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그리스) | 성지순례
1987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 1천년이 넘게 오랜 기간에 걸쳐 번영해온 신화와 종교 문명의 대표적 사례이다. 파르테논 신전, 프로필리아(아크로폴리스 신전입구), 에레치씨엠 신전, 나이키 신전 등 고전시대 그리스 예술의 최대 걸작품들이 산재해 있다.
기원전 480년에 발생한 페르시아 전쟁으로 아크로폴리스의 신역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같은 해, 아티카 해군을 조직해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군을 격파한 집정관 테미스토클레스는 폐허가 된 아테네의 부흥에 착수해, 아크로폴리스의 서쪽과 동쪽 기슭에 성벽을 재건했다. 더욱이 장군 키몬은 페르시아에서 약탈한 전리품으로 아크로폴리스의 옛 아테나 신전을 새로운 성벽으로 둘러싸 아크로폴리스의 영역을 더욱 확장했다. 기원전 5세기의 아크로폴리스 재건 공사로 확장된 아크로폴리스 지대 위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양한 신전을 건설한 사람은 페리클레스였다. 아크로폴리스에 대한 부흥 구상은 단순한 복구가 아니라,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서 도시 국가 아테네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페리클레스는 아크로폴리스를 도시 국가 아테네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절벽위의 파르테논 신전(아테네 여신 신전, 아테네 수호신)
아테네 시의 수호신인 아테나를 모신 파르테논 신전은 대조각가 페이디아스가 총감독을 맡고 건축가 칼리크라테스와 익타노스가 지었다. 높이 18.5m인 원주가 동서로 8개, 남북으로 15개가 세워진 직사각형의 도리아식 신전에는 서쪽 실내에 있는 기둥과 신상이 안치된 내진이 있다. 내진 위쪽의 프리즈 등에는 우아한 이오니아 양식을 부분적으로 도입해 중후한 도리아식 요소와 적절하게 융합한 고대 그리스의 전형적인 이상이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흰 대리석 구조가 자아내는 파르테논 신전의 간결한 아름다움은 그리스 정신의 아름다움이라고도 한다. 건물을 구성하는 수직선과 수평선은 눈으로는 판별할 수 없을 만큼 미세한 곡선을 이루고 있어, 이 장대한 신전이 주는 중압감을 덜어준다. 바닥면 30.88x69.50m의 넓이를 지탱하는 거대한 식회암 기단은 약간 볼록하다. 그리고 모든 원주가 신전 안쪽으로 몇 cm씩 기울어져 건물 위쪽이 약간 작아 보인다. 파르테논 신전을 건설할 때도 아테네에서 가까운 펜델리콘산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파르테논 신전 내진에는 여신 아테나의 훌륭한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신전의 이름은 이 여신의 이름인 아테나 파르테노스(파르테노스는 처녀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조각상은 높이가 12m나 되며, 전신이 황금과 상아로 장식되어 있었다. 1456년 터키가 아테네를 점령하자, 파르테논 신전은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바뀌었다. 7세기에 그리스 정교 성당으로 변한 에렉테움은 1463년에 터키 군사령관의 하렘이 되었다. 1640년에 터키군이 화약 저장고로 개조한 프로필라이온은 폭발 사고로 파괴되었다. 이윽고 파르테논 신전도 같은 종말을 맞았다. 파르테논 신전은 1687년 베네치아군의 봉쇄 때 포탄이 명중해 터키군이 이 곳에 저장해 놓았던 폭약이 터져, 신전 내부와 지붕이 파괴되었다.
아레오바고란 아레오파고스인데,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으로부터 북서쪽 방향으로 약 1,000미터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는 낮은 언덕이름이다. 아레오파고스 언덕에는 아테네 귀족회의가 열렸었기 때문에 아레오파고스라는 명칭이 귀족회의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했다. 입법회의가 제정한 법률을 검토하여 비토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고, 탄핵법에 따라 헌법위반행위를 심리했으며, 도시질서를 파괴하는 죄인들을 심리하는 시민법정기능도 담당했다. 1세기 당시 아레오바고는 시민법정기능과 공개토론 기능이 뒤섞여있는 복합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사도바울은 십자가도와 몸의 부활의 도를 전함으로 인해 아테네 시민들에 의해 기소당한 신분으로 붙잡혀 거기에 서게 되었다.
아크로폴리스 건축물 가운데 에렉테움이 복원되어 창건 당시의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고대 건축가들은 건물 남서쪽으로 길게 돌출한 주랑에 훗날 카리아티드라고 불렀던 아름다운 여신상 기둥 6개로 지붕을 떠받치게 했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승리의 신 니케를 모시는 신전. BC420년경에 건축가 칼리크라테스(Kallikrates)에 의해 건축되었다. 이오니아 양식이다. 이 신전 역시 1686년 터키에 의해 분해되어 입구에 거대한 대포가 놓여져 있었다. 1836년~1842년 사이에 복원되었다. 1936년에 플랫폼이 다시 붕괴되어 재복원하였다.
올림포스 산의 제우스에게 봉헌된 신전 유적지. 전설에 따르면 이 곳에 신전이 세워진 것은 신화상의 듀켈리온(Deucalion)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역사시대에 제우스 숭배가 시작되었다. BC515년 아테네의 참주(僭主)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착공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AD124~125년경에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신전 안에는 황금과 상아로 만든 제우스 상이 있다. 아크로폴리스보다 웅장했다는 건물은 4세기에 고트족이 파괴했고 지금은 열다섯개의 코린트식 기둥만 남아 있다. 발굴은 1889년~1886년에 펜로즈(E. Penrose)에 의해 그리고 1922년에 웰터(G. Welter)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후 트라블로스(Travlos)에 의해 1960년대에도 이루어졌다.
아테네 아고라 옆 불(대장간)의 신전(헤파이스토스 신전)
제우스신전 바로 앞에 있는 신구(新舊) 아테테의 경계선도 겸하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문. 신구란 고대 아테네와 로마시대 아테네를 구분하는 개념이다. 개선문 형식의 이 문은 AD131년에 아테네인들이 아테네문명을 칭송하고 본받고자 노력한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를 칭송하기 위하여 건설하였다. 이 문 양 면에 두개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아크로폴리스를 향한 한면에는 "이것은 테세우스(Theseus)의 고대 도시인 아테네이다."라고, 다른 면에는 신도시를 향하여 "이것은 테세우스의 도시가 아닌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인 아테네이다."라고 씌어 있다.
아고라의 입구로 들어서면 곧바로 대리적으로 만들어진 팔각형 "바람신"의 탑을 볼 수 잇다. 1세 기 때의 천문학자 "안드로니코스"가 세운 것으로 당시에는 해시계, 믈시계, 풍향 계의 3가지 기능을 했었다고 한다. 탑의 8면은 각각 정확하게 동,서,남,북과 북 동,남동,남서,북서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는 고대 그리스 유적지. 아고라란 광장이나 시장을 뜻하는 말이다. BC6세기경부터 건물과 신전이 들어서고, 광장 주변에는 노점상이 모여 시장이 서기도 했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 이야기와 연설을 듣는 등 시민들이 정보를 얻던 곳이기도 하다. 헤파이스테이온(Hefaisteion)신전을 비롯하여 아레스신전, 아그리파 음악당, 대배수구 To Megalo Avlaki와 이오니아식 기둥 등이 고대 그리스의 문화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특히 아그리파 음악당은 아고라에서 가장 큰 건물로, 축조 당시 2층이었다. 3세기에 파괴되었다가 4세기 들어 그 자리에 체육관이 세워졌고, 대학 건물로 이용되었다.
디오니소스 신에게 바친 디오니소스 극장은 아이스킬로스 등의 극작가가 아크로폴리스 남쪽 기슭에 목조로 만들었다. 현존하는 계단석은 기원전 4세기에 대리석으로 개수된 유적이다.
로마 태생의 헤로데스 아티코스가 2세기에 건설. 관객 6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
1896년 제1회 국제올림픽경기가 열렸던 경기장. 신타그마광장에서 10분 거리에 있다. 원래는 일리소스(Ilissos)강을 끼고 아그라(Agra)계곡과 아르데토스(Ardettos)계곡 사이에 자연스런 홈이 나 있어 이것을 스타디움으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BC330~329년에 리코우르고스(Lykourgos)에 의해 '위대한 판 아테나 축제(Great Panathinaea Festivities)'의 운동 경기를 위한 스타디움으로 변형되었다. 그후 AD140~144년 사이에 헤로데스 아티쿠스(Herodes Atticus)에 의해 스타디움이 복원되었는데, 이것이 1870년에 발굴된 현재의 모습이다. 즉 길이 204.07m, 넓이 33.35m의 말발굽모양 구조이다. 약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로마시대에는 스타디움이 투기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근대에 와서는 19세기 말엽에 애버로프(G.Averof)에 의해 스타디움이 복원되었는데, 1896년에 부활된 최초의 올림픽게임이 여기에서 개최되었다.
델피 전경
델포이 유적은 코린트 만이 보이는 파르나소스 산허리에 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덕분에 이 곳은 매력적인 유적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델포이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서 3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첫째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아폴론 신전이 있다는 점, 둘째 올림피아와 마찬가지로 범그리스 제전인 피티아제가 4년마다 열렸던 점, 셋째 고대 세계 구석구석까지 널리 알려진 아폴론 신탁소가 있었다는 점이다. 1893년 발굴 조사를 몇 단계로 나누어 천천히 진행하자, 신전과 극장의 고대 유적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발굴과 함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1902년, 그리스인 은행가 싱그로스의 협력으로 세워진 델포이 미술관에 유물의 일부가 소장, 전시되고 있다. 오늘날 델포이 유적은 프랑스 고고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기원전 15세기경부터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모신 신전이 있었다. 가이아 신전은 가이아 여신의 시중꾼인 피톤이라는 용의 보호를 받으며 점술을 행하고 있었는데,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이 용을 죽이고 이 일대를 자신의 성역으로 만들었다. 이 때부터 델포이에서는 아폴론을 아폴론 피티오스로서 섬기게 되었다고 한다.
1987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 이다. 아폴로 신탁이 있는 델피(델포이)의 신전으로, '세계의 중심'이라는 Omphalos(아폴로신전에 있는 원뿔꼴의 돌)가 있다. 이곳은 그리스의 종교 및 국민적 통합의 상징이었던 중요한 곳이다. 델포이 유적 아래쪽 지역에 있는 아테나프로나이아의 신역에는 토로스라는 원형 건조물이 있다. 현재 위쪽 지역을 형성하고 있는 아폴론 신역으로 가기 전에 이 곳을 본다. 포키아 출신의 건축가 테오도로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이 건조물은 기원전 390년부터 10년 동안 건설되었다고 한다. 신화에 따르면, 지구가 원반 모양이라고 여겼던 시대에 신들의 지도자 제우스는 자신이 지배하는 세계의 중심이 어디인지 알아보기 위해 세계의 양쪽 끝에서 각각 독수리를 날려 보냈다. 독수리는 고대 시인이 ‘빛나는 2개의 정상을 가진’이라고 표현한 델포이의 바위산, 파르나소스 산 공중에서 만나 산 꼭대기로 날아가 앉았다고 한다. 이 전설에 따라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곳을 ‘세계의 배꼽(옴파로스Omphalos)’이라고 불렀고, 그 후로 델포이는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졌다
아폴론 신전은 델포이 성역의 중심 건물로, ‘최초의 신전은 월계수 가지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고, 전설상의 네 번째 신전은 ‘보로스 산의 돌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지만, 실제로 최초의 신전은 기원전 650년경에 건립되어 후에 소실되었다. 기원전 510년경에 세워진 두 번째 신전도 기원전 4세기 초에 일어난 지진으로 불에 타서 붕괴되었다. 현존하는 유적은 기원전 330년에 완성된 세 번째 석조 신전이다. 유적은 신전의 토대, 원주 몇 개, 원주의 토대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었지만, 최근 원주 몇 개가 복원되어, 페리스튀리움(안뜰을 둘러싸는 열주랑)이 곁들여진 정면에 6개, 측면에 13개, 총 38개의 도리아식 열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신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신전의 전실에서 순례자를 맞이한 것은 벽에 새겨진 고대 그리스 일곱 현자의 격언이었다. 거기에는 지금도 “너 자신을 알라.” “절도가 최상이다.” “참고 견디며 겸손하라.”와 같은 현자의 가르침을 연상시키는 명문이 남아 있다. 이 성역이 가장 번성했던 시대에 아폴론은 인간에게 관용과 덕행을 권장하는 광명의 신으로 칭송받았다. 사람들은 신탁이 미래를 예언해 준다고 믿었다. 신전터에서는 여러 개의 원주가 복원되어,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진 당시의 전체적인 윤곽을 보여준다. 아폴론 신전 내부는 3부분으로 나뉘며, 신탁이 이루어지던 가장 안쪽의 지성소는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 중앙 부분은 황금으로 만든 거대한 아폴론 상이 놓이고, 지하 성당(내진의 밀실)에는 ‘대지의 배꼽’이라고 불리는 대리석이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델포이의 신관을 지냈던 철학자 플루타르코스는 “대지의 갈라진 틈에서 안개 같은 가스가 분출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지만, 지금 그 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곳에는 무녀(피티아)가 있어, 광기어린 혼수상태에서 신탁을 전했다고 한다. 신탁 받을 사람은 카스탈리아의 신천에서 정화 의식을 마친 다음 무녀 앞으로 나갔다. 무녀가 전하는 신의 말은 불명료한 소리로 이어졌고, 여기에 함께 참석한 신관이 신의 말을 ‘통역’해 사람들에게 전했다.
델피 극장
극장의 기원은 기원전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존하는 극장 유적은 기원전 2세기에 로마인들이 복원한 것이다. 35단의 석조 계단 관람석은 약 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보물창고
‘아테네인의 보물 창고’는 파로스 산 흰 대리석으로 만든 도리아식 건물이다. 현존하는 건물은 20세기 초에 프랑스 고고학 연구소가 재건한 것이다. 이 보물 창고는 기원전 490년에서 기원전 480년경에 만들어진 도리아식 건물로, 기원전 490년의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인이 페르시아인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의 일부로 세워진 것이다. 보물 창고의 벽에는 헌사가 800개가 넘게 새겨져 있으며 아테네인이 줄겨 썼던 테마, 예를 들어 그리스인과 여전사 아마조네스와의 전투 장면이나 테세우스와 헤라클레스의 전설이 담긴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그 중에는 신전의 주인인 아폴론에게 바친 찬가도 2개 있다
경기장
아폴론에게 바친 운동 경기인 피티아제는 성역 서북쪽 언덕에 펼쳐진 침엽수림 안에 있는 경기장에서 열렸다. 지금도 남아 있는 출발선에서 골인 지점까지의 거리는 177.53m이다. 기원전 3세기에 경기장이 만들어졌을 무렵 관람객들은 다각형 돌을 층층이 쌓아올린 벽으로 둘러싸인 맨바닥에 앉아야 했지만, 2세기 로마 시대에 헤로데스 아티코스가 돌로 만든 관람석과 입구 문을 기증했다. 이 유적은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경주로 동쪽 끝에 놓여 있던 돌기둥도 복원되었다. 트랙은 그 길이가 178m, 폭 25.50m로 양쪽으로 길게 좌석이 놓여 있다. 북쪽의 12계단은 거의 완전한 상태로 복원되었으나 남쪽의 6계단은 완전히 부서진 채로 남아 있다. 북쪽 계단의 중간 지점에 심판원이나 고위층이 앉았던 긴 벤치가 놓여 있었다. 양쪽 객석에 약 7,000명의 관중을 수용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델피 미술관 소장 유적
‘시프노스인의 보물 창고’ 북쪽 프리즈의 부조 부분. 보물 창고는 기원전 525년경, 금 채굴로 부를 쌓은 키클라데스 제도의 시프노스 섬 주민들이 건립했다. 조각이 완성된 당시에는 선명한 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델피 미술관 소장
낙소스 섬에 봉헌된 스핑크스. 대리석 산지로서 뛰어난 조각가를 배출한 낙소스 섬에서 보낸 봉헌품이었다. 높이가 2.3m나 되는 대리석 상은 기원전 560년경에 조각되었다. 처음 만즐어졌을 때는 높이가 9m가 넘는 이오니아식 가느다란 원주 위에 설치되어 아폴론 신전 앞에 놓여 있었다.
플라태이아 삼각대 터(뱀신상을 두던 곳, 이스탄불로 이동)
김나지움 터
아테나프로나이아의 신역 서쪽에 있는 김나지움 터.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나 델포이의 젊은이들이 심신을 단련하는 시설이었다고 한다. 이들을 지도한 사람은 의사나 트레이너, 그리고 시인이나 교사 등이었다.
고대 히에라폴리스에 있어 가장 중요한 종교의식은 Apollo신에 대한 숭배였다.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곳은 A.D.3세기경에 건축되어졌으며, 신전의 몇몇 기념물들은 헬레니즘 시대로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5×25 m 규모의 이 건물은 남서쪽을 향하고 있다
원형극장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팔각형의 건물이 나오는데 이 건물은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건물이다. 기독교의 역사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하나인 사도 빌립은 말년에 히에라폴리스에 와서 전도를 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5세기경 그 무덤 위에 사도 빌립을 추모하기 위한 건물이 세워졌다. 직경 20m의 중앙 홀은 사도 빌립의 추모행사가 개최 된 곳이고 그 둘레에 팔각형 모양에 따라 8개의 기도실이 있다. 주변의 부속 건물은 교육관 혹은 손님 접대용 방이나 창고로 사용했다.
도미티안 황제 문
현재명은 Pambuk-Kale 이다. "Cotton Castle" 브루기아(Phrygia)지역에 위치한 아나톨리아 평야의 서쪽지역에 있는 도시로 오늘날은 터키 제일의 온천인 파묵칼레 위쪽에 폐허로 남아있다. 특별히 로마시대에 번성하였고 유대인 공동체도 위치하였다. 빌립사도는 주후 80년 여기에서 순교하였고 비잔틴 시대에 이 도시가 주교가 있는 교회로 되었을 때 그를 위하여 큰 교회를 건축하였다. 교회 옆에는 많은 로마시대 유적- 목욕탕, 15,000명을 수용하는 극장, 아고라, 신전등-들이 위치한다. 히에라볼리는 특별히 로마시대동안 다양한 모양으로 꾸민 대규모 공동묘지로 유명하였다. 주요 요새는 11/12세기 비잔틴 흔적들이다.
이 신전은 주전 6세기경에 세워진 그리스의 신전중에서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신전으로 전통적인 도리스식 기둥이며 기둥이 하나로 된 통기둥이다. 현재는 7개의 기둥만이 서있다
주후 50~52년에 사도 바울이 이곳에 도착하여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러다 1858년의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어 현재는 로마시대의 유적이 있는 구 고린도와 신 고린도로 나뉘어져 있는데 신 고린도에는 바울 사도를 기념하는 교회가 있다. 교회 왼쪽은 베드로 사도, 오른쪽은 바울 사도의 모자이크가 있고, 교회 입구 우측면에는 대리석 판에 흔히들 사랑장이라 부르는 고린도전서 13장의 1~8절까지 말씀이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 사도 바울이 18개월 동안에 복음전파를 했던 곳은 구 고린도이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바울이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도착하여 바울의 본업이었던 장막을 만들며 안식일마다 복음을 전파하며 지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행18:1~4)"
고린도의 첫 번째 항구는 레기움으로 고린도 시와 그 항구인 레기움을 연결하는 긴 성벽은 전체길이가 2.5km이고 각 성벽이 1.2km로 평행으로 지어져있다. 인공적으로 바다를 두른 항구(double port)의 넓이는 460,000m2고 부두의 길이는 7km 이다. 지금은 항구의 아주 일부분이 발굴되어있다(Roux 1958: 103). 고린도의 두 번째 항구는 겐그리아이다. 고린도 동쪽으로 9km 떨어진 사론 만에 위치한다. 인공적인 이 항구는 30,000m2정도 되며 큰 건물들이 북쪽 방파제위에 우뚝 솟아있고 네 개 구역으로 된 저장 창고들은 남쪽의 인공 방파제 안쪽을 따라서 정렬되어있다. 이 두 항구를 차지하고 통제한다는 것은 펠로포네스와 그리스 본토를 연결하는 6km의 넓은 지협을 실질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이 고린도를 고대 세계의 중요한 교차로로 만든 것이다(Strabo 8.6.20). 평지 가장자리의 경사지는 전통적으로 높은 생산성과 함께 부유함으로 유명하고 또한 동서와 남북 무역을 통한 세금 징수를 통하여 고린도의 금고는 항상 가득 찼었다.
고린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주전 1,800년 페니키아 인들과 왕래가 있었으며 미케네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하고 이어 에올리안 민족이 대륙으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주전 1,200 년경부터 도리아 인들이 들어도기 시작하여 약 900년 경에는 문화가 도리아 식으로 바뀌었다. 주전 8세기경부터 상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코르푸 섬과 시실리 섬의 시라쿠사에 식민지를 확보했고, 주전 5세기 경에는 그리스 도시국가들 가운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도시국가중의 하나였다. 페르시아 전쟁때에는 육지와 바다에서 많은 역할을 담당했고 해군력에 있어서는 후에 아테네와 겨룸으로서 실제적인 그리스의 자살이라 불리는 펠로포네소스 전쟁의 한 도발 도시가 되었다. 펠로포네소스 전쟁 이후 새로운 그리스의 패권국인 스파르타에 대항해서 독립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스파르타, 떼베에 이은 마케도니아의 등장으로 좌절되었다. 주전 338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삘립뽀스 2세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의 지도자로 인정되어 아끄로고린쏘스에 마케도니아의 수비군을 주둔시켰으며 주전 243년에 아르케안 동맹에 가입하여 동맹의 수도로서의 역할도 했으나 주전 146년 밈미우스가 이끄는 로마에 점령당해 철저히 파괴된다. 주전 44년에 율리우스 시저에 의해 다시 복구되기 시작하여 아우구스투스 황제때에 복구되었다
서쪽 바다인 이오니아해와 동쪽의 에게해를 연결하는 이 운하는 길이 6.2Km, 폭 25m(바닥은 21m), 수심 8~10m, 다리에서 수면까지의 높이가 약 80m로 고대 고린도인 들로부터 만들기를 계획하였으나 기술과 재정문제로 실패하고, 주후 40년경에는 이집트인들이 고린도만의 수위가 사로닉만의 수위보다 높아 운하를 만들 경우 에기나가 침수될 것이라하여 중단하기도 했다. 주후 67년에는 로마의 네로 황제가 수천명의 죄수를 동원하면서까지 시도했으나 실패를 거듭, 19세기말에 와서야 완성이 되었다. 1881~1893년까지 약 12년에 걸쳐 프랑스 기술진에 의해 완공되기 전에도 그리 크지 않은 배는 땅위로 올려 올꼬스 네온(ολκός νεών 구지 번역하자면 배를 견인하는 마차)를 이용하여 배를 옮겼으며 운하의 서쪽 끝에 가면 그 당시 이용했던 길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 길을 Diolkos라 하였으며 폭은 3~5.5m이고, 주로 선실이 없는 전함을 옮겼다. 상선일 경우에는 겐그레아 부두에서 선내의 짐을 하역한 후에 배를 가볍게 하여 고린도만의 레헤온 항구로 옮겼다.
고린도인들은 아프로디테(비너스)를 수호신으로 하는 성적으로 타락하고 문란한 도시였다.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이 자랑하는 3가지 중의 하나인 비너스 상은 그리스의 밀로 섬에서 발견되어 루브르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그 자체만 본다면 아프로디테의 완벽한 몸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지만 신화에 나타난 아프로디테의 행실은 그리 정숙하지 못한 '사랑의 여신'이다.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고전5:1~2)" 의 말씀과 같이 당시 고린도인들의 문란함을 꾸짖었다. 심지어 음란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고린도인'이란 은어가 있기도 했다.
아크로폴리스(고린도의 높은 도시)라 불리는 이 곳은 해발 575m에 있고 일명'펠로포네소스의 족쇄'라고 불릴 만큼 튼튼한 성채로 되어 있다. '에피라' 즉 관찰, 관측소, 경계라는 의미로 주전 7~6세기 경에 성채를 쌓았으며 현재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보아 4세기 경의 축조물로 보고 있으며 성벽은 유스띠니아노스 황제 때인 슬라브 족들의 침공 이전인 주후 583~586년 경에 다시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채의 길이는 2,000m에 이르며 성채 안에는 아프로디띠의 신전이 있어 이 곳에 종사했던 제관과 천여명의 제녀에 의해서 종교라는 명목아래 자행되었던 음행이 유행처럼 번져 외국인들의 발걸음 까지도 잡아 당겼다고 한다.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한 때 수 천명의 무녀들이 살고 있었으며 창녀의 업을 했다. 아폴론 신전의 옆에 있는 박물관에는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는데 쓰인 항아리, 술병, 화병, 물병 등이 있고, 로마시대의 율리아 황제 가의 7개 동상과 신격화된 율리오스 황제의 모습, 네로의 두상, 모자이크, 치료의 신인 아프로디테 신전 터에서 발굴된 조각 파편들(환자들이 신전에서 나음을 받고 신께 감사의 표시로 환부들을 받들어 봉납한 것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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