한국 교회를 조명할 계획이다.

교회의 기원은 1885년 4월5일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가 제물포항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월미도로 가는 길목인 인천시 내동 9. 서울 신도림역에서 수도권 지하철 1호선 동인천행 열차를 타고 50분 정도면 닿는다. 동인천역에 내리면 월미도로 가는 큰 길이 가운데로 보이고 왼편으로 인천 길병원, 오른쪽 1∼2시 방향의 언덕 위로 커다란 예배당 지붕이 솟아오른 보름달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폭풍의 언덕 바람막이 3인의 목회자

현재의 예배당은 1985년 5월 100주년 기념 입당예배를 드린 곳이다. 동인천역 대한서림에서 신포시장으로 가는 길목 오른편 언덕에 우뚝 솟은 건물로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번씩 올려다본다. 언덕을 올라가면 본관으로 오르는 계단 왼편 적벽돌 벽면에 교회 역사를 보여주는 4개의 머릿돌이 눈길을 끈다. 각기 다른 크기와 글씨로 건축연도가 적혀 있다. 맨 아래에는 'AD 1901'이라고 쓰인 머릿돌이고 그 위 왼쪽이 '1955. 10. 19', 오른쪽이 '1964. 2. 26 화재 전소 1966. 6. 16 개축 봉헌', 맨 위의 머릿돌이 '예수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사도행전 4장11절)'고 씌어 있다.

계단을 중간쯤 오르면 탁 트인 하늘과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친다. 성도들은 '폭풍의 언덕'이라고 부른다. 바람이 아주 거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언덕에는 3명의 목회자 흉상이 거센 바람을 등지고 성도들에게 미소짓고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와 한국인 최초 목회자인 김기범 목사, 조원시(존스) 목사가 주인공들이다.

폭풍의 언덕을 마주보고 오른쪽으로 돌면 닫혀 있는 철문이 보인다. '젊음의 거리'로 연결되는 계단 골목으로, 지금은 통행을 하지 않지만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 성도들이 이곳으로 다녔다. 초입에는 1901년에 놓은 돌계단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최초'

3층 로비에 마련된 내리감리교회 역사전시관에는 교회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유물과 사진들이 걸려 있다. 1885년 4월5일 제물포항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미국 북감리교회 선교사로서 부인과 함께 바로 서울로 들어갈 수 없었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직후 서울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은 외국인 여성이 자유롭게 생활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김흥규 담임목사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내리교회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라면서 "아펜젤러 부부는 인천에 머무는 38일 동안 예배를 위한 집회를 가졌고, 입경(入京)할 수 없었던 그는 4월12일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6월21일 입국해 약 한 달간 인천에 머물렀기 때문에 이때를 내리감리교회의 시작점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내리감리교회는 근대문물의 수용지였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최초'란 수식어를 간직하고 있다. 한국 감리교회의 첫 예배당을 설립한 교회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오르간 예배를 드린 곳이다. 한국 최초의 해외 선교사 파송과 해외 개척교회를 설립했다. 한국 감리교회 사상 처음 매일학교(영화초등학교)를 운영했으며, 한국 최초로 메시아 전곡을 발표했다.

#제물포 웨슬리예배당 복원

선구적인 인물도 많이 나왔다. 고고학을 개척한 고유섭, 여성 교육의 총본산인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란,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 한국화 거장 이당 김은호 화백,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한글 점자를 발명한 박두성 선생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개그맨 이혁재씨도 이 교회 집사로 가끔 수험생들을 위로하는 등의 공연을 갖는다.

내리감리교회는 새해를 맞아 대역사를 시작하고 있다. 옛 제물포 웨슬리예배당과 똑같은 19세기 미국 건축 양식으로 복원하고 있다. 교회 옆에 2145㎡(650평)의 부지를 마련해 지상 3층, 지하 6층 규모로 건축하고 있다. 김 목사는 "내년에 옛 예배당이 복원되면 인천의 새로운 기독교 명소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글·사진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한국의 역사교회―⑩ 인천 내리감리교회] 인천 기독 역사와 내리감리교회

1894년 한국인 힘으로 교회당 건축
1899년 감신대 모체 ‘신학회’ 조직


"멈추고 닻을 내려라! 이곳에 수도를 정하리라." 졸본부여의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항해를 하던 비류 왕자는 크고 작은 섬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항구에 닿았다. 문학산에 올라 출렁이는 바다와 작은 섬들, 그 섬들을 헤치고 눈앞으로 다가오는 중국 대륙을 바라보던 비류는 "바로 여기가 도읍지다. 이곳의 이름은 이제부터 미추홀(彌鄒忽)이라 부르겠다"고 함성을 질렀다고 한다. 비류 백제의 도읍지가 된 인천은 삼국시대 초기에는 '밑골 또는 바탕골'을 의미하는 매소홀현으로도 불렸다.

역사 속에 나오는 인천의 시작은 몹시 분주했다. 문학산에서는 성을 쌓느라 고함 소리가 요란했다. 비류 백제는 나날이 커졌다. 다른 부족들과 전쟁을 하면서 영토를 차츰 늘려갔다. 활발한 교역과 인구 증가로 농업이 매우 발달했다. 한강을 낀 너른 평야를 가진 부평과 남촌, 구월 일대에서는 많은 곡식이 생산됐다.

그러던 중 한 영웅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례식이 열렸다. 온조와 비류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세우는 데 앞장섰던 졸본부여왕의 딸 소서노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 삼국사기에는 "서울에서 할멈이 사내로 변하고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 안에 들어왔다. 왕모(소서노)가 돌아가니 나이 61세였다"고 기록돼 있다. 온조 백제의 위례성을 찾아가던 소서노가 애통하게 죽음을 당한 것이었다. 소서노는 고주몽을 도와 고구려를 세웠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일으키는 데 힘을 다했던 빛나는 영웅이었다.

이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는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 유럽 세계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20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인천을 통해 비로소 한국에 기독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으며 현재 세계 2위의 선교대국으로 성장했다.

1894년에는 한국인의 힘으로 4칸 반의 교회당을 건축했고, 지교회로 만수교회(담방리)를 세웠다. 1899년에는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의 모체인 '신학회'를 조직했다. 1903년에는 한국인 최초의 목사 김기범이 3대 목사로 취임해 화도교회(1907년)와 문화교회(1910년)를 개척했다.

윤중식 기자

 

[한국의 역사교회―⑩ 인천 내리감리교회] 김흥규 담임목사 “가장 젊은 교회돼야”

내리감리교회는 124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만 아직도 20세 청년처럼 꿈을 꾼다.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하도록 길고 긴 역사 동안 수많은 업적을 이뤘지만 교회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한국 최고(最古)의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흥규(49·사진) 목사는 항상 내리감리교회가 한국에서 가장 젊은 교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 목사는 "세상에는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다. 보이는 교회는 보이지 않는 참교회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면서 "내리교회는 참교인, 모범적인 예표가 되는 교회라는 칭송을 받을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목회를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올해 목표를 '장벽을 허무는 교회'로 정했다. 어떻게 하면 내리감리교회가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착하고 충성된 일꾼을 많이 길러내고 많은 장벽을 허물어내는 일에 앞장설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나아가 인천과 한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나가는 그런 진취적인 교회가 되는 것이 김 목사의 목표다.

2004년 김 목사 부임 이후 내리감리교회는 은혜가 풍성한 교회, 아름다운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희망찬 교회로 거듭나고 있다. 격년으로 한 해는 아버지학교, 또 한 해는 어머니학교를 열어 교인들이 행복하고 모범적인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양육하고 있다.

김 목사는 또 지역사회를 위해 세 가지 기본적인 사역을 하고 있다. 인천 중구 지역이 날로 공동화되면서 어려운 이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우선 월요일마다 200명에게 사랑의 점심을 대접하고 있다. 또 매년 4월5일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첫발을 디딘 역사적인 날로 정하고 입항기념 문화 축제를 연다. 형편이 좋지 않아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이들을 위해 예배당을 식장으로 제공하고 주례를 서주는 등 지역 주민들을 섬긴다. 충북 충주고와 감신대를 나온 김 목사는 1990년 미국 텍사스주에 있는 남감리교 대학(SMU)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인 교회에서 미국인 목회와 한인 교회 목회로 주목받다 2004년부터 제26대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윤중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