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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 지역(Black Africa) 선교사들

영국신사77 2008. 9. 29. 17:23

                      아프리카 지역(Black Africa)선교사들
                                                                 
 19세기초, 그 밖의 선교사들
                                                                                                   [Other Missionaries during the early 19th C.]

                                                                                                                              손윤탁  
  
  아프리카에 근대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세기 모라비안들에 의한 케이프 식민지 선교이다. 그후 런던 선교협회(London Missionary Society; LMS) 소속 화란의 의사인 존 데오도레 반데르캠프(John Theodore Vanderkemp)가 1799년 케이프타운에 도착하게 된다. 그래서 Stephen Neill은 반데르캠프, 존 필립(John Philip), 로버트 모펫(Robert Moffat), 그리고 그의 사위이자 친구인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을 아프리카 선교의 4명의 위대한 인사(Four great figures)라고 불렀다.

  19세기초에는 특별히 세 돌출 부분에 선교 기지(early 19C, Three major beachheads)가 구축되었는데,

 

                 서쪽은 시에라리온(Sierra Leone),

                 동쪽은 이디오피아 & 케냐(Ethiopia & Kenya),

                 남쪽은 케이프 타운(Capetown)

 

  이었다.

 

 

 

 


                                 
반데르캠프와 존 필립(J. T. Vanderkemp and John Philip)
                                             <반데르캠프(J. T. Vanderkemp), 1747~1811, 64세
  반데르캠프는 화란에서 10여년 동안 의사로 활약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거의 50세가 되었을 무렵,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내와 딸이 보트 사고로 익사하는 참변을 겪은 후에야 그는 깊은 신앙적인 회심을 체험하게 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증인이 되기 위하여 런던 선교협회(L.M.S.)의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자원하였다.

 

  그는 그의 세 동료와 함께 아프리카의 세 부족(Bushman, Hottentots, Kaffirs)과 접촉하게 되지만 반데르캠프는 주로 반투족인 가피르족과 깊은 관심을 가졌으나, 그의 선교 사업은 주로 호텐토트족에 집중되었다. 그는 아프리카 여인(Malagasy orgin)과 결혼을 하므로 동일시(identification)의 모본을 보이려 하였으나, 오히려 선교 지역의 백인들에게 적개심을 현저히 불러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도 하였다. 그는 1811년 죽었다.

 


                                                 <존 필립(John Philip)>

  반데르캠프와 마찬가지로 늦은 나이에 선교사로 부름 받은 또 한 사람의 선교사가 바로 John Philip(1775-1851, 76세)이다. 그는 44세에 S.M.S.의 선교부 책임자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30년 동안 그 직책을 수행하면서 오히려 흑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백인과 대항한 선교사로, 흑인들도 백인들과 동일한 교육을 받게 된다면 유럽인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보어인들이 영국인들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유 운동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불리는 필립은, '남아프리카 자유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어지기도 하였다.

  

                                      
로버트 모팻(Robert Moffat, 1795-1883, 88세)

  
남아프리카 선교회(South African Missions)의 창시자이며, 리빙스턴의 장인(The father-in-law of David Livingstone)으로 더 알려져 있는 선교사로, 50년 이상을 이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795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정원사의 기술을 배워, 1813년 정원사로 일하기 위하여 영국으로 이사를 하였다. 1814년[19세] 감리교 모임에 나가서 회심을 하게 된 그는 1817년 아프리카로 파송되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메리 스미스(Mary Smith)와 결혼하였다. 그 신부는 그가 영국에서 정원사 생활을 할 때의 주인집 딸로, 부모가 아프리카로 보낼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1819년 결혼하게 되었다. 그 후 53년을 행복하게 산 부부가 되었으며, 10명의 자녀 중 7명이 성장하여 그 중 5명이 모두 아프리카 선교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신혼여행을 통하여 찾게 된 쿠르만(Kuruman)이 그의 선교의 기지가 되었으며, 때로는 이들을 위한 외교가로 때로는 군사적인 지도자(직접 군대의 민간인 대장으로 만티티족과 전투를 하였음)로, 성경 번역가(1857년 성경번역 완성)로, 학교 건축을 통하여, 그리고 농지 경작을 위한 수로 건축을 위한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825년 쿠루만에 정착하여 1870년까지 48년을 고향처럼 지냈던 그는, 영국으로 되돌아 간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내 메리(Mary Moffat)가 세상을 떠났고, 모팻은 그 이후 13년 동안 온 영국을 순회하며 아프리카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한 선교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

  
앗시시의 프란시스나 쟌다크와 비길 수 있는 영웅이며, 아프리카 선교의 불을 댕긴 리빙스턴에 대하여 몇 줄의 글로 소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너무나 잘 알려진 리빙스턴이므로, 오히려 그의 생애와 사역을 간단하게 요약함으로서, 선교 운동사에 나타난 업적을 정리하려고 한다.

  1813년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그러나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난 리빙스톤은 오전6시부터 밤8시까지 방직 공장에서 일을 해야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라났으나 야간학교를 통하여 공부를 하였으며, 이미 10대 일 때 중국 선교사를 꿈꾸며 의학을 공부하려고 하였다. 1836년 23세의 나이로, 공장과 학교를 번갈아 가며 신학과 의학을 공부하여, 27세가 되어서야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끝내었다.

  그후 아편 전쟁으로 말미엄아 중국의 꿈이 무너지자, 선교회는 그를 서인도 제도로 보낼 계획을 세웠으나, 훗날 그의 장인이 될 아프리카의 베테랑 선교사인 로버트 모펫을 만남으로, 1840년 12월 영국을 떠나 13주 후인 1841년 3월 케이프에 도착하게 됨으로써, 아프리카 선교사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모팻 부부가 휴가를 다녀오는 동안 쿠루만을 중심으로 2년 반을 견습선교사로 있으면서, 그 중 무려 1년 이상을 탐험과 여행에 시간을 투자하였다. 1843년 그가 제2의 쿠루만을 꿈꾸며 나아간 지역은 물이 풍부하고 숲이 우거진 마보스타(Mabosta) 지역으로서 쿠루만에서 북쪽으로 300Km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이곳이 그에게 있어서는 아프리카 제1의 고향이자 사자와의 싸움에서 왼쪽 어깨에 큰 부상을 당하기도 한 곳이다. 사고를 당한 3개월 후 그는 쿠루만으로 가서 모팻의 장녀 메리(Mary)에게 구혼을 하였고, 1845년 1월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 후 메리 리빙스턴(Mary Livingstone, 1821-1862)은 남편과 함께 사역을 계속 하였다. 그러나 여자인 메리는 매우 힘든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둘째 아들을 해산한 후 바로(1847년) 남편은 세 번째 정착지를 찾아 나서게 됨으로 함께 7년이나 반유목민의 생활(a semi-nomadic life)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1850년에는 네 번째 아이를 낳자마자 메리는 중풍으로 투병생활을 하게 되고, 결국 아이는 죽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51년 또 다시 그의 가족을 이끌고 탐험 길에 나섰다. 이해 9월 또 다시 메리는 다섯 번째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리빙스턴은 그 이듬해(1852년 3월) 그의 아내 메리를 영국으로 돌려보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남편과 헤어진 5년 동안의 생활은 오히려 더 큰 고통과 고난, 빈곤의 삶 그 자체였다. 결국 그녀는 남편의 1차 휴가 기간을 영국에서 보낸 후인 1862년 4월 남편의 품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 

  리빙스턴의 대륙 횡단은 그의 가족들을 케이프타운에서 전송한 후 북쪽으로 돌아가 쿠루만에 잠시 머문 후, 아프리카 중앙에서 탐험을 시작하여 잠베지강(Zambezi River)을 따라 북서쪽 해안 루안다(Luanda) 해안에 이르는 코스였다. 그는 이 기간동안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잊지 않았으며, 성경 교육을 위하여 그림과 매직 랜턴(Magic Lantern, a slide projector)을 이용하였다. 그는 어떤 배의 선장의 호의로 영국으로 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동행한 마콜롤로 부족을 고향까지 데려다 주기 위하여 또 다시 동부로 길을 재촉하게 된다. 빅토리아 폭포는 바로 이때에 발견된 것이다.

  1856년 영국 방문을 통하여 국가적인 영웅으로 대접을 받은 그는 1858년 아프리카로 돌아가기까지 강연과 저술(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 새로운 선교회 설립을 위하여 힘썼으며, 아프리카를 구하기 위한 상업과 기독교 (Commerce and Christianity)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864년 다시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그는 1865년 나일강의 근원을 밝혀내기 위한 그의 세 번째 그리고 그의 생애 마지막 탐험을 시작하였다. 영양부족(malnutrition), 열병(fever), 빈혈(bleeding hemorrhoids) 등과 싸우며 나아간 그는 비록 나일강의 근원은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아프리카인들은 점점 그와 친숙해지기 시작하였다.

  리빙스턴의 사망 소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방문한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의 편집장 헨리 스탠리(Henry Stanley)의 출현이 그에게는 큰 힘이 되기도 하였다.

  스탠리가 떠난 1년 후인1873년 5월 1일 그는 평소 그가 하던 대로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아프리카인들은 이 노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심장을 꺼내어 그곳 므푼드(Mpund) 나무 아래 묻고, 시체는 아프리카의 뜨거운 햇볕에 말려 미이라로 만든 다음 2,400Km가 넘는 해안까지 운반하여 영국으로 돌려 보냈다.

  그의 시신은 많은 고관대작과 저명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국장으로 거행되어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안장되었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자식들, 먼저 사위를 보내어야 하는 78세의 모팻에게는 어느 누구보다도 큰 슬픔의 날이었다.

  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하여 리빙스톤과 그의 장인 모팻은 그 길을 열어 놓았으며, 수많은 추종자들은 그 길을 따랐다.

  그 외에도 19세기초의 선교사로 1838년 성공회 선교사로 에디오피아에서 축출을 당하였으나 아덴으로 피신하였다가 1844년 Kenya의 항구에 주재소를 두고 선교하다 그의 부인과 하나밖에 없던 그의 아들을 잃은 조한 루드비히 크래프(Johann Ludwig Krapf, 1810-1856)와 1846년 크라프와 합류하여 아프리카의 가장 높은 산인 케냐산과 Kilimanjaro산을 발견한 조한 레브만(Gohan Rebmann)과 같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여하튼 이들은 모두 19세기 후반으로 이어지는 많은 선교회와 선교 단체들, 학교와 모범 농장, 신학교, 현대 선교 사업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제도와 장치들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