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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초, 그 밖의 선교사들

영국신사77 2008. 9. 26. 00:44

                                        19세기초, 그 밖의 선교사들
                                                [Other Missionaries during the early 19th C.]

                                                                                  손윤탁   2001-01-11 00

 

 

 19세기를 선교의 위대한 세기(Great Century)라고 하는 만큼 많은 선교사들이 배출된 시기가 바로 이 때이다. 근대 선교의 아버지 (the father of modern missions)로 불리는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를 비롯하여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등은 물론 19세기 후반의 한국 선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19세기의 선교사들이다.

 

 그러나 이들 외에도 19세기를 위대한 세기로 만든 많은 선교사들이 있다. 1965년도 선교 연구 도서관(the Missionary Research Library of New York)에서 발간한 선교사 열람(An Initial Bibliography of Missionary Biography)에는 2,286명의 전임 선교사들의 자서전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는데, 그 들 중 대부분이 19세기의 인물 이라고 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본 고(稿)는 그 중에서도 19세기 초반의 선교사들을 선교지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물론 전(前)과 후(後)를 50년으로 정확하게 끊을 수 없음을 감안하여 1850년을 기준으로 하되, 서구 열강들의 정치적인 제국주의 정책 이전의 선교 운동을 중점적으로 고찰하려고 한다. 이들 중 일부는 동인도 회사의 전속 목사이거나 혹은 이들과 함께 일한 선교사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치적을 살펴봄으로서, 한 때 식민지 국가의 지도자들로부터 선교사들이 제국주의의 앞잡이였다 는 사실과는 무관하였다는 사실도 확인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1. 인도·남중앙아시아 지역(India and South Central Asia)

  
 윌리암 캐리(W. Carey)와 아도니람 저드슨(A. Judson)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들 외에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 지역의 중요한 선교사들로 죠지 보어드맨(George Boardman), 헨리 마틴(Henry Martyn), 알렉산더 듀프(Alexander Duff)와 같은 이들이다.

 

 이들은 모두 캐리나 저드슨과 그 봉사 기간이 중복되거나 비슷한 시기에 사역한 선교사들이다. 보어드맨은 미국출신으로 버어마에서 선교하였으나, 더 유명한 것은 그 아내 사라(Sarah Boardman)이다. 후에 저드슨의 두 번째 아내가 바로 이 사라 저드슨(Sarah Judson)이기 때문이다. 마틴과 듀프는 모두 영국 출신의 선교사들이다.

  

                          죠지 & 사라 보어드맨 (George and Sarah Boardman)

  

   죠지 보어드맨(George Dana Boardman, 1801-1831)은 콜비대학(Colby College)을 졸업한 후 미얀마의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으로 앤도버 신학교(Andov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2년간 공부하였다. 그가 선교사로 자원하게 된 것은 아도니람 저드슨의 동역자인 제임스 콜만(James Coleman)의 죽음과 그의 희생에 대한 감동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이 콜만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하여 애도하는 소녀가 있었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비해 조숙한 여인 사라 홀(Sarah Hall, 1803-1845)이었다. 문제는 그녀의 콜만을 추모하는 시가 종교 잡지에 실렸기 때문이다. 이 시를 본 보어드맨이 그 시의 저자를 찾아 만나게 되었는 데 이 것이 그 후 그들이 결혼을 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주게 된 것이다. 보어드맨이 앤도버신학교를 졸업하고 1825년 결혼을 하게 된 이들은 즉시 버어마로 출발하였으며, 이 때가 바로 저드슨의 부인 낸시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 해였다.

   그들이 미얀마에 도착한 곳은 선교사 촌이 모여있는 모울마인(Moulmein)이었다. 편하고 안락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곳은 문명화된 버마인들로부터 천대를 받고 살아가는 카렌족(Karens)이었다. 그래서 이 부부는 카렌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타보이(Tavoy)로 옮겨갔다.

   이곳에는 예수를 믿기 전에 혼자서 30명도 더 되는 사람을 죽인 코타뷰(Ko Tha Byu)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보어드맨 부부와 동행하며 자신의 이야기로 간증을 하였다. 그 결과 오랫동안 사역을 하고도 개종자를 얻지 못했던 저드슨과는 달리 수많은 개종자들을 얻게 되어 세례를 받게 되었고, 타보이 교회(Tavoy Church)도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죠지 보어드맨은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더니 버어마에 도착한 지 만 5년도 채우지 못한 채 1831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아내 사라 보어드맨은 두 살난 어린 죠지를 데리고 3년 동안 카렌족 사이에서 남편의 사역을 계속하였으나, 1834년 여섯 살 된 죠지는 교육을 위하여 미국으로 보내었고, 그녀는 아도니람 저드슨과 결혼하게 된다(Sarah B. Judson).

   그녀는 그 후 다시는 죠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며, 곧 새로 태어난 아이들의 엄마와 여학교의 교사, 새로운 찬송가를 짓는 일과 천로역정의 번역 등 카렌족의 선교를 위하여 헌신하다가 저드슨과 결혼한 지 11년만인 1845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헨리 마틴 (Henry Martyn, 1781-1812)

  

   영국 콘웰(Cornwall)에서 마틴의 교육을 위하여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캠브리지대학에서 수학부문에서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과 누이의 기도, 목사님과의 영적인 상담, 무엇보다 데이비드 브레너더(David Brainerd)의 글을 읽고 난 후의 그의 감동은 인도 선교가 인생의 유일한 목표가 되고 말았다.

   David Brainerd s sacrificial example and William Carey s pioneering efforts in India were a powerful source of inspiration, and soon foreign missions became his single objective.

  

   그는 독신 선교사였으며-평생을 사모한 6살 연상인 사촌의 처형인 리디아(Lydia)가 있었으나 결혼하지 못했다.- 당시 선교사들의 사역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방해를 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The East India Company)의 전속 목사였다. 그러나 그가 선교사에 길이 남을 만한 업적을 남긴 것은 1806년 인도에 도착하여, 동인도 회사의 직원과 가족을 위한 목회가 주된 업무이긴 하였으나 윌리암 캐리와 세람포 선교사들의 권유대로 신약 성경을 수백만의 아시아인들을 위하여 번역하는 일이었다. 그는 군대에 종군하면서도 유럽인들과 아시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으며, 학교를 세우는 둥의 선교 사역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특별히 힌두어, 아랍어, 페르시아어(Urdu, Arabic, and Persian versions of Scripture, thus focusing on Muslim languages) 등 모슬렘권을 위한 신약 성경 번역에 정진하였다.

   1810년 힌두어 성경의 출판 직전 중앙아시아의 열병을 이기지 못하고 페르시아로 치료 차 건너가 페르시아어로 성경을 번역하였으나 1812년 31세의 나이로 소아시아에서 언제나 그가 마음속으로 사랑하였던 리디아를 그리며 눈을 감고 말았다. 짧은 생애, 그 가운데에서도 그는 인도를 위하여 자신을 불태운 뜨거운 선교사였다.

  

                                알렉산더 더프 (Alexander Duff, 1806-1878)

  

   알렉산더 더프는 스코틀랜드 교회의 첫 번째 해외 선교사(the first foreign missionary of the Church of Scotland)였다. 성 앤드류 대학교(University of St. Andrews)를 졸업한 그는 1820년의 부흥운동에 영향을 받게 되어 33세의 나이로 인도선교사가 되었다. 두 번이나 파선을 당하는 험한 뱃길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인도에 도착하여 인도의 지식층과 상류층을 중심으로 사역하게 되었다. 그의 선교 방법에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주로 그의 선교 대상이 상류층(his plans for reaching India s upper classes by means of higher education)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5명으로 시작된 그의 학교 사업은 얼마되지 않아 300명이 넘었으나 3년이 지나 겨우 4명의 개종자에게 세례를 주는 데 그쳤으며, 10년 동안 수 천명의 학생들 중 겨우 33명이 개종한 데 불과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강력한 지지와 후원자가 되어준 사람은 윌리암 캐리와 진보적이면서도 학식이 뛰어난 브라만 출신의 람 모훔 로이(Ram Mohum Roy)였다. 로이는 자신은 기독교인이 되지 않으려 하면서도 성경을 공부하고 더프의 학생들에게도 격려하였다.

   분명한 것은 더프의 학생들 가운데 몇 명은 뛰어난 선교사와 목회자가 되었으며, 또 다른 몇 사람들은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가 되었다.

   알렉산더 더프는 선교지도자로서도 크게 성공한 선교사로 손꼽히고 있다. 두 번째 휴가 중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그리고 미국 등지에서 행한 선교 사업의 후원을 위한 호소는 많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 영향으로 인하여 수백 명의 선교 지원자들이 헌신하였고, 수 만명의 선교 후원자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알렉산더 더프와는 반대로 인도의 사회 밑바닥의 낮은 카스트들을 위하여 헌신한 선교사도 있었다. 미국 침례회 출신의 죤 클라우(Dr. and Mrs. John Clough) 부부로 인도의 옹골(Ongole)에 있는 론 스타 선교회(Lone Star Mission)에서 천민 계급 사이에 큰 부흥을 일으킨 바 1878년 여름에는 하루에 2,222명에게 침례를 베풀었던 기록이 있다.

  

                                          2. 아프리카 지역(Black Africa)

  

  아프리카에 근대 선교가 시작된 것은 18세기 모라비안들에 의한 케이프 식민지 선교이다. 그후 런던 선교협회(London Missionary Society) 소속 화란의 의사인 존 데오도레 반델캠프(John Theodore Vanderkemp)가 1799년 케이프타운에 도착하게 된다. 그래서 Stephen Neill은 반델캠프, 존 필립(John Philip), 로버트 모펫(Robert Moffat), 그리고 그의 사위이자 친구인 데이비드리빙스톤(David Livingstone)을 아프리카 선교의 4명의 위대한 인사(Four great figures)라고 불렀다.

  19세기초에는 특별히 세 돌출 부분에 선교 기지(early 19C, Three major beachheads)가 구축되었는 데, 서쪽은 시에라리온(Sierra Leone), 동쪽은 이디오피아(Ethiopia and Kenya), 남쪽은 케이프 타운(Capetown)이었다.

  

                            반델캠프와 존 필립(J. T. Vanderkemp and John Philip)

  

  반델캠프는 화란에서 10여년 동안 의사로 활약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거의 50세가 되었을 무렵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내와 딸이 보트 사고로 익사하는 참변을 겪은 후에야 그는 깊은 신앙적인 개심을 체험하게 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증인이 되기 위하여 헌신하여 L.M.S.의 선교사로 봉사하기로 자원하였다. 그는 그의 세 동료와 함께 아프리카의 세 부족(Bushman, Hottentots, Kaffirs)과 접촉하게 되지만 반델캠프는 주로 반투족인 가피르족과 깊은 관심을 가졌으나 그의 선교 사업은 주로 호텐토트족에 집중되었다. 그는 아프리카 여인(Malagasy orgin)과 결혼을 하므로 동일시(identification)의 모본을 보이려 하였으나, 오히려 선교 지역의 백인들에게 적개심을 현저히 불러 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도 하였다. 그는 1811년 죽었다.

  반델캠프와 마찬가지로 늦은 나이에 선교사로 부름 받은 또 한 사람의 선교사가 바로 John Philip(1775-1851)이다. 그는 44세에 S.M.S.의 선교부 책임자로 임명을 받았다. 그는 30년 동안 그 직책을 수행하면서 오히려 흑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백인과 대항한 선교사로, 흑인들도 백인들과 동일한 교육을 받게 된다면 유럽인들에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였다. 보어인들이 영국인들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유 운동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불리는 필립은 남아프리카 자유 운동의 아버지로 불리어지기도 하였다.

  

                                     로버트 모팻(Robert Moffat, 1795-1883)

  

  남아프리카 선교회(South African Missions)의 창시자이며, 리빙스턴의 장인(The father-in-law of David Livingstone)으로 더 알려져 있는 선교사로 50년 이상을 이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1795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정원사의 기술을 배워, 1813년 정원사로 일하기 위하여 영국으로 이사를 하였다. 1814년 감리교 모임에 나가게 되어 변화를 받은 그는 1817년 아프리카로 파송되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결혼하였다. 신부는 그가 영국에서 정원사 생활을 할 때 주인집 딸이었으며, 부모의 반대로 아프리카로 보낼 수 없다고 완강히 거절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1819년 결혼하게 되었는 데 그 이름은 메리 스미스(Mary Smith)였다. 그 후 53년을 행복하게 산 부부가 되었으며, 10명의 자녀 중 7명이 성장하여 그 중 5명이 모두 아프리카 선교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신혼여행을 통하여 찾게 된 쿠르만(Kuruman)이 그의 선교의 기지가 되었으며, 때로는 이들을 위한 외교가로 때로는 군사적인 지도자(직접 군대의 민간인 대장으로 만티티족과 전투를 하였음)로, 성경 번역가(1857년 성경번역 완성)로, 학교 건축을 통하여, 그리고 농지 경작을 위한 수로 건축을 위한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825년 쿠루만에 정착하여 1870년까지 48년을 고향처럼 지냈던 그는 영국으로 되돌아 간 후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내 메리(Mary Moffat)가 세상을 떠났고, 모팻은 그 이후 13년 동안을 온 영국을 순회하며 아프리카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한 선교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

  

  앗시시의 프란시스나 쟌다크와 비길 수 있는 영웅이며, 아프리카 선교의 불을 댕긴 리빙스턴에 대하여 몇 줄의 글로 소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너무나 잘 알려진 리빙스턴이므로 오히려 그의 생애와 사역을 간단하게 요약함으로서 선교 운동사에 나타난 업적을 정리하려고 한다.

  

  1813년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그러나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난 리빙스톤은 오전6시부터 밤8시까지 방직 공장에서 일을 해야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라났으나 야간학교를 통하여 공부를 하였으며, 이미 10대였을 때 중국 선교사를 꿈꾸며 의학을 공부하려고 하였다. 1836년 23세의 나이로 신학과 의학을 공부하였으나 공장과 학교를 번갈아 가며 일하고 배워야 했지만 27세가 되어서야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끝내었다.

  아편 전쟁으로 인하여 중국의 꿈은 무너지고 선교회는 그를 서인도 제도로 보낼 계획을 세웠으나, 훗날 그의 장인이 될 아프리카의 베테랑 선교사인 로버트 모펫을 만남으로 1840년 12월 영국을 떠나 13주 후인 1841년 3월 케이프에 도착하게 됨으로 아프리카 선교사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모팻부부가 휴가를 다녀오는 동안 쿠루만을 중심으로 2년 반을 견습선교사로 있으면서, 그 중 무려 1년 이상을 탐험과 여행에 시간을 투자하였다. 1843년 그가 제2의 쿠루만을 꿈꾸며 나아간 지역은 물이 풍부하고 숲이 우거진 마보스타(Mabosta) 지역으로서 쿠루만에서 북쪽으로 300Km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이곳이 그에게 있어서는 아프리카 제1의 고향이자 사자와의 싸움에서 왼쪽 어깨에 큰 부상을 당하기도 한 곳이다. 사고를 당한 3개월 후 그는 쿠루만으로 가서 모팻의 장녀 메리(Mary)에게 구혼을 하였고, 1845년 1월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 후 메리 리빙스턴(Mary Livingstone, 1821-1862)은 남편과 함께 사역을 계속 하였다. 그러나 여자인 메리는 매우 힘든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둘째 아들을 해산한 후 바로(1847년) 남편은 세 번째 정착지를 찾아 나서게 됨으로 함께 7년이나 반유목민의 생활(a semi-nomadic life)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1850년에는 네 번째 아이를 낳자마자 메리는 중풍으로 투병생활을 하게 되고, 결국 아이는 죽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51년 또 다시 그의 가족을 이끌고 탐험 길에 나섰다. 이해 9월 또 다시 메리는 다섯 번째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리빙스턴은 그 이듬해(1852년 3월) 그의 아내 메리를 영국으로 돌려보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남편과 헤어진 5년 동안의 생활은 오히려 더 큰 고통과 고난, 빈곤의 삶 그 자체였다. 결국 그녀는 남편의 1차 휴가 기간을 영국에서 보낸 후인 1862년 4월 남편의 품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

  

  리빙스턴의 대륙 횡단은 그의 가족들을 케이프타운에서 전송한 후 북쪽으로 돌아가 쿠루만에 잠시 머문 후, 아프리카 중앙에서 탐험을 시작하여 잠베지강(Zambezi River)을 따라 북서쪽 해안 루안다(Luanda) 해안에 이르는 코스였다. 그는 이 기간동안 복음 전파의 사명을 잊지 않았으며, 성경 교육을 위하여 그림과 매직 랜턴(Magic Lantern, a slide projector)을 이용하였다. 그는 어떤 배의 선장의 호의로 영국으로 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동행한 마콜롤로 부족을 고향까지 데려다 주기 위하여 또 다시 동부로 길을 재촉하게 된다. 빅토리아 폭포는 바로 이때에 발견된 것이다.

  1856년 영국 방문을 통하여 국가적인 영웅으로 대접을 받은 그는 1858년 아프리카로 돌아가기까지 강연과 저술(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 새로운 선교회 설립을 위하여 힘썼으며, 아프리카를 구하기 위한 상업과 기독교 (Commerce and Christianity)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864년 다시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는 그는 1865년 나일강의 근원을 밝혀내기 위한 그의 세 번째 그리고 그의 생애 마지막 탐험을 시작하였다. 영양부족(malnutrition), 열병(fever), 빈혈(bleeding hemorrhoids) 등과 싸우며 나아간 그는 비록 나일강의 근원은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아프리카인들은 점점 그와 친숙해지기 시작하였다.

  리빙스턴의 사망 소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방문한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의 편집장 헨리 스탠리(Henry Stanley)의 출현이 그에게는 큰 힘이 되기도 하였다.

  스탠리가 떠난 1년 후인1873년 5월 1일 그는 평소 그가 하던 대로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아프리카인들은 이 노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심장을 꺼내어 그곳 므푼드(Mpund) 나무 아래 묻고, 시체는 아프리카의 뜨거운 햇볕에 말려 미이라로 만든 다음 2,400Km가 넘는 해안까지 운반하여 영국으로 돌려 보냈다.

  그의 시신은 많은 고관대작과 저명 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국장으로 거행되어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안장되었다.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는 자식들, 먼저 사위를 보내어야 하는 78세의 모팻에게는 어느 누구보다도 큰 슬픔의 날이었다.

  

  아프리카의 선교를 위하여 리빙스톤과 그의 장인 모팻은 그 길을 열어 놓았으며, 수많은 추종자들은 그 길을 따랐다.

  그 외에도 19세기초의 선교사로 1838년 성공회 선교사로 에디오피아에서 축출을 당하였으나 아덴으로 피신하였다가 1844년 Kenya의 항구에 주재소를 두고 선교하다 그의 부인과 하나밖에 없던 그의 아들을 잃은 조한 루드비히 크래프(Johann Ludwig Krapf, 1810-1856)와 1846년 크라프와 합류하여 아프리카의 가장 높은 산인 케냐산과 Kilimanjaro산을 발견한 조한 레브만(Gohan Rebmann)과 같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여하튼 이들은 모두 19세기 후반으로 이어지는 많은 선교회와 선교 단체들, 학교와 모범 농장, 신학교, 현대 선교 사업에 필요한 여러 가지 제도와 장치들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3. 극동 지역(The Far East)

  

  극동 지역은 인도나 아프리카 지역에서처럼 18세기말이나 19세기에는 그리 괄목할 만한 부흥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부분 강력한 쇄국 정책(all strongly isolationist)을 고수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대개 19세기말에야 비로소 선교사들의 입국이 가능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초 중국에서는 개신교의 선교가 시작되었으며, 극동 지역에도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854년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의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나 공식적인 한국 선교(1884년)는 모두 19세기 후반(2nd half)에 속하지만 모리슨(R. Morrison), 구츨라프(Karl F.A.Gutzlaff)와 같은 선교사들이 먼저 이 지역에 발을 들여놓음으로 선교의 길을 닦아 놓은 19세기 초반(1st half)의 선교사들이다.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인 아버지와 그가 스무 살이 되던 해 돌아가신 경건한 어머니의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모리슨은 어머님의 죽음이후 런던에서 2년동안 공부하였으며, 런던 선교회(L.M.S.)의 해외 선교사로 1807년 1월 미국의 제임스 메디슨 회사(State James Madison)의 직원으로 같은 해 9월 광동에 도착하였다. 1809년 마카오에서 영국 의사의 딸 메리 모튼(Mary Morton)과 결혼하였으며, 6개월은 동인도 회사를 위하여 광동에서, 6개월은 마카오에서 생활을 하였다.

  사실 동인도 회사의 직원들은 그의 선교 사역이 상업 활동에 지장을 초래케 됨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늘 감시를 당하는 입장이었고, 또 로마 카톨릭이 선교에 큰 장애가 되고 있음을 모리슨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 중국어를 공부하였으며, 1815년 사실상 최초로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물론 그에게는 개인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의 아내는 결국 결혼한지 6년만인 1821년 두 명의 어린 자녀를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떠났으며, 또 그의 자녀들은 오랫동안 그와 헤어져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국에서와는 달리 1824년 중국에 온지 17년만에 휴가를 얻어 영국으로 귀국하였을 때 그는 이미 유명한 명사가 되어 있었다. 2년동안 영국에서 보낸 후 1826년 2명의 아이들과 새 아내 엘리자베스(Elizabeth)를 데리고 광동으로 돌아왔으나 네 명의 아이를 입양하게 되어 가족 부양의 책임이 커져 결국 1832년 아내와 아이들을 영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슬픈 것은 가족들이 영국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이 그에게 닿기도 전에 격무로 인하여 그는 먼저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과 같이 하여 동인도 회사도 중국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모리슨의 중국 사역은 매우 힘들었다. 7년만에 1명의 개종자를 얻었고, 25년만에 얻은 개종자는 10명에 불과하였으며, 그가 죽을 즈음엔 중국을 통틀어 3명의 중국인 신자가 남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천하의 우상 숭배자들에게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은 없으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는 유명한 말을 남겼으며(제임스 메디슨 회사의 지배인과의 대화에서), 중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큰 공적을 남겼다.

  

                             칼 구츨라프(Karl F. A. Gutzlaff, 1803-1851)

  

  그는 열성적인 선교사였다. 그래서 많은 별명이 따라 다녔다.-성인(a saint), 괴짜(a crank), 개척자(a true pioneer), 광신자(a deluded fanatic) 등.

  1826년부터 화란선교사(a missionary of the Netherlanda Missionary Society)로 인도네시아(Indonesia)에서 1828년까지 활동하였으나, 후에 독립 선교사로 태국(Thailand)에서 많은 일을 하였고, 1831년 이후 중국 해안을 여행하면서 대만과 한국(Korea, 1836년) 해안 지역으로 다니며 모리슨에게 받은 성경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였기 때문에 아편전쟁이 일어난 1839년까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이 일을 잘 수행할 수 있었다.

  그의 계획은 원대하였다. 한 세대 안에 중국을 복음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럽을 통하여 받은 재정적인 후원을 통하여 300명이 넘는 현지인들을 훈련시켜 성경과 신앙책자들을 배포하였으며, 그들로부터 2,871명이나 세례를 받았다는 보고를 접하게 된다. 더욱 고무된 그는 1849년 유럽에 도착하여 개선 장군처럼 영국과 유럽에서 놀라운 간증을 하게 되었으나, 결국 1850년 알게 된 것은 이 모든 것이 거짓임이 드러나게 된다. 헌금은 모두 아편 밀매업자의 자금이 되었고, 착하고 속기 잘하는 구츨라프는 정직하지 못한 중국인 사역자들 (his dishonest Chinese workers)에 의해 완전히 속고 만 것이다. 그 후 구츨라프는 사역의 재건과 명예의 회복을 위하여 중국으로 되돌아갔으나 1851년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사역이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노력에 의하여 조직된 중국 복음화 선교회(Chinese Evangelization Society)는 1853년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or)를 중국에 파송하게 된다. 그래서 그를 중국 내지 선교회의 조부 (the grandfather of the China Inland Mission)이라 부르는 것이다.

  

  지금까지 19세기의 전반부의 선교역사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19세기가 위대한 세기로 불리는 것은 19세기의 전, 후반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후반기의 허드슨 테일러를 비롯한 중국 선교와 한국 선교의 장을 열게 된 언더우드(H. Underwood), 아펜셀러(H. G. Appenzeller)등도 모두 19세기(1885년)의 선교 사역이다. 역사는 계속적인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 선교 운동사는 오늘의 선교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