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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지를 찾아서 45-두로를 위한 엘레지

영국신사77 2008. 8. 20. 15:29

                              성지를 찾아서 45-두로를 위한 엘레지

 

 서기전 332년 2월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대는 지중해안을 따라 이집트로 내려가고 있었다.이에 대항하여 페르시아군은 알렉산드로스를 저지하기 위해 페니키아의 섬나라 두로에 해군력을 집결시켰다.

 

 두로는 해안으로부터 700m 떨어진 섬이었고 육중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예로부터 난공불락의 요새로 유명했다.더욱이 알렉산드로스는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하지만 이집트 정복을 눈앞에 둔 알렉산드로스는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그는 병사들로 하여금 육지에서부터 섬까지 폭 60m의 공격로를 만들도록 명령했다.두로 해군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6개월의 난공사 끝에 드디어 섬이 육지와 연결됐다.마케도니아 군대는 돌판으로 포장된 공격로를 따라 공성퇴를 동원하여 성벽을 파괴시켰다.마침내 두로가 함락됐고, 주로 이 도시의 선박으로 구성된 지중해의 페르시아 해군은 더 이상 알렉산드로스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비록 페르시아의 위협 때문에 할 수 없이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했지만, 두로는 원래 전쟁보다는 평화를 사랑하고 주로 국제무역을 통해 번창했던 민족이었다.페니키아는 그 지리적 특성상 내륙으로는 최고 3,000m 높이의 레바논 산지가 가로막고 있어서 진출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오직 바다뿐이었다.따라서 일찍부터 발달된 항해술을 이용하여 먼바다로 나가 지중해 여러 곳에 식민지를 개척했고 무역을 했으며, 그 결과 다양한 문화가 교차되는 국제적 감각의 첨단 도시로 발전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전승에 의하면 두로의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히람 왕(서기전 969∼936)이 해안에서 떨어져 있는 두 섬 사이의 바다를 메워, 전체 넓이가 16만㎡에 이르는 주거지를 형성했다고 한다.섬의 북쪽과 남쪽에 각각 하나씩 모두 두 개의 항구를 만들고 시돈과 이집트와 무역을 했다.

 

 두로가 아직 섬이었을 때 양식과 물은 맞은편 육지의 풍부한 물과 농경지가 있는 곳에 위치한 일종의 배후도시였던 우슈로부터 공급받았다.두로는 솔로몬의 성전 건설 당시 물자와 인력으로 원조해주었던 이스라엘의 동맹국이었다. 두로는 그리스-로마시대에도 여전히 무역항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침략 이후 육지로 연결된 공격로 양편으로 파도에 밀려온 토사가 쌓이면서, 두로는 더 이상 섬이 아닌, 바다 쪽으로 돌출된 반도의 모습으로 남게 됐다.

 국제적 무역도시로서의 두로의 모습은 에스겔의 두로를 위한 엘레지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

 

 우선 두로는 바다의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많은 섬들과 교역할 수 있는 입지적 조건을 갖췄다(겔 27:3).또한 두로는 다국적 원자재를 이용해서 최상품의 선박들을 건조했다(겔 27:5∼7).우선 쉐니르의 잣나무 판자를 이용해서 선체를 만든 다음, 크레타의 소나무로 갑판을 깔았다. 바샨의 단단한 상수리나무로 노를 만들었고 가장 중요한 돛대는 키가 크고 품질이 좋은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세웠다. 돛과 깃발은 이집트의 수놓은 고운 삼베로 만들었고, 갑판 위에 설치한 천막은 키프로스의 청색천과 자색천으로 장식했다.선박뿐만 아니라 이를 운행하고 수리하는 인력들도 페니키아의 대표적인 전문가들로 구성됐다(겔 27:8∼9).선원들은 시돈과 아르바드 사람들, 선박 수리공은 비블로스의 기술자로 구성됐고, 가장 중요한 몫을 담당하는 항해사는 두로의 전문가들이 맡았다.

 

 두로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군대가 필요했지만, 자국민들은 대부분 바닷사람들이었다.따라서 두로는 페니키아 사람들 외에도 축적된 부를 이용하여 페르시아 리디아 푸트(리비아) 등의 외인부대를 용병으로 고용했다(겔 27:10∼11).

 이러한 두로의 세계화 정책은 대상 무역국의 숫자와 교역 상품의 다양성에서 더욱 그 진가를 찾아볼 수 있다(겔 27:12∼25).스페인에 위치한 다시스로부터는 은과 철을 비롯한 금속류를 들여왔고, 야반으로 불렸던 그리스로부터는 노예와 청동그릇류를 수입했다.터키 동부지역으로 알려진 도갈마로부터는 말,, 전마 노새를,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의 남부지역인 드단으로부터는 상아와 흑단목을 수입했다.아람으로부터는 남보석을 비롯한 보석류와 옷감 및 자수제품을, 다메섹으로부터는 포도주 모직 제련철 계피 창포 등을 들여왔다.아라비아로부터는 양과 염소를, 스바로부터는 향수와 황금을 수입했고, 이밖에도 하란 아수르 등을 비롯한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자수와 카펫을 수입했다.이중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두로인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식량인 밀 올리브 무화과 꿀 등은 유다와 이스라엘로부터 수입했다는 것이다.

 

 솔로몬도 성전 건설의 대가로 두로의 히람왕에게 밀과 올리브 기름을 제공한 것으로 나타난다(왕상 5:11).하지만 두로가 이에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솔로몬은 갈릴리 지역의 20개의 성읍을 더 건네주었다(왕상 9:11).결국 두로는 많은 재산과 무역품으로 주변 민족들을 풍요롭게 만들었다(겔 27:33).

 

 하지만 에스겔은 폭풍우로 인해 두로의 배들이 난파됐기 때문에, 그들의 영화가 물속으로 사라졌다는 비극으로 그의 두로를 위한 엘레지를 마무리한다.

 

                                              전쟁과 예언 문학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주변국의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그들의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것은 서기전 9세기초부터 시작된 앗시리아의 잔인한 전쟁술을 비롯한 그들의 식민지 정책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서기전 883년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앗시리아의 아슈르나시르팔 2세는 수많은 전쟁으로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방을 괴롭혔다.그 아들 샬마네세르 3세도 35년의 통치기간에 31년을 전쟁을 치를만큼 아버지를 능가하는 호전적 인물이었다.

 

 그 무렵 이스라엘은 서서히 무자비한 북쪽의 앗시리아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따라서 이러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메시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비로소 이스라엘 최초의 예언문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서기전 600년쯤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는 페니키아의 도시들을 점령했고 무역항들은 제 기능을 잃게 됐다.나아가 서기전 586년 예루살렘의 성전도 바빌로니아에 의해 파괴됐다.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에서 에스겔은 화려한 솔로몬 성전을 건설했던 두로의 명성이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는 엘레지를 지어 부르면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로를 받고자 했을 것이다.

                                                                                    /김 성 교수 협성대·성서고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