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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성군으로 유명한 다윗 왕은 그의 생전에 여호와를 위한 성전을 건축하려 했으나 전쟁으로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그의 꿈을 아들 솔로몬에게 물려주어야만 했다. 주전 1천년 경 솔로몬 왕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했던 모리아산에 성전을 건축했고, 이후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었다. 솔로몬의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고(주전 586년), 70년 후 재건되었으나 솔로몬의 성전을 기억하고 있는 노인들은 그 초라함에 눈물을 흘렸다.
예수님 당시에는 헤롯대왕(주전 40-주전4)이 보수한 화려한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롯은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고, 그의 선조가 유대인으로 개종한 에돔출신의 반쪽짜리 유태인이었다. 헤롯은 그의 출신 때문에, 유대인이 자신을 몰아내고 다른 유대인을 왕으로 삼을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늘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강압적인 통치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유대인에게 잘 보이려는 정책을 쓰기도 했다. 그가 성전을 보수한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헤롯은 예루살렘의 넓은 광장에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연설을 했다.
"여러분들의 성전이 이렇게 초라한 것을 보니 제 가슴이 아픕니다. 여러분들을 위하여 훌륭한 성전을 지어드리겠습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초라하기는 하지만 성전을 재건한다는 구실로 부수고 나서 딴소리를 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백성들은 헤롯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만일 왕께서 정말로 성전을 재건하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 성전재건에 관한 청사진과 자재를 미리 보여주십시오. 성전을 재건하는 동안에도 매일 드리는 희생제사를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솔로몬 왕 때처럼 제사장들이 건축에 참여하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하여 주전 20년경 성전재건이 시작되었다. 천 명의 제사장들은 석수로 훈련을 받고 성전 재건에 참여하였고 석재를 운반하는 마차가 천 대, 건축 숙련공 만 명이 동원되었다. 성전 주위를 넓히기 위하여 계곡을 메꾸어 성전산을 확장했으며, 이 일을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했다. 성전 자체는 제사장들에 의해 1년 6개월에 걸려 지어졌고, 회랑과 바깥 뜰을 건축하는데 8년이 걸렸다.
성벽은 잘 다음어진 돌을 사용했는데, 돌 한 개의 평균 무게는 약 1∼40톤, 평균 길이는 1∼10m 의 거대한 돌들이 사용되었다. 통곡의 벽에 사용된 가장 큰돌은 무려 400톤에 달하니, 당시의 공사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성전이 재건되는 동안에는 낮에는 비가 오지 않고 밤에만 비가 내려서 공사에 차질이 없었다고 한다.
예루살렘 성전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탈무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일 당신 평생에 성전을 본적이 없다면 아름다운 건물을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당시 헤롯이 재건한 성전은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전이었다. 성전과 예루살렘의 건물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석회암을 다듬어서 석재로 사용했다. 흰빛의 이 석회암은 햇빛에 반사되면 더욱 하얗게 빛나기 때문에 건물의 위엄을 더해준다.
성전 입구에는 아디아베네 왕국의 헬레네 여왕이 기증한 금으로 된 포도 덩굴이 장식되어 있었다. 로마군인들이 성전을 방화하고 그 안의 금을 약탈해 갔을 때, 시리아의 금값이 반으로 폭락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 정도 과장된 표현이었겠지만, 얼마나 예루살렘 성전이 화려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랑인 이 성전은 로마군에 의하여 주후 70년 완전히 파괴되어서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우리들은 당대의 역사가인 요세푸스와 유대인의 경전인 탈무드의 기록을 통하여, 옛날 성전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다.
1967년 6일 전쟁으로 예루살렘이 다시 이스라엘 영토가 되면서 예루살렘은 본격적인 발굴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성전이 있었던 자리는 현재 모슬렘의 회교 사원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까지 발굴을 못하고 있다.
통곡의 벽
유대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기는 곳은 어디일까?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때, 유일하게 파괴를 면하고 남아있는 흔적이 통곡의 벽으로 불리는 서쪽 벽이다.
유대인의 전승은 왜 서쪽벽만이 화를 모면하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말한다. 성전을 건설할 때 모든 백성들에게는 맡겨진 구역이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다른 백성들보다 더 많은 눈물과 땀을 흘리며 서쪽 벽을 짓는데 동참했다. 로마군인들이 성전을 불사르고 파괴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성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그때 천사가 서쪽벽 위에 앉아서, 가난한 사람들의 피땀이 서려있는 벽만큼은 로마군인들이 손을 대지 못하도록 보호했다고 한다.
예루살렘을 함락한 후, 로마인들은 유대인들이 더 이상 예루살렘에 거주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했다. 이 법이 잘 지켜지지 않았는지, 로마 황제들은 반복하여 유대인의 예루살렘 거주금지법을 공포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본거지였으나 그 중요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랍비들은 종교적 센터를 예루살렘에서 야브네, 벧쉐아림을 거쳐 티베리야로 옮겨야 했다.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일년에 하루 성전파괴일인 아브월(月) 9일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는 서쪽의 벽으로의 접근을 허락했다. 유대인 전승에 따르면, 솔로몬 왕이 건설한 성전은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아브월 9일에 파괴되었고, 재건된 두 번째 성전이 로마군에의해 파괴된 날도 아브월 9일이었다. 바르 코크바 반란군의 마지막 요새가 함락된 날도 주후 135년 아브월 9일이었다.
아브월 9일 예루살렘의 서쪽벽에 모인 유대인들의 가슴은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들의 자랑인 성전은 불타버리고, 유대인들은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다. 그들은 메시야가 속히 와서 이스라엘을 회복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눈물을 흘렸다. 로마인들은 슬픔에 젖어 기도하는 유대인들을 보며, 서쪽 벽을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통곡의 벽에는 돌 틈새마다 유대인들의 기원을 담은 기도문 쪽지들이 빽빽하게 꽂혀있다. 쪽지들은 너무나 많아서 바닥에도 수북히 쌓여있다. 바닥에 떨어진 쪽지 몇 개를 슬쩍 주어서 읽어보았다.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샬롬을 구하는 것까지 내용은 다양했다.
통곡의 벽이 있는 넓은 광장은 이전에 흙과 돌무더기에 묻혀 있었다. 1967년 6일 전쟁으로 구예루살렘을 되찾은 뒤, 이 지역에 대한 발굴이 활기를 띄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통곡의 벽 광장 지면은 2천년 전 예루살렘 당시의 지면보다도 약 2 미터가 더 높은 상태이다. 무너진 돌무더기들이 원래의 지면을 높여 놓은 것이다.
통곡의 벽을 이루고 있는 돌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모양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지면에서부터 7층까지는 헤롯대왕 당시의 것이지만, 그 위층은 후기에 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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