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03 10:3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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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엔 배재학당 안에 인쇄 시설이 마련됐다.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인쇄소는 한글, 영어, 한문 등 세 종류의 활자를 구비했다는 의미에서 '삼문출판사'로 불렸다. 독립신문, 죠션그리스도인회보 등의 신문과 초기 찬송가도 여기에서 출판됐다. 현대식 예식인 '예배당 결혼'이 최초로 거행됐다. 1887년 11월 여성 전용 병원도 생겼다. 1910년 11월11일에는 한국 기독교 최초의 여선교회인 '보호여회(保護女會)'가 창립됐다. 제5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현순 목사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제6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손정도 목사는 교회를 부흥시킨 민족 운동가였으며, 제7대 담임을 역임한 이필주 목사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 2년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는 고난을 겪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한 때부터 일요일이면 정동제일교회 예배에 참석하며 겨레와 함께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2004년에는 직장인 예배를 활성화시켰다. 매주 수요일 낮 12시10분 주변 직장인을 대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애찬을 나눈다. 직장인들이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평화를 맛보는 기회로 삼는다. |
2008.11.03 17: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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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시청 주변서 직장인에 복음 전하는 윤용구 권사 "안녕하세요. 정동제일교회 거리전도대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복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서울시청 주변에서 매일 아침 출근길 직장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윤용구(66·사진) 권사. 처음에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음료수를 건네는 사람들도 많다. 윤 권사의 전도 열정은 출근길 직장인뿐만 아니라 정동제일교회마저 바꿔놓았다. 1년전부터 매주 토요일 교회 앞마당에서 열고 있는 길거리 전도에는 여러 명의 교인들이 동참하고 있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정동제일교회는 냉랭하기 그지 없었어요. 수십년간 교회 생활하면서 '부흥'이란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죠. 새벽기도회도 몇 명 나오지 않았어요. 전도하는 사람도 전무했고요." 정동제일교회는 지난해에만 350명이 새로 등록했다. 10년전 1200장을 찍어내던 교회 주보도 지금은 2500장으로 늘어났다. 이 같은 변화를 주도한 이는 지난해 새로 부임한 송기성 담임목사다. 성도들의 기도와 땀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변화의 주역은 역시 윤 권사다. '평신도 부흥사'란 그의 별명처럼 뜨거운 그의 전도 열정이 조금씩 엘리트 성도들에게 옮아갔던 것이다. '길거리 전도자' 윤 권사의 배경은 화려하다. 그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이다. 아버지는 서울대 초대 민선 총장인 윤일선 박사다. 그런 그가 거리전도를 시작한 건 14대 총선에서 낙선하면서다.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리던 그는 생계를 위해 가전제품 판매를 시작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그를 재기시킨 건 오산리기도원에서의 기도였다. 깊은 기도 가운데 원망과 저주가 기쁨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처럼 세상에서 절망한 사람들을 위해 거리의 전도자로 나섰다. 윤 권사는 평신도로서는 드물게 웨슬리전도학교 강사로도 참여하고 있다. 윤 권사는 "전도는 나를 살리고 정동제일교회와 한국교회를 살리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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