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대문로 5가 금호아시아나빌딩(구 대우빌딩) 뒤편 동산에서 서울역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대문교회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석조건축물이다. 건물을 지을 때 민족성을 빼놓지 않았던 건축가 박동진이 만든 작품이라 영락교회와 많이 닮았다. 1970년대 말에 개봉한 '영자의 전성시대'를 보면 야간열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한 이들이 서울역에 내려 십자가를 보며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십자가 교회가 바로 남대문교회다. 지금은 빌딩 숲에 가려 잘 안 보이지만 당시에는 서울역에서 정면으로 십자가가 우뚝하게 보였다. 한국전쟁 땐 피란민들의 안식처였고 약속장소이기도 했다. 도시산업화 시기에는 서울에서 가장 상징적인 교회 중의 하나였다.
#병 있는 사람 제중원으로 가시오
남대문교회(예장통합)는 지난 14일 펴낸 남대문교회사에서 "남대문교회는 1885년 6월21에 창립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앙공동체(비조직교회)"라고 밝혀 교회사가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남대문교회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심에 서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한국교회사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 위주로 기술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각각 한국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감리교와 장로교의 대표적인 선교사로 추앙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들보다 먼저 들어와 선교의 초석을 다지고 구호활동을 폈던 호레이스 알렌(1858∼1932)에 대한 대접은 아직도 박한 편이다.
"하나님? 감사함/속담에 니라기를 밥잘먹기는 하나님덕이라하되… ? 가라처 줄 일은 서울 제중원에 고양한 영국 의원이 치료하오니 병잇는 사람들은 그리로 가시오"(제중원 전도지)
처음엔 선교활동을 할 수 없었지만 제중원(濟衆院·세브란스병원 전신) 홍보 전단에는 복음이 실렸다. 선교사가 한 명도 없던 시절 1884년 9월20일 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알렌이 제물포항에 발을 디디면서 복음의 씨앗은 뿌려졌다. 알렌은 이듬해 4월9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하고 의료선교활동을 폈다.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살려낸 공을 인정받은 알렌은 의료사업만 하지 않고 선교활동도 병행했다. 생명을 구하는 일이 곧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제중원은 전통 의술에서 할 수 없는 치료를 할 수 있게 됐으며 서양과 한국문명이 만나는 장소였다. 알렌은 병든 한국 사람이라면 신분을 구분하지 않고 누구나 치료해줬다. 이곳은 치외법권 지역이라 당시 나라에서는 금지된 예배도 가능했다. 알렌의 공로로 세워진 제중원은 향후 선교사들이 입국하는 관문이 됐다. 1885년 4월5일에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입국해 본격적인 의료 활동과 교육사업을 펼쳤다. 제중원은 선교가 자유로워질 때까지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했던 창구였다. 제중원은 한국교회의 '못자리'였으며 남대문교회의 모태가 됐다.
#서울역 앞 남대문교회서 만나자
일제강점기 말 가장 암울했던 때에 서울 도성에서는 유일하게 새벽마다 기도회를 가지며 영적애국운동을 벌인 곳이 남대문교회이다.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오래 생존했던 이갑성과 세브란스 1회 졸업생 김필순, 정형외과의 태두 이용설, 생리학자 김명선 박사 등 의사들이 많이 배출됐다. '동무생각'을 지은 작곡가 박태준, 배우 김혜자, 성악가 이규도 등도 남대문에서 배출한 인물이다. 구호의 천사로 불리는 배우 김혜자 권사는 유치원 때부터 다니고 있다.
내년으로 창립 124년을 맞는 의료선교의 산실인 남대문교회는 도심 속의 오아시스와 같은 교회다. 한국 전쟁 땐 교회마당에 솥을 걸고 피란민들의 허기를 채웠다. 근대화가 한창 진행되던 때까지만 해도 "서울역 앞 남대문교회에서 만나자"고 할 정도로 만남의 광장이었다. 외환위기(IMF) 이후 노숙인 사역, 탁아방 운영, 개안수술, 사랑의 쌀나누기 운동, 외국인근로자 진료소에 이르까지 이 땅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고 있다.
알렌, 헤론, 에비슨 등 선교사에 이어 박종찬 목사가 초대목사였고 현재 12대 조유택 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공덕교회와 청량리 중앙교회 등 25개 교회를 세웠다. 우즈베키스탄 등 21개국에 26명의 선교사를 보내는 등 해외선교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한국의 역사교회―⑦ 남대문 교회] 1885년 제중원 첫 예배 ‘한국교회 못자리’ |
남대문교회사에 규정하고 봉헌예배… 창립연도 논의 마침표
남대문교회는 지난해에 3가지 일을 계획했다. 먼저 알렌 기념관을 비롯해 본당 1, 2층의 리모델링 공사와 최신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하는 프로젝트였다. 마침내 지난 9월21일에는 교회 리모델링 감사와 파이프오르간 봉헌 예배를 드렸다.
또한 14일에는 남대문교회사를 발간하고 봉헌 예배를 드렸다. 30년 만에 새로 쓴 이번의 교회사에서는 당시 선교사들이 함께 예배를 드렸던 제중원의 신앙공동체(남대문교회의 뿌리)를 '한국교회의 못자리'라고 규정했다.
신재의 역사편찬위원장은 "남대문교회는 제중원에서 예배를 드린 것을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우리 교회의 시작이 한국교회의 시작이고 한국교회의 시작이 남대문교회의 시작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한국의 모(母)교회가 남대문교회라는 근거로 알렌의 일기를 제시했다. 1885년 6월1일 알렌이 쓴 일기에는 "우리는 오늘 저녁 8시 저녁 식사 후 우리의 첫 일요일 예배를 보았다. 첫 일요 예배에는 헤론 박사 부처와 스크랜턴 의사의 어머니, 나와 그리고 내 아내 등이 참석했다"고 했다. 이 공식 주일예배는 제중원을 중심으로 이어졌고, 한국인들이 참석하게 됐다는 것이다.
교회사를 쓴 영남신학교 정성한 교수는 "이 땅의 역사 속의 모든 교회들은 예배공동체를 통해 시작된다"면서 "남대문교회사를 계기로 오랫동안 지속돼온 교회의 정확한 창립연도에 대한 논의에 마침표를 찍게 됐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사실 한국교회에는 아직도 그 설립연도를 확정짓지 못한 교회들이 많이 있다"며 "선교사들의 보고에 나타나는 설립연도와 실제로 교회 안에서 구전되어 오는 설립연도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윤중식 기자 |
[한국의 역사교회―⑦ 남대문 교회] 순교자의 아들 조유택 담임목사
“믿음의 유산 이어 성숙한 교회로 발전 ”
조유택(사진) 담임목사는 순교자의 아들이다. 조 목사의 부친 조석훈 목사는 1950년 10월14일 공산군에 의해 순교를 당했다. 그 순교의 피가 4남3녀를 모두 목회자 가족으로 만들었다.
"늦게 신학을 공부하신 아버지는 18년 만인 1948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했어요.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등의 찬송가를 부르셨던 기억이 납니다."
조 목사는 어린시절 부친이 즐겨 불렀던 찬송가를 지금도 역시 좋아한다. 그러나 학창시절엔 그렇지 않았다. 7남매를 남기고 떠나신 것(희생)이 이해가 안 돼 반항아로 자랐다고 고백했다. "학창시절엔 너무 가난해서 점심 때 물만 먹었어요. 그래서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자랐어요. 목사가 될 생각은 꿈에도 없었어요."
그러던 그에게 인생일대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다. 연세대 2학년을 마치고 3학년 1학기 등록을 하러 갔다가 폐결핵 환자라는 이유로 등록이 거부돼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삼각산 제일기도원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를 잃고 천신만고 끝에 피란 왔는데 폐병에 걸려 학교도 다닐 수 없게 됐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원망스러웠어요. 원망도 많이 했죠. 마침내 무릎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어요. 살려만 주시면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지요."
원래 꿈이 교사나 교수였던 그는 6개월 만에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해 복학해서 1964년 졸업했다.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서 공부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플 때 약속한 것을 벌써 잊었느냐는 음성을 듣고 3일간 금식기도한 뒤 목회자가 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장신대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아버지가 순교하셨다는 것이 자랑스러웠어요. 2세기의 교부 터툴리안이 그리스도의 피가 씨앗이라고 한 말씀이 가슴에 닿았어요. 예수님의 은혜로 피란 와서 병 고침 받고 목사가 돼 콧물, 눈물범벅이 됐죠."
가족들을 돌보지 않고 순교한 아버지를 원망했던 아들이 마침내 믿음의 유산을 받아 한국의 대표적 역사교회인 남대문교회의 정신적인 지주가 됐다.
조 목사는 늘 성장보다는 성숙한 교회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모님의 믿음의 유산이 그 가문의 전통을 만들지요. 선교사들이 이 땅에 오셔서 선교의 씨앗을 뿌렸는데 오래된 교회로서 역할을 잊지 않겠습니다."
윤중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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