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聖地성화歷史[종합]

21.솔로몬성전,23.국제무역항, 42.십계명 및 47.성전법궤

영국신사77 2008. 8. 20. 16:11

                       성지를 찾아서 21-솔로몬 성전

 

성서고고학 역사상 솔로몬 성전 같이 수많은 고고학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유적·유물 발굴은 아직까지 없다.

  19세기 말 유럽 강대국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진행된 팔레스타인 탐사목록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유적지는 언제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산이었다.바로 그 자리에는 오늘날
`바위의 돔'이라 불리는 이슬람교의 사원이 있어, 서구 기독교인들의 관심과 이목이 더욱 집중되고 있다.

  이슬람 건축사에서도 길이 남을 만한 대작으로 여겨지는 눈부신 황금빛 돔과 페르시아제 채색타일로 외벽이 장식된 이 아름다운 팔각형의 건물은, 무하마드가 승천하면서 남긴 발자국이 있다는 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기원전 691년 건설됐다.

  그런데 그 바위가 다름 아닌 솔로몬 성전 터였다는 막연한 추정은 있었지만, 그곳이 이슬람 성지여서 아무도 발굴을 시도할 수 없었다.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해 3천년 전 다윗왕 때와 같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선포했지만, 성전산을 포함한 옛성 지역은 당시 요르단의 영토여서 더이상 접근할 수 없었다.

  1967년 5월 치러진 6일전쟁은 이 모든 상황을 뒤바꿔놓았다.전쟁 발발 3일만에 이스라엘 특공대는, 치열한 교전 끝에 사자문을 통해서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 옛성을 탈취하는데 성공했고, 이어 전 세계 1천6백만 유태인의 최고 성지인 통곡의 벽에는 다윗의 방패가 선명하게 그려진 이스라엘 국기가 펄럭였다.이스라엘군 랍비가 부는 뿔나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군인들은 모두 통곡의 벽에서 기도했다.

  예루살렘 옛성이 이스라엘의 영토가 된 직후, 전쟁의 포격으로 폐허가 된 이 지역에 대대적인 건축공사가 계획됐다. 본 공사에 앞서 고고학적인 발굴작업이 진행됐고, 이 과정에서 신약시대의 집터가 나왔다.또 성전산과 통곡의 벽 근처에서도 대규모 발굴이 진행됐다.그 결과 비록 성전산 내부의 구조는 알 길이 없지만, 신약시대 성전터를 둘러싸고 있는 축대에 관해 비교적 자세하게 알게 됐다.헤롯 성전이 자리잡은 14만㎡ 규모의 넓은 성전뜰은 북쪽을 제외하고는 20m 이상으로 솟은 축대로 둘러싸여 있다.통곡의 벽은 바로 이 축대의 일부였다.

  솔로몬은 궁전과 성전을 포함한 대규모 건축공사를, 페니키아왕 히람에게 발주했다.그 이유는 건축공법상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다기보다는, 이스라엘의 해외무역 자체가 `다시스 상선대'라 불렸던 페니키아 해운회사에 깊이 의존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즉, 이스라엘로서는 페니키아 뱃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동방무역에 간여할 수 없었고, 이 과정에서 무역거래의 일환으로 진행된 프로젝트중 하나가 성전 및 궁전 건축공사였다.

  또 고대세계의 가장 질 좋은 목재인 백향목은 페니키아에서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도움은 필수적이었다.이 목재는 뗏목으로 이스라엘 해안까지 운반된 다음, 육로로 예루살렘으로 이송됐다.건축에 필요한 석재는 예루살렘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모두 7년이 걸린 성전 공사는, 13년이 걸린 궁전 공사와 함께, 과다한 지출로 한때 이스라엘의 국고를 바닥나게 했다.솔로몬은 공사 대금을 현물로 다 갚지 못해, 페니키아와 인접한 갈릴리 산악지대 20여개의 이스라엘 촌락을 통째로 넘겨주었고, 이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 두고두고 구설에 오르게 된다.심지어 히람은 이러한 거래에도 만족못하고 불평했다는 사실이, `카불'이라는 그 지방의 지명으로 유래되기도 했다(왕상9:10~12).

  솔로몬 성전의 설계도(왕상 6)에 따르면, 이 건물은 길이 30m,폭 10m로 가나안의 신전 양식중 `긴방(long-room)구조'에 해당된다.고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도시들에서 발견된 기원전 1800~1600년에 건설된 신전들 중, 일부가 솔로몬 성전과 비슷한 것으로 밝혀졌다.비록 성전산을 발굴할 수 없어 그 구조를 고고학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솔로몬 성전과 가장 흡사한 신전이 시리아의 텔 타이낫에서 발견됐다.이 신전은 기원전 8세기 페니키아 민족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아마도 솔로몬시대 히람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체계적으로 성전산의 동쪽 축대를 면밀히 관찰하던 고고학자들은, 구약시대의 축대와 헤롯이 확장한 신약시대 축대의 이음새를 찾아냈다.땅속에 파묻힌 부분을 확인하고자 했지만, 이 지역이 아랍인들의 묘지로 뒤덮여 있어 발굴할 수 없었다.단지 지상에 드러난 부분을 근거로, 이 축대가 구약시대 성전뜰을 받치던 것이라고만 여길 뿐이다.




〈석류모양 상아 장식품〉

예루살렘에 사는 프랑스의 언어학자 르메르는 79년 한 골동품상점에서 석류 모양의 상아 장식품을 발견했다.높이 4㎝,직경 2㎝인 이 조그만 장식품 한 귀퉁이에는 고대 히브리어 글귀가 새겨져 있어, 그는 금방 이 물건이 구약시대의 유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글자체로 보아 기원전 8세기의 것으로 판명됐고, 비록 몇개의 글자가 훼손됐지만 그는 글귀를 “거룩한 야훼성전의 제사장들의 것”이라고 해독했다.그런데 문제는, 하필이면 `야훼'라는 부분의 네 글자가 훼손된 점이었다.단지 그 공백의 길이가 야훼라는 히브리어 네 글자가 들어갈 정도라는 점에서 야훼로 보았던 것이다.

다른 지역의 신전 발굴에서 출토된 비슷한 유물들을 근거로, 이 석류장식은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손에 쥐고 다니는 지팡이의 머리부분에 해당된 것으로 판명됐다.구약시대 성전에 속한 유일한 유물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뜻있는 고고학자들은 상점 주인으로 하여금 이 유물을 박물관에 기증할 것을 요청했다.하지만 이미 상아 석류가  구약시대 성전에 속한 유일한 유물임이 권위있는 고고학자에 의해 밝혀진 이상,그 상점 주인은 쉽게 기증할 의사를 비치지 않았다.

  그로부터 7년 뒤 이 유물은 유럽으로 빠져나가, 스위스 골동품 경매장에서 약 6천만원에 팔렸다.이름을 밝히지 않은 구입자는, 이 상아석류를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에 흔쾌히 기증했다

 

 

          성지를 찾아서 23-솔로몬의 국제 무역항을 찾아서 

 

 솔로몬 시대 예루살렘은 외국제 수입상품들로 넘쳐났으며, 수많은 외국상인들이 북적대는 국제적인 메트로폴리스였다. 부왕 다윗이 영토를 확장하기위해 무력으로 국제적 감각을 익힌 반면, 아들 솔로몬은 무역과 외교라는 평화적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부각시켰다. 솔로몬의 국제성은 300명이나 되는 그의 부인들 중에서, 각각 이집트 모압 암몬 에돔 페니키아 힛타이트의 왕족과 귀족 출신들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잘 찾아볼 수 있다. 성서 경제학자들은 국제무역으로 축적한 부를 이용하여, 솔로몬이 비로소 성전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과연 솔로몬이 건설한 홍해의 무역항이라는 에시온 게벨은 어디이며, 그 항구를 운영했던 다시스 해운회사는 어떤 기업이었는가


                            홍해의 무역항 에시온 게벨 
  예루살렘 성전의 신축공사를 기획하던 솔로몬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당대 최고급 목재인 레바논의 백향목을 수입하는 문제였다. 기본적인 건축자재인 석회암은 예루살렘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노동력이야 부역을 통해 모집할 수 있지만, 성전의 내부를 황금빛으로 치장하기 위해서는 독특한 향과 함께 웬만해서는 잘 썩지 않는 백향목을 반드시 사용해야만 했다.

 
  백향목의 명성은 이집트에서는 이미 왕조가 시작된 서기전 3000년경부터 입증이 됐다. 대규모 선박을 만들기 위해, 이집트는 레바논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뗏목으로 백향목을 가져왔던 것이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의 축성과 궁전 및 성전 등의 건축사업을 위하여 필요한 목재와 기술은 페니키아의 두로왕 히람과 구상 무역을 통해서 충당했다. 당시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 등의 목재는 바다에서 뗏목으로 이동되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욥바 북부의 야르콘 강으로 운반됐다. 목재와 기술 지원의 댓가로 솔로몬은 해마다 엄청난 양의 밀(2만코르)과 기름(20코르)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갈릴리 지방의 20개 도시를 히람에게 건네준 것으로 미루어, 솔로몬이 약속한 댓가를 제때에 충분히 지불하지 못했거나, 해가 거듭할수록 히람의 요구조건이 강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사용된 것은 이집트 신왕국 시대가 시작할 무렵인 서기전 1550년경부터였다. 신앗시리아 시대의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말들의 원산지는, 대부분 터키 남부의 타우루스(Taurus) 산지와 메소포타미아의 지붕으로 불리는 자그로스(Zagros) 산지에 위치한 지역들이다. 이집트는 비교적 일찍부터 말과 병거를 이용한 전술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엄청난 숫자의 군마가 필요했고, 솔로몬은 바로 이점에 착안하여 터키 남부의 무쭈르(Mutzur)와 쿠에(Que)로부터 말을 수입하여 이집트에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목적으로 그는 국제 무역로변에 위치한 므깃도를 병거성으로 개발했고 넓은 이즈르엘 평야에서 군마를 훈련시킬 수 있었다. 솔로몬이 운용한 병거대(chariotry)와 기병대(chivalry)는 4만마리의 말과 12,000명의 기병들로 구성된 대규모였다. 당시 병거는 한대에 은 600세겔(6㎏)이었고 말은 한마리에 은 150세겔(1.5㎏) 정도였기 때문에, 솔로몬은 말 장사를 통해 커다란 이익을 올렸을 것이다.

  스바 왕국은 향품을 많이 생산하며, 근처의 동부 아프리카 지역과 해상 무역을 통하여 금을 확보할 수 있고, 또한 그들이 낙타에 주로 짐을 싣고 온 것으로 미루어, 이 왕국의 지리적 위치를 아라비아 남부 지역으로 보고 있다. 스바의 여왕은 황금만 120키카르, 즉 5t에 달하는 엄청난 양을 가져왔다. 그러나 역시 스바산의 최고의 상품은 신전 분향에 필요한 향품과 방부제, 그리고 각종 향신료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아라비아 반도의 남부와 인도양 연안에서 자라기 때문에, 이미 솔로몬 시대부터 이스라엘과 인도양 사이에 거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솔로몬이 주변국들과 육상무역을 했지만, 이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최고의 부와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에시온 게벨 항구에 설립한 다시스 해운회사 덕택이었다. 다시스는 지명으로서, 이 회사 소속의 배와 선원들이 대부분 그곳 출신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스는 지중해변에 자리잡은 해양 무역의 도시로만 추정될 뿐, 아직 정확한 지리적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페니키아 학자들은 스페인의 타르테소스로 보고 있다. 에스겔서(27:12)에 기록된 대로, 다시스의 특산품은 철 은 주석 납 등의 진귀한 금속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다시스의 배들은 홍해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와 인도양 너머의 인도, 그리고 동부 아프리카 등 매우 먼 거리를 항해하기 때문에, 3년에 한차례씩 이스라엘 항구인 에시온 게벨로 돌아왔다. 어떤 학자들은 항해기간이 3년 걸린 것은 아프리카 대륙을 한바퀴 돌아 대서양을 통해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 불리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지중해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하지만 당시 아프리카 해안에는 아라비아 남부의 스바 왕국 등과 교역을 하였고, 서기전 1500년경 이집트의 하쳅숫트 여왕의 벽화 부조에 기록된 동부 아프리카의 푼트와 성서의 기록에 나타난 오피르 외에는 알려진 지명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일부러 오랜 기간동안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돌아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남쪽 홍해의 항구 도시였던 에시온 게벨은 1930년대 미국의 유대인 고고학자 넬슨 글릭의 발굴 결과, 오늘날 에일랏 근처에 위치한 텔 엘-클레이페(Tell el-Kheliefeh)로 알려졌다. 하지만 출토된 토기들에 대한 정밀 분석 결과, 대부분 서기전 8세기 이후의 것들로 밝혀졌다. 특히 무엇보다도 이 유적지는 바다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동안의 퇴적작용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고대 항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1967년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 후, 해양 고고학자들은 신비에 싸인 홍해의 조그만 섬 게지랏트 엘-파라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시나이 반도의 해안으로부터 18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섬은, 길이가 400미터 정도되는 작은 섬으로서 서쪽에는 깊숙한 만으로 이루어진 항구가 있었다. 해저 발굴 결과, 방파제의 흔적과 함께 구약시대의 토기류들이 발견됐다. 실제로 지중해의 페니키아 도시들도, 두로와 같이 해변에서 가까이 위치한 섬을 육지와 방파제로 이어서 항구를 만드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만일 타르쉬쉬 해운회사가 페니키아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었다면, 내륙에 위치한 텔 엘-클레에페 보다는 해변에 가까이 위치한 게지랏트 엘-파라윤 섬이 많은 배들을 정박시킬 수 있는 적절한 항구가 될 것이다.

  한편 서기전 850년경 유다의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의 아하시야는 공동으로 투자하여 합작 해운회사 프로젝트(역대하 20:36-37)를 시작했다. 100년전 솔로몬 시대에 명성을 떨친 다시스 해운회사를 다시 고용했으나, 배들이 파선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아마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세력이 약화된 국제정세의 모멘툼을 적절히 이용할 수 있었던 솔로몬 시대와는 달리, 이집트와 앗시리아가 건재해서 국제 무역의 중심이 홍해에서부터 지중해로 넘어간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짐작된다.
 
  신약시대에 헤롯이 지중해변에 대규모 항구도시 가이사랴를 건설하고, 아라비아 반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것이, 어느 정도 솔로몬의 업적과 비교된다. 더구나 국제무역에 일가견이 있었던 두 왕에 의해, 각각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성전이 건설됐다는 사실도 결코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김 성 교수(협성대학교)

 

 

                         성지를 찾아서 42-솔로몬성전의 그룹부조(浮彫)와 십계명

 

서기전 167년 12월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치하던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교 탄압의 일환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가증스런 파멸의 우상’을 세웠다(마카베오상 1:54). 이에 격분한 유대인들은 모디인 마을의 마타티야 가문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 집안의 셋째 아들의 이름을 따 마카비 혁명이라 일컫는 대규모 민중봉기는 시작된지 3년 만에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성전의 우상을 철거했다.

                              헤롯 성전의 황금 독수리상

  서기전 20년 기존의 성전을 헐고 대규모로 신축한 헤롯왕은 성전 입구의 대들보 위에 로마 제국을 상징하는 황금 독수리상을 설치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 2계명을 강조했던 두 명의 랍비 유다와 마티아스는, 제자들에게 헤롯이 설치한 우상의 죄악성을 시사했고, 그들은 곧 성전으로 달려가 황금 독수리상을 끌어내려 도끼로 부숴버렸다. 이에 화가 난 헤롯은 이들을 체포하여 모두 산 채로 화형에 처했다.

 
  이처럼 이스라엘 역사상 제 2계명을 철저히 지켰던 시대는, 서기전 167년 마카비 혁명부터 서기 135년 바르 코크바 혁명까지 약 300년 동안이다. 고고학적 발굴에서 출토된 이 시대의 동전에는 인물이나 동물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로마의 후광으로 유다의 왕으로 임명된 헤롯이 찍어낸 동전에도 그의 초상은 새겨져 있지 않고 오직 식물적인 모티브만 나타난다.

  하지만 구약시대의 경우에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야훼 자신이 직접 이스라엘 민족에게 성막 안에 안치한 법궤를 덮는 두 마리의 그룹[(히)케룹;Cherub]을 만들 것을 명령했으며(출애굽기 25:18∼22), 성막의 천에도 여러 개의 그룹[케룹]을 장식하도록 했다(출애굽기 26:1).
 
  나아가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 올리브 나무로 만든 길이 4.5m,높이 4.5m 크기의 그룹[케룹] 두 마리를 설치했고(열왕기상 6:23∼28), 성전의 내부 벽과 문짝에도 그룹[케룹]들을 부조로 새겼다(열왕기상 6:29∼35).

  십계명의 두번째 조항은 분명히 그 어떤 살아있는 인물이나 동물의 형상도 조각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솔로몬은 제 2계명을 위반했을까?

                                   스핑크스와 라마수

  고대 이집트인들과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일찍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존재로서 합성 생물을 희망해 왔다. 이러한 꿈은 인간의 머리와 사자의 앞부분, 황소의 뒷부분과 독수리의 날개로 이루어진 이집트의 스핑크스와 메소포타미아의 라마수(Lamasu)로 구체화된다.

  스핑크스는 원래 고대 이집트어로 ‘살아있는 형상’이라는 의미의 셰셉프 앙크(shesep ankh)에서 비롯됐으며, 그리스어로는 ‘교살자’라는 뜻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스핑크스는 에키드나(Echidna)와 티폰(Typhon)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등장한다. 여자의 얼굴과 가슴, 사자의 몸 그리고 독수리의 날개를 지닌 이 괴물은, 헤라 여신에 의해 테베를 저주하기 위해 파견됐다. 스핑크스는 이 도시의 입구 절벽 위에 자리를 잡고 모든 지나가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를 내고 정답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먹어치웠다. “아침에는 네 다리로, 그리고 저녁에는 세 다리로 걸으며, 네 다리로 걸을 때가 더 연약한 존재는 무엇인가?” 마침내 오이디푸스가 그 정답을 대자, 스핑크스는 절벽에서 떨어져 자살했다. 그 후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이 됐고, 운명의 장난으로 그 도시의 왕비였던 자신의 어머니 조카스타(Jocasta)와 결혼하게 된다.

  1842년 앗시리아의 수도였던 코르사바드를 발굴한 프랑스의 보타(P.E.Botta)는 궁전 입구에 양쪽으로 마주보고 서있는 사람의 얼굴을 한 황소상을 발견했는데, 4.2m 높이의 거대한 석상에는 독수리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또한 영국 고고학자 레이야드(A.H.Layard)가 니므루드를 발굴했을 때에도 역시 비슷한 동물상을 여러 개 발견했다. 메소포타미아 문헌에서 라마수로 알려진 이 신화적 존재는, 인간의 얼굴에 황소의 몸 그리고 독수리의 날개가 합쳐진 것으로, 궁전을 지키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바벨론의 이쉬타르 성문에 부조로 새겨진 마르둑 신상은 용의 머리에 양의 뿔, 사자의 앞발과 독수리의 뒷발, 전갈의 꼬리 그리고 온몸이 물고기의 비늘로 덮여 있어서, 지구상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합작생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숭배되는 신상을 만들지 말라

  오늘날 대부분의 구약학자들은 십계명이 구체화된 시기를, 솔로몬 성전보다 훨씬 후대인 서기전 5세기 페르시아 시대로 보고 있기 때문에, 솔로몬 성전의 그룹[케룹] 조각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경의 우상제작 및 숭배 금지 조항들을 자세히 분석한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의 후로비츠(V.Hurowitz)교수는, 야훼가 금지시킨 것은 일반적인 인물이나 동물상이 아니라, 신으로 숭배되는 신상들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성소의 그룹[케룹]은 비록 인간의 얼굴과 사자 몸에 독수리의 날개를 지닌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의 라마수나 이집트의 스핑크스를 닮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이들을 신으로 숭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 2계명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후로비츠의 이러한 견해는, 서기 12세기 스페인 출신의 유대교 대학자인 마이모니데스의 십계명 해설에 기초하고 있다. 마이모니데스는 첫 세가지 계명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다른 신을 갖지 말라. 둘째, 그것에 절하지 말라. 셋째, 그것을 섬기지 말라. 그는 어떤 형태로든지 살아있는 동물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명령은 오직 신격화되는 것에 한정되며, 만일 신으로 섬기는 것이 아닐 경우에는 형상을 만들어도 괜찮다는 유권해석을 했다. 이러한 해석은 출애굽기 20장23절에서 야훼가 만들지 말라고 금지시킨 것은 일반적인 형상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로 숭배되는 특별한 신상들이라는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에스겔의 네 생물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동물들이 합성된 그룹[케룹]은 에스겔 예언자의 환상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에스겔의 그룹[케룹]은 각각 인간, 사자, 황소, 독수리 등 모두 네 개의 얼굴을 지녔다(에스겔 1:10). 이러한 구약의 전통적인 그룹[케룹]은, 신약시대에 들어와 요한의 환상 가운데에도 각각 사자 송아지 인간 독수리 등 네 생물이 주님의 보좌 주위로 배치돼 있음을 알 수 있다(요한계시록 4:7).

  한편 서기 4세기 비잔틴 시대 이후로 기독교 예술에서 자유스럽게 성서의 인물과 동물들을 형상화하는 분위기 속에서,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의 네 생물은 신약의 4복음서를 상징하는 모티브로 정착됐다. 마태는 인간, 마가는 사자, 누가는 황소 그리고 요한은 독수리로 각각 상징된다는 것이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
 
 
 
 
                 성지를 찾아서 47-잃어버린 솔로몬 성전의 법궤 
 
1992년에 출판된 그레이엄 헨콕의 저서 ‘상징과 봉인’은 법궤의 역사적 행방을 추적했다는 의미에서 매우 수준 높은 논픽션으로 평가된다.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동아프리카 주재원으로 활약하던 헨콕은, 에티오피아의 악숨을 방문하여 그곳의 한 교회에 안치돼 있다는 법궤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어떻게 해서 예루살렘의 보물이 머나먼 에티오피아까지 오게 되었는가.

                         인디아나 존스의 법궤찾기

  헨콕의 이러한 법궤찾기는 1981년에 제작된 스티븐 스필버그의 ‘잃어버린 법궤의 추적자들’, 일명 ‘레이더스’로 알려진 미국의 한 할리우드 영화에서부터 비롯됐다. 유대인 성서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법궤가 이집트 고센 땅 어느 곳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다.
 
  성서에는 솔로몬이 죽은 후 르호보암 제5년에 이집트의 파라오 시삭이 쳐들어와 성전의 보물을 탈취해 간 사건이 언급돼 있다(대상 12:9). 이때 파라오는 황금으로 씌워진 법궤도 전리품으로 가져다가 이집트의 수도인 타니스의 한 신전에 보관했다는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와 나치 독일군은 타니스에서 경쟁적으로 보물찾기에 나섰고, 결국 각본대로 법궤는 고고학자의 수중에 들어와서 선편으로 미국으로 이송된다. 하지만 도중에 잠수함까지 동원한 독일군에 의해 법궤가 탈취되고, 법궤의 신비스러운 위력을 시험키 위해 뚜껑을 여는 순간 강렬한 빛에 의해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죽고 만다. 고고학과 모험, 사랑과 이념이 적절히 배합된 이 영화는, 법궤가 나무상자에 포장되어 미국 국방성 창고에 보관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악숨의 기독교 왕국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서기 350년쯤 시리아의 프루멘티우스가 악숨 왕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수단과 에티오피아 그리고 예멘 지역을 모두 통치했던 이 왕국은, 국제적인 무역국가로 그 명성을 떨쳤다. 서기 12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한 연대기에 의하면, 에티오피아 왕들의 조상은 솔로몬과 스바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메넬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 말로 ‘현자(솔로몬)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메넬릭이 에티오피아의 초대 황제이며, 1930년부터 통치했던 하일레 셀라시가 225번째 황제로 여겨진다. 1974년의 군사 쿠데타로 셀라시는 3000년 역사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황제로 기록됐다.

                               악숨 교회의 법궤

  헨콕이 1983년 악숨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그는 군사정권의 후원으로 에티오피아 홍보 영상물을 제작중이었으며 ‘시온의 성 마리아’ 교회에 있다는 법궤를 집중적으로 조명코자 했다. 하지만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법궤를 구경하기는 커녕, 교회내부로 들어가는 것도 허락받지 못했다. 왜냐면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법궤 수호자’로 임명된 수도사이기 때문이다.
 
  이 수도사에 의하면 스바 여왕의 아들 메넬릭이 스무살 청년이 되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12지파의 아들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올 때 사독의 아들인 아자리우스가 법궤를 훔쳐왔다는 것이다. 헨콕은 법궤가 해마다 1월에 열리는 팀캇이라 불리는 그리스도의 현현 축제 기간에만 교회밖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내전의 급박한 상황속에서 그는 이 축제에 참여할 수 없었다.

                            황금으로 씌워진 나무상자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두 개의 십계명 돌판을 보관하기 위해 광야의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법궤는, 길이가 1.1m, 폭과 높이가 각각 0.7m인 상자였다(출 37:1). 옮기기 쉽게, 상자 아랫부분에는 두 개의 채(손잡이)가 있었고 상자의 안팎은 순금으로 씌웠다. 금송아지와 함께 법궤는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제의기구였다.
 
  1922년에 발견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중에는 법궤를 연상시키는 유물이 있다. 길이가 0.9m, 폭 0.5m, 높이 0.6m의 나무상자는 황금판으로 입혀져 있으며 위에는 자칼 모양의 수호신 아누비스가 앉아 있다. 더욱이 이 황금상자는 쉽게 들고 다닐 수 있도록 2.7m 길이의 두 개의 채가 달려있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법궤 위에는 두 마리의 황금 케룹이 서 있다는 것뿐이다.

                                    법궤의 이동

  법궤는 요단강을 건넌 후 이스라엘 민족이 이동함에 따라 길갈에서 세겜을 거쳐 실로의 ‘야훼의 전’에 모셔졌다. 서기전 11세기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에벤에셀 전투에서 패하게 되자 실로의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간다(삼상 4:3). 블레셋 군대는 법궤를 탈취해서 아스돗의 다곤 신전에 안치한다. 하지만 불레셋에 재앙이 내려, 결국 그들은 법궤를 이스라엘 지역으로 되돌려 보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에 가져왔고 솔로몬 성전에 안치됐다. 성서에 법궤에 관한 언급은 200여회 나타나는데, 솔로몬 이후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이 시대에 이미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볼 수 있다.

  헨콕은 법궤의 행방에 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서기전 680년쯤 예루살렘의 왕 므나세는 우상숭배하면서 아세라 목상을 성전에 세웠다(왕하 21:7). 이에 격분한 한 무리의 제사장들이 법궤를 가지고 이집트로 내려갔고 아스완 지방의 나일강에 위치한 엘레판틴 섬의 유대인 신전에 모셨다. 서기전 400년쯤 신전이 파괴된 후 수단의 메로에로 옮겨졌다가 악숨 왕국이 이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한 서기 1세기쯤 법궤가 최종적으로 이곳까지 오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헨콕의 이러한 결론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우선 성서에는 므나세 시대까지 성전에 법궤가 있었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또한 헨콕은 므나세의 연대와 엘레판틴의 유대교 신전의 연대 사이에는 150년이상의 차이가 있음을 고려하지 못했다. 나아가 이 신전이 파괴된 후 유대인들이 남쪽의 메로에로 이동했다는 어떠한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도 없다. 따라서 차라리 시삭이 빼앗아 갔거나 악숨 교회의 ‘법궤 수호자’의 말대로 스바의 아들 메넬릭이 솔로몬 시절에 이미 법궤를 에티오피아로 가져왔다는 해설이 더 타당하게 들린다.

  지금까지 발견된 솔로몬 성전의 유일한 고고학적 유물이 엄지 손가락 크기의 상아석류 장식인 점으로 미루어, 법궤의 고고학적 행방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잃어버렸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1991년 1월18일 헨콕은 8년동안이나 고대하던 팀캇 축제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 파괴적인 위력을 방지하기 위해 두꺼운 천에 싸인 법궤가 축제행렬에 등장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이 법궤가 진품이 아닌 복제품이라고 확신했다. 왜냐면 법궤가 교회밖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법궤 수호자’는 여전히 지성소를 떠나지 않고 향을 피우며 법궤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기 때문이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