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팔자(四柱八字)와 운명론에 대한 성경적 고찰
(글쓴이 : 미상)
저는 아이들과 자연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잘 웃고요, 늘 미소가 입에 가득합니다. 한의학을 전공하는 본과 4학년 학생이구요, 시편 139편은 제 이야기입니다. 동양학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간구하며, 귀한 가정 이루기를 원하는 젊은이입니다. 꿈은 멋있는 할아버지,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거구요. 읽어보시고, 편집은 자유롭게 하셔도 되구요. 또 고치거나 요구하실 게 있으시면 연락해 주세요. 평안하시구요.
이 글은 96년 여름에 기독교 세계관 학교에 다니면서 쓴 글인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또한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는지 알고 싶어서 찾아보고 정리하게 된 겁니다. 특히 최근 방송에서 귀신이나 다른 영적인 존재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려주는 것이나 영화에서 자주 언급하는 것 등도 영적인 싸움의 최일선에 우리가 다가와 있음을 말해줍니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그대로 미혹되고 힘없이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어떤 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이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해야하는 일인지 알면, 우리를 방어하고 나아가 말씀과 기도로 영적전쟁에서 승리할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병사로 그 부르심에 충성으로 임해야합니다. 이러는 것이 또 스스로를 돕는 길이기도 하구요. 처음 쓴 글이라서 좀 어색한 부분도 있으니까, 이해해 주시길 바래요. 마음을 먼저 봐 주시길 바래요.
1. 들어가며
2. 사주 팔자는 무엇인가?
가. 사주 팔자와 궁합
나. 운기학설
다. 음양오행
음양이란 무엇인가
오행이란 무엇인가
3. 우상 숭배와 운명론의 폐단
4.기독교적 세계관
5. 나오며
1. 들어가며
한의학을 전공하면서, 그 기저에 깔려있는 음양오행론(陰陽五行論)을 접하게 되었다. 한의학의 모든 이론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음양오행론을 배우면서 이것이 동양인들이 자연과 우주를 보는 하나의 세계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의외로 사주(四柱)나 궁합(宮合) 등의 운명론으로 인한 문제를 보았다. 예를 들면 궁합이 맞지 않아 혼인하지 못하는 연인들, “다 팔자 소관이다!”는 한탄, 대학입시․사법고시․행정고시 등 시험전 점 보기, 원단(元旦)에 토정비결로 한 해의 운세를 보는 이들, 잡지에서 별자리에 따른 애정운, 금주의 운세, 일간지(干支)의 오늘의 운세를 보는 이들 등등이다.
이렇게도 자신의 운명을 알려고 하는 이들을 보면서, 음양오행론의 한 응용분야인 사주팔자(四柱八字)(四柱八字)와 궁합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자유하고자 하는 몸부림과 노력이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되어 도리어 얽매여 자유하지 못하게 된다. 그대로 믿고 따르려니 자신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도 속박하게 된다. 이렇게 한 부분일뿐인 한 세계관이 삶과 인생을 결정하는 사상이 되어 문제가 생기는 것이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보여진다.
“크리스천으로서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도울 수 있을까 ???”
돕고 싶었다!! 그들에게 적절하게 힘이 되는게 뭔지를.
알고 싶었다!! 어떻게 대해야하며, 바른 정보․바른 사상이 무엇인지.
그래서 사주팔자(四柱八字)와 궁합에 연관된 운명론에 대해 알아보고, 문제가 되는 점과 이에 대해 성경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2. 사주팔자(四柱八字)(四柱八字)는 무엇인가?
가: 사주팔자(四柱八字)(四柱八字)와 궁합(宮合)
사주(四柱)는 사람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표시하는 연주(年柱), 월주(月柱), 일주(日柱), 시주(時柱)를 말한다. 연월일시마다 각각의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사용해서 나타낼 때 8자가 되므로 사주팔자(四柱八字)(四柱八字)라고도 한다. ‘다~ 내 팔자야!’란 말의 팔자(八字)도 여기의 팔자이다.
천간(天干)은 태양을 위주로 10일을 1순(旬)으로 본 것으로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 의 10간이다.
지지(地支)는 달을 위주로 오행(五行)의 추이(推移)를 12달과 연관하여 본 것으로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의 12지이다. 이 천간과 지지를 조합하여 만든 것이 잘 아는 회갑(回甲), 육십갑자 동방삭이라고 할 때의 육십갑자(六十甲子)이다.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줄여서 간지(干支)(干支)라 한다. 간지(干支)의 선후 차례는 결코 편리한데로 배열한 것이 아니다. 간지(干支)는 1, 2, 3, 4, ······ 와 같이 단순한 하나의 부호가 아니라, 만물이 발생(發生), 소장(消長), 번성(蕃盛), 노쇠(老衰), 사망(死亡), 재발생(再發生) 하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갑(甲)은 새싹이 흙을 헤치고 나오는 초생(初生)현상을
을(乙)은 어린 싹이 점차 꿈틀거리며 생장하는 것을 뜻한다.
간지(干支)는 각각 음양오행에 배속되는데 이는 음양오행의 변화를 역법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일종의 범주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사주는 우주에 운행하는 기의 움직임에 대한 운기론에 속한다. 기 사상에서는 인간이 각자 고유한 선천의 기(先天之氣)를 가지고 태어나며, 이 선천지기의 두텁고 엷음에 따라 신체의 강건과 수명, 운명이 결정된다고 본다. 그런데, 이 선천지기는 부모로부터 부여받지만, 한편으로는 태어날 때의 우주의 기, 즉 천체의 독특한 배열에 따른 기의 작용에 의해서도 결정지워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궁합은 사주를 가지고 맞추어 보는 것이다. 즉 선천의 기를 나타내는 사주에 따라 사람마다 독특한 성격과 성적 기능을 가지므로, 이러한 특성과 잘 조화되는 사람을 배필로 고르자는 생각이다. 따라서 궁합 역시 주로 천간지(干支)지로 맞추어 본다. 이때 천간과 지지에 오행을 배속하여 오행의 상생과 상극의 원리를 적용한다. 즉 간지(干支)에는 서로 친화하여 합(合)하는 것이 있고, 또 배척하여 충(衝)하는 것이 있다. 궁합이 좋다는 것은 결국 두 사람의 사주의 간지(干支)가 서로 합하는 것이다.
궁합의 원리는 중국 전래의 상수학(象數學)에 근거를 두고 있다. 상수학의 특징은 단순히 수리(數理)에 대한 경험적 학문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우주관과 연관하여 형이상학적으로 발전한 것이 특징이다.
나: 운기학설(運氣學說)은 무엇인가?
운기(運氣)는 오운육기(五運六氣)의 간칭이다.
“운(運)”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5운(運)을 말하며, “기(氣)”는 풍(風), 한(寒), 습(濕), 조(燥), 상화(相火), 군화(君火)의 6기(氣)를 말한다. 이는 천체 일월 성신의 변화와 지상 생물의 생장 변화 상태를 관찰하여 자연 변화의 규칙성을 찾아낸 것이다, 자연계 기후에는 각각 서로 다른 특징과 작용이 있으므로, 이런 특징과 작용을 근거로 하여 규칙성을 추출하여 하나의 학설로 정립한 것이다.
오운(五運)은 1년 사계의 기후변화를 오행의 개념으로 분류한 것으로, 각 계절 기후의 정상 또는 이상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들의 인력 등으로 인한 자기장과 인력의 변화를 통해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육기(六氣)의 변화는 1년 사계의 음양소장진퇴(陰陽消長進退)의 변화 아래 발생한다.
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이란?
음양(陰陽)이란 무엇인가?
음양(陰陽)은 《주역(周易)》에 처음 나타나는 개념으로, 처음의 뜻은 《문자몽구》중에 표현되어 있는 것과 같은 산의 형세에서 일광이 항상 비치는 면과 비치지 않는 면을 가리킨 것이다.
그 후 음양은 유취(類聚)하며 확대되어 자연계를 인식하는 개념이 된다. 음(-)은 보다 어둡고 차가우며 고정적이고 낮은 곳에 있고 무겁다. 양(+)은 비교적 밝고 따뜻하며 운동적이고 높은 곳에 있고 가볍다. 낮이 길어진다는 면에서 봄, 여름은 양이 되고 가을, 겨울은 음이 된다. 그러나 밤이 길어진다는 관점에서는 가을, 겨울이 양이 되고 봄, 여름은 음이 된다. 이와 같이 음양은 상반되는 것 같으면서도 동전의 양면과 같이 홀로 떼어 놓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다. 음양은 고정된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음양은 서로 의존하고 도와주며 또한 제약한다. 또 서로 전화(轉化)될수도 있다.
우주 만물의 운동과 변화는 하나의 기(氣)로부터 말미암으며 이러한 운동의 원동력은 태양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인식한 고대인들은 태양이 떠오를 때면 만물이 생장, 활동의 추세로 향하게 되고 지고 나면 잠복, 휴식의 추세로 향하게 된다고 관찰하고, 그 결과 위로는 일월성신(日月星辰)과 아래로는 산악하수(山岳河水), 크게는 천지와 작게는 풀 한 뿌리, 나무 한 그루까지도 이러한 양상을 뛰지 않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렇게 하여 이뤄진 규율은 음양이란 두 글자를 이용해 개괄한 것이다.
오행(五行)이란 무엇인가?
오행설(五行說)은 《상서(尙書)》의 「홍범구주(洪範九疇)」편에 나타나는 개념이다.
우주간에 운행하는 원기(元氣)로서 만물을 낳게 한다는 5종의 원소 즉,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5상(五象)의 상호 억압(抑壓)․조장(助長)하는 기화(氣化) 변화에 의해 우주의 모든 현상과 만물의 생존을 관찰하여 설명한 일종의 사상체계이다. 오행학설의 주요 관점은 우주안의 모든 사물을 오행의 운행과 변화에 의해 구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오행(木, 火, 土, 金, 水)은 나무, 불, 흙, 쇠, 물 같은 자연형질 자체만 아니라 상(象)도 대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형이하(形而下)와 형이상(形而上)을 종합해 형(形)과 상(象)을 모두 대표하며 상징하는 부호이다. 그러나 그 주점은 상(象)에 두고 있다. (여기서의 상은 일반적인 상이 아니라 이면(裏面)에서 율동하는 생멸력(生滅力)인 상 즉, 운(運)을 말한다.)
목(木)의 특성은 나무가지 등이 위로 향하는 것, 밖으로 넓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생장(生長), 발육(發育)과 순조롭게 조달(調達)하는 작용 및 성질을 가진 사물을 木에 귀속시킨다.
화(火)는 불이 가진 온열(溫熱), 상승(上升)이 특성이 된다. 온열(溫熱)한 것으로 상승하는 작용을 가진 사물이 火에 귀속된다.
토(土)는 땅에 농작물을 심어 거두는 특성이 있다. 생산(生産), 변화(變化), 수납(受納)의 작용을 가진 사물을 土에 귀속시킨다.
금(金)은 숙살(肅殺), 변혁(變革)에 그 특성이 있다. 깨끗하고 숙강(肅降)하고 수렴(收斂)하는 작용을 가진 사물이 金에 귀속된다.
수(水)는 습윤(濕潤)시키고 아래로 흐르는 작용을 특성으로 지닌다. 그래서 한량(寒凉)하고 습윤(濕潤)하고 아래로 운행하는 작용을 가진 사물이 水에 귀속된다. 이와 같은 특성을 중심으로 해서 사물의 여러 속성, 기능, 작용과 형태 표현 등을 근거해 추상적으로 개괄하여 분류한다.
이렇게 해서 색깔, 맛, 소리, 방위, 가축, 오장, 육부, 감정상태, 기후, 천체 등 모든 것을 오행이라는 틀로 구분해서 인식한다. 한의학에서 많이 응용되는 패러다임이다.
천체의 운행. 계절의 기후, 생물의 성쇠 등 이 모든 현상을 오행설이란 창을 통해 상생(相生)과 상극(相克)으로 설명할 수 있다. 상생(相生)은 하도(河圖)에서 비롯된 개념으로 목생화(木生火),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으로 “목 +++> 화 +++> 토 +++> 금 +++> 수 +++> 목”의 방향으로 고리처럼 상호 조장(助長) 내지 협조(協助)하여 사물을 변화 발생시킨다.
상극(相克)은 낙서(洛書)에서 기인한다. 목극토(木克土), 토극수, 수생화, 화극금, 금극목 “목 ---> 토 ---> 수 ---> 화 ---> 금 ---> 목”의 방향으로 거스르거나 억압하는 관계로 사물의 변화 발생을 제약한다.
오행학설은 이 같은 인식에 기초를 두고 우주 안의 각종 사물을 오행에 귀속시킴과 동시에 우주 안의 모든 사물은 오행의 상호작용, 상호전화에 의해 구성된다고 본다. 사물 각각의 특성을 갖는 면의 조화성에 의해 사물 사이는 서로 연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에서 기(氣)사상, 음양오행학설(陰陽五行學說), 사주팔자(四柱八字), 궁합의 운명론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았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가 되는 걸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개념들을 수용하여 성경적 권위하에 복종시켰다. 성경에 나오지 않는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세계관을 전개하는데 수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때도 당연히 이 개념들은 성경의 권위에 복종되어야 한다(사43:23; 딤전4:4).
문제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을 사용해서 형성된 사상 체계가 성경적 권위와 세계관에 도전한다는데 있다(창3:4-5).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에는 구원받을 이름을 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이런 개념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여, 그 받으실 영광을 가로채고 하나님을 가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혹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우상과 우상숭배에 대해 알아본 후 성경에서 이들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찾아보자.
3. 우상숭배와 운명론의 폐단
기독교 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우상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우상(偶像) :
예배의 대상이 될 때의 신상이다. 그러나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어떤 물질적인 상징도 우상으로 불리는 수가 있다. 후자의 용법은 구체적이거나 추상적이거나 무가치한 망집(妄執)의 대상인 것에 우상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적 관점에서 볼 때 부차적인 성격을 띤다.
우상숭배(偶像崇拜) :
구약에서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구체적인 상들이나 우상들로 표현되는 이방신들에 대한 숭배 또는 야훼신앙에서 이러한 상징들을 사용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이방신들의 숭배가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하나님 이외(以外)의 대상에 심하게 사로 잡혀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신약, 특히 바울서신에서는 일반적으로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창조주에 헌신하는 대신에 피조물(被造物)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엡5:5 ; 빌3:19에서는 탐식이나 탐욕이 우상숭배로 언급되어 있다).
망상(妄想)을 버리지 못하고 집착(執着)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 우상이며,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해서 심하게 사로잡히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운명술은 사사로운 마음으로 길흉을 미리 알아보자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재미로 신문, 잡지의 점성술이나 컴퓨터 사주를 본다고 한다. 인간은 재미로 볼지 모르지만 사탄에게는 결코 재미가 아니다. 이는 그릇된 것이며 불순종의 행위이며 불충성의 행위이다(시81:9; 사43:12).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아버지의 뜻을 찾을 수 있는 통로와 수단을 우리에게 충분히 마련해주지 않았다(렘33:3)고 말하는 것과 같다. 거짓된 예언들은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잠재의식(潛在意識)으로 남아서 우리를 속박(束縛)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로 자유케 하고자 하신다(요8:32, 16:13, 17:17).
운명술자들은 길흉(吉凶)이 마치 기의 법칙과 같은 어떤 힘이나 자연의 법칙에 달려있는 것처럼 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은폐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박한다. 우상이 되고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복술자들, 점성술자들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를 용납(容納)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가증스럽게 여기신다(신18:10-14; 사47:13-14; 왕하23:5 ).
복술(卜術)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계시, 그밖에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통로들을 통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통하여 영적인 세계의 정보를 얻어내고자 하는 모든 시도들을 통털어 말하는 일반 용어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복술은 언제나 금지된 것이었다. 이 절대적인 금지령은 한번도 철회된 적이 없고, 돌로 쳐죽이고 멸하라고 명령하고 있다(레19:31, 20:6,27; 출22:18,20; 습1:5-6).
운명론이 주는 아주 나쁜 폐단은 우리를 현세 구복(求福)적으로 유도한다는 것이다. “운(運)이 좋다!”는 기준은 일반적으로 재물, 지위, 명예, 권력, 건강, 장수 등 현세 적인 가치에 있다. 운명론에서는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삶의 질(質)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온갖 비리와 술수를 써서라도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부귀영화를 누리면 사주가 좋은 것이 된다. 반면에 아무런 부귀영화도 누리지 못하면서 이름도, 빛도 없이 나라와 민족, 사회와 이웃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은 사주가 좋지 못한 사람이 된다.
하나님은 현세적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을 복된 삶으로 여기지 않으신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복된 것으로 여기신다(시1:1-2; 미6:8). 야곱에게 허락하신 축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창28:15).
사실 운명술에서 말하는 대로 자신의 노력과 마음가짐에 의해서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굳이 운명을 점쳐서 알 필요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래의 길흉화복을 미리 안다고 하더라도, 단지 최선의 노력을 하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또 노력과 올바른 마음가짐에 의해서 바뀔 수 있는 미래라면 이미 정해진 미래가 아니며, 정해진 미래가 아니라면 미리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롬12:2-3; 전3:11).
우리가 미래를 미리 알아서 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사사로운 마음만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마음은 자기의 선천적인 운명이 좋다고 하면 교만해지고, 나쁘다고 하면 낙망하기 쉬운 법이다. 교만이나 낙망 어느 쪽이든 사탄이 매우 기뻐하는 것이다.
4. 기독교 세계관
하나님으로부터 인하지 않고 우주의 기로 정해진 운명론에서 평안을 찾으려한다는 데서, 인간이 만든 피조물(被造物)을 절대시하여 섬긴다는 데서 문제가 된다. 십계명에서도 “너를 위하여 ···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20:4-5)고 엄격하게 금(禁)하고 있다.
기복적(祈福的) 사고방식에서는 어떤 기계적인 작용을 가함으로써, 현세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계는 사람의 영적, 도덕적 상태와 상관없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영적, 도덕적 상태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않고, 좋은 이름으로 바꾸거나, 좋은 관상을 위해서 성형 수술을 하거나, 사주 좋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 제왕절개를 해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필요할 때 동전만 넣으면 언제나 우리의 입맛에 맞게 보아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요구대로 따르는 분도 아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알라딘의 마술램프 속의 거인 지니처럼 힘세고 전능한 종인 양 착각한다. 그리고 그런 분으로 ‘취급’한다.
운명론에서의 “운(運)”이란 것도 가변적인 확률을 의미하며 “운이 좋다”는 것은 확률이 높단 의미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는 사실상 확률의 성취는 언제나 100%가 된다. 운명론의 관점에서는 성취될 확률이 0.1%라도 하나님 뜻 안에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100%가 된다. 하나님 안에서는 확률이란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분이시며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고후 5:17; 창1:1). 구약, 특히 잠언과 시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개인의 삶과 국가의 역사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걸 볼 수 있다(창 50:19~21; 잠16:1~2, 9, 33, 19:21).
인간은 타락으로 총체적 인식 능력을 상실했고 불완전성과 불확실성에 처하게 되었다. 불완전성과 불확실성에서 기인하는 인간의 깊은 곳에 있는 불안은 전적으로 타락에 의한 것이다.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인간의 호기심과 욕구도 이러한 불안에서 출발한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은 만유의 주권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창1:1), 오직 한분이신 구원자에게로 돌아갈 때 해소되는 것이다(사43:11, 45:21). 인간이 자신의 죄인됨과 전적 무기력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할 때 참된 내적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눅15:20~24). 이 세상 신(고후4:4)인 사탄이 주는 평안은 참되고 지속적인 평안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요14:2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1:6-7)
욥기 23:10-14 말씀에서 욥은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난중에서 자기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깨닫는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고난 중에 두심은, 자기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단련시키려는 뜻임을 안다.
우리가 당하는 징계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표현이다(잠3:11~12). 고난이 아니었더라면, 감히 생각할 수도 느낄 수도 없었던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주관해 이끌어 가시는)에는 목적이 있고 이룰 때가 있다(전3:1~8, 17). 배우자(창2:22, 잠19:14)도, 재물과 부요함에도(전5:19, 빌4:11~12) 하나님의 손길이 숨어있다(요3:27). 하지만, 총체적 인식능력이 결여되어있는 우리는 그 뜻을 온전히 알수 없다(전3:11).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창5:24, 히11:5),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을 먼저 구하는 자(마6:33)는 숨겨진 아버지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잠3:5~8; 16:3).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뜻, 에덴동산에서부터 우리에게 주신 선물에는 보람과 즐거움이 있다. 내일 일을 위해 염려하며 괴로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마6:27, 34). 창조때부터 시작된 일하는 즐거움과 보람,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로움 중에 즐거워하고 보람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분복(分福)이며 하나님의 선물(膳物)이다(전5:18~20). 우리가 선물할 때 그에게 가장 필요하고 어울리고 기뻐할 것을 준비하는 것처럼, 우리를 더 세밀하게 아시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더할 나위 없다.
늘 우리에게 제일 필요할 때 가장 좋은 것, 최고로 어울리는 걸로 선물을 주시려는 아버지의 대한 절대적인 믿음(막11:22~24)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수 있다(요11:40).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8:39). 이런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들을, 그의 방법과 지혜에 대한 절대적이고 온전한 믿음으로 우리는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껴 자유롭고 평안을 누릴수 있다(빌2:1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요14:1, 빌4:6~7).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 그 풍성하신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다(빌4:19). 우리를 위하여 정한 날들을 통해 이뤄가실 주님의 섭리를 기대해본다.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23:10)
“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139:16)
5. 나오며
어떤 세계관을 지니고 사건과 사물, 사람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반응양식과 대처방법에 큰 차이가 나게된다. 바닥에 깔려 있어 좀처럼 바뀌지 않는 이 세계관에 따라 사람들의 삶의 향방이 정해진다.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것을 겸하여 섬기지는 못한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두고 섬길 것인가?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우리의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뤄간다는 믿음! 고통과 고난의 어려움이 다가와도 아버지 하나님께 의지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 고난에서 얻은 축복이다.
나아가서 이 과정을 지나고 나면 또 얼마나 더 큰 은혜를 선물로 받게 될까? 이렇게도 훈련받고 단련시키시며 성숙하게 하시는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바라보자(요9:3). 쉽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같이 메자. 두려움과 근심이 사라지고 쉼을 얻을 것이다(마11:28~30).
사람의 지혜보다 지혜로운 하나님의 미련함, 사람의 강함보다 강한 하나님의 약함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고전1:25).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믿음이 작은 자여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내니 두려워 말라(마14:22~33). 당신은 어디를 볼 것인가? 풍랑인가? 주님인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6-18)
참고문헌:
《고난의 의미》 김진홍, 도서출판 대장간
《그리스도인의 영적전투》 Michael Harper, 도서출판두란노
《김 진홍 칼럼》 김진홍, 도서출판 대장간
《세계관과 영적전쟁》 안점식, 조이선교회출판부
《한의학과 사주팔자》 한중교육문화연구원編譯, 여강출판사
《한의학원론》 김완희, 성보사
《한의학의 형성과 체계》 김완희, 김광중 편저, 중문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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