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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를 찾아서 48-스스로 있는자

영국신사77 2008. 8. 20. 15:58
                   성지를 찾아서 48-스스로 있는자 
 
1967년 여름철 어느 날 예루살렘의 한 연구소에 근무하던 미국의 고고학자 디버(W G Dever)는 헤브론 근처에서 도굴꾼들이 가져온 유물들을 구입했는데, 그 중에는 국보급인 구약시대의 히브리어 기록이 한점 포함돼 있었다.
 
  손바닥이 그려진 돌판에는 모두 6줄의 히브리어 문장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해독하던 디버는 ‘야훼와 그의 아세라’라는 구절을 발견하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세라는 보통 바알과 한쌍을 이루는 가나안의 여신으로 알고 있었는데, 마치 야훼의 배우자인양 이 기록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발견된 장소를 따서 키르베트 엘-콤 기록이라 불리는 야훼 기록은, 1976년 시나이 반도에서 발견된 또다른 히브리어 기록과 함께, ‘야훼와 그의 아세라’ 논쟁에 불을 지폈다.

  이 발견의 현장은 이스라엘이 1967년 6일 전쟁으로 점령한 시나이 반도에 위치해 있으며, 왕정시대 유다의 남쪽 요새로 개발된 쿤틸라트 아즈루드였다. 무게가 200㎏이나 되는 대형 돌그릇과 석고벽, 그리고 저장용 항아리 등에는 고대 히브리어와 페니키아어로 문장이 기록돼 있는데, 이중에서 ‘야훼와 그의 아세라’가 등장한다.
 
  이 문장에서 야훼는 축복의 주체로 나타나며, 아세라를 동반하고 있는데, 두 기록 모두 서기전 8세기 중엽이기 때문에, 아마도 히스기야의 종교개혁 이전의 우상숭배현상을 나타낸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아세라는 여신이 아니라, 일종의 장승과 같은 나무 기둥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이집트 관리를 죽이고 미디안으로 피신했던 모세는 그 지방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고 광야에서 양떼를 치고 있었다. 어느 날 양떼를 이끌고 호렙산으로 갔을 때, 불붙는 떨기나무 속에서 야훼의 음성을 들었다.
 
야훼는 모세에게 억압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로부터 구원하라고 명령했다. 모세는 자신과 대화하는 존재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이때 야훼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만 대답했다(출 3:14).
 
  야훼라는 이름은 바로 이 구절에서 유래됐으며, 히브리어로 존재를 나타내는 be동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금까지 애매한 야훼의 어원을 언어학적으로 가장 객관적으로 해석한 사람은 하바드 대학의 크로스(F M Cross) 교수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미 서기전 1900년경 시리아의 도시국가 마리에서 출토된 종교적 문서에는 가나안 최고의 신 엘(El)의 이름으로 병자에게 건강을 회복케 하거나 죽은 자를 살리는 기도문이 있는데, 이때 ‘야휘’나 ‘야후’가 be동사로서 ‘엘신이여 재물이 있게 하소서, 건강이 있게 하소서, 생명이 있게 하소서’ 등으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엘 야훼’는 원래 ‘엘이여 존재케 하소서’ 또는 ‘엘이여 살리소서’라는 의미를 지녔는데,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섬기던 엘을 경멸하는 남유다의 종교적 관점에서 be동사의 미래 간청형인 ‘야훼’가 엘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미 1868년에 모압 지방의 디본에서 발견된 메샤 석비를 통해서 야훼라는 이름의 역사성이 확인된 적이 있다. 이스라엘과 영토분쟁을 종식한 모압의 메샤 왕은 느보에 있던 야훼의 기물들을 탈취하여 모압의 신 크모쉬 제단에 바친다는 서기전 850년경의 기록을 통하여, 야훼교의 기원을 서기전 9세기로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구약의 종교인 야훼교의 기원을 고고학적 관점에서 규명하려는 연구가 시작됐다. 비록 물질문명을 다루는 고고학이지만, 신전이나 제의 도구들을 통해서 정신문명인 종교현상까지도 조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내산에 이르러 열가지 계명을 받았다. 이때부터 ‘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유일신 사상이 야훼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그렇다면 과연 모세 시대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유일신 야훼만을 섬겼을까? 우선 야훼교적 신학에 입각하여 기록된 구약성서라 할찌라도 이러한 물음에 회의적인 답변만을 제시한다.
 
  서기전 10세기 야훼를 위해 화려한 예루살렘 성전을 건설했던 솔로몬은 시돈 사람의 여신 아쉬토렛과 암몬의 신 밀콤과 몰록, 그리고 모압의 크모쉬를 숭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다(왕상 11:5∼7). 서기전 9세기 이스라엘의 예언자 엘리야의 독백은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야훼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 오십인이로다”(왕상 18:22). 성전을 지은지 채 100년도 지나지 않아서 야훼교의 명맥은 끊어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나아가 서기전 8세기 유다왕 아하스는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과 작은 산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했다”(왕하 16:3∼4).
 
  이렇게 만연된 유다의 우상숭배현상은 서기전 7세기 예레미야에 의해 구체적인 숫자로 표현됨으로써 절정에 이른다. “유다야 네 신들이 네 성읍의 수효와 같도다. 너희가 예루살렘 거리의 수효대로 바알에게 분향하는 단을 쌓았도다”(렘 11:13).

  미국의 한 유대인 성서학자는 고대근동의 왕들의 이름에는 그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이 자주 포함돼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구약에 등장하는 이름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만일 이름에 바알이 들어가 있다면 가나안이나 페니키아의 바알교 신자이며, 하다드가 들어갔다면 아람 다메섹 사람, 아문이나 라가 포함됐으면 이집트 사람 등으로 볼 수 있다. 당연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에는 야훼가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십계명의 제3계명에 의거하여 야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에는 대부분 여호수아와 같이 ‘여호’라는 야훼의 약자가 이름앞에 접두사로 붙거나 엘리야(후)와 같이 접미사로 첨가됐다. 이러한 이름들은 그 주인공보다는 작명(作名)한 그 부모들의 신앙적 경향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통계적으로 볼 때 왕정시대 유다왕국의 466개의 이름들중에서 89%인 413개가 야훼의 이름으로 되어있고, 오직 나머지 11% 53개만 ‘엘’이나 ‘바알’ 등의 다른 신들의 이름이 함께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초기의 왕들인 사울,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 등이 야훼와는 전혀 관계없는 이름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고대근동의 관점에서 비록 어린 시절의 이름이 따로 있다 하더라도, 일단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신의 이름이 첨가되는 공식적인 왕명이 부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이름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발굴에서 출토된 도장에 나타난 이름을 통해서, 이 학자는 서기전 800년쯤부터 야훼적인 이름이 보편화됐다는 사실을 밝혔다.

  야훼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메샤 석비와 발굴에서 출토된 도장에 나타난 유다 사람들의 야훼적인 이름은, 서기전 9세기부터 비로소 야훼교가 본격적으로 부흥했음을 시사해 준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왕들의 이름 중에서 야훼의 요소가 들어가는 이름이, 서기전 870년경 유다의 여호사바트 왕이 최초라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