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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로몬 <온맘>

영국신사77 2008. 9. 7. 13:57

솔로몬



 

 (hmolv] ,Solomwvn, Solomon)「평화」
                                                         (1)서론:
 
 솔로몬(BC 990년 경- 932년 경)은 이스라엘의 제 3대왕(재위 BC 973년 경- 932년 경)이다. 그에 관한 기사는 사무엘하 11장- 20장, 열왕기상 1장- 11장 및 역대하 1장- 9장에 기록되어 있다.
 
 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유세비우스(Eusebius) 및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 등의 솔로몬에 대한 기사는 상술한 성경 기록에 의한 것이다. 또 잠언의 대부분과 전도서 및 아가는 그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한다.

 

   

                                                  (2)왕이 되기까지:
 

  ①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하사.
솔로몬은 이스라엘 민족의 자랑인 다윗의 아들인데, 사무엘하 12:24, 25에 의하면, 예루살렘에서 난 밧세바의 두 번째 소생이며,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여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그 이름을 `여디디야'(여호와께서 사랑을 입음)라 하였으나, 사무엘하 5:14와 역대상 3:5, 14:4에 의하면, 네째 아들(막내)로 되어 있다.
 
   ②다윗은 그의 아들을 '솔로몬'이라고 명명.
 다윗은 자기의 파란만장한 일생에 비교하여, 그 아들의 치세 때에는 평안과 안정을 바라는 마음에서 `솔로몬'(평화의 사람)이라고 명명했다(삼하 12:24, 대상 22:9).
 
 요컨대, 하나님께서는 여디디야라는 이름 말고도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 솔로몬은 히브리어의 샬롬, 곧 평화 또는 번영을 의미하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 위에 평안과 안정이 임하리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담고 있는 이름이었다. 참으로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아온 다윗에게 '평화' 라는 용어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이는 단어이며 축복인데, 이러한 평화가 자식에게 임한다는 말씀을 전해 들을 때 다윗은 너무나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사무엘하 12:24,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25,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역 대 상 22: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9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
 
 
 솔로몬은 어려서부터 선지자나단에게 양육된 듯하다. 그는 어머니 밧세바의 감화를 많이 받고 성장한 듯하다. 그녀는 단순히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 기지에 풍부한 부인이었다(왕상 1:15-31). 또 많은 신복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즉위하기까지의 솔로몬에 대해서는 역대상 22:6- 19 이외에는 별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다윗이 죽기 직전,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당부하는 곳이다.
 
 그가 다윗에 이어 왕으로되는 데는 경쟁자가 있었다. 즉, 다윗이 노년에 쇠약해졌을 때, 이복 형 아도니야(헤브론에서 난 왕자로서, 이미 암논과 압살롬의 사후였음으로 당시 최연장자였다)는 부왕 다윗의 승인 없이 즉위하려고 했다. 아도니야를 옹립한 측에는 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이 있었다.
 
 그러나 이 일파에 대해 제사장 사독, 선지자 나단 및 기타 인물들은 솔로몬을 밀어 다윗의 위를 잇게 하려 했으므로, 아도니야 일파의 계획을 탐지하자마자 밧세바를 움직여 다윗에게 진언하여 솔로몬에게 왕위를 넘기게 했다.
 
 그들은솔로몬에게 기름을 붓고 이를 백성들 앞에서 널리 공포함으로써 기선을 제하였다. 아도니야 일파는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여 도망쳤다(왕상 1:49).
 
 솔로몬은 즉위 후 곧 아비삭의 일로 인해 아도니야를 죽이고, 아비아달은 부왕에 대한 공을 참작하여 사형에서 감하여 고향으로 추방하고, 요압은 부왕의 유언대로 죽였다. 시므이에 대해서는 부왕의 유지에 반하여 관대히 대하다가, 회개의 소망이 없자 그도 역시 죽였다(왕상 2장).

 

                                                (3)왕으로서의 솔로몬:
 솔로몬은 다윗의 시위대에 옹위되어 기브온에서 등극하고, 아도니야 일당은 붕괴되어 그의 왕위는 공고해졌다. 때에 그의 나이는 20세쯤이었다. 그는 애굽의 바로의 딸을 왕비로 맞아 들였다(왕상 3:1).
 
 여호와께서 실로를 버리신 후부터 그 곳 성소에서의 예배는 중단되고 있었다. 당시 여호와의솔로몬의 놋바다전은 기브온에 있었고, 여호와의 법궤는 예루살렘에 있었다. 백성들은 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솔로몬은 기브온에 가서 거기서 여호와께 *일 천 번제를 드렸다(왕상 3:4). 솔로몬은 겸손˙공의˙순결˙믿음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은 이 기도에 대해 자유 선택을 허락하셨다. 즉, 여호와께서는 밤에 그의 꿈에 나타나시어, 무엇이든지 바라는 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그는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지혜를 구하였다. 그것은, 당시 백성의 재판을 행하는 것은 왕의 직무였기 때문이다.
 
  * 일 천 번제를 드렸다는 것은 번제를 1000번 드렸다는 횟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1000마리의 양을 희생 제물로 드린 것을 나타낸다. 번제는 희생으로 드리는 짐승 전체를 남김없이 제단에서 불사르는 제사로, 그 드리는 자의 헌신을 상징한다. 
 
 
 그의 요구는 이루어졌다. 내가 네 말대로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요구를 가상하시고,아울러 그가 구하지도 않은 부와 영광도 주셨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여호와의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수은제(酬恩祭)를 드리고, 모든 신복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었다(왕상 3:5-15).
 
 곧 그의 지혜와 공정한 재판을 보일 첫 기회가 왔다. 그것은 두창녀가 한 아이를 서로 자기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복잡한 사건을 보기 좋게 재판함으로 증명되었다. 즉, 이 두 창기가 같이 아이를 안고 자다가 한 여자가 잘못하여 자기 아이를 깔아 죽이게 되자, 옆에서 자던 여자의 아이와 바꾸어 놓았다. 날이 밝자 산 아이를 놓고 서로 자기의 아이라고 주장하다가, 마침내 이들은 왕에게 소송을 한 것이다. 솔로몬은 사건의 내용을 듣고는 칼을 주면서 살아있는 아이를 둘로 나눠가지라고명령했다. 그 결과 참 어머니는 차마 자기 자식을 칼로 짜를 수 없어 상대 부인에게 아이를 가지라고 했다. 그것을 보고 솔로몬은 진짜 어머니를 가려내어 그 여자에게 아이를 돌려 주었다는 것이다(왕상 3:16-28,대하 1:3-12).
 
 이 명판결로 그의 지혜와 명성은 높아졌다.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즉위 제 4년 2월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착수하여 제 11년 8월 준공함으로서 약 7년의세월을 소비했다(왕상 6:38). 열왕기상 6장솔로몬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사용된 채석장은 그 성전 구조를 말하고 있다.
 
 이어 약 13년동안 왕궁을 지었다. 왕궁의 규모는 성전보다 훨씬 컸다(왕상 7:1-12). 이 건축을 위해 솔로몬은 특히 아도람을 공사의 감독관으로 임명하고, 그 수하에 3,300명의 공사 감독, 3만 명의 역군, 7만 명의 담군(擔軍), 8만 명의 석공이 동원되었다(왕상5:13-18). 또 그는 국내 곳곳에 정원이나 과수원을 만들었다(전 2:5,6,아 8:11).
 
 공사가 완료되었을 때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각 지파의 두목들(족장)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하여 성대한 헌당식을 거행했다.
 
 그날 법궤를 지성소로 이동 안치하였으니, 480년 간 성막에 있다가 완전한 성전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와 온 회중이 우양을 잡고 제사를 드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였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능히 섬기지 못할 지경이었다. 솔로몬은 위로는 하나님께 충실했고, 아래로는 부왕의 유지(遺志)에 순종하였다.
 
 솔로몬은 여호와의 단 앞에서
  ① 왕실의 영속,
  ② 왕과 백성의 기도를 들어달라는 의뢰와
  ③ 공정한 판결을 위해,
  ④ 그리고 패전하게 될 때와
  ②한재(旱災) 때,  기근˙온역 때,
  ⑤ 이방인의 기도,
  ⑥ 출전 때와,
  ⑦ 포로 되었을때를 위해 기도하고,
  ⑧ 결론으로 자기와 백성의 기도를 들어 주시기를 바란다
는 긴기도를 했다.
 
 백성을 향해서는
  ⑨ 하나님은 신실하사 모세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심과,
  ⑩ 열조와 같이 지금도 우리와 같이 하시기를,
  ⑪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게 하시기를,
  ⑫ 하나님의 보호와 권위를 간구하는 축복과, 전심으로 여호와의 법도를 준수하라
는 훈사를 했다.
 
 이때 솔로몬의 거국적 대 봉헌식에는 북쪽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까지 전 국민이 14일 간이나 참례하였다. 이때 화목제의 희생은 소 2만 2천, 양이 12만이니 명실공히 사상 최대의 낙성식이었다(왕상 8장).

 

                                                  (4)솔로몬의정책:
 솔로몬의 사업은 부왕 다윗이 착수한 사업을 계승하여 이것을 발전시키고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공고히 된 권력으로써 이스라엘 전 민족을 통일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위의 제 민족을 용케도 제압했다(왕상 9:20).
 
 예루살렘 도성은 안으로는 성전과 궁전이 건축되고, 밖으로는 성벽이 견고하게 축조되고, 밀로도 건축되어 위력이 더하여졌다(왕상 9:24,11:27). 또 국고성과 병고성(兵庫城), 그리고 마병의 성들을 요소 요소에 건축했다(왕상 9:19). 또 1만 2천의 마병, 1천 4백의 병거가 상비되었다(왕상 4:26,10:26).
 
 그의 영토는 대략 북은 유브라데 강에서 남은 애굽 지경까지 미치고,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이 창대해졌다. 주변 나라들은 조공을 바쳤다.
 
 솔로몬의 1일분 식물은 가는 밀가루 30석, 굵은 밀가루 60석, 살찐 소 10, 초장의 소 20, 양 100 기타 등등으로서 그의 번영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대제사장˙서기관˙사관˙군대장관˙관리장˙제사장˙궁내대신 등 내각을 조각하고, 12지방장관도 새로 두었다(왕상 4:1-28).
 
 그의 시대는 비교적 태평하였으므로 다윗 시대처럼 전쟁에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솔로몬은 전쟁의 용사로서는 묘사되지않았다.
 
 그의 시대의 사건으로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에돔 사람 하닷의 난(왕상 11:14-22),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의 난(왕상 11:23-25) 및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난(왕상 11:26-40) 등인데, 모두 대군을 동원할만한 대사건은 아니었던 듯하다. 솔로몬의 회랑X현대에 건축된 것으로 예루살렘에 있다.〉
 
 전쟁에 시간과 힘을 빼앗긴 일이 별반 없었던 솔로몬은 타국과의 외교˙무역에 뜻을 써서 이것으로서 이득을 얻었다. 그는 남방의 패자(■者) 애굽과 수교하여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솔로몬이 선민의 혈통주의를 떠나서, 애굽 왕 이방인의 딸과 결혼한 것은 조상의 유훈과 민족 혈통상 찬성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가나안 족속에 대하여는 잡혼을 금했으나, 애굽에 대하여는 관대한 듯하다. 모세˙요셉˙아브라함(하갈) 같은 이도 애굽 여인을 취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솔로몬의 결혼은 애굽과의 국교 수호에 한 방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결혼에 의해 그는 애굽 왕으로부터 게셀을 예물로 받았다(왕상9:15-19). 또 많은 말과 병거를 애굽에서 얻고, 또 이것을 팔아 이익을 얻었다(왕상10:28,29). 그런데 여기 `애굽'으로 번역되어 있는 !yIrx]mi (미스라임)을 북 수리아의 `무스리(Musri)'로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 후 여로보암의 난 때에는 애굽 왕 시삭은 오히려 솔로몬에 대하여 반도(叛徒)를 비호해 준 일도 있다(왕상 11:40). 또 솔로몬은 유브라데 강가에서 애굽에 이르는 대상의 통로 길목을 이용하여 많은 이득을 얻은 것으로 생각된다. 김함의 대상의 여관도 그 당시 생긴 것이리라(렘 41:17).
 
 애굽에 이어 솔로몬은 두로 왕 히람과 수교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 의하면, 그는히람의 딸도 아내로 맞았다고 한다(왕상 11:1,5참조). 이스라엘족과 히람과의 수교는 다윗 시대부터 계속되어 온 것으로서, 솔로몬의 시대에 이르러 한층 친밀의 도를 더했다.
 
 솔로몬의 성전과 궁전의 건축에 있어서는 이 히람에 힘입은 바가 크다(왕상 5:1-12). 즉, 솔로몬은 히람 왕의 축하사(祝賀使)에 뒤이어 답례사를 보내면서, 부왕의 성전 건축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과, 부왕의 유지를 계승할 터이니 레바논의 백향목의 벌채 허가를 요청했다. 히람은 솔로몬의 요청을 쾌락했으니 솔로몬의 외교에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솔로몬은 그 대신 히람에게 그 궁전의 식물로 밀 2만 석과 기름20석을 주기로 약조를 맺었다.
 
 레바논 산에서 베어낸 백향목이나 잣나무 등 재목은 욥바의 항구에서 예루살렘으로 운송되고, 또 많은 건축자와 석공 등이 히람에게 보내어졌다. 히람은 그밖에 솔로몬에게 다량의 금(120달란트)도 주었다(왕상 9:11-14). 솔로몬은 이에 대해 갈릴리 20성을 주었다.
 
 솔로몬의 성전 상상도 솔로몬은 많은 성읍을 건설했다. 즉, 수도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하솔˙므깃도˙게셀˙바알랏˙다드몰 등이다. 이제 성읍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가나안의 남아 있는 자손들을 노예로 썼다.
 
 솔로몬의 이같은 국내 건설에 민중의 호혈을 착취한 결과는 왕국 분열의 실정이 되고 말았다. 상기한 바와 같이 솔로몬은 국내 건설 뿐만 아니라 외국 무역에도 착념하고 조선소를 홍해의 에스연게벨에 두고 조선에 주력하는 한편, 두로에서 선원을 고용하여 무역에서 제 1차로 오벨에서 금 420달란트를 획득하였다(왕상 9:15-28).

 

                                               (5)솔로몬의 영화:
 다윗은 솔로몬에게 금 10만 달란트(1 달란트를 59kg로, 1g을 11,200원으로 계산하면 66조 8천만원), 은 100만 달란트(1g을 80원으로 계산하면 4조 7,200억원), 기타 놋, 철 등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물을 물려 주었다.
 
 솔로몬의 세입금이 1년에 666 달란트였으며, 기타 제국으로부터 조공도 받았다(왕상 10:14,15). 솔로몬은 이것을 가지고 무기를 만들거나 왕궁의 기구를 만들었다. 금 방패˙상아˙보좌˙정금 그릇 등이 그것이다.
 
 스바 여왕을 비롯하여 열국의 왕과 기타 인사들이 솔로몬자신과 그의 지혜를 탐구하러 내방할 때 가지고 온 예물들은 금은 기명˙의복˙갑옷˙말˙노새 등인데, 일정수의 조공인 듯하다.
 
 솔로몬의 영화˙명예˙권세는 그 극에 달했다(왕상 10:14-25). 솔로몬은 그 거액의재화를 거의 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쓴 것 같다.
 
 그는 성전과 궁전을 건축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와 외국으로부터 많은 처첩을 맞고 그들을 위해서도 궁전을 지었다(왕상7:8). 솔로몬은 자기의 궁전을 짓는데 13년의 세월을 소비함으로써 성전보다(7년) 2배나 더 걸렸다. 얼마나 호화 찬란했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재력과 인력, 그리고 시간을 정도 이상 낭비한 결과는 민중의 호혈을 착취한 것이 되어, 후에 국토와 민족이 양분되고 말았다. 솔로몬이 자기 궁을 `레바논 나무 궁'이라고 하였다.
 
 솔로몬의 다처주의는 그로 하여금 타락케 한 첫째 과오이다. 그는 후비가 700, 빈장(嬪■)이 300, 도합 1,0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대부분 이방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 나라의 우상을 가지고 왔으므로, 궁중은 우상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하나님께서는 왕된 자의 세 가지 금기 사항(말을 많이 두지 말 것, 아내를 많이 두지말 것, 은금을 많이 두지 말 것. 신 17:14-20)을 명하셨던 것이다. 부왕 다윗도 이로 인해 실패하여 꼬리를 이어 일어나는 가화(家禍)를 보고도 그 길을 갔으니, 솔로몬은 더 큰 죄에 빠졌다.
 
 곧 우상숭배이니, 여기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왕위 피탈과 국가의 분열로 징계를 내리셨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즉위 후 24년에 그의 꿈에 다시 나타나,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을 따르면 그의 혈통에서 왕위에 오를 자가 끊어지지 않을것을 약속하고, 또 엄한 경고를 주셨건만, 그는 이를 잊었던 것이다(왕상 9:1-9,대하 7:12-22).
 
 당시 유다족을 제외하는 이스라엘 나라는 지역별로 12로 나뉘어 각처에는 관장(官長)이 파견되어, 각 관장이 왕과 왕실을 위하여 일년에 한 달씩 양식을 공급하였다(왕상 4:7-19).
 
 이와 같이 솔로몬의 영화와 유다족의 특권적 생활의 반면에는 전술한 노동을 제공한 사람 뿐만 아니라 다른 이스라엘족이 부담한 중세가 있었다(왕상 12:4). 이런 불평 불만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여로보암의 난이다(왕상 12:26-).
 
 또 성전 건축에 따른 제사장 제도의 발달은 선지자의 활동을 추방하게 했다. 나단이나 아히야 등의 선지자들이 이같은 경향에 대하여 적어도 의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6)솔로몬의 지혜:
 실례를 이미 든 바 있지만, 솔로몬은 특별한 지혜의 소유자였다(왕상 3:16-28). 그는 재판이나 정치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연구에도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그는 잠언 3천을 말하였으며, 시가(詩歌)는 천 다섯에 이르렀다. 또 동식물학에도 조예가 깊어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돌담에 나는 우슬초와 동물˙조류˙어류에 이르기까지 실로 박학다식하였다.
 
 이렇게 솔로몬은 외적으로 평화와 번영, 그리고 축복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지혜와 총명이 동서양인을 막론하고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그 소문이 온 천하에 퍼져 군왕들이 내왕했는데, 스바의 여왕도 그 중 한 사람이다(왕상 4:29-34).
 
 그녀는 솔로몬의 지혜 뿐만 아니라, 그 시설과 부귀영화에 심취하여 일국의 왕으로서의 체면도 잊고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왕상 10:1-13). 그는 잠언은 물론 전도서와 아가서를 썼으며, 시편의 일부를 쓴 것으로 보인다.
 
 
                                                 (7)솔로몬의 만년:
 솔로몬의 만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건설과 사치생활, 그리고 국민에 부과한 중세는 백성을 적지않게 괴롭혔을 것으로 상상된다. 여로보암의 난이 그 한 현상이다(왕상 11:26).
 
 여로보암의 배후에는 이미 이스라엘에 대한 친선적 태도를 버린 애굽 왕 시삭이 있었다. 그는 르호보암 왕 제 5년에 예루살렘에 침입했을 정도이다(왕상 14:25).
 
 동시에 그가 거느린 수많은 처첩 때문에 여호와의 종교에서 떠나는 자가 늘어나, 종교적으로 난맥상태를 나타내는 경향마저 보였다. 그는 우상을 위해 산당을 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왕상 11:1-8). 이 배교 때문에 솔로몬은 징계를 받아 왕국의 대부분은 그를 떠나 극소수만이 남게 되었다(왕상 11:9-13).
 
 선지자 아히야는 여로보암에게 찢은 옷 12조각 중에서 너는 열 조각을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라고 예언했다(왕상 11:28,39).
 
 이렇게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대적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으나, 그 아들 르호보암이 즉위하기까지는 왕국 분열은 표면화하지 않았다.
 
 후세에 이르러 예수님은 그에 대해 언급하여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를 평하는 가장 지당한 말씀이라 하겠다. 즉, 그가 사치를 다한 것이 그의 두 번째 큰 과오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국민은 중세에 허덕여 마침내 왕에 대한 충성심이 흔들리게 되었다. 이렇게 반역의 씨가 국민의 마음에 뿌려진 것이다.
 
 솔로몬은 40년 간 통치하였다(왕상 11:42,43,대하 9:30,31). 그의 위는 아들 르호보암이 이었다(대하 9:30,31).수델라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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