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1)
시 온 문. 문 주변의 총탄 자국은 67년 전쟁 때의 탄흔이다.
성의 남쪽에 있는 시온문입니다.
문 주변의 총탄 자국은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게 되는
67년 전쟁때의 탄흔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은 아르메니아지역, 무슬림지역, 유대교지역, 기독교 지역으로 구분됩니다. 시온문 부근은 아르메니아 지역입니다.
아르메니아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나라입니다. AD 313년 밀라노 칙령에 의하여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보다 약 10년 빠릅니다.
아르메니아는 노아의 방주가 안착하였다는 아라랏산으로 대표되는 나라인데, 터키와의 두번에 걸친 인종분쟁으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학살당하였습니다.
아르메니아 대주교 공관
아르메니아의 기독교를 아르메니아 정교라고 하는데, 이는 로마카톨릭과도 그리고 동방카톨릭과도 전혀 구별되는 종파입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에 독자적인 아르메니아 대주교 공관을 가지고 있는데, 사진이 바로 그 주교공관을 나타냅니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그리고 사도 야고보의 무덤이 지금 보시는 성당안에 있다고 합니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고, 아르메니아 정교의 전승이라고 보시면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안은 보시는 바와 같이, 길이 좁고, 어떤 길은 차량과 사람이 같이 지나다닙니다. 따라서 오른쪽에 계시는 분과 같이, 언제 차가 끊어질까 하고 기다리다간 통과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냐구요? 담대한 마음으로 그냥 가야합니다. 그러면 차가 피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담대하지는 마십시요. 왜냐하면 그저 제 의견이니까요.
영국성공회 교회
1809년에 세워진 영국성공회 교회입니다. 게스트하우스가 있습니다. 사전 예약을 하면 누구든지 묵을 수 있습니다. 현재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기독교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야파문[욥바문]
야파문입니다. 야파문은 그 앞에 힌놈의 골짜기가 있으며, 예루살렘 성의 서쪽을 대표하는 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문 중, 지명을 문의 이름으로 가지고 있는 문들은, 그 문에서 뻗어나간 길이 최종적으로 이르는 지역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습니다. 따라서 이 야퍄문의 최종 도착지는 지중해의 야파 해안이 되겠습니다. 현재의 텔아비브에 인접한 구항이 되겠습니다.
이전에 보여드렸던 다마스커스문에서 뻗어나간 길의 최종 총착지는
다마스커스가 되겠습니다.
다윗 성채. 일명 헤롯 왕궁
야파문의 오른쪽에 있는 다윗성채입니다. 성전 남쪽의 다윗성과는 다른 곳입니다. 이름은 다윗성채이지만, 다윗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하스몬 왕조때 요한 히란커스가(BC134~104) 세웠으며, 헤롯이 증축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이곳에서 정사를 집행한 곳이기도 하여 헤롯왕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름이 언제부터 다윗성채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윗성채의 다윗탑.원형탑 아래의 사각형이 다윗탑이고, 원형탑은 회교첨탑이다.
다윗성채의 다윗탑입니다. 흔히 높이 솟아있는 원형탑을 다윗탑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그 아래 있는 사각형 모양의 건축물이 다윗탑입니다. 원형탑을 다윗탑이라고 하면 격분한 다윗이 무덤에서 뛰어 나올까 염려됩니다.
사진을 확대해서 탑위에 있는 피뢰침같은 보시면 확실하게 감을 잡으실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초생달입니다. 이 원형탑은 다윗탑 위에 회교도들이 1655년에 세운 회교첨탑(minaret) 입니다.
예루살렘 지도[외곽성벽 안]
좌측 야파문, 우측 다윗성채. 1892년 빌헤름 2세가 마차를 통과시키기 위해 성벽을 헐은 곳이다.
흔히 이곳을 야파문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야파문은 사진의 왼쪽에 있습니다. 사진의 오른쪽에는 다윗성채가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곳은 성벽을 허물은 지역입니다. 1898년 독일의 빌헤름 2세가 이 야파문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야파 성문이 좁아서 마차가 들어갈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차를 타고 들어가기 위하여 성문옆의 성벽을 헐은 이곳으로 마차가 들어갔다고 합니다.
1917년 영국의 알렌비 장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그는 아래와 같은 말을 하고 말에서 내려 걸어서 성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성에 들어가셨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성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야파문 왼쪽의 성벽
야파문[욥바문]
19세기 말까지 야파에는 유대인과 무슬림들이 같이 살았다고 합니다. 이후 이 지역에서 유대인들이 �겨나서, 바로 북쪽에 '봄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텔아비브를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은 야파는 있지만 텔아비브와 비교하면 어떻게 비교가 할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돌바닥으로 깔려 있는 예루살렘성 내의 길바닥
예루살렘성내의 모든 길바닥은 모두 돌바닥 입니다. 이런 곳도 있고, 이것보다는 작은 돌로 울퉁불퉁하게 깔려진 곳도 있습니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오래 걸으면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특이한 이름의 카사노바 거리
카사노바?!
이 성스러운 성에 약간은 특이한 거리 이름인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2)
십자가 상이기도 합니다.
곱틱정교 교회
곱틱의 효시는 알렉산드리아 교구이었습니다. 칼케돈 공의회로 기억되는데 이때 단성론이 이단으로 �겨나게 됩니다. 이때 곱틱, 시리아(안디옥교회) 정교등이 단성론으로 로마교회로부터 이단으로 몰려나게 됩니다.
곱틱교회안에 있는 수도원입니다. 아래 사진도 마찬가지 입니다.
방문객들을 위한 조그만 예배당입니다.
곱틱교회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여기 뿐 아니라, 거의 예루살렘의 모든 곳이 거의 다 그런데, 들어가는 입구보아서는 절대 아니다 싶은데, 들어가보면 엄청나게 큰 규모의 건물이나 땅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벽으로 다 막아놓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리고 출입구는 조그맣게 뚫어놓고. 그리고 별 표지판도 세워놓지 않은...., 뭐 그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벽 잡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있는데 벽뒤에서 무언가 삐끄덕, 삐끄덕 하는 소리가 나더니, 뒤에 있는 문이 열리고 수도승으로 보이시는 분이 쓰레기 구루마를 밀고 나오려고 하였는데, 턱이 있어 힘들어 하길 래 박전도사님이 도와주었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더군요. 아마 저희들의 기도에 더 고마워하였으리라 믿습니다.
예루살렘 (3) |
성묘교회 입구
입구로 들어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아래 가운데가 성묘교회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성묘교회의 왼쪽 부분입니다. 수리중인지 아니면 증축중인지 확인하지 못하였습니다. 현지에서는 수리중일 것이다라는 생각이 강하였기에 실제로 수리중인지를 확인할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성묘교회에 대하여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성묘교회에 관한 글을 적어놓습니다. 글의 내용은 "Prepare the Way for the King of Glory" 라는 책에 있는 것인데, 아직 국내에는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성묘교회가 있는 이 지역의 명칭은 '뮤리스탄'[Muristan] 입니다. 뮤리스탄은 페르시아 말로 병원이란 뜻이며 실제로 십자군 때에 이곳에 병원이 지어졌다고 합니다.
이곳은 하드리안 황제가 AD 135 년에 엘리아 카피톨리나[역자주: 서기 132년 유대의 두번째 반란인 바르 코크바의 반란이 135년에 진압된 후, 하드리안 황제는 예루살렘을 로마식 도시로 만들기 위해 성문과 광장, 도로, 신전 등을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과 로마의 언덕을 상징해 이 새로운 도시를 엘리아 카피톨리나로 명명하였습니다.]를 세웠을 때 조성하였던 로마의 광장이 있던 자리입니다.
이 광장은 도시의 중심이자 회합이 이루어지는 곳이었으며, 로마의 신이었던 쥬피터, 쥬노, 미네르바의 조상[彫像]이 같이 세워졌을 것이라 여겨지고 있습니다. 로마식의 이방의 새로운 도시는 이들 로마신들에게 바쳐졌으며, 이들은 이 도시를 보호하여 주는 신으로 정해졌습니다. 하드리안은 이를 통하여 유대의 두번째 반란을 잠재운 뒤, 유대인들의 기억을 씻어주기 위한 승리의 선포를 하였던 것입니다.
AD 312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이후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한 이후에, 성지를 발견하고 보존하려는 관심이 일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는 자신이 직접 예루살렘으로 와서 성지를 찾아내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헬레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아내었고, 부근에 있는 저수지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간 파편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보물은 수세기동안 기독교의 가장 소중한 유물이었습니다.
이후 AD 614 년에 페르시아에 의해 탈취되었으며, 631년에 협상을 통하여 다시 되돌아왔고, 633년에는 콘스탄티노플로 왔습니다. 후에 이 유물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갔고, 소문에 의하면 성묘교회내 그리스 정교회의 ‘아담[Adam]’ 예배실의 성구[聖具]실에, 러시아의 피터대제(병원기사단의 최고위에 있었음)의 칼과 교황의 선물과 함께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Chaple of Adam in 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한편 성묘가 있던 터는 콘스탄틴의 명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이 장면은 발굴현장을 목격하였던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주교에 의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땅위에서, 두렵게 하는 것, 영혼들의 틀림없는 무덤 곧 아프로디테라고 하는 더러운 마귀의 집, 곧 생명이 없는 우상들이 있는 어두운 사당과 경건이라고는 볼 수 없는 저주받을 제단들에서 행하여졌을 더러운 제물을 바치는”
콘스탄틴은 이곳을 정화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의 집[house of prayer worthy of God]’ 을 세우도록 명령하였습니다. 326년에 교회 건축이 시작되어 9년후인 335년에 봉헌되었으며, 모든 종파들의 신앙적 중심지이자 분쟁의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1632년경 이곳을 방문하였던 ‘샌디[Sandy]’ 라는 사람은 부활절의 전통적인 ‘성령의 불의 의식 [Ceremony of the Holy Fire]’ 을 엄숙함이 깃든 박카스(역자주: 그리스, 로마의 술의 신) 의 축제에 비유하였던 것으로 보아서, 각 교파간의 주도권 다툼이 심하였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교회는 전쟁으로, 지진(최근에는 1927년에)과 화재(최근에는 1808년과 1949년)로 손상되고 못쓰게 되곤 하였지만, 그때마다 수리되고 재건축되고 확장되어 왔습니다. 부분적으로 현재 교회의 모습을 이룬 때는 104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십자군들이 이곳에서 승리를 축하하였으며 예루살렘 왕국(역자주: 1차 십자군 때에의 처음 십자군들이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에 왕국과 3개의 봉건령을 세웠습니다. 3개의 봉건령: ·안티오키아후령(侯領)·트리폴리백령(伯領)·에데사백령 등)의 처음 두 왕(‘고드프루아 드 부용[Godfrey de Bouillon]’(예루살렘 정복) 과 ‘보두앵 1세[Baldwin]’)은 이곳 성묘교회에 매장되었습니다. 고드프루아의 칼과 금이 입혀진 박차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성구실 벽에 전시되어 있으며. 이것들과 가슴에 다는 십자가는 성묘교회를 지키는 기사들을 모으는데 이용되었고 이용되고(?) 있습니다.
십자군들은 1149년에 대관식을 치르기 위하여 교회의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예루살렘이 1187년에 살라딘에게 떨어진 후, 1229년에 독일의 교만한 프리드리히 2세[6차 십자군을 운동을 이끌었으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하였습니다. 성묘교회에서 자신을 예루살렘의 왕으로 관 씌웠습니다.]가 조약[條約]으로 예루살렘을 회복하였습니다.[역자주: 6차 십자군 전쟁에서 술탄과의 협정에 의해서 1244년까지 예루살렘을 기독교가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244년에 터키에 의해서 기도교도들은 추방당하게 되었고, 교회는 약탈당하였습니다.
그후 기독교도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오는 것이 허용되었던 때부터, 많은 교파들이 성묘교회의 여러 부분들을 나누어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14세기에는 그리스, 라틴, 콥트,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야곱, 이디오피아 교파들이 제각기 자신들의 소유권을 주장하였습니다.
성묘교회의 열쇠는 무슬림이 보관하였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도들은 다른 교파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수 있으며, 각 교파들간에 빈번한 싸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루지야(높은 세금 때문에 포기)를 제외한 모든 교파들은 그동안 수많은 소유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묘교회의 일부분씩을 다 소유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이들중 그리스 정교회가 주요한 부분을 점하고 있습니다.
각 교파는 지금도 여전히 자신들의 소유권을 지키려고 열심입니다. 현재 교회의 수리가 필요한 경우, 어떻게 수리를 하여야 하는 가에 대하여 의견 일치를 보기 어렵기 때문에 수리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묘교회에 거하며 사역하고 있는 모든 교파의 사제들에게 당신을 보이시기를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에서 영의 누름은 대단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곳에 임하여 분열과 종교의 영들에게 승리하기를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성묘교회에 들어가면 바로 눈에 들어오는 그림입니다. 아래 그림에서와 같이, 이곳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장사되시어 묻히셨다고 합니다...
위의 그림에서의 가운데 부분을 나타내는 실물입니다.(돌판)
예수님의 무덤위에 세워진 건축물입니다. 이 건물도 콥틱, 라틴등 몇개의 교파가 나누어서 관리한다고 합니다.
한군데로 들어가 보았는데, 콥틱에서 관리하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뉘어지셨다는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예수님이 뉘어지셨다는 곳입니다.
성묘교회의 내부는 상당히 큽니다. 다 돌으시려면 꽤 시간을 보내셔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위의 성묘교회에 대한 설명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곳은 이미 우상화 내지 신격화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미 장소가 더 의미있고 중요한 것으로 되어버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의 두 사진은 이곳에서 있었던 화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벽에는 검댕이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언제적 화재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성묘교회를 나와서 바로 우측 앞편에 있는 교회입니다. 독일 루터파의 구세주교회(Church of the Redeemer) 입니다.
이 교회의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의 종류는 몰타(Malta) 십자가 입니다. 이곳은 바울이 로마로 가다가 머물러 있던 섬이기도 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모습이 무엇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드시지요. 네!, 저도 그렇습니다. 바로 2차 대전 당시의 독일군의 상징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독일군이 채택하였던 철십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십자군교회가 있던 터(장소)에 1898년 독일의 빌헤름 2세에 의해 봉헌되었습니다.(빌헤름 2세에 대해서는 예루살렘(1)에서 야파문과 관련하여 소개하여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다시한번 아까 위에서 언급한 책의 내용을 인용하고 싶습니다.
아래의 글은 “유대인들과 그들의 죄에 관하여” 라는 제목으로 1543년 나온 루터의 책자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첫째, 유대인들의 회당과 교회들은 불타야만 한다…. 하나님과 기독교인들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독교인임을 아시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백성인 기독교인들에게 그렇게 거짓말하고 저주하고 모독한 것을 우리가 알면서도 참고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하여….
두번째로는, 유대인들의 가정이 마찬가지로 깨지고 파괴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유대인들에게서 기도책과 탈무드를 빼앗어야만 합니다….
넷째로, 유대인들의 랍비들을 죽음으로 위협하여 그들이 가르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다섯째로 통행허가증의 발급이나 여행은 엄격하게 금하여야 합니다….
여섯째로 이들의 고리대금업이 금지되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모든 현금과 은, 금등의 귀중품들은 압수되어야만 합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훔친 것이며 강도질한 것들 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런 생활의 수단이 없습니다…..
일곱번째로, 유대인들에게 연장을 주어서 이들이 이마에 흐르는 땀으로 빵을 얻게 하여야 합니다…. 이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크시기에 부드러운 자비로는 이들은 점점 더 나빠만 질 것이며 엄정한 자비도 이들을 더 낳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을 멀리 하십시요…. 여러분들이나 우리가 저 참을 수 없는 악마와도 같은 무거운 짐인 곧 유대인들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기 위해서 입니다.”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자신의 처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루터가 대량 학살을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루터의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히틀러의 이러한 말들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이 기독교가 관련된 것으로 보았으며, 이 사건을 예수님을 나타내는 교회가 유대인을 박해한 또 하나의 사건으로 여겼습니다.
지난 2000년 동안 많은 경우에 있어서, 특히 십자군이나 ‘스페니쉬 인퀴지션[Spanish Inquisition; 역자주: 스페인의 15~16세기 종교이단자를 재판하던 종교재판을 가리킵니다.]’에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을 개종하도록 강제하였으며, 이에 따르지 않으면 유대인들을 죽였습니다.
오늘날 유대인들 사이에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저항감이 있는 것이 아마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 조차도, 많은 곳에서 유대의 믿는 자들은 교회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개종하여야만 한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이방인들을 유대인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가 유대인들을 교회에 받아들이기 전에 그들이 성경에 있는 명령을 준행하는 것을 그만둘 것을 기대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갈2; 행15).
반유대주의는 오늘날 교회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대체 신학인데,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이라는 것과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버리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러한 견해에 대한 근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하며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합니다. 유대인이나 교회나 모두 믿음을 통한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짐을 믿습니다.
예루살렘 (4)
2004-11-15 http://blog.joins.com/gtkbest/3781610 |
위의 사진에서 회교사원의 첨탑이 보이시죠. 그리고 그 뒤편의 유대교를 상징하는 메노라도 보실 수 있으시죠.
안보이시는 분을 위하여 당겨서 찍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조명이 어둡습니다.
사자문(Lion Gate)으로 가는 길입니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비아돌로로사의 출발지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위에 있는 건축물은 보기에는 그래도 상당히 오래된 건축물입니다.
BC 2세기 하드리안 황제가 예루살렘을 밀어버리고 새로운 로마풍의 도시를 건축하고 예루살렘의 이름을 '엘리야 카피톨리나' 로 바꾸어 부르게 됩니다.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아취의 흔적이 이때 지은 3개의 아취 중 가운데의 아취것 이라고 합니다. 주거용이나 밟고 다니는 통로용으로 지은 아취는 아니었을텐데, 아취 위에 창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후에 사람들이 자신들의 용도에 맞게 구조변경(?)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아취의 이름은 에케호모 (Ecce Homo : "보라 이사람 이로다[요19:5]" 의 라틴어) 입니다. 그 이름의 유래는 현재의 비아돌로로사를 따르는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법정이 안토니아 요새이고, 바로 이곳에서 약 50M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반대편에서 찍은 모습입니다.
비슷한 아취이긴 한데 이것은 그 에케호모가 아닙니다.
사진위의 로마숫자와 글자에서 짐작하셨겠죠? 이곳은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 : 슬픔의 길)의 3번째 지점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처음으로 쓰러지신 곳이라고 합니다. 현재 이곳은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작은 예배당이 있습니다.
예배당안의 사진입니다. 쓰러지신 예수님 뒤에 수많은 천사가 둘러서있는 모습이 몹시 인상적이었습니다.
예배당 안의 십자가 입니다. 나무로 되어 있는데 꽤 큽니다. 그러나 사람을 못박을만한 실제 크기의 십자가는 아닙니다.
들어오라고 함에도 안들어오시고, 서 계시는 문위에는 아래의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도 아주 인상적인 그림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수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니다.
그림 관련해서 어떤 분의 분위기를 띄우시는 한 말씀이 있었는데, 사진을 확대하셔서 보시면 좋을 것 같은데, 십자가를 지신 분들중 왼쪽에서 두번째 분의 얼굴을 확대하셔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인상이 아주 어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같이 계신 분 중에서 "마음에 있는 것이 겉으로 나온다는 말씀대로, 즐겁고 기쁜 마음에서 짊어져야, 그래야 즐겁고 기쁜 표정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지 않겠냐" 는 거룩한 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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