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모팻(Robert Moffat, 1795-1883, 88세)
남아프리카 선교회(South African Missions)의 창시자이며, 리빙스턴의 장인(The father-in-law of David Livingstone)으로 더 알려져 있는 선교사로, 50년 이상을 이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795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정원사의 기술을 배워, 1813년 정원사로 일하기 위하여 영국으로 이사를 하였다. 1814년[19세] 감리교 모임에 나가서 회심을 하게 된 그는 1817년 아프리카로 파송되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메리 스미스(Mary Smith)와 결혼하였다. 그 신부는 그가 영국에서 정원사 생활을 할 때의 주인집 딸로, 부모가 아프리카로 보낼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1819년 결혼하게 되었다. 그 후 53년을 행복하게 산 부부가 되었으며, 10명의 자녀 중 7명이 성장하여 그 중 5명이 모두 아프리카 선교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신혼여행을 통하여 찾게 된 쿠르만(Kuruman)이 그의 선교의 기지가 되었으며, 때로는 이들을 위한 외교가로 때로는 군사적인 지도자(직접 군대의 민간인 대장으로 만티티족과 전투를 하였음)로, 성경 번역가(1857년 성경번역 완성)로, 학교 건축을 통하여, 그리고 농지 경작을 위한 수로 건축을 위한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825년 쿠루만에 정착하여 1870년까지 48년을 고향처럼 지냈던 그는, 영국으로 되돌아 간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내 메리(Mary Moffat)가 세상을 떠났고, 모팻은 그 이후 13년 동안 온 영국을 순회하며 아프리카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한 선교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원주민 원어 통해 阿 복음전파 물꼬선…
남아프리카선교회 창시자 로버트 모펫
[국민일보 2004-06-20 15:45]
남아프리카선교회(SAM)의 창시자 로버트 모펫(1795∼1883) 선교사는, 데이비드 리빙스턴 선교사의 장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복음전파자· 성경번역가· 교육자· 외교관· 탐험가 등의 역할을 잘 조화시켜, 아프리카 선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기록돼 있다.
모펫은 스코틀랜드 오미스톤 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했기 때문에 14세부터 정원사 기술을 배워야 했다. 1814년[19세] 그는 영국의 한 감리교 모임에 나가면서 성령세례를 체험했다. 스코틀랜드의 엄격한 칼뱅주의에 감리교적인 열정이 접목됐다.
이듬해 그는 런던선교회 회장인 윌리엄 로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선교사로 자원했다. 런던선교회는 1795년에 설립된 초교파 선교단체이다. 그러나 선교회는 선뜻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모펫은 로비 목사의 집 근처에 일자리를 얻은 뒤, 로비 목사에게 개인적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1년 뒤 다시 런던선교회에 지원,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1819년[24세] 그는 4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85일간의 항해 끝에, 아프리카 케냐의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아프리카의 문화와 선교 실상을 깨닫게 됐다.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의 식민지 정부 관계자들은 선교사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방해를 감수해야 했다. 아울러 선교사들의 비도덕성과 불화에 크게 실망했다.
같은 해인 1819년 24세 때 메리 스미스와 결혼한 뒤, 모펫 선교사는 쿠루만(Kuruman)에 선교베이스를 구축했다. 정원사 이력을 살려 그는 관개수로를 신설, 과수와 채소를 재배하고 정원을 만들었다. 베쿠아나족에게 경작과 추수를 맡겼다.
하지만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우리 일꾼들이 도둑질하는 노력을 농사일에 기울였다면, 대리석과 같은 땅이라도 옥토로 바꿔놓을 수 있을 텐데…” 모펫 선교사의 집은 여러 차례 털렸다.
그는 베쿠아나족과 만타티족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수완을 발휘했지만, 복음사역의 열매는 극히 미약했다. 이는 모펫 선교사가 베쿠아나족의 신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원주민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원주민 언어의 누가복음 번역으로 열매 맺기 시작
이에 모펫은 1827년부터 원주민 언어를 집중적으로 배웠다. 이어 누가복음 등 성경번역에 착수했다. 원주민 언어로 복음을 전하자,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선교 10년째인 1829년 첫번째 세례식을 거행했으며, 1838년 석조예배당을 헌당했다. 수백㎞ 떨어진 곳에서 원주민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찾아올 정로도 명성이 높아갔다.
1870년 53년간의 사역을 마친 모펫은 선교사를 은퇴하고 귀국했다. 쿠루만의 원주민 사역자들과, 그의 아들인 존 모펫이 모든 사역을 떠맡았다.
영국으로 귀국한 모펫 선교사는 13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면서 아프리카 선교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선교 부흥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
나를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지 마세요
● 시 119:103 /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 시 19:10 /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어느 날 아프리카 선교사 로버트 모펫에게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성경 한 권을 얻기 위해 25킬로미터를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선교사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라고요? 그럼 저는 빈손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저는 며칠 전 친구에게서 한 권의 책을 빌려 보았습니다. 그 책을 읽는 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책을 다시 가져가버렸습니다. 지금 저와 제 가족은 슬픔 가운데 있습니다. 참다운 행복을 주는 책이 지금은 없기 때문입니다. 가서 우리를 위해 제발 책을 가져다주세요. 분명히 어디엔가 한 권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저를 빈손으로 돌아가게 하지 마세요. 제발 한 번 찾아봐 주세요."
그녀의 간청에 선교사는 여기저기 뒤져서 다행히 성경을 한 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성경을 받아 든 여인은 얼마나 기뻤던지, 선교사의 손을 잡고 쉴 새 없이 입을 맞추면서 감사의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가슴에 꼭 안고 기쁨에 가득 찬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주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부어주소서.
시간과 분량을 정해 규칙적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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