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聖地성화歷史[종합]

※ 홍해에서 지중해까지 <김성 교수>

영국신사77 2008. 9. 8. 18:29
홍해에서 지중해까지

     1.솔로몬의 국제 무역항 에시온 게벨을 찾아서

     2.두로를 위한 엘레지

     3.자주 물감과 자색 옷 

     4.도탄 부부와 블레셋 고고학

     5.멘델 눈과 갈릴리 호수의 고고학

     6.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반 사역을 한 이유

 

 

 

          홍해에서 지중해까지

                    1.솔로몬의 국제 무역항 에시온 게벨을 찾아서 

 

 솔로몬 시대 예루살렘은 외국제 수입상품들로 넘쳐났으며, 수많은 외국상인들이 북적대는 국제적인 메트로폴리스였다. 부왕 다윗이 영토를 확장하기위해 무력으로 국제적 감각을 익힌 반면, 아들 솔로몬은 무역과 외교라는 평화적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부각시켰다. 솔로몬의 국제성은 300명이나 되는 그의 부인들 중에서, 각각 이집트 모압 암몬 에돔 페니키아 힛타이트의 왕족과 귀족 출신들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잘 찾아볼 수 있다. 성서 경제학자들은 국제무역으로 축적한 부를 이용하여, 솔로몬이 비로소 성전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과연 솔로몬이 건설한 홍해의 무역항이라는 에시온 게벨 어디이며, 그 항구를 운영했던 다시스 해운회사는 어떤 기업이었는가

 

 열왕기상 9:26,    "솔로몬 왕이 에돔홍해 물 가의

                               엘롯 근처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지은지라"

 

   역대하 8:17, "그 때에 솔로몬이 에돔땅의 바닷가

                         에시온게벨(Ezion Gebel)엘롯(Elath)에 이르렀더니"

 

 
                            홍해의 무역항 에시온 게벨 
  예루살렘 성전의 신축공사를 기획하던 솔로몬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당대 최고급 목재인 레바논의 백향목을 수입하는 문제였다. 기본적인 건축자재인 석회암은 예루살렘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노동력이야 부역을 통해 모집할 수 있지만, 성전의 내부를 황금빛으로 치장하기 위해서는 독특한 향과 함께 웬만해서는 잘 썩지 않는 백향목을 반드시 사용해야만 했다.

 
  백향목의 명성은 이집트에서는 이미 왕조가 시작된 BC 3000년경부터 입증이 됐다. 대규모 선박을 만들기 위해, 이집트는 레바논에 사람들을 파견하여 뗏목으로 백향목을 가져왔던 것이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의 축성과 궁전 및 성전 등의 건축사업을 위하여 필요한 목재와 기술은 페니키아의 두로왕 히람과 구상 무역을 통해서 충당했다. 당시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 등의 목재는 바다에서 뗏목으로 이동되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욥바 북부의 야르콘 강으로 운반됐다.
 
 목재와 기술 지원의 댓가로 솔로몬은 해마다 엄청난 양의 밀(2만코르)과 기름(20코르)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갈릴리 지방의 20개 도시를 히람에게 건네준 것으로 미루어, 솔로몬이 약속한 댓가를 제때에 충분히 지불하지 못했거나, 해가 거듭할수록 히람의 요구조건이 강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말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사용된 것은 이집트 신왕국 시대가 시작할 무렵인 BC 1550년경부터였다. 신앗시리아 시대의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말들의 원산지는, 대부분 터키 남부의 타우루스(Taurus) 산지와 메소포타미아의 지붕으로 불리는 자그로스(Zagros) 산지에 위치한 지역들이다.
 
 이집트는 비교적 일찍부터 말과 병거를 이용한 전술을 발전시켰기 때문에 엄청난 숫자의 군마가 필요했고, 솔로몬은 바로 이점에 착안하여 터키 남부의 무쭈르(Mutzur)와 쿠에(Que)로부터 말을 수입하여 이집트에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목적으로 그는 국제 무역로변에 위치한 므깃도를 병거성으로 개발했고 넓은 이스르엘 평야에서 군마를 훈련시킬 수 있었다. 솔로몬이 운용한 병거대(chariotry)와 기병대(chivalry)는 4만마리의 말과 12,000명의 기병들로 구성된 대규모였다. 당시 병거는 한대에 은 600세겔(6㎏)이었고 말은 한마리에 은 150세겔(1.5㎏) 정도였기 때문에, 솔로몬은 말 장사를 통해 커다란 이익을 올렸을 것이다.

  스바 왕국은 향품을 많이 생산하며, 근처의 동부 아프리카 지역과 해상 무역을 통하여 금을 확보할 수 있고, 또한 그들이 낙타에 주로 짐을 싣고 온 것으로 미루어, 이 왕국의 지리적 위치를 아라비아 남부 지역으로 보고 있다. 스바의 여왕은 황금만 120키카르, 즉 5t에 달하는 엄청난 양을 가져왔다. 그러나 역시 스바산의 최고의 상품은 신전 분향에 필요한 향품과 방부제, 그리고 각종 향신료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아라비아 반도의 남부와 인도양 연안에서 자라기 때문에, 이미 솔로몬 시대부터 이스라엘과 인도양 사이에 거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솔로몬이 주변국들과 육상무역을 했지만, 이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최고의 부와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에시온 게벨 항구에 설립한 다시스 해운회사 덕택이었다. 다시스는 지명으로서, 이 회사 소속의 배와 선원들이 대부분 그곳 출신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스는 지중해변에 자리잡은 해양 무역의 도시로만 추정될 뿐, 아직 정확한 지리적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페니키아 학자들은 스페인의 타르테소스로 보고 있다. 에스겔서(27:12)에 기록된 대로, 다시스의 특산품은 철·은·주석·납 등의 진귀한 금속이라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다시스의 배들은 홍해를 거쳐 아라비아 반도와 인도양 너머의 인도, 그리고 동부 아프리카 등 매우 먼 거리를 항해하기 때문에, 3년에 한차례씩 이스라엘 항구인 에시온 게벨로 돌아왔다. 어떤 학자들은 항해기간이 3년 걸린 것은 아프리카 대륙을 한바퀴 돌아 대서양을 통해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 불리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지중해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아프리카 해안에는 아라비아 남부의 스바 왕국 등과 교역을 하였고, BC 1500년경 이집트의 하쳅숫트 여왕의 벽화 부조에 기록된 동부 아프리카의 푼트와 성서의 기록에 나타난 오피르 외에는 알려진 지명이 별로 없기 때문에, 일부러 오랜 기간동안 아프리카 대륙 전체를 돌아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 남쪽 홍해의 항구 도시였던 에시온 게벨은 1930년대 미국의 유대인 고고학자 넬슨 글릭의 발굴 결과, 오늘날 에일랏 근처에 위치한 텔 엘-클레이페(Tell el-Kheliefeh)로 알려졌다. 하지만 출토된 토기들에 대한 정밀 분석 결과, 대부분 BC 8세기 이후의 것들로 밝혀졌다. 특히 무엇보다도 이 유적지는 바다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 동안의 퇴적작용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고대 항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1967년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 후, 해양 고고학자들은 신비에 싸인 홍해의 조그만 섬 게지랏트 엘-파라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시나이 반도의 해안으로부터 18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섬은, 길이가 400m 정도되는 작은 섬으로서, 서쪽에는 깊숙한 만으로 이루어진 항구가 있었다. 해저 발굴 결과, 방파제의 흔적과 함께 구약시대의 토기류들이 발견됐다. 실제로 지중해의 페니키아 도시들도, 두로와 같이 해변에서 가까이 위치한 섬을 육지와 방파제로 이어서 항구를 만드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만일 타르쉬쉬 해운회사가 페니키아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었다면, 내륙에 위치한 텔 엘-클레에페 보다는, 해변에 가까이 위치한 게지랏트 엘-파라윤 섬이 많은 배들을 정박시킬 수 있는 적절한 항구가 될 것이다.

  한편 BC 850년경 유다의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의 아하시야는 공동으로 투자하여 합작 해운회사 프로젝트(역대하 20:36-37)를 시작했다. 여호사밧보다 100년전 솔로몬 시대에 명성을 떨친 다시스 해운회사를 다시 고용했으나, 배들이 파선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아마도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세력이 약화된 국제정세의 모멘툼을 적절히 이용할 수 있었던 솔로몬 시대와는 달리, 이집트와 앗시리아가 건재해서 국제 무역의 중심이 홍해에서부터 지중해로 넘어간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짐작된다.
 
  신약시대에 헤롯이 지중해변에 대규모 항구도시 가이사랴를 건설하고, 아라비아 반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계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것이, 어느 정도 솔로몬의 업적과 비교된다.
 
 더구나 국제무역에 일가견이 있었던 두 왕에 의해, 각각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성전이 건설됐다는 사실도 결코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것이다. 
                                                                       /김 성 교수(협성대학교)

 

 

                                    2.두로를 위한 엘레지

 

 서기전 332년 2월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대는 지중해안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가고 있었다.이에 대항하여 페르시아군은 알렉산드로스를 저지하기 위해 페니키아의 섬나라 두로에 해군력을 집결시켰다.

 

 두로는 해안으로부터 700m 떨어진 섬이었고 육중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예로부터 난공불락의 요새로 유명했다.더욱이 알렉산드로스는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하지만 이집트 정복을 눈앞에 둔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그는 병사들로 하여금 육지에서부터 섬까지 폭 60m의 공격로를 만들도록 명령했다.두로 해군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6개월의 난공사 끝에 드디어 섬이 육지와 연결됐다.마케도니아 군대는 돌판으로 포장된 공격로를 따라 공성퇴를 동원하여 성벽을 파괴시켰다.마침내 두로가 함락됐고, 주로 이 도시의 선박으로 구성된 지중해의 페르시아 해군은 더 이상 알렉산드로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비록 페르시아의 위협 때문에 할 수 없이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했지만, 두로는 원래 전쟁보다는 평화를 사랑하고 주로 국제무역을 통해 번창했던 민족이었다.페니키아는 그 지리적 특성상 내륙으로는 최고 3,000m 높이의 레바논 산지가 가로막고 있어서 진출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오직 바다뿐이었다.따라서 일찍부터 발달된 항해술을 이용하여 먼바다로 나가 지중해 여러 곳에 식민지를 개척했고 무역을 했으며, 그 결과 다양한 문화가 교차되는 국제적 감각의 첨단 도시로 발전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전승에 의하면 두로의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히람 왕(서기전 969∼936)이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두 섬 사이의 바다를 메워, 전체 넓이가 16만㎡에 이르는 주거지를 형성했다고 한다.섬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하나씩 모두 두 개의 항구를 만들고 시돈과 이집트와 무역을 했다.

 

 두로가 아직 섬이었을 때 양식과 물은 맞은편 육지의 풍부한 물과 농경지가 있는 곳에 위치한 일종의 배후도시였던 우슈로부터 공급받았다.두로는 솔로몬의 성전 건설 당시 물자와 인력으로 원조해주었던 이스라엘의 동맹국이었다. 두로는 그리스-로마시대에도 여전히 무역항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침략 이후 육지로 연결된 공격로 양편으로 파도에 밀려온 토사가 쌓이면서, 두로는 더 이상 섬이 아닌, 바다 쪽으로 돌출된 반도의 모습으로 남게 됐다.

 국제적 무역도시로서의 두로의 모습은 에스겔의 두로를 위한 엘레지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우선 두로는 바다의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많은 섬들과 교역할 수 있는 입지적 조건을 갖췄다(겔 27:3).또한 두로는 다국적 원자재를 이용해서 최상품의 선박들을 건조했다(겔 27:5∼7).우선 쉐니르의 잣나무 판자를 이용해서 선체를 만든 다음, 크레타의 소나무로 갑판을 깔았다. 바샨의 단단한 상수리나무로 노를 만들었고 가장 중요한 돛대는 키가 크고 품질이 좋은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세웠다. 돛과 깃발은 이집트의 수놓은 고운 삼베로 만들었고, 갑판 위에 설치한 천막은 키프로스의 청색천과 자색천으로 장식했다.선박뿐만 아니라 이를 운행하고 수리하는 인력들도 페니키아의 대표적인 전문가들로 구성됐다(겔 27:8∼9).선원들은 시돈과 아르바드 사람들, 선박 수리공은 비블로스의 기술자로 구성됐고, 가장 중요한 몫을 담당하는 항해사는 두로의 전문가들이 맡았다.

 

 두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군대가 필요했지만, 자국민들은 대부분 바닷사람들이었다.따라서 두로는 페니키아 사람들 외에도 축적된 부를 이용하여 페르시아 리디아 푸트(리비아) 등의 외인부대를 용병으로 고용했다(겔 27:10∼11).

 이러한 두로의 세계화 정책은 대상 무역국의 숫자와 교역 상품의 다양성에서 더욱 그 진가를 찾아볼 수 있다(겔 27:12∼25).스페인에 위치한 다시스로부터는 은과 철을 비롯한 금속류를 들여왔고, 야반으로 불렸던 그리스로부터는 노예와 청동그릇류를 수입했다.터키 동부지역으로 알려진 도갈마로부터는 말,, 전마 노새를,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의 남부지역인 드단으로부터는 상아와 흑단목을 수입했다.아람으로부터는 남보석을 비롯한 보석류와 옷감 및 자수제품을, 다메섹으로부터는 포도주 모직 제련철 계피 창포 등을 들여왔다.아라비아로부터는 양과 염소를, 스바로부터는 향수와 황금을 수입했고, 이밖에도 하란 아수르 등을 비롯한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자수와 카펫을 수입했다.이중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두로인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식량인 밀 올리브 무화과 꿀 등은 유다와 이스라엘로부터 수입했다는 것이다.

 

 솔로몬도 성전 건설의 대가로 두로의 히람왕에게 밀과 올리브 기름을 제공한 것으로 나타난다(왕상 5:11).하지만 두로가 이에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솔로몬은 갈릴리 지역의 20개의 성읍을 더 건네주었다(왕상 9:11).결국 두로는 많은 재산과 무역품으로 주변 민족들을 풍요롭게 만들었다(겔 27:33).

 

 하지만 에스겔은 폭풍우로 인해 두로의 배들이 난파됐기 때문에, 그들의 영화가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비극으로 그의 두로를 위한 엘레지를 마무리한다.

 

                                              전쟁과 예언 문학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주변국의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그들의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것은 서기전 9세기초부터 시작된 앗시리아의 잔인한 전쟁술을 비롯한 그들의 식민지 정책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기전 883년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앗시리아의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수많은 전쟁으로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방을 괴롭혔다.그 아들 샬마네세르 3세도 35년의 통치기간에 31년을 전쟁을 치를만큼 아버지를 능가하는 호전적 인물이었다.

 

 그 무렵 이스라엘은 서서히 무자비한 북쪽의 앗시리아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따라서 이러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메시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비로소 이스라엘 최초의 예언문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서기전 600년쯤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는 페니키아의 도시들을 점령했고 무역항들은 제 기능을 잃게 됐다.나아가 서기전 586년 예루살렘의 성전도 바빌로니아에 의해 파괴됐다.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에서 에스겔은 화려한 솔로몬 성전을 건설했던 두로의 명성이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는 엘레지를 지어 부르면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를 받고자 했을 것이다.

 

 

 

                                           3.자주 물감과 자색 옷 

페니키아 민족은 바닷가에 치솟은 해발 3000m 높이의 레바논 산지 때문에 내륙과는 고립되어 일찍부터 바다로 진출했다. 이들은 지중해 연안을 따라 수많은 식민지를 개척하고 국제적인 장사꾼으로 명성을 날렸다. 최상품 목재인 레바논 백향목과 함께 페니키아 최고의 특산품은 자주 물감이었다. 순금의 가격과 맞먹을 정도로 비싼 자주 물감으로 물들인 자색 옷은 부유층의 상징이었고 로마시대에는 ‘왕궁 자색(royal purple)’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구석기 시대 말기에 이르러 철이나 구리 등의 여러 금속들이 산화되어 다양한 색깔을 띤 녹을 채취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서기전 1만500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라스코나 알타미라 동굴 벽화들은 모두 이러한 물감을 사용한 것들이다. 서기전 4000년경부터 도시와 왕국이 생겨나 왕이나 제사장 등 특권층의 고유 의상이 필요하게 되면서 천의 염색을 위한 물감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당시는 주로 식물의 꽃, 잎, 열매, 껍질, 뿌리 등에서 추출한 물감이 사용됐다. 하지만 햇빛이나 세탁으로 쉽게 색이 바랬기 때문에 좀더 질이 좋은 물감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자주 물감은 두로의 수호신 멜카르트가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그가 개와 함께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는데 소라를 깨물은 개의 입이 처음에는 붉게 물들었다가 차츰 자주빛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페니키아’의 어원이 되는 ‘페닉크’는 ‘붉은 자주’라는 뜻으로서 원래는 지중해에 서식하는 소라의 일종이다. 서기전 1500년경 기록된 누지 문서에는 자주 물감을 후리어로 ‘키나후’라고 표기했고 ‘가나안(크나안)’의 어원이라는 학설도 제기됐다. 자주색을 의미하는 영어의 ‘퍼플(purple)’은 원래 지중해에 서식하는 소라의 이름인 그리스어 ‘포르피라(porphyra)’와 라틴어 ‘푸르푸라(purpura)’에서 유래됐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남(藍)’이나 ‘쪽’이 원래 식물의 이름이지만 이로부터 추출된 색깔을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서의 삼원색

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대표적인 세가지 색깔은 염색한 천의 색깔을 기준으로 자줏빛의 아르가만과 푸른빛을 띠는 트켈렛트, 그리고 붉은색의 톨라앗트 쉐니가 있다. 이 중에서도 아르가만과 트켈렛트가 종교적으로 중요한 기물과 의상을 장식하는 색깔이다. 이 두 색은 모두 지중해 소라의 분비물로부터 만들어지는데 소라의 종류와 성별, 그리고 염료를 만드는 공정에서 햇빛에 쏘이는 정도에 따라서 자주색 계열의 아르가만과 푸른색 계열의 트켈렛트로 구분된다. 톨라앗트 쉐니는 벌레의 분비물로부터 만들었다. 자색 천과 자색 옷은 구약시대부터 성막의 치장과 제사장의 옷, 그리고 왕과 귀족들의 의상으로 자주 사용됐다. 솔로몬은 성전 내부를 치장하기 위해서 자주 물감의 전문가들을 두로 왕 히람으로부터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신약성서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의 옷 색깔이 자주색인만큼 자색 옷은 부유층의 상징이었다.

바닷가의 소라 무더기

자주 물감 제조의 고고학적 증거로 가장 자주 나타나는 것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부수어진 소라들의 무더기이다. 소라를 단순히 식용으로 할 때는 끓는 물에 삶으면 되지만 자주 물감을 얻기 위해서는 소라의 껍데기를 깨내어 내장의 특정부위에서 분비액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깨진 소라들의 무더기는 모두가 자주 물감을 만들었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두번째 증거로는 자주 물감을 끓이거나 보관했던 토기들인데 이러한 토기 조각에는 자주빛의 흔적이 남아 있어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세번째 증거는 물감을 제조했던 공장 터인데 지중해 연안에서 이 유적은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텔 카브리, 악코, 텔 케이산, 쉬크모나, 도르, 가이사랴, 아폴로니아, 텔 모르 등지에서 소라 무더기와 자주빛 흔적의 토기 조각들이 발견됐다.

지금까지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 세계 최초로 자주 물감을 만든 곳은 크레타 섬이었다. 이미 서기전 1800년경부터 자주물감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서기전 1600년 이후 크레타와 페니키아 사이에 무역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자주 물감 제조술이 함께 전수된 것으로 보인다. 페니키아 민족은 연안에서 대량으로 소라를 구할 수 있고, 자주 물감이 부피는 작지만 고가에 팔리는 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상품이기 때문에 이를 전문적으로 개발했다. 따라서 서기전 1500년경 이후에는 페니키아가 자주 물감의 중요 생산지가 된다.

물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로마시대의 자주 물감에 관한 정보는 플리니우스의 ‘자연사’와 스트라보의 ‘지리학’ 등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가장 좋은 품질의 물감을 만들 수 있는 소라는 페니키아의 두로에서 잡힌 것들이다. 소라의 내장 중에서 흰색의 분비물을 내는 부분만을 도려내 그릇에 모은다. 이 분비물은 산화되면서 노란색으로 변한다. 여기에 소금을 뿌리고 사흘정도 지난 후 납이나 주석으로 만든 가마솥에 물과 함께 넣고 끓인다. 이때 원료와 물의 비율은 1:1 정도로 하며 일정한 온도로 9일간 끓이면 비로소 자주 물감이 완성된다. 완성품의 색깔은 양털 뭉치를 담가서 확인하는데 붉은 색보다는 검은 빛을 띤 붉은 색이 더 좋은 물감이다. 양털을 염색할 때는 물감에 5시간 정도 담그며 양털과 물감의 비율은 무게로 따져 5:1 정도가 적당하다. 가장 최고의 색깔은 ‘응고된 피’의 색으로서 보통은 검게 보이지만 햇빛에 반사되면 선명한 붉은 색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 색깔이 호메로스가 ‘일리어드’와 ‘오딧세이’에서 자주 인용하는 ‘자줏빛 피(blood of purple hue)’라는 표현의 기원이 됐다.

최고급 두로산 자주 물감

신약시대에 시칠리아의 타렌툼에서 생산된 자주 물감은 1kg에 220데나리온(약 660만원)이었고 최고급의 두로산 자주 물감은 그 열배가 되는 2200데나리온(약 6600만원)을 주고도 구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값이 비싼 이유는 1만2000개의 소라를 분해해야만 겨우 1.4g의 자주 물감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로산 자주 물감으로 염색한 모직천을 ‘디바파’라고 부르는데 이는 ‘두번 담갔다’라는 뜻이며 두번에 걸쳐 염색하기 때문에 그 색이 절대로 바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두로산 색깔의 특징은 한 마디로 ‘응고된 피빛’으로 표현된다. 두로산 자주 옷감은 그냥 보면 단순한 검은 색깔이지만 햇빛에 비추면 검붉은 빛에서부터 보라빛까지 그 색상이 매우 화려한게 특징이었다.

 

 

                                4.도탄 부부와 블레셋 고고학

 골리앗으로 대표되는 성서속 한 이방민족의 정체를 밝히는 블레셋 고고학은, 1948년 이래 50여년간 오로지 이 분야의 발굴과 연구로 일관했던 모세와 투르데 도탄 부부에 의해 열매를 맺었다.폴란드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어린 시절 팔레스타인에서 성장한 이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군복무하던 중 만나, 함께 히브리대학을 졸업하고 각자 성서에 등장하는 블레셋 도시들인 텔 카실레,아쉬도드,데이르 엘-발락흐,에크론 등을 발굴하면서 이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로 자리를 잡았다.

  전설 같은 삼손 사울 골리앗 다윗 등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이야기에 매료된 성지순례자들은, 17세기 이래로 현장에서 성서의 내용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1659년 한 프랑스 여행가가 지중해변 블레셋의 다섯개 도시중 하나인 가자를 방문해서, 블레셋의 신,다곤의 신전을 발굴했다.비록 블레셋의 유물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장님이 된 삼손이 무너뜨려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는 신전의 존재를 믿고 시도한 첫번째 발굴이었다.

  블레셋에 관한 좀더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는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탐사를 통해 처음으로 발견됐다.테베의 메디낫트 하부에 위치한 람세스3세(기원전 1184~1153년)의 장례신전 벽에는, 블레셋민족의 전투장면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 학자들은 짧은 치마에 깃털 전투모를 쓴 그들을 인도인으로 착각했다.1850년대 초 스코틀랜드 출신의 그린(J.B.Greene)이 이 신전 마당을 직접 발굴하다가 새로운 비문들을 발견했고,파리의 드루쥐(V.E.DeRouge)는 이 비문 해독을 통해, 블레셋을 비롯한 다섯 종족의 이름이 나열된 바다민족의 이집트 침공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그들은 이집트로 쳐들어 왔다…그들은 온 땅을 평정했고, 그들의 동맹은 블레셋 체케르 쉐켈레쉬 데니엔 웨세쉬 등으로 구성됐다'.성서 외의 역사적 자료에서 처음으로 블레셋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나아가 영국의 대영박물관이 1870년에 구입한 `하리스 파피루스'에도 이집트의 파라오가 블레셋민족을 가나안지역에 정착시키고 식민통치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다.블레셋에 관한 역사적 증거자료가 이집트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은, 곧 창세기(10장13~14절)에 등장하는 고대민족들의 계보에 블레셋이 이집트(미스라임)의 후손으로 기록된 것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이러한 블레셋고고학 추세에 영향을 받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탐사재단은, 골리앗의 도시로 알려진 가드를 찾아내기 위해, 1899년 블리스(F.Bliss)와 마칼리스터(R.A.S.Macalister)를 파견했다.그들은 쉐펠라지역의 텔 에스-사피를 가드로 확인,발굴을 시작했고, 거기서 출토된 수많은 미케네 토기조각들의 분석을 통하여, 블레셋 민족의 기원을 에게해로 밝혔다.성서에 처음으로 고대 유럽인들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계속되는 구미 각국의 벳샨,게제르,므깃도 발굴 등을 통하여, 블레셋의 세력이 내륙까지 미쳤던 사실이 확인됐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후 그들의 첫번째 공식적인 발굴은, 다름아닌 블레셋의 항구도시였던 텔 아비브의 텔 카실레였다.이스라엘 고고학의 대부였던 마자르(B.Mazar) 교수의 지휘 아래 진행된 발굴에서, 블레셋 민족의 체계적인 건축 종교 등 일상생활의 증거들이 드러났다.이 발굴에 참여했던 도탄 부부는 평생 블레셋 고고학에 헌신하기로 결심했고,그들의 노력으로 인해 블레셋 민족의 역사적 실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3천2백년전,당시 세계를 평정했던 양대세력인 이집트와 히타이트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주인없는 땅이 돼 버린 가나안을 차지하기 위해 유목민들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요단 건너편에서 서쪽으로 이동했고, 바다민족이었던 블레셋은 해안평야에서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했다.조직적인 군사력과 고도로 발달된 철 제련술을 이용한 최신식 무기,이집트산 전차로 무장한 블레셋 민족은, 가나안의 모든 평야지역을 장악했다.블레셋 민족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기원전 1200~1000년이며,이스라엘 왕국이 건설된 후, 그들의 세력은 약화되거나, 기존의 가나안 문명권으로 동화되고 흡수됐다.

  1996년 여름 에크론의 마지막 발굴때 석비가 신전에서 출토됐다.모두 다섯줄로 된 비문의 내용은, 성서에 등장하는 아키쉬 왕의 이름을 비롯해 에크론 통치자들의 족보와 신전을 봉헌하는 글이었다.

  현재 이스라엘에서는 하버드대학과 히브리대학의 발굴팀이 각각 아쉬켈론과 가드를 발굴하고 있어 더 많은 블레셋 유물들의 출토가 기대된다.


 

 

                               5.멘델 눈과 갈릴리 호수의 고고학 

16군데의 어항을 지닌 갈릴리 호수

갈릴리 호수의 동편에 자리잡은 엔게브 키부츠에 라트비아 출신의 한 어부가 살고 있었다.1920년대 이스라엘로 이민온 그는 자신의 성을 ‘물고기’라는 뜻의 ‘눈’으로 바꿀 정도로 평생을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에 몰두했다.나이 일흔이 다 되어 은퇴할 무렵인 지난 71년부터는 그는 둘레가 66㎞나 되는 호수변을 샅샅이 뒤지며 고대 항구들의 흔적을 조사했다.20년간 직접 발로 뛰면서 연구한 그의 업적이 92년에 출판됐을 때 모든 이는 갈릴리 호수에 자그마치 16군데의 고대 항구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더욱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비록 그가 유대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의 복음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고 나아가 ‘복음서에 나타난 고기잡이의 모습이 너무나 자세하고도 정확했다’는 그의 고백이었다.

세계 1차 대전 이후 형성된 양식비평을 포함한 최근의 성서 연구방법들은 대부분 복음서 내용의 신빙성에 이의를 제기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예수를 직접 대면했던 제자들의 기억과 기록 능력에 의구심을 품었기 때문이다.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도 베드로와 요한이 원래 ‘학문 없는 범인’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행 4:13).과연 예수의 수제자들이었던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무지한 뱃사람들이었을까?

생선은 매우 비싼 식품

신약 시대 지중해 지역의 기본적인 식사는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곁들인 빵과 생선이었다.예수의 말씀을 듣고자했던 갈릴리 호수변의 한 어린아이의 도시락도 빵과 생선이었으며 예수의 비유에서도 생선과 고기잡이가 자주 등장한다.하지만 문제는 더운 지역에서 싱싱한 생선은 항상 수요에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값이 비싼 편이었다.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 생선은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잡은 즉시 가공해서 보관해야만 상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대부분 소금에 절이거나 말리고 연기로 훈제했고 작은 생선으로는 젖갈을 담갔다.실제로 이스라엘 지역의 발굴에서 이탈리아 ‘쿠메’산 생선젖이라고 기록된 항아리의 손잡이가 출토된 적도 있다.국제무역을 통해 여러 유통단계를 거치는 생선의 값은 더욱 비쌌다.서기 1세기의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로마에서 훈제 생선 한 수레의 가격이 ‘한 마리의 황소가 이끄는 양 100마리’와 맞먹는다고 기록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 갈릴리 호수의 어부들은 값비싼 상품을 취급하는 고급 상인들이었을 것이다.나아가 이들은 이방인들에 비해 이윤을 더 얻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유대인들은 음식율법인 카슈루트(신 14:9∼10)를 지키기 위해 지중해의 이방인 어부들보다는 갈릴리 호수의 유대인 어부들이 공급하는 생선을 원했다.갈릴리의 어부들은 예루살렘 시장에서 생선을 팔기 위해 나흘길을 마다않고 판로를 개척했으며,유대인 특수 때문에 호황을 누렸다.따라서 갈릴리 호수에는 여러 군데에 항구가 있고 어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어족의 보고 갈릴리 호수

갈릴리 호수의 대표적인 생선은 베드로 고기를 비롯해서 메기,정어리,잉어 등이다.정어리는 젖갈을 담그는데 오늘날까지도 대량으로 잡히며 한 해 어획량의 절반인 1000t을 차지한다.잉어는 정어리를 미끼로 해서 낚시로 잡으며 정어리와 베드로 고기는 그물을 이용해서 잡는다.베드로 고기는 지느러미가 빗같이 생겼다고 해서 아랍어로 ‘무슈트’로 불리는데 길이가 40㎝까지 자라며 어미가 수정된 알을 입에 넣은 채 치어가 될 때까지 2∼3주 동안 보호하는 독특한 습성이 있다.따라서 이 물고기는 히브리어로는 ‘물고기를 돌본다’는 의미로 ‘암눈’으로 불린다.

벳새다의 부유한 어부들

베드로와 안드레,그리고 빌립의 고향인 벳새다는 분봉왕 헤롯 빌립이 서기 30년경 로마식 도시 ‘율리아스’로 재건했으며 수많은 갈릴리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왔다.자연히 생선의 수요도 늘어났고 근처의 가버나움에는 대규모 시장이 형성됐을 것이다.실제로 벳새다를 발굴했을 때 한 저택에서 수많은 그물 추와 낚시 바늘들이 발견됐다.함께 출토된 로마산 고급 수입식기들을 통해서 이 집의 주인은 어업과 관련한 부유한 상인으로 추정된다.안드레,빌립 등은 원래부터 헬라식 이름이며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헬라 사람들과 대화할 정도로 고급 문화에 익숙한 자들이었다(요 12:20∼21).시몬 베드로는 전문적인 어부로서 동생 안드레는 물론이거니와 이웃 형제인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동업자로서 두 척의 배를 이용하여 조직적으로 고기를 잡았다(눅 5:10).야고보와 요한의 집에는 일당을 받고 일하는 품군들도 있었다(막 1:19∼20).이처럼 예수의 제자들은 경제적으로 자립한 비교적 부유한 어부들로서 생업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든지 자유 의지대로 고기잡이를 떠나 예수의 제자가 될 수도 있었다.

벳새다에서 가버나움으로

베드로는 왜 자신의 활동 중심지를 벳새다에서 가버나움으로 옮겼을까? 복음서에는 이 도시에 그의 처가가 있었다고 한다.하지만 갈릴리 호수 어업현장에서 사업장의 위치는 곧 경제적 이윤과 직결되는 것이었다.티베리아스 북쪽 5㎞ 지점에는 신약시대의 어촌 막달라가 있는데 헬라어 지명은 ‘생선 가공공장’이라는 뜻의 타리케아(Tarichea)였다.좀더 많은 이익을 올리려는 어부들은 생선을 잡은 즉시 타리케아로 수송해서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가공용으로 넘겼다. 벳새다의 어부들은 헤롯 빌립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헤롯 안티파스의 관할인 타리케아로 생선을 수송하면 가버나움 세관에서 막중한 통관세를 지불해야만 했다.따라서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어업의 근거지를 가버나움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가버나움은 타리케아와 같은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이기 때문에 감세의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6.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반 사역을 한 이유 

 바울은 그의 선교여행 중 모두 60여군데의 도시들을 거쳐가는 동안 들리는 곳마다 길게는 한달 짧게는3∼4일 정도 머물렀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의 비난과 이방인들의 반발, 그리고 이러한 소요사태를 방지하려는 지방 총독들의 제지로 한 곳에서 오랜 기간 머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에서는 무려 1년6개월을 머물렀다. 고린도는 어떤 곳일길래 그토록 오랜 세월 바울을 붙잡아 놓을 수 있었을까.



                        국제적인 ‘도시왕국’ 고린도

  비록 아테네가 그리스의 대표적인 도시라고 하지만, 서기 1세기 고린도는 상업의 중심지로서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국제적인 도시였다. 해발 575m 높이의 난공불락의 요새인 아크로폴리스와 함께 바닷가의 레카이온 항구를 동시에 지닌 고린도는, 도시라기보다는 막강한 왕국이었다. 일찍부터 고린도에는 유대인들이 정착했으며, 바울은 자연스럽게 이곳의 유대인 구역에 머물면서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리스도의 도를 전할 수 있었다. 한 도시에서 여러 외국인들과 교류하며 이를 통해 그의 선교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또한 바울은 마케도니아와 아케아 지방에서 그를 시기하는 유대인들과 해당 로마 관리들의 저지로 구금되고, 몰래 탈출하는 등 계획했던 만큼 선교의 효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안디옥에 필적할만한 선교의 본부를 고린도에 세우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린도는 근처의 성소 이스트미아에서 대규모 축제와 운동경기를 2년에 한번씩 개최했기 때문에, 바울로서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리 없었다.



                         올림픽 버금가는 경기와 축제

  서기전 776년부터 시작되어 4년에 한번씩 열리는 올림픽 경기에 필적할 만한 이스트미아 경기는 서기전 580년경부터 시작됐고 고린도에서 동쪽으로 9㎞ 떨어진 이스트미아에서 개최됐다. 이 경기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소년 신 팔라이몬에게 헌정하는 축제로 열렸다. 포세이돈 신전은 서기전 7세기에 최초로 세워졌고 이후 1300여년 동안 파괴와 재건을 거듭했다. 이스트미아에는 두 개의 스타디움이 있었는데 서기전 7세기에 건설된 최초의 스타디움이 너무 신전과 가까이 있어서 대규모의 관중석을 만들지 못함에 따라 서기전 4세기경 남동쪽으로 350m 떨어진 곳에 새로운 스타디움을 건설했다. 서기 1세기 디오 크리소스톰은 이스트미아 경기를 관전하고 이 축제의 생생한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글로 남겼다. “축제가 시작되면 포세이돈 신전에는 많은 소피스트 철학자들이 몰려들었고 그의 제자들은 시를 낭송하며 서로 자신들의 지식을 과시했다. 마술사들과 점쟁이들은 신기한 요술과 재주로 손님들을 끌어모았고 수많은 장사꾼들은 거리의 가판대에서 온갖 물건을 팔았다. 돼지기름을 온 몸에 바른 선수들은 저마다 승리를 장담했고 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셀러리로 만든 승리의 면류관이 주어졌다” 육상경기로는 달리기, 높이뛰기, 창던지기, 원반 던지기 등이 있었고 격투기는 권투와 레슬링 경기가 열렸다.

  바울이 이스트미아 경기에 참여하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기술을 활용해서 선교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로마시대에는 선박의 돛을 비롯해서 극장의 차일, 포룸의 천막, 노천상점 등 천막의 수요가 많았기때문에 천막업자는 중요한 직업 중 하나였다. 이중에서도 천막의 수요가 가장 많은 경우는 그리스 지역에서 해마다 개최되는 축제와 운동경기였다. 보통 축제는 일주일 정도면 끝나지만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이스트미아 축제나 4년에 한번씩 개최되는 올림피아 축제는 2∼3개월씩 지속됐다. 축제에 몰려든 수만명의 참가자들을 위해서 수백개의 천막이 필요했고 수백명의 천막업자들이 동원되어 몇달씩 일했을 것이다. 이러한 수요 때문에 신약시대에는 많은 천막업자들이 활동했고 로마에는 천막업자의 조합도 있었다.

  서기 1세기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의 기록을 통해서 네로 황제의 원형경기장에는 푸른색 바탕에 별들이 그려진 천막이 지붕의 역할을 했으며, 가정집의 안마당에는 붉은색의 천막을 쳐서 햇빛을 차단함으로써 바닥에 이끼가 잘 자라도록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천막업자의 경우 수입은 괜찮았지만 일을 매우 고된 것이었다. 대부분 여름철의 뜨거운 햇볕이나 겨울철의 차가운 비바람이 치는 노천에서 작업을 해야했고 천과 가죽을 자르고 굵은 바늘을 이용해 바느질을 했기 때문이 손이 부르텄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은 바느질 작업으로 바울의 손이 매우 무뎠기 때문에 그는 글씨를 크게 쓸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갈 6:11).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전문적인 천막업자들로서 로마 제국내에서 대규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다니며 일했다. 로마에 많은 일감이 있었음에도 불굴하고 이 부부가 고린도에 온 이유는 서기 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내린 로마로부터의 유대인 추방령때문이었다(행 18:2). 바울은 이미 자리를 잡은 고린도의 아굴라 가족을 알게됐고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했다(행 18:3). 이 부부는 바울과 1년6개월을 동거동락하며 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이스트미아 경기 특수때문에 사업도 번창할 수 있었기에 목숨을 내걸 정도로 바울의 선교일에 헌신할 수 있었다(롬 16:4). 바울의 선교로 이 부부는 에베소(고전 16:19)와 로마(롬 16:3∼5)에 가정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서기 50∼51년 고린도에서 일년반이나 지내며 관전했던 이스트미아 경기는 바울의 일생에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특히 경기의 전 과정이 끝난 후 우승자에게 승리의 면류관이 주어지는 폐막식은 그에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자신의 일생을 운동경기로 비유한 바울은 로마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운동경기에 참여하여 정당하게 경쟁을 했고 이제 막 달리기를 끝냈습니다. 나는 (경기)의 서약을 준수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나를 위해 준비된 의의 면류관이며 공정한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내게 수여하실 것입니다(딤후 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