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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로마 원형 극장/시타델/엣 쌀트/브니엘

영국신사77 2008. 8. 8. 12:38
암만/로마 원형 극장/시타델/엣 쌀트/브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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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만(Amman) : 랍바 암만 (Rabbath Amman)

암만은 요르단 왕국의 수도로서 행정부와 왕궁이 자리하고 있다. 구약시대 ‘암몬인들의 라빠’(신명 3,11) 라고 불렸던 이곳은 물이 풍족한 지역이었으며, 지금부터 약 9천 년 전,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다. 이곳은 다윗 왕이 바쎄바의 남편 우리야를 전투 최 일선에 내어보내 전사케 한 곳(2사무 11장)이기도 하다.
‘라빠'란 단어는 ’주요 도시' 또는 '수도'란 의미를 지닌다. 데카폴리스의 하나로 ‘필라델피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암만은 기원전 3세기 이후의 유적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암만은 현대의 하시미트 요르단 왕국 (Hashemite Kingdom of Jordan)의 수도로서 행정부와 왕궁(까스르 라가단 : Qasr Raghadan)이 자리하고 있으며, 구약성경 신명기에서 처음으로 언급되고 있는 고대 근동의 주요한 고대도시의 하나이다.

구약시대 '암몬의 랍바 성읍(신 3:11)' 이라고 불렸던 이곳은 물이 풍족한 지역이었으며, 지금부터 약 9천년전,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기 시작했다. '랍바' 란 단어는 '주요 도시' 또는 '수도' 란 의미를 지닌다.

이곳 랍바가 역사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13세기 암몬 왕국의 수도가 되면서 였다. 랍바를 중심으로 했던 암몬 왕국은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인접해 있었다. 두 나라는 적대적 경쟁 관계여서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암몬 왕국은 주전 8세기 말, 앗시리아 제국에게 정복당한 후 4백년 이상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암몬' 은 롯의 후손(창 19:38)들로서 '나의 백성의 아들(벤 암미)'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족속들의 가나안 진입과 관련하여 암몬 자손의 땅을 지나 여러 중요 도시들을 점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민 21:24-35, 신 2:19-37)  이 시기에 암몬은 이미 강한 나라로 성장해 있었으며 그 경계는 견고하였다. (민 21 : 24)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암몬 자손의 땅 절반 곧 랍바 앞의 아로엘까지를 갓 자손에게 분배하였다. (수 13:24-28)  암몬 족속과 이스라엘 족속은 서로 적대적 관계에 있었으며, 따라서 종종 전쟁이 벌어졌다. 여호수아에서 사울 왕까지 이르는 사사시대 동안(1,200 - 1.025 B.C.) 암몬 족속들은 모압의 에글론왕과 동맹을 맺고 여러 차례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여리고를 18년 동안, 에훗에 의해 퇴각될 때까지 점령하기도 하였다. (삿 3:12-30)  

사사 입다의 시기(삿 10:6-12:6)에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며, 사울왕 때(기원전 1,025년경)에 암몬왕 나하스는 요단강 서편지역 '야베스 길르앗'까지 침입해 들어왔다. (삼상 11) 다윗의 암몬 정벌의 기록이 있는가 하면, (삼하 10:1-14)  솔로몬(c. 970-945 B.C.)은 그의 후비와 빈장들 중에 암몬 여인을 취했고, 그들의 영향으로 암몬 사람의 가증한 몰렉을 쫓고, 예루살렘 근처 실로암에 신전을 지었으며, (왕상 11:1, 6, 7)  그 여인들 중의 한 사람, 즉 르호보암 왕의 모친의 이름은 '나아마'로 암몬 사람이었다. (왕상 14:21)  여호사밧 왕(876-849 B.C.) 때, 모압과 에돔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대하 20장)  웃시야왕(785-740 B.C.) 때에는 유다에 조공을 바쳤으며, (대하 26:8) 요담왕 때는 암몬을 다시금 정벌하여 통치를 강화하였다. (대하 27:5)  

알렉산더 이후 랍바 암만은 기원전 259년에 프톨레미 왕조에 의해 통치되면서 '필라델피아' 라는 이름으로 불려 지게 되는데, 이는 프톨레미 2세의 이름인 '필라델푸스(Philadelphus, 283 -246 b.c.)' 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제논 파피루스에서는 이 도시를 '비르타(Birta)' , 즉 '성곽 거주지' 라 불렀다. 기원전 218년 안티오쿠스 3세는 이 성을 포위하고 수로를 차단하여 정복하였으나, 기원전 1세기부터 점차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한 나바테안 때문에 오랫동안 지배하지 못하였다. 하스모니안 왕조의 알렉산더 야나이가 여러 차례 정복을 시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기원전 63년에 로마의 폼페이가 이 성을 점령하고 데카폴리스의 하나로 지정되면서 필라델피아는 로마 시대의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도시가 되었으며,  '비아 노바 트라야나(Via Nova Traiana)' 의 중심지로서 홍해와 다메섹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기원 후 4세기초에서 7세기초에 이르는 [비잔틴] 시대에는 기독교 전파와 함께 교회들이 건설되면서 필라델피아는 주교가 있는 요단강 동편 지역 교회의 중심도시가 되었으며, 니케아 공의회(주후 325)와 칼케돈 공의회(주후 451)에 대표를 보내기도 하였다. 아크로폴리스 서쪽에 세워진 성 엘리야 교회와 성 조지 교회는 6세기에 가장 잘 알려진 교회였다.

635년 아랍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움마야드 시대(661-750)를 거쳐 압바시드(750-969), 파티미드(969- 1071), 십자군(1099-1268), 마멜룩(1263-1516), 오토만(1516-1918) 시대를 지나 영국 위임 통치 기간동안 자치 정부를 인정받은 요르단 왕국이 독립한 이후 요르단의 수도로 선택되어 지금에 이르러서는 요르단 최대의 도시로서, 이스라엘의 점령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연결하는 정치, 경제적 전략지로서 기능하고 있으며, 지금은 인구 160만 명이 넘는 도시로 성장했다.

관련 성경 : 겔 25:5, 암 1:13-15, 렘 40:14-41:4, 스 9:1-2 이하, 느 13:23-27, 느 4:3, 삼하 11, 신 3:11, 사사기 11:1, 삼상 11:2, 삼하 10:, 17:27, 암 1:13-15 등

■  로마 원형 극장

다운타운(중심가)으로 부터 5분 거리의 공원에 자리하고 있는 로마극장은 암만이 로마 도시의 하나인 필라델피아로 기능했을 당시의 유산들 중에 파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것 하나이다. 기원 후 138년에서 161년,  안토니너스 피우스(ANTONINUS PIUS)가 통치했던 시기인 기원 후 2세기에 건설된 것으로, 암만의 동쪽 언덕을 깎아서 곧바로 만들어 놓은 형식으로 대략 6,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이며,  현재도 공연장으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무대의 양쪽 옆으로는 '전통 장식 및 의상 박물관'과 '민속 박물관'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  오데온(Odeon)

로마 원형극장의 오른편 앞쪽에 위치한 작은 극장이 오데온이다. 로마 극장과 같은 시기에 건설되었으며 지금도 한창 복원중이다. 보통 음악회를 위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2세기초에 지어진 이 작은 극장은 수용 인원이 500명 정도이다.

■  님프 신전(Nymphaeum)

로마 극장에서 서쪽으로, 후세인 사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돌로 만들어진 건물 하나를 보게 된다. 이것이 2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님프 신전이다. 몇 년 전만해도 빽빽히 늘어선 주거용 건물들로 가려져 있었던 이 유적은 로마 극장이나 오데온보다 약간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데카폴리스의 일원이었던 고대 필라델피아(암만)의 주요한 물 공급 우물이었다.

■  시타델(Citadel) : 암몬 성터

해발 850m의 고지에 매우 견고하게 건설된 암몬 성은 현재 아랍어로 '자발 엘 깔라아' 로 불리운다. 주변 사방의 깊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성채는 로만 비잔틴 시대의 것이 남아 있으나 아래 성채는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성경 이전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 이 지역의 유적은 많이 손상되고 파괴되어 있다.  지금도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움마야드 왕조에 의해 건설되었던 왕궁(기원후 8세기)은 복원 작업이 한창이다. 6, 7세기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교회 터가 발굴되어져 있고, 로마 시대에는 이곳을 중심으로 아크로폴리스가 형성되었다.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161-180)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헤라클레스 신전이 발굴되었으며, 이것은  일부가 복원되어 있는데, 이 자리는 철기 시대 암몬 족속의 신 밀곰의 성소가 있었던 곳이다. 그 외에도 로마시대의 방어 성벽이라든지 움마야드 시대의 물 저장고를 비롯해서 아직도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유적이 이곳 고대의 랍바성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에는  청동기 시대로 부터 철기 시대에 매장을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많은 둥굴들이 있다.

시타델 북쪽 중앙에는 암만 고고학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1950년대에 오스틴 해리슨(Austin Harrison)에 의하여 세워졌다. 규모는 작지만 나름대로의 가치를 간직한 중요한 곳이다. 전시물들은 선사시대부터 주후 170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유물들로써, 각 시대별로 잘 정리되어 있으며, 이러한 유물들을 통하여  요르단을 중심으로 한 중근동과 이집트의 문화가 어떻게 융합되었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나바테 문명의 흔적과 이집트의 막강했던 영향력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전시물들 중에는 기원전 180,000년까지 올라가는 유물들에서부터 비잔틴 시대, 아랍 시대, 십자군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전시물이 소장되어 있어 이 지역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성경과 관련하여 1868년 디반에서 발견된 모압 비문의 사본 (왕상 16:23-29)과 텔 데이르 알라에서 발견된 브올의 아들 발람의 예언에 관한 이야기 (민 22장-24장)가 기록된 기원전 8세기경의 돌 비문도 전시되어 있다.

■  망대 (암몬 시대의 망대)

많은 수의 망대들이 암만 주위에 남아 있는데 구약 성경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암만 산의 자흐란 궁전 근처와  아랍어로 '둥근 망대' 또는 '양배추 망대' 라는 뜻의 '루즘 엘말포우프' , 바야디르 와디 엣씨르 근처의 키르벳 싸르의 망대 등이  암몬 시대의 망대들로써 이들  망대들은  암만 지역에서만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석회암을 8-22m 크기의 거대한 규모로 쌓았다.

■  엣 쌀트(Es Salt)

암만에서 북서쪽으로 30㎞, 해발 790-880m 지점의 두 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쌀트는 발까(Balqa) 지방의 행정 도시이다.  '쌀트' 라는 지명은 나무로 둘러싸인 골짜기라는 의미의 라틴어 '쌀투스' 에서 파생된 말이다. 비잔틴시대 때는 '쌀토스 히에라티콘' 로 불렸고, 이곳에 주교좌가 있었다. 몽고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가 마멜룩 왕조의 쑬탄 바이바르 1세(재위 1260-77)가 다시 건설하였다. 이 당시에 세워진 요새가 아직 남아 있다. 1830년대 초기에 이집트인(viceroy)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의 팔레스타인 원정 기간에 다시 파괴되었다.
마을을 지나가는 길은 오래 전부터 암만과 예루살렘을 연결하던 주요 도로로 쌀트 길로 불린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요르단 골짜기로 이어진다. 몇 ㎞ 가지 않아서 왼쪽 길을 따라가면 '자발 유샤 (Jebel Yusha)'라 불리는 산등성이를 만난다. 이곳은 무슬림의 전통에 의하면 호세아 선지자의 무덤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이곳에 무슬림 사원이 자리하고 있다.  

■  텔 다미예(Tell Damiyeh) : 아담읍

암만 북서쪽 75㎞ 지점으로 오늘날의 '텔 다미야' 는 성경에 언급되는 아담 읍 (수 3:16)으로, 요단 여울을 지키고 있던 도시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진입을 위해 요단강을 건널 때  물이 멈추어 쌓인 장소로 성경에 언급되고 있다. 오늘날 다리가 있는 가까운 곳에서 로마시대의 다리를 볼 수 있다.

관련 성경 : 수 19:36, 수 3:16

■  자르까 강(Zarqa) : 얍복 강 (Jabbok)

암만에서 85㎞정도의 북쪽 지역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개울처럼 규모가 작은 하천이 자르까(Zarqa) 강으로 성경의 얍복강이다. 이 강은 길르앗 지역을 절반으로 나누는 역할을 하였으며, 동서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관련 성경 : 창 32:22, 민 21:24, 신 2:37, 신 3:16, 수 12:2, 삿 11:13, 삿 11:22

■  툴룰 엣다합(텔 엣다합) : 브니엘(Peniel)

텔 데이르 알라에서 얍복강을 따라 약 7㎞ 정도에는 '동쪽 황금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진 '텔 엣다합 엣 사르끼에'지역이 나온다. 이 마을의 서쪽산 주변이 성경의 브니엘(또는 브누엘, 부느엘) 지역이다. 성경은 이곳을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한 곳으로 언급한다. 일부 고고학자는 이집트 룩소의 카르낙 신전의 시삭 기념벽화에 나오는 기원전 926년경의 시삭 왕의 원정 기록 중에 나오는 정복 도시 목록의 53번째 도시를 이곳으로 지적한다. 이곳은 유적발굴이 작은 규모로 진행되고 있으며, 초기 철기 문명에서부터 초기 로마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명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관련 성경 : 창 32:30-31, 삿 8:8-17, 왕상 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