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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47-잃어버린 솔로몬 성전의 법궤

영국신사77 2008. 8. 20. 15:58

                 성지를 찾아서 47-잃어버린 솔로몬 성전의 법궤 

 

1992년에 출판된 그레이엄 헨콕의 저서 ‘상징과 봉인’은 법궤의 역사적 행방을 추적했다는 의미에서 매우 수준 높은 논픽션으로 평가된다. 영국의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동아프리카 주재원으로 활약하던 헨콕은, 에티오피아의 악숨을 방문하여 그곳의 한 교회에 안치돼 있다는 법궤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어떻게 해서 예루살렘의 보물이 머나먼 에티오피아까지 오게 되었는가.

                         인디아나 존스의 법궤찾기

  헨콕의 이러한 법궤찾기는 1981년에 제작된 스티븐 스필버그의 ‘잃어버린 법궤의 추적자들’, 일명 ‘레이더스’로 알려진 미국의 한 할리우드 영화에서부터 비롯됐다. 유대인 성서학자들의 자문을 받아 작성한 이 영화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법궤가 이집트 고센 땅 어느 곳에 파묻혀 있다는 것이다.

 
  성서에는 솔로몬이 죽은 후 르호보암 제5년에 이집트의 파라오 시삭이 쳐들어와 성전의 보물을 탈취해 간 사건이 언급돼 있다(대상 12:9). 이때 파라오는 황금으로 씌워진 법궤도 전리품으로 가져다가 이집트의 수도인 타니스의 한 신전에 보관했다는 것이다. 인디아나 존스와 나치 독일군은 타니스에서 경쟁적으로 보물찾기에 나섰고, 결국 각본대로 법궤는 고고학자의 수중에 들어와서 선편으로 미국으로 이송된다. 하지만 도중에 잠수함까지 동원한 독일군에 의해 법궤가 탈취되고, 법궤의 신비스러운 위력을 시험키 위해 뚜껑을 여는 순간 강렬한 빛에 의해 주인공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죽고 만다. 고고학과 모험, 사랑과 이념이 적절히 배합된 이 영화는, 법궤가 나무상자에 포장되어 미국 국방성 창고에 보관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악숨의 기독교 왕국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서기 350년쯤 시리아의 프루멘티우스가 악숨 왕국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수단과 에티오피아 그리고 예멘 지역을 모두 통치했던 이 왕국은, 국제적인 무역국가로 그 명성을 떨쳤다. 서기 12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한 연대기에 의하면, 에티오피아 왕들의 조상은 솔로몬과 스바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메넬릭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곳 말로 ‘현자(솔로몬)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메넬릭이 에티오피아의 초대 황제이며, 1930년부터 통치했던 하일레 셀라시가 225번째 황제로 여겨진다. 1974년의 군사 쿠데타로 셀라시는 3000년 역사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황제로 기록됐다.

                               악숨 교회의 법궤

  헨콕이 1983년 악숨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그는 군사정권의 후원으로 에티오피아 홍보 영상물을 제작중이었으며 ‘시온의 성 마리아’ 교회에 있다는 법궤를 집중적으로 조명코자 했다. 하지만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법궤를 구경하기는 커녕, 교회내부로 들어가는 것도 허락받지 못했다. 왜냐면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 ‘법궤 수호자’로 임명된 수도사이기 때문이다.
 
  이 수도사에 의하면 스바 여왕의 아들 메넬릭이 스무살 청년이 되어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12지파의 아들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올 때 사독의 아들인 아자리우스가 법궤를 훔쳐왔다는 것이다. 헨콕은 법궤가 해마다 1월에 열리는 팀캇이라 불리는 그리스도의 현현 축제 기간에만 교회밖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내전의 급박한 상황속에서 그는 이 축제에 참여할 수 없었다.

                            황금으로 씌워진 나무상자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두 개의 십계명 돌판을 보관하기 위해 광야의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진 법궤는, 길이가 1.1m, 폭과 높이가 각각 0.7m인 상자였다(출 37:1). 옮기기 쉽게, 상자 아랫부분에는 두 개의 채(손잡이)가 있었고 상자의 안팎은 순금으로 씌웠다. 금송아지와 함께 법궤는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제의기구였다.
 
  1922년에 발견된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중에는 법궤를 연상시키는 유물이 있다. 길이가 0.9m, 폭 0.5m, 높이 0.6m의 나무상자는 황금판으로 입혀져 있으며 위에는 자칼 모양의 수호신 아누비스가 앉아 있다. 더욱이 이 황금상자는 쉽게 들고 다닐 수 있도록 2.7m 길이의 두 개의 채가 달려있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스라엘 민족의 법궤 위에는 두 마리의 황금 케룹이 서 있다는 것뿐이다.

                                    법궤의 이동

  법궤는 요단강을 건넌 후 이스라엘 민족이 이동함에 따라 길갈에서 세겜을 거쳐 실로의 ‘야훼의 전’에 모셔졌다. 서기전 11세기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에벤에셀 전투에서 패하게 되자 실로의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간다(삼상 4:3). 블레셋 군대는 법궤를 탈취해서 아스돗의 다곤 신전에 안치한다. 하지만 불레셋에 재앙이 내려, 결국 그들은 법궤를 이스라엘 지역으로 되돌려 보냈다.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에 가져왔고 솔로몬 성전에 안치됐다. 성서에 법궤에 관한 언급은 200여회 나타나는데, 솔로몬 이후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이 시대에 이미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볼 수 있다.

  헨콕은 법궤의 행방에 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서기전 680년쯤 예루살렘의 왕 므나세는 우상숭배하면서 아세라 목상을 성전에 세웠다(왕하 21:7). 이에 격분한 한 무리의 제사장들이 법궤를 가지고 이집트로 내려갔고 아스완 지방의 나일강에 위치한 엘레판틴 섬의 유대인 신전에 모셨다. 서기전 400년쯤 신전이 파괴된 후 수단의 메로에로 옮겨졌다가 악숨 왕국이 이 지역을 통치하기 시작한 서기 1세기쯤 법궤가 최종적으로 이곳까지 오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헨콕의 이러한 결론에는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우선 성서에는 므나세 시대까지 성전에 법궤가 있었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또한 헨콕은 므나세의 연대와 엘레판틴의 유대교 신전의 연대 사이에는 150년이상의 차이가 있음을 고려하지 못했다. 나아가 이 신전이 파괴된 후 유대인들이 남쪽의 메로에로 이동했다는 어떠한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도 없다. 따라서 차라리 시삭이 빼앗아 갔거나 악숨 교회의 ‘법궤 수호자’의 말대로 스바의 아들 메넬릭이 솔로몬 시절에 이미 법궤를 에티오피아로 가져왔다는 해설이 더 타당하게 들린다.

  지금까지 발견된 솔로몬 성전의 유일한 고고학적 유물이 엄지 손가락 크기의 상아석류 장식인 점으로 미루어, 법궤의 고고학적 행방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잃어버렸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1991년 1월18일 헨콕은 8년동안이나 고대하던 팀캇 축제에 참석할 기회를 얻었다. 파괴적인 위력을 방지하기 위해 두꺼운 천에 싸인 법궤가 축제행렬에 등장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이 법궤가 진품이 아닌 복제품이라고 확신했다. 왜냐면 법궤가 교회밖으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법궤 수호자’는 여전히 지성소를 떠나지 않고 향을 피우며 법궤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기 때문이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