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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교회―③ 승동교회] 부흥·독립운동 앞장 115년

영국신사77 2008. 11. 18. 22:46
2008.11.17 22:03:29

      [한국의 역사교회―③ 승동교회]

                  부흥·독립운동 앞장 ‘민족 신앙의 산실 115년’


차(茶)와 묵향(墨香), 고전과 현대가 살아 숨쉬는 서울 인사동에서 115년 동안 '복음의 향기'를 뿜어내는 교회가 있다. 구한말 계급철폐의 깃발을 들어 '백정교회' '상놈교회'로 불리던 승동(勝洞)교회. 근·현대사의 영욕과 함께한 민족 신앙의 산실이다. 여운형 이동녕 노백린 등이 애국기도를 드리던 곳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승동교회 청년면려회장 김원벽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학생대표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하며 기미독립선언문을 나누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래서 교회 본당 앞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시에서 만든 표석이 세워져 있다. 1993년에는 '3·1운동 유적지'로 지정됐으며, 2001년에는 본당 건물이 서울시로부터 유형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받고 인사동 터줏대감이 됐다.

1893년 ‘곤당골교회’로 시작

한국교회사의 살아있는 역사교육장인 승동교회는 100년 동안 인사동 골목 한참 안쪽에 웅크리고 있다. 대일빌딩 맞은 편 노암갤러리와 한국관광명품점 사이 골목으로 들어서면 왼쪽 담벼락에 붙은 조그마한 교회 간판이 보인다. 골목 끝까지 들어가면 삼성종로타워 빌딩이 큼직하게 다가오고 왼편엔 한옥 예배당이, 오른편엔 본당 건물 등이 눈에 들어온다.

문화재인 예배당과 교회 본당 등 주요 시설은 너무 낡아 외형만 살린 채 전면 리모델링 중이다. 예배는 인근 빌딩 교육관에서 드린다. 공사는 지난해 12월부터 시작해 내년 2월까지 계속된다. 올해 17년째 교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박상훈(54) 목사는 "현실에 만족해 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려 하지 않는 현재지향적인 교회가 되면 안 된다"면서 "부단히 뛰고 달리는 미래지향적인 교회가 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승동교회는 1893년 미국의 선교사 사무엘 무어(1860∼1906) 목사와 16명의 성도들이 세웠다.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던 곳은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였다. 그 당시 교회 앞에는 실개천이 흘렀다. 주변에 고운 담장들이 둘러쳐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곤담골 또는 부르기 좋은 곤당골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교회의 처음 이름은 곤당골교회였다. 1899년에는 한국에 있는 모든 교회들 가운데 중앙적인 역할을 잘 감당해야다는 각오로 '중앙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이때부터 모든 운동의 중앙이 됐다. 기도운동과 부흥운동의 중심이었다. 나라를 빼앗겼을 때는 독립운동의 중앙이 되기도 했다.

1904년 승동교회는 곤당골에서 홍문섯골, 구리개(洞峴)를 거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당시에는 이곳을 인사동으로 부르지 않고 '승동(承洞)'이라고 불렀다. 현재 조계종이 있는 지역을 사동(寺洞), 곧 절골이라고 했다. 사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에서 '이을 승(承)'자를 넣었다.

1907년 유명한 부흥 목사였던 길선주 목사가 강사로 참석한 경기도 연합 사경회가 열렸는데 그때 길 목사가 설교 도중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승동교회는 교회 뒤에 있는 사동, 곧 절골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승동교회는 앞으로 모든 면에 있어서 한국 교회의 모범이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처럼 이을 승(承)자를 쓰지 말고, 이길 승(勝)자를 쓰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첫 백정 출신 장로… 신분타파 실천

곤당골 교회를 세운 무어 목사는 훗날 승동교회로 발전하는 역사와 불가분의 인물인 백정(白丁)인 박성춘(朴成春)을 만난다. 박성춘은 어느 날 매서인(賣書人)들이 길거리에서 파는 복음서를 집어 들고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성춘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들 봉출(박서양)을 곤당골의 소학교에 입학시킨다. 봉출은 훗날 국내 최초의 외과의사가 된다. 박씨는 백정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교회에 나간 지 1년 만에 세례를 받았다.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는 갑오개혁이 있었다. 양반과 평민의 신분타파, 백정과 광대 등 천민신분 폐지, 공사노비 제도 폐지, 인신매매 금지 등의 법령이 공포됐다. 그가 자기의 이름을 성춘이라고 지은 것은 예수를 믿은 이후였다고 추측된다. 1895년 박성춘은 백정에게도 평등한 인권을 달라는 내용의 소지(訴志)를 올렸다.

당시 조선은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백정들은 갓을 쓰거나 도포를 입을 수 없었다. 곤당골 교회가 설립된 지 1년이 되자 교회에는 어느새 20여명이 모여들었다. 이 가운데 백정이었던 박성춘이 세례를 받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양반들은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다며 무어 선교사에게 항의했다.

"우리가 어떻게 백정들과 예배를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박성춘은 양반에게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말을 좀 해보라"면서 따졌다. 화가 난 양반은 욕설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무어 선교사는 성경책을 펴들고 설득했다. "예수 안에서는 양반과 천민이 따로 없습니다. 다 같이 예수 믿으면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형제자매입니다."

본당 건물 서울시 문화재 지정

그러나 양반들은 결코 곤당골교회로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무어 선교사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홍문섯골(현 광교 근처)교회를 설립하고 따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박성춘이 소지를 올린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4월 마침내 백정들의 소원을 허락한다는 것과 망건을 쓰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도포를 입어도 좋다는 회답이 왔다. 무어 목사는 당시의 백정들이 기뻐하던 모습을 일기에 남겼다.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선언을 들었던 흑인들의 기쁨도 앞으로 갓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조선 백정들의 기쁨만큼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백정은 너무 좋아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갓을 쓰고 있었다."

1911년 12월4일에는 한국 교회사상 최초의 백정출신 박성춘 장로가 탄생했다. 박 장로의 큰 딸 박양무는 단재 신채호의 아우였던 산부인과 의사 신필호 박사와 결혼해 계급타파를 실천한 주인공이 됐다.

박 목사는 "지난 날 승동교회는 교단 분열의 중심에 선 교회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셨다"면서 "이제 내년이면 교단이 갈라진 지 50년이 되는 희년을 맞는 해로 우리 교회가 새롭게 거듭나는 제2의 승동시대를 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한국의 역사교회―③ 승동교회]

                  교단 분열 상징 딛고 연합운동 새 장 개척


한국장로교는 지난 1959년 9월 서울 승동교회에서 44차 총회를 치르던 중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등 에큐메니컬 운동을 놓고 이념 갈등을 빚었다. WCC 가입을 반대하는 승동파, 찬성하는 연동파로 갈라져 각각 승동교회와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이후 승동파는 예장합동교단으로, 연동파는 예장통합교단으로 분열돼 한국장로교의 핵분열을 가져왔다.

50년도 초기에는 고려파와 기장파, 총회파라는 3분파로 분립돼 있었다. 승동교회는 그 중 가장 큰 총회파에 속했다. 승동교회는 언제나 회합장으로 사용됐다.

양측은 서로가 총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문제를 두고 대치하게 됐다. 59년 9월28일 대전에서 열린 제44회 총회는 개회 벽두부터 벌어진 두 파의 치열한 싸움으로 중단됐다. 총회는 11월23일 승동교회에서 속개하기로 하고 정회하자는 증경총회장들의 제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 결정에 불만을 가진 통합측 회원들은 이튿날인 9월29일 새벽 특별열차 편으로 서울로 올라와 연동교회에서 오전 10시 전필순 목사의 사회로 단독 속회를 열었다. 11월23일 승동교회에서 열린 총회는 합동측만 참석했다. 연동교회에서 단독 속회를 가졌던 통합측은 60년 2월27일 새문안교회에서 한경직 목사의 사회로 통합총회를 열었다.

총회파가 두 쪽으로 나뉘자 지역 교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양분됐다. 양측 성도들은 제각기 예배당을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다. 승동교회는 마침내 교회 분열의 진원지 신세가 됐다. 통합측과 합동측 싸움은 마침내 법정 투쟁으로 발전했다. 연동교회측은 60년 10월 승동교회를 상대로 서울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듬해 7월29일 서울고등법원은 원고기각 판결을 내렸다.

한국장로교 분열의 현장인 승동교회와 연동교회(담임 이성희 목사)가 분열 43년 만인 2002년 처음으로 강단 교류를 시행, 한국 교회 연합운동의 새로운 장을 이어가고 있다.

                                                                                       윤중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