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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교회―(1) 정동제일교회] 1885년 아펜젤러가 세운 교회

영국신사77 2008. 11. 18. 22:42

2008.11.03 10:35:58

  [한국의 역사교회―(1) 정동제일교회]

             1885년 아펜젤러가 세운 신문화 운동 요람


 한국교회의 역사는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독특하다. 전래된 과정도 그렇고 교회의 성장과 시련 등이 모두 경이적이다. 한국교회는 독립운동의 견인차였고 사회를 깨끗하게 하는 소금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성장 위주로 치달으면서 부작용도 낳고 있다. 교권 다툼이나 진보와 보수, 계파간 주도권 대립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선교 2세기에 들어선 한국교회에 소모적인 논쟁과 다툼을 극복하고 거듭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교회 창립 100여년이 넘은 교회를 탐방, 어제와 오늘의 흔적을 살펴봄으로써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선교 좌표를 모색해본다.

1885년 4월5일 부활절 아침. 동방의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로 미북장로교 소속 언더우드와 인천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딘 헨리 아펜젤러(1858∼1902) 부부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간절하게 기도했다.

"우리는 부활절 날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죽음의 철창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와 빛을 허락해 주옵소서."

◇개신교 유일한 문화재 예배당=덕수궁 돌담길을 걷다보면 개신교 유일한 문화재 예배당인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문화재 사적 256호)이 두 팔을 들고 성도들을 부른다. 123년전 7월 말 이곳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8월3일부터 한국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10월11일에는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성찬식을 집례했다. 정동제일교회는 이날을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1886년 6월8일 정식으로 학교 문을 열었다. 1887년 2월 고종 황제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교명을 내렸으며, 매리 스크랜턴이 운영하는 여학교 이름은 이화학당(梨花學堂)으로 불렀다.

남녀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벧엘예배당에 모였다. 예배당 건물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한국 최초의 빅토리아식 고딕 적벽돌 서양 건축물이다. 설립 당시에는 장안의 명물로 구경하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기도 했다.

강단의 강대상은 한국 개신교 최초의 것으로, 이후 한국 개신교의 모든 교회가 같은 형태로 제작해 사용하고 있다. 또한 한국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 세상을 깨운다는 '경세종(警世鍾)' 등도 자랑거리. 이 파이프 오르간을 중심으로 현대식 성가대가 구성돼 김애식 김인식 김자경 김영의 이흥렬 현제명 등 많은 음악인이 배출됐다. 파이프 오르간은 6·25전쟁으로 소실됐었는데, 2003년 9월12일 고 이종덕 권사 유족의 헌금으로 복원해 봉헌했다.

◇복음의 씨앗이 민족의 등불로=정동교회 교인의 대부분은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로 구성됐다. 두 학교 학생들은 주일성수를 지켰으며, 엡윗(존 웨슬리의 고향 이름)청년회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서재필과 윤치호 등 독립협회 중심 인물들이 이들을 지도했다.

 1887년엔 배재학당 안에 인쇄 시설이 마련됐다.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인쇄소는 한글, 영어, 한문 등 세 종류의 활자를 구비했다는 의미에서 '삼문출판사'로 불렸다. 독립신문, 죠션그리스도인회보 등의 신문과 초기 찬송가도 여기에서 출판됐다. 현대식 예식인 '예배당 결혼'이 최초로 거행됐다. 1887년 11월 여성 전용 병원도 생겼다. 1910년 11월11일에는 한국 기독교 최초의 여선교회인 '보호여회(保護女會)'가 창립됐다. 제5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현순 목사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제6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손정도 목사는 교회를 부흥시킨 민족 운동가였으며, 제7대 담임을 역임한 이필주 목사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 2년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는 고난을 겪었다. 유관순 열사는 이화학당에 입학한 때부터 일요일이면 정동제일교회 예배에 참석하며 겨레와 함께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우남 이승만과 정동제일교회의 인연은 그가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 시작됐다. 재학 시절 서재필의 지도 아래 협성회, 독립협회 등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투옥된다. 이승만은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뒤 40여명을 개종시켰다. 해방이 되자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했고, 1948년 8월15일 마침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한반도 짊어질 NEW 정동의 꿈=정동제일교회는 선교 2세기를 맞으면서 복음에 빚진 교회로서 베풀고 나누는 교회로 거듭나고 있다. 알마티정동교회, 세네갈정동교회를 비롯해 해외 선교와 국내의 미자립교회 30곳을 지원하고 있다.

 2004년에는 직장인 예배를 활성화시켰다. 매주 수요일 낮 12시10분 주변 직장인을 대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애찬을 나눈다. 직장인들이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평화를 맛보는 기회로 삼는다.

 정동젊은이교회는 젊은이를 통해 민족의 새로운 미래를 개척했던 아펜젤러의 선교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세운 젊은이 신앙공동체다. 21세기 한국 사회와 세계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를 심는 크리스천 리더들을 양육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송기성 담임목사가 취임하면서 교회는 역동적으로 변했다. 새벽기도회와 금요기도회가 활발해졌으며 예배시간도 활력이 넘친다. 미래의 정동을 설계하기 위한 '발전위원회'도 가동 중이다. 발전위원회는 교회 본당 리노베이션 등 청사진을 마련하고 있다. 송 목사는 "교회의 마스터 플랜을 세우기 위해 선교와 교육, 재무, 목회 등에 대한 자료를 분석하고 있다"면서 "이를 토대로 정동교회의 SWOT(장점 약점 기회 위협)를 정확히 도출해 새로운 100년의 비전을 세워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

 

 

2008.11.03 17:51:26

[한국의 역사교회―(1) 정동제일교회] “전도는 한국 교회를 살리는 일”
 

 매일 아침 시청 주변서 직장인에 복음 전하는 윤용구 권사

 "안녕하세요. 정동제일교회 거리전도대입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복된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서울시청 주변에서 매일 아침 출근길 직장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윤용구(66·사진) 권사. 처음에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지만 지금은 음료수를 건네는 사람들도 많다.

 윤 권사의 전도 열정은 출근길 직장인뿐만 아니라 정동제일교회마저 바꿔놓았다. 1년전부터 매주 토요일 교회 앞마당에서 열고 있는 길거리 전도에는 여러 명의 교인들이 동참하고 있다. "몇년전까지만 해도 정동제일교회는 냉랭하기 그지 없었어요. 수십년간 교회 생활하면서 '부흥'이란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죠. 새벽기도회도 몇 명 나오지 않았어요. 전도하는 사람도 전무했고요."

 정동제일교회는 지난해에만 350명이 새로 등록했다. 10년전 1200장을 찍어내던 교회 주보도 지금은 2500장으로 늘어났다.

 이 같은 변화를 주도한 이는 지난해 새로 부임한 송기성 담임목사다. 성도들의 기도와 땀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변화의 주역은 역시 윤 권사다. '평신도 부흥사'란 그의 별명처럼 뜨거운 그의 전도 열정이 조금씩 엘리트 성도들에게 옮아갔던 것이다.

 '길거리 전도자' 윤 권사의 배경은 화려하다. 그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출신이다. 아버지는 서울대 초대 민선 총장인 윤일선 박사다. 그런 그가 거리전도를 시작한 건 14대 총선에서 낙선하면서다.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리던 그는 생계를 위해 가전제품 판매를 시작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그를 재기시킨 건 오산리기도원에서의 기도였다. 깊은 기도 가운데 원망과 저주가 기쁨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처럼 세상에서 절망한 사람들을 위해 거리의 전도자로 나섰다.

 윤 권사는 평신도로서는 드물게 웨슬리전도학교 강사로도 참여하고 있다. 윤 권사는 "전도는 나를 살리고 정동제일교회와 한국교회를 살리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