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예루살렘(종합)

★예루살렘 지하탐사

영국신사77 2008. 8. 25. 18:47
                          예루살렘 지하탐 
                                                                                                                                    협성대 김성교수

 
            물의 오염으로 인한 예루살렘 성 안의 전염병 발생문제가 심각

 예루살렘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은 이 도시의 물 문제를 해결하려는 한 모임에서 비롯됐다. 1864년 5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귀족들과 성직자들의 연례모임에서 물의 오염으로 인한 예루살렘 성 안의 전염병 발생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됐고,이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 수질개선 협회'가 결성됐다. 예루살렘의 기드론 골짜기에 기혼 샘이 있지만, 성문에서부터 가파르게 경사진 곳을 한참 걸어 내려가야하고, 그나마 여름철 건기에는 물의 양이 적어 모든 주민들이 사용하기에는 부족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집집마다 바위를 파서 지하 웅덩이를 만들고 겨울철에 빗물을 저장했다가 여름철 건기에 사용하곤 했다.문제는 한번도 청소하지 않고 사용하는 지하 물저장소의 오염으로 인한 전염병의 발생이었다.
 
                베들레헴 근처의 `솔로몬의 연못'으로부터의 물 끌어오기
 예루살렘 주민들은 모두 성 안의 좁은 공간에 모여 살았다.따라서 일단 콜레라와 같은 전염병이 발생하면 순식간에 번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이는 당시 유럽인들의 선교활동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그 무렵 영국은 콜레라와 같은 수인성 전염병을 상하수도 정비를 통해 어느 정도 퇴치할 수 있는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수질 개선의 묘책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예루살렘의 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남쪽 베들레헴 근처에 위치한 `솔로몬의 연못'이라 불리는 수원지로부터 수로를 설치해 물을 끌어오는 방법이었다.
 
                      윌슨의 수로공사를 위한 지형조사 및 측량 
 이러한 수로공사를 위한 지형조사 및 측량의 임무를 띠고 파견된 영국 공병대의 윌슨 대위(1836~1905년)는 1864년 10월 초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측량을 시작했다. 예루살렘의 지하수로는 영국 공병대보다 2천년을 앞서 BC 2세기 하스몬왕조시대부터 건설됐기 때문에, 윌슨은 성전산 지하에 있는 고대의 물 저장소와 수로를 따라 성밖으로 나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10개월에 걸친 성공적인 탐사를 마치고 `예루살렘의 측량탐사'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이 보고서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성묘교회와 바위의 돔 등에 대한 자세한 평면도와 단면도가 등장해, 건축학적인 분석이 시도됐다. 또한 윌슨은 헤롯 궁전에서 성전 뜰로 향하는 교량의 받침대를 발견했다.오늘날 이것은 `윌슨의 아치' 불린다.

 

 

                      

          

 

     주요 성지 발굴 목적의 `팔레스타인 탐사재단'(PEF) 설립으로 워렌 대위 파견

  1859년에 발표된 다윈의 진화론에 대항하여, 성서와 교회의 권위를 지키려는 신앙적 운동이 활발했던 당시 영국에선, 윌슨의 성공적인 예루살렘 측량 소식에 힘입어 전문적인 성지 탐사 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65년 5월 12일 런던에서 성서를 조명하기 위해 성지의 고고학,지형학,지질학,지리학,자연사,풍습과 전통에 대한 정확하고 체계적인 조사를 목적으로 `팔레스타인 탐사재단'(PEF)이 설립됐다.윌슨이 최초로 예루살렘의 지하를 파고 들어가 발굴했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 출토된 것처럼 박물관 전시용의 화려한 유물은 거의 나오지 않았었다.때문에 이 재단은 단순한 지형조사보다는, 주요 성지에 대한 발굴을 목적으로 1867년 또다시 영국 공병대 장교인 워렌 대위(1840~1927년)를 파견했다.

 1867년 2월 워렌과 그의 일행은 욥바 항구에 도착하여, 세관원이 무기로 오해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비들을 싣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워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예루살렘의 성전산을 발굴하여 솔로몬 성전의 잔재를 발견하고,그리스도의 무덤이 있는 골고다의 성묘교회가 과연 신약시대에 성벽 밖에 있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전산은 무하마드가 승천했다는 바위를 보호하기 위한 `바위의 돔'이 서있는 이슬람교의 3대 성지 중 하나이기 때문에 발굴할 수가 없었다.한번은 워렌과 그의 일행이 성전산의 남쪽 축대 지하를 파내서 성전쪽으로 향하는 거대한 통로를 발견했으나, 돌에 부딪치는 연장소리 때문에 발각돼 기도하던 아랍인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를 했다.할수없이 워렌은 성밖으로 나가서 성전산 축대의 남동쪽 모서리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지점을 파기 시작했다.그들은 수직으로 24m 정도 파낸 뒤, 성전쪽으로 수평으로 파들어가 비로소 신약시대 성전의 축대 기초를 조사할 수 있었다. 


               BC 1천년경 다윗의 예루살렘 점령 당시의 지하 `수구' 발견
 그는 또한 기혼 샘에서부터 실로암 못으로 이어지는 길이 5백30m의 지하 수로를 조사하다가, 기혼 샘 부근에서 수직으로 뚫린 통로를 발견하게 된다.전시에 성 밖의 기혼 샘을 이용할 수 없을 경우, 성 안에서 물을 긷도록 뚫어놓은 터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따라서 오늘날 이 통로는 `워렌의 수직통로'로 불리며,BC 1천년경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요압이 몰래 올라갔던 지하 `수구'로 여겨지기도 한다.

 비록 예루살렘 당국의 반대로 전염병을 퇴치하기 위한 대규모 수로공사는 좌절됐지만,영국 공병대의 두 장교는 예루살렘의 정확한 측량과 발굴을 통해, 성서시대의 예루살렘을 최초로 드러낸 고고학자들로 인정받게 됐다.


   
       

 

 

                                                                  [사진설명]

                       1. `워렌의 수직통로'(Warren's Shaft)
예루살렘의 기혼 샘은 성 밖에 있어서 전시에 적들이 포위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성 안에서 지하터널을 따라 샘에 접근하는 공사를 시도했다.사무엘서에는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요압이 수구를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수구가 바로 `워렌의 수직통로'라는 의견도 있다. 

                                               

 

                                                       

 
                            2. `솔로몬의 연못'(Solomon's Pool)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20㎞ 떨어진 곳에 인공의 댐으로 막아 수량이 풍부한 지하의 샘으로부터 흘러 나온 물을 저장한 `솔로몬의 연못'이 있다. 이 연못은 BC 2세기 하스몬왕조시대에 수원지로 개발됐고,이 곳에서부터 수로를 만들어 예루살렘으로 물을 공급했다

 

                                                                    

 

 
 
 
 
출처 nhw815님의 블로그 | 깐돌아빠
원문 http://blog.naver.com/nhw815/400220216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