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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교회―⑤ 상동교회] ‘주님 닮은’ 민중목회 산실

영국신사77 2008. 12. 6. 23:17

[한국의 역사교회―⑤ 상동교회] 이땅 가난한 자와 함께 ‘주님 닮은’ 민중목회 산실
                                                                                                            2008.12.02 00:44:25

생기목자(生氣牧者). 오는 25일로 취임 3주년을 맞는 서울 남창동 상동교회 서철(51) 담임목사는 남대문시장 상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목회자가 되고 싶어한다. 120년의 유구한 역사의 민족교회를 이끌고 있는 서 목사는 6대 담임목사였던 전덕기(1875∼1914) 목사를 사표로 삶고 있다. 고관대작들의 터전이던 정동을 마다하고 서민들의 삶속으로 파고 들었던 W. B. 스크랜턴(1834∼1909) 선교사의 소명을 잇고 싶어서다. 서 목사가 목회 모델로 삼은 전 목사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중목회자이면서 복음주의 신학을 표방했다. 요한 웨슬리가 말했던 아름다운 중용의 길이었다. 서 목사는 전 목사의 이 같은 목회철학을 본받아 민족정신을 살리고, 교회의 영성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나아가 남대문시장 상인들과 가난한 자의 이웃으로 더 가깝게 다가서겠다는 각오다.

◇'나막신과 마른 쑥'은 필수 휴대품=전 목사는 후배 목사들에게 나막신과 마른 쑥, 의지(약식 관)를 상비하고 있어야할 3가지 물품이라고 가르쳤다. 연고자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장례를 치를 때 부패한 시체에서 흘러나온 체액 때문에 나막신을 신고 방에 들어가 마른 쑥으로 코를 막고 악취를 참아가며 의지에 시체를 담아 장례를 치렀던 경험에서 나온 교훈이었다.

그가 목회지역으로 선택한 남대문 일대의 상동지역은 양반들과 상류층이 사는 정동과는 180도로 달랐다. 상동은 구한말 가난하고 소외된 백성들의 거처였다. 당시는 전염병이 돌면 돌볼 이 없는 사람들이 죽어도 누가 나서서 장사 지낼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이때 전 목사는 코에 마른 쑥 한 줌을 틀어막고, 나막신을 신은 채 시신이 부패해 물이 흐르는 방에 들어가 손수 시신을 수습했다. 이런 행적 때문에 전 목사는 '나막신과 마른 쑥'으로 명성이 높았다.

전 목사는 서울 정동에서 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컸다. 그러다 17세에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을 만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2의 인생을 맞는다. 특히 스크랜턴이 상동지역에서 시작한 민중선교와 목회, 그리고 엡윗청년회로 불리는 청년목회가 전덕기의 생애와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펜젤러가 정동을 중심으로 왕실과 중산층 이상을 대상으로 시작한 선교와는 차원이 달랐다. 진정한 기독교 정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믿음의 본보기였다. 스크랜턴도 전 목사가 후임목사로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해방 직전 강제로 문닫는 수난=민족운동의 산실이었던 상동교회는 해방을 1년 앞두고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는다. 이후 해방이 되고 민족상잔의 비극을 끝난 다음에야 닫혔던 교회의 빗장이 열렸다. 뿔뿔이 흩어졌던 성도들이 다시 모여 교회 재건에 나섰다. 59년 박설봉 목사가 23대 담임을 맡으면서 교회 재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73년에는 삼일중학교와 삼일실업고교를 운영하고 있던 삼일재단을 인수하고 76년 현재의 예배당으로 신축한다. 이듬해에는 건물선교와 수익사업을 펼쳐 학원선교와 사회봉사를 한다는 명분으로 새로나백화점을 개설한다. 그해에는 또 서울감리교신학교(협성대학교)를 설립했으며 많은 지교회를 설립했다. 장안의 명물이었던 새로나백화점은 외환위기(IMF) 직후에 문을 닫았지만 일반 상가는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다.

서 목사는 서울에 대형교회가 생기기 전 사대문 안에 기념비적으로 세워진 교회의 소중한 건물이 상업적인 이미지를 벗고 21세기 세계 선교센터로 새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다. 지난 10월 펴낸 교회지 '상동' 특집호에서 성도들에게 "낡은 이데올로기로서의 국수적인 민족교회나 급진 좌파들의 이데올로기 개념으로서의 민족교회를 넘자"며 "세계 평화를 기여하는 거룩한 민족교회로 거듭나자"고 촉구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제로 서 목사는 소외받는 계층을 위해 헌신한 스크랜턴 선교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전 목사가 열정을 쏟았던 민족교회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 목사는 "지금은 무엇보다도 민중 목회를 회복하는 일이 우선"이라며 "남대문 상인의 친구가 되었던 상동교회가 다시 소외받는 사람들을 향해 문을 열겠다"고 말했다.

◇감리회를 위한 무기한 비상금식기도회=11월 28일 오전 10시. 상동교회 7층 소예배실에선 감리회를 위한 비상금식기도회가 열렸다. 감리회 원래의 영성 회복과 웨슬리 신앙 정신이 감리회 전체교회에 회복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하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기도회는 감리회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계속된다.

안병화 사무장은 "평신도와 목회자가 함께 진정으로 주님만을 위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철저히 주님께 맡기는 의미로 시작됐다"고 기도회의 취지를 설명했다. 금식 기도회는 상동교회와 선한목자교회, 부광교회, 용두동교회 등 지방 교회 여러 곳에서 100여명이 참석했다.

금식기도회는 찬양과 말씀과 기도형식으로 이어진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진행된다. 성령님께서 말씀하시는 감동이 있는 분이 나와서 기도제목을 말하고 다함께 합심해 간절히 기도한다. 오후 1시 이후에는 무기한 릴레이 기도에 들어간다.

안 사무장은 "교회 8층에는 24시간 금식기도회 기도실을 마련하고 지원하고 있다"면서 "주님께서 감리회의 향방을 알려주실 때까지 기도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회 민족교회연구소 김종설 소장은 "스크랜턴 선교사의 정신을 계승해야겠다는 의미에서 세계 선교의 중심역활을 하는 교회가 돼야 한다"면서 "전덕기 목사의 구국신앙정신을 잇는 교회, 통일을 대비하며 기도하는 교회로 거듭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동교회는 남대문시장을 찾는 상인들에게도 24시간 개방하고 있다. 매주 월요일 오후에는 남대문 주변의 한국은행 롯데 KT SK 등 직장인성경공부(BBB) 모임도 열린다.

서 목사는 "일제 암흑기에 애국지사들이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기도했듯이 성도들과 국내외의 성도들이 찾아와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언제나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성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남대문 시장 상인들의 친구같은 서 목사는 "교회건물 전체가 선교센터로서 활용되도록 현재 노력 중이며, 조만간 이러한 기도가 명실 공히 민족의 중심에 우뚝 섰던 상동교회의 옛 모습을 되찾을 것"이라고 환하게 웃었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한국의 역사교회―⑤ 상동교회] 헤이그 밀사사건·신민회 창립… 전덕기 목사 주도

상동교회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수많은 인재들을 길렀다. 구한말 상동교회는 남학생과 여학생을 위한 초등학교인 공옥학교를 설립했다. 뒤이어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청년운동 그룹이 형성된다. 이른바 '상동파'로 불리는 그룹 안에서 '헤이그 밀사사건'의 기획과 실천이 이뤄졌다. 그 중심에는 전덕기 목사가 있었다.

초기에는 스크랜턴의 지시와 도움을 받았지만 전 목사의 활동은 점차 확대돼 독자적인 민족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경향은 상동교회 청년회가 결성되면서 본격화해 1905년 을사늑약을 겪으면서 절정을 이른다. 전 목사는 안창호 윤치호 등과 함께 1907년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만든다.

상동파는 또한 주시경 선생을 통해 민족운동의 차원으로 한글보급운동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전 목사는 을사늑약 이후 어깨에 도끼를 메고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시위하며 조약무효 상소운동을 벌였다. 그와 함께한 대표적 동지들이 백범 김구 최재학 이준 이동녕이다.

이때부터 전덕기와 상동파는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의 핵으로 떠오른다. 이동휘 노백린 안태국 남궁억 신채호 최광옥 차병수 이승훈 이상설 최남선 이상재 김진호 양기탁 주시경 이회영 유일선 이승만 등이다. 전덕기 목사에게 신앙과 민족은 하나였다. 스크랜턴 선교사가 표방했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이라는 복음의 내용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조선독립의 근원으로 상동파와 신민회를 지목한 일제는 전 목사가 눈엣가시였다. 1911년 105인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석방된 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4년 옥중 고문 후유증으로 숨을 거뒀다. 당시 남대문시장의 상인은 물론, 기생과 걸인들까지 통곡하며 상여꾼을 자청했으며 그 인파가 10리 밖까지 이어졌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전 목사가 떠난 뒤에도 민족운동은 계속됐다. 19년 3월1일 삼일운동을 주도한 민족 대표 33인 중 최석모 오화영 이필주 신석구 4명이 상동교회 출신이다.

윤중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