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海外 聖地순례/요르단·레바론·시리아歷觀&聖地순례

페트라/호르산/모세의 우물

영국신사77 2008. 8. 8. 12:41
페트라/호르산/모세의 우물
 paxkorea    | HIT : 193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서남쪽 150 Km 지점에 페트라의 유적이 있다.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 라고 영국의 시인 존 버곤 신부는 페트라를 묘사하였듯이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의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갑자기 웅대한 건물의 정면이 나타난다.  

궁전 아니면 신전으로 생각되는 헬레니즘 양식의 건물 정면은 커다란 암벽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정면에 있는 문으로 들어 서면 복도가 나타나고, 이 복도를 따라가면 암벽을 파서 만든 방들이 나타난다.

페트라 시는 대부분의 건물들을 이와 같이 암벽을 파서 만들었으며, 결코 좁지 않은 지역에 펼쳐진 이곳에는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 않은 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다. 천연의 요새로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이 도시는 마치 지하에 구축된 지하 왕국이 연상될 만큼 신비롭다.

나바티안 이라고 불리우는 민족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수많은 대상들이 들러가는 상업의 요충지로 한때 크고 번창했었으나, 대상 무역의 쇠퇴와 함께 폐허가 되어 여러 세기 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옛 기록에 나오고 있지만 소멸한 많은 도시들이 그렇듯이 이 도시의 위치도 잊혀졌다.그러던 중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라는 스위스의 한 젊은 탐험가가 현지인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 이 웅장한 유적을 발견한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대 민족을 이끌고, 당시로는 최강의 파라오의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긴 여행 중, 당시 에돔 왕국의 수도이던 이곳의 통행 허가를 못 받아, 멀리 우회하여 느보산으로 갔다는 전설의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는 모세가 지나 갔다고 하여, '무사와디' (모세의 계곡) 라고 불리우는 곳과 '모세의 샘'이라고 불리우는 우물이 여러 곳에 있어 현대의 순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대의 수수께끼 유적의 하나로 남아있는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밋과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이며, 최근에는 영화 '인디아나 죤스 / 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 졌다.

이곳의 고대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들이며, 유럽 문명의 골간을 이룬 성서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지구상의 변방에 불과한 곳이 되어 버린 곳이며, 황량한 광야에는 남루한 베두윈들이 염소떼를 한가히 몰고있는, 마치 고대세계에서 시계가 멈춰 버린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  페트라(Petra) : 셀라

페트라는 요르단이 세계에 자랑하는 국보 1호의 역사적 유적이다. 이곳은 기원전 1400-1200의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역에 자리한 곳으로 구약에서 에돔의 셀라(Sela)로 언급되고 있다.

'셀라'는 히브리어로 바위를 나타내고,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지역은 또한 '바위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호리 족속'의 거주지였으며, 사사기 1:36에서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로 언급된다.  '바위' 라 불리우는 이 도시의 이름은 시실리의 디오도루스에 의해 최초로 언급되는데, 그는 나바테안들이 기원전 312년 안티고누스 1세의 공격을 받고 그들의 생명과 음식과 가재들을 이 도시에 숨겨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약의 셀라와 이곳을 같은 장소로 본 사람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였으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다섯 왕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때 처형당한 미디안의 왕 레켐을 페트라의 왕과 동일인으로 보았다.

1950년대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발굴 작업으로 이 지역에 적어도 기원전 7000년 경에 문명이 존재했었음이 드러났다. 당시에 농경 문화를 간직한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에돔이 이 지역을 다스리던 기원전 1200년 사이의 역사적인 정보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이후 형성된 에돔 왕국은 셀라를 수도로 하고 있었으며, 이 에돔 왕국의 실체는 성경을 통하여 추정해 볼 뿐이다.

무엇보다도 페트라는 나바테안들이 남긴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인해 그 명성을 얻었다. 유목 생활을 하던 서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의 일이다. 이들은 기원전 580년경 에돔족과 혼합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서 주후 106년경까지 페트라를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이곳을 나바테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나바테안들은 왕의 대로를 장악하고 이 지역의 무역과 상권을 주도하였으며, 페트라를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후 106년 로마에 점령당하기까지 문명의 절정을 이룩하였다.

기원 후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당하였고, 131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페트라를 방문하고 이곳 이름을 '하드리안의 페트라' 라 불렀다. 로마 시대에 아라비아 사막에 새로운 상업로가 개척되면서 페트라의 중심적 역할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후기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도시의 상업적 역할보다는 트랜스 요르단과 남부 시리아의 종교적 중심 도시로 자리하게 된다. 주후 4세기에는 콘스탄틴에 의하여 기독교화되었고, 언제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주후 6세기에 있었던 큰 지진으로 인하여 함몰되어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아랍 이슬람이 요르단을 점령한 7세기에서 1812년까지 이곳은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이곳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이다. 1812년 젊은 유럽 탐험가인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카이로로 가는 그의 행로중 이곳에 엄청난 유적들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해 8월 아랍인으로 위장한 부르크하르트가 우여곡절 끝에 페트라를 찾아내었고, 그의 여행기가 출판됨으로 유럽인들은 비로소 페트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 연구소의 도미니칸 수도사가 발굴을 시작하면서 1896년에 최초의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그후 1897-1898년에 걸쳐 독일의 부른노우와 도마츠브스키에 의해 무덤과 건물들이 발굴되었으며, 다른이들에 의해 로마시대의 나바테안 도시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페트라의 본격적인 발굴은 1929년 콘웨이와 호스필드에 의해 이루어 졌고, 그후 1982년에 이르기까지  성 입구의 문을 비롯해 로마 극장과 여러 유적들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나바테안들은 불후의 문명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역사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널리 사용되던 아람(Aramaic)문자를 사용하였으며, 지금까지 약 4천점에 달하는 나바테안들의 문자 기록이 수집되었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지극히 단편적이어서 그들의 역사와 관계된 내용은 거의 없다.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던 나바테안들이 문자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와 문학, 사상과 종교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고대 문명이 앉고 있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다.

나바테안들은 돌을 깎아 웅장한 건물들을 만들었다. 이곳 페트라에는 암벽을 깎아서 만들어 놓은 거대한 암벽 도시의 유적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변의 경관은 아주 대단하다. 이곳에 나타나는 건축 양식은 초기의 단순하고 투박스러운 나바테안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시작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건축양식을 거쳐 후기의 세련되고 건축미가 넘치는 그리스, 로마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건축양식의 변천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손은 거칠고 투박한 석공의 손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의 문양은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었고, 토기의 두께는 2㎜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해 '계란껍질 토기(egg-shell pottery)' 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다.

모세가 하느님의 명령으로 유대 민족을 이끌고, 그 당시 절대 권력을 누리던 파라오의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긴 여행 중, 당시 에돔 왕국의 수도이던 페트라의 통행 허가를 받지 못하여, 멀리 우회하여 느보산으로 갔다고 한다. 이곳에는 모세가 지나갔다고 하여, ‘무사와디(모세의 계곡)’ 라고 불리 우는 곳과 ‘모세의 샘’이라고 불리 우는 우물이 여러 곳에 있어 전 세계의 순례객을 불러 모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대의 수수께끼 유적의 하나로 남아있는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밋과 더불어 고대 세계 7대불가사의의 하나이며, 영화 '인디아나 죤스 - 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유명하다. 이곳의 고대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들이며, 유럽 문명의 골간을 이룬 성서의 무대이기도 하다. 현재는 잊혀진 역사와 더불어, 마치 고대세계에서 시계가 멈춰 버린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  시크 (Siq)

하늘을 가릴 듯한 높은 암석들 사이로, 미로와 같은 균열 부분을 따라 2km 정도를 걸어 들어간다. 이 암벽 사이의 좁은 통로를 아랍어로 협곡이라는 의미를 가진 '시크(Siq)' 라고 부른다. 이 시크를 따라가면서도 고대 수로가 벽면을 따라서 이어진다.

◆  알카즈네 (Al-Khazneh)

식(siq)이라는 폭 5m, 높이 100-200미터 높이의 1.5km의 협곡을 지나면 갑자기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는 연분홍색의 거대한 신전이 나타나는 데 이것이 알카즈네이다. 이 사원은 기원 전 1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고전적 헬레니즘 건축 양식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데, ‘나바티안’ 왕이었던 ‘아레타스 3세’의 무덤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훗날 이곳은 왕의 명성을 찬양하고 숭배하는 사원으로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거대한 바위벽을 깎아 만든 웅장하고 화려한 이 사원의 정면에는 몇 개의 둥근 기둥과 섬세한 조각상들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모두가 나바티안들의 신화적인 내용과 죽음을 예찬한 것들로 높이 30미터의 2층으로 이루어진 조각물은 여섯 개의 원주기둥이 조각되어있고 섬세한 조상들이 서있다.

◆  원형극장

바위산 자체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나바테안들의 기발한 독창성과 우직한 추진력이 마음껏 발휘된 작품이다. 약 3,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너비가 40m에 이르는 로마 원형 극장은 2세기 경의 유적으로, 33층의 계단식 의자가 모두 바위를 그대로 깎아 만들었다. 이 극장은 각종 예술 행사나 오락적 행사를 위한 기능보다는 하나의 제의적 기능을 갖춘 장소로 여겨지며, 왕의 장례식은 물론 각종 회의 및 종교 의식을 치룬 것으로 여겨진다.

◆  보고

페트라의 유적 중 대표적인 것으로 '보고' 라고 부르는 건물을 손꼽을 수 있다. 전면에 6개의 고린도식 석주가 서있는 높이 약 25m의 그리스식 건축 양식의 건물로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출입구 좌우의 벽면에는 그리스의 이시스신을 상징하는 식물이 조각되어 있고, 2층에 장식된 6개의 고린도식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여인 모양의 양각이 새겨져 있다. 건물 정면 제일 윗부분에는 항아리 형태가 조각되어 있는데, 그 속에 나바테안들이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보고]라는 이름이 생겼다.

◆  수도원

[수도원]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페트라의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전면의 폭이 50m, 높이가 45m에 이른다. 수도원으로 불리게 된것은, 이 건물 내부 벽면에 십자가 몇 개가 새겨져 있는데서 유래했다. 나바테안들이 이 건물을 세웠던 원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내부에 십자가를 새긴 것으로 미루어 서기 4세기 이후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 건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페트라 건물들의 내부는 의외로 단조롭다. 돌을 파내 규모가 큰 직사각형 방들을 만들어놓았다. 건물의 내부 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벽화가 없다. 그러나 암석 자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색깔과 기하학적 또는 물결 무늬들이 방 전체를 휘감고 있어 어떤 궁중 벽화나 장식보다도 현란하고 황홀하다.

◆  바로의 궁전

이집트의 나바테 문명에 대한 영향은 이집트의 건축 양식의 특징인 거대한 탑문에서 볼 수 있다. 페트라의 한복판에 있는 바로의 궁전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곳에 시집온 그의 딸을 위하여 지은것으로 생각된다. 1927년에 이곳에서 있었던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었다.

◆  희생 제물의 언덕

원형 극장 뒷편 언덕으로 나바테안들이 희생 제사를 드렸던 산당이다.

◆  왕족 무덤 지역   

◆  열주로

기둥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거리로 로마시대의 유적이다.

◆  두 사자 신전

험한 산허리에 위치한 이 신전은 출입구가 병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쪽 벽면에 사자 형상이 새겨져 있어 두 사자의 신전으로 불리운다.

관련 성경 : 민23:9, 민 24:21, 민 31:8, 수 18:19, 수 13:21, 삿 1:36, 대하25:11-12, 욥14:18, 욥18:4, 욥24:8, 욥28:9, 욥30:6, 욥39:28, 시18:2, 시27:5, 시 60:9, 시31:2, 시61:2, 시71:3, 시74:15, 시89:26, 시92:15, 시104:18, 시141:6, 렘 4:29, 렘 48:28, 렘49:16, 암 6:12, 욥 1:3-4, 나 1:6, 삿 1:36, 왕하 14:7, 왕하 14:7, 고후 11:32

■  아론의 산 (자발 하룬) : 호르산

가데스에서 광야로 들어간 출애굽 여정 38년간의 생활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언급이 되지 않는다. 다만 출애굽 후 40년 5월 1일 에돔 국경 호르산에서 아론이 죽었음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이 호르산은 오늘날 페트라의 꼭대기에 있는 해발 1,593m의 자발 하룬(아론의 산)에 해당한다. 페트라 내의 박물관 아래에 있는 제벨 하비스의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페트라 꼭대기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성경의 호르산으로 현지 지명으로는 '아론의 산' 이라는 의미의 '자발 하룬' 이라 불린다.

아론을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서는 하룬으로 부른다. 산 꼭대기의 아론 무덤에는 비잔틴 시대에는 돔형의 건물과 오벨리스크가 있었으나 현재는 모스크 형태의 건물이 남아 있다.

관련 성경 : 민 20:22, 민 20:23, 민 20:25, 민 20:27, 민 21:3, 4, 민 33:37-39, 민 33:41, 민 34:7, 8, 신 1:44

■  아인 무사 : 모세의 우물

'아인 무사'란 아랍어로 모세의 우물이란 의미이다. 세개의 하얀색 돔으로 이루어진 건물 안에 들어가면 바위 사이로 흐르는 맑은 샘물을 볼 수 있다. 전승에 의하면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을 낸 곳(민 20:11)이라 하나, 위치적으로 성서의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로 보기는 어렵다.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위를 쳐서 물을 내어 이스라엘 백성의 갈증을 해소 시켰던 모세를 기념하기 좋은 장소이다.

■  타윌란(Tawilan) : 데만

페트라와 베이다 사이에 위치해 있는 데만은 창세기에는 에돔의 자손중 한 사람의 이름으로 등장하나 후에 에돔의 도시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욥기에 나타나는 친구 엘리바스는 바로 이 데만 출신이다. 성경에서 예레미야의 예언과 에스겔의 예언 가운데 드단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에돔의 수도의 한 후보지역이며 대도시의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36:11, 창36:15, 창36:34, 창36:42, 대상1:36, 대상1:45, 대상1:53, 욥2:11, 욥4:1, 욥15:1, 욥22:1, 욥42:7, 욥42:9, 렘49:7, 렘49:20, 겔25:13, 암1:12, 합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