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기 속 민중, 빛처럼 다가온 말씀에 열광
조선에 거주하던 초기 선교사들이 성경 번역을 위한 실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외국성서공회들이 지부를 설립하던 때는 한반도에 격동과 위기의 태풍이 거세게 몰아치던 시기다. 신약과 구약성경이 번역되던 이 시기는 동학혁명(1894)과 청·일전쟁(1894∼1895), 을미사변·단발령(1895), 아관파천(1896), 대한제국 성립(1897), 만민공동회 활동(1898), 러·일전쟁(1904) 등이 연속적으로 전개됐다.
◇전통적 사고 뒤흔든 사건=1893년부터 1903년까지 10년간 우리 사회와 기독교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다. 이 두 사건은 조선인의 전통적 사고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다.
조선인들은 청·일전쟁을 통해 그들이 전통적으로 신봉해오던 신들과 중국이 일본의 총칼 앞에 맥없이 쓰러지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중국 이외의 민족은 모두 오랑캐라고 업신여겼던 화이관(華夷觀)은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렸다. 더군다나 유교 등 전통 종교의 신들도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가치관을 제공하지 못해 더 이상 의지할 대상이 못 됐다.
"조선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현 정부를 존경하거나 신뢰하지 않습니다. 러시아와 일본 가운데 누가 앞으로 이 나라를 지배할 것인가, 그것만이 문제입니다."(루미스의 편지·1903)
민중들의 공허함과 불안감은 점차 가중됐고 예수가 조선 민중들의 마음속을 파고든다. 이때 많은 기독교 학교와 병원이 설립되어 관·민의 호응을 받고 있었으며, 일요일은 공휴일로 바뀌었다. 1894년부터 선교를 시작한 미 북장로교회만 해도 15년 만에 교회 258개, 예배처 261개소, 수세자 2804명, 교인 9634명에 달했다. 이런 성장에 따라 1895년부터 1899년까지 출판된 단편 성경만 해도 20만부가 넘었다.
◇실행위원회 구성 번역 작업 착수=서울에 거주하던 선교사들이 번역 성경을 서둘러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조선의 긴박하게 돌아간 정치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그러나 성경 번역 사업은 로스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지지부진한 상태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번역사업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킨 '루키'는 영국성서공회 만주지부 켄뮤어 총무였다. 1893년 조선에 발을 디딘 켄뮤어는 의주방언과 한자 표현으로 서울 선교사들이 거부 반응을 보였던 로스역에 대해 무용성을 재확인하고 새 번역본을 펴낼 것을 결정하는 등 교착 상태에 빠졌던 성서 번역 사업의 '교통정리'를 했다. 켄뮤어의 제안에 따라 서울에 거주하던 스크랜턴, 홀, 레이널즈, 모펫, 언더우드, 털리 선교사 등은 상임성서실행위원회(Permanent Executive Bible Committee·PEBC)를 꾸렸다. PEBC는 1894년 조선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이던 3개국 성서공회에 재정 지원을 요청했으며, 언더우드, 게일, 스크랜턴, 아펜젤러, 트롤로프를 전임번역자회 위원으로 선출했다.
PEBC는 번역자회가 내놓은 원고를 개정·검토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그리스 성경과 영어 개역판, 중국 위원회 역본을 번역 대본으로 한다는 원칙을 세운다. 번역자회에서 잠정적으로 완성된 역본은 PEBC에서 만장일치를 봐야만 시험역이라는 이름으로 시중에 내놓을 수 있었다. 시험역은 다시 3년간 반포시켜 수정할 부분을 찾아 개정한 후 공인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절차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한글성경에 대한 조선교회의 시급한 요청 때문이다. 따라서 PEBC는 임시로 개인역 형태의 성경을 발간한다. 1895년 '마태복음'을 시작으로 1900년 '요한 �시'에 이르기까지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게일, 스크랜턴은 27권의 신약성경을 모두 번역해 '신약젼셔'를 내놓는다. 중국은 번역 신약성경을 갖기까지 첫 선교사 입국 후 50년이 걸렸지만 조선은 불과 1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수요가 엄청납니다"=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은 정치·경제적으로 한국이 일본에 예속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러·일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시기이던 1904년판 신약전서는 거의 절판됐다. 늘어난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1905년 후반기 출판한 복음서와 사도행전 5만부는 이듬해 봄에 매진되었다. "성경에 대한 엄청난 요구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지연된 데다 새 판본이 나오려면 상당 기간을 기다려야 하므로 바로 그 성경들이 독자들의 손에 들어가고 있습니다."(번커의 편지·1905) "수요는 엄청나고, 우리의 성공은 다만 이 수요에 대처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한되고 있습니다."(밀러의 편지·1906)
선교사들은 신약성서 번역이 끝난 후 구약성서 번역 작업에 들어가 '창셰긔' '?언' '삼우엘젼후셔' '말나긔'에 이르기까지 5년5개월의 대장정 끝에 1911년 '구약젼셔'를 완역하게 된다. '구약젼셔'는 출시되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려 6개월 만에 6500권이 판매됐다.
이렇듯 전쟁의 극한 상황 속에서 불안한 민중들은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종교에 의지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야소교(耶蘇敎), 즉 오늘날의 개신교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는 시편 기자의 고백은 훗날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고 선교 강국으로 급성장한 한국교회의 고백이 된다.
물론 이런 고백이 가능했던 것은 1902년 성서번역자회에 참가하려다 군산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하면서 순직한 아펜젤러 선교사와 조한규 조사와 같은 이들의 피땀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그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알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성경 번역에 바쳤다."(미국성서공회 연례보고서·1903)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성경으로 돌아가자―한국의 성경⑤]
스코틀랜드성서공회 한국에 최초 성경 보급 | |
'9000㎞나 떨어진 생소한 나라, 조선에 아무런 대가없이 재정을 지원한 스코틀랜드성서공회를 아시나요?'
한국의 성서 보급과 관련해 스코틀랜드성서공회(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NBSS)를 빼놓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중국 만주에서 존 로스에 의해 10년간의 노력 끝에 발간된 한국 최초의 성경 '예슈셩교젼셔'(1887)나 국내 최초의 번역본 '마가의젼한복음셔언?'(1887)는 NBSS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빛을 볼 수 있었다. 이들 성경은 훗날 조선 복음화의 강력한 무기가 된다.
NBSS는 1860년대부터 중국에 진출해 성경 반포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 토머스 목사가 대동강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중국지부 윌리엄슨 총무가 주선했기 때문이다. NBSS는 조선 복음화를 위해 1882년부터 부산과 원산의 일본인 거주지를 중심으로 성경보급소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로스역 성경 외에도 이수정역, 다량의 한자·일본어 성경과 소책자가 보급됐다. 1883년부터 1887년까지 6405권의 단편 성경이 NBSS를 통해 보급됐다. 이후에도 NBSS는 영국성서공회를 통해 자금을 지원하는 방법으로 보이지 않게 성경 보급 사업을 도왔다.
이 단체의 모체는 1804년 런던에서 세워진 '영국과 해외성서공회(British&Foreign Bible Society)'다. 이후 지역 단위의 성서공회가 모여 1809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NBSS를 설립하게 된다. 1862년 처음으로 나이지리아 성경을 번역했으며, 1863년 중국에 지부를 설치한 후 중점적으로 성서 보급 사업을 펼쳤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에 성서를 보급하게 된 것이다.
NBSS는 지금도 콩고 네팔 페루 미얀마 등지에서 성경 보급 및 구호 사업을 펼치고 있다. NBSS는 1985년 설립 배경이 비슷한 스코티시성서공회(www.scottishbiblesociety.org)에 합병됐으며, 2009년 창립 200주년을 맞는다. 본부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다.
NBSS는 한 사람의 선교사도 한국에 파견하지 않았지만 성경을 전하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미국이나 독일교회 못지 않게 한국교회가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준 '영적 어머니'나 다름없는 셈이다.
백상현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