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 본문 : 열왕기상 14 : 1 - 18 일시 : 2007년 7월 8일 주일아침설교문 모든 사람에게는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들에 둘러싸여서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여러분에게도 문제들이 있을 것입니다. 해결해야 할 사항들이 있고 극복하고 도전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과 같은 문제들이 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한 번 다른 사람들의 인생과 바꾸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합니다. 당신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녀들의 문제, 경제적인 어려움과 인간과의 갈들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혹은 도달하고 싶은 성공과 부와 행복을 찾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건강의 문제가 있으며 세상이 주는 시련과 상처도 있습니다. 자신의 실수로 인하여 겪는 불행한 현실도 있습니다.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문제는 그 문제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사람들의 방법에 있습니다. 자신의 독단적인 방법을 넘어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 문제들을 해결해 보겠다는 태도마저 악한 모습이기까지 합니다. 여로보암의 모습은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며 믿음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행복하고 만족한 시절보다, 더 가증하고 악해질 수 있을 때가 위기의 때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으로 우리의 문제들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세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인생의 문제는 죄로 멀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한 은혜의 부르심입니다. 여로보암은 왕의 자리에 있었지만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었습니다. 그가 아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이가 죽으면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할 순간까지 왔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고 거기에 인생을 걸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잃었을 때 그것은 내 인생의 전부였다고 울며 고백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것으로 인해 기쁘고 보람을 느끼고 행복해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부였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릴 만큼 무엇인가를 상실하고 떠나보냈을 때 우리는 진지하게 물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진 소중한 가치를 누가 지켜 줄 것인가?’ ‘내가 가진 것들은 결국 아무 것도 인간의 능력으로 보존할 수 없구나!’.
세월이 지나가면서 우리의 생애 가운데 소중한 것들을 하나 둘씩 떠나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안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보다 더 불행합니다.
어리석은 제가 경험한 바는 인간은 지속적으로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첫 번째 자리에 모시지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서 보면 하나님은 그저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되거나 무가치한 한 부분쯤으로 여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궁여지책으로 필요하면 찾고 잊혀 지면 팽개치는 존재로 여기는 악행을 일삼습니다.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를 내어 주셨습니다. 영광스러운 가치를 가장 하찮은 가치로 바꾸셨고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의 자리는 우리 자신들이 있어야 할 자리였습니다. 죄인들이 가야할 지옥을 대신하셨고 심판과 형벌을 대신하신 분이십니다. 구원받은 여러분은 영원히 행복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행복을 느끼시던지 아니던지 상관없이 영원히 행복한 나라로 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영원한 죄악을 담당하시고 죽으신 일을 의심하지 않으신다면 이 땅에서 슬픈 일을 당하거나 시련이 왔을 때 한 번이라도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버리신 아픔을 생각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인간이 이기적인 욕심을 깨드릴 수 있는 기회는 위기와 시련의 순간뿐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세상의 모든 것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기억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잘 나가가는 사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공과 부와 만족과 육신의 행복은 자신을 영원히 잃어버리게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가 그리워질 수 없는 법입니다.
<며칠 전 홀로 사시는 85세나 되신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이제 곧 가게 될 주님의 나라만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처음에 그분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줄 알고 복음을 전하자, 우리는 한 형제라면서 너무도 반가워했습니다. 그 할머니의 생애는 지금까지 눈물과 시련이었습니다. 저와 얘기하는 시간에도 기침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두 아들은 술 마시며 방탕한 나날을 보내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고, 두 딸이 외지에 살고 있는데 두 명의 사위도 병과 사고로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련과 아픔이 할머니를 더욱 주님과 가까이에 있도록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몇 일전에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안부를 주고받고 저는 그 친구에게 늘 기도한다고 해 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무엇을 기도하는지 모를 것입니다. 자기의 사업이나 가정의 평안 같은 것들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가 기도하는 내용은 그 친구와 그의 부인과 자녀들의 영혼을 위해서만 기도합니다. 성공과 육신의 안정이 하나님과 멀어지는 길이라면, 실패나 아픔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길이라면 그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에게는 무조건 선하게 대하신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아내를 변장하게 하여 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선지자 아히야에게 보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내가 이 백성을 다스리는 왕이 되리라고 내게 말한 사람이라.”(2절하).
여로보암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왕의 자리를 허락하시고 왕국을 다스릴 수 있는 통치력을 허락하셨다는 것에 대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된 것이 하나님의 선대라고 오해했던 것입니다.
역사를 보노라면 자격이 있어서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거의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국가의 통치자나 권력가들이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다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고 당연히 그럴만한 인격과 능력을 갖추었기에 현재의 위치를 누린다고 생각합니다.
여로보암은 대단히 큰 착각에 빠져있었습니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도 왕으로서 인정될 만한 권위와 명철을 가진 사람으로 자신을 과대평가했던 것입니다. 왕관을 쓰고 있고 왕복을 입고 있으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부패한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직분을 가졌다고 하나님의 일군이 아닙니다.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을 올바로 살피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있기 때문에, 백성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고 있기 때문에, 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 주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한다면 진실을 오해한 것입니다. 현실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선대하시기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확신할 수 있는 단서는 어디에 있을 까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선하게 인도하시고 여러분이 도움을 요청할 때 선하게 인도하시리라는 확신을 어디애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여로보암은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는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리라는 생각을 했지만 아니었습니다. 자기만을 아는 사람은 남들이 자신을 좋게 생각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타인들이 안 좋은 평가를 하면 화를 내고 그 사람이 나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자기는 더 나쁜 존재일수도 있습니다. 전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부당하게 대우받아야할 일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제가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은 타인이 나를 부당하게 생각하고 나쁜 평가를 내리고 기도했던 대로 주님께서 응답해 주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분명 나에게 무엇인가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로보암의 삶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하나님의 간절한 기대에는 전혀 요지부동한 내 자신이라는 사실입니다. 거기에다가 육신적이고 죄까지 짓고 세상을 사랑하는 은혜를 저버리는 더럽고 냉정한 자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부당하게 대하실까?’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십시오.
여로보암은 자기가 하나님께 행했던 악행들은 한 가지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파송했던 선지자를 잔혹하게 대우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왕들도 있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선지자를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일을 하나님 앞에서 내세우려는 태도입니다. 여로보암은 우상을 만들어 경배했고 바알을 위해서 산당을 짓고 분향했습니다. 마귀의 형상을 만들어서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백성들을 속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과거에 혹시 한 가지라도 헌신했던 부분이나 열매들을 가지고 자랑하듯이 여기며 그것이 자신의 모든 삶인 양 내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잘 드리러 이곳에 모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도리어 더 부족한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 더 부족하고 잘못된 부분이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한 가지만을 보면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잃어버린 혼들에게 복음을 잘 증거 한다면, 기도하는 생활은 잘 되고 있는지, 그것들이 잘되고 있다면 말씀을 공부하라는 명령은 순종하는지 더 부족한 모습은 없는지 끊임없이 살펴서 변화해 가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대우와 은혜를 받을 최소한의 자격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이 전부가 되어서 주님의 뜻이 아니면 우리의 사람은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무조건이지만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기는 악하고 게으르면서 좋은 것만을 받으려는 태도는 더 악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비천하게 대하면서 자기는 존귀하게 여겨달라고 바라는 것은 가증한 죄악입니다. 3. 인생의 문제들을 통해서 더 중요한 가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여로보암은 아내를 변장시켰습니다. 선지자 아히야는 연로하여 눈이 어두워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선물을 가져져가게 했습니다.
“그대는 빵 열 덩이와 과자와 꿀 한 병을 가지고 그에게 가라. 그가 그대에게 이 아이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해 주리라.” 하니”(14:3).
이곳 자기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을 때 외에는 어느 곳에도 여로보암이 선지자를 찾았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그의 관심은 오직 죽어가는 아들이 살아날 수 있는 목적만이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여로보암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오로지 아이였습니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것들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것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다 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보편적인 인간의 이기심입니다. 자기중심은 일반적인 가치관입니다.
육신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힌 사람의 특징입니다. 여로보암은 왕으로서 더 중요한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배고픔과 부당한 대우에 신음하며 죽어가는 백성들의 필요를 더 보살피고 안타까워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잘못된 인도로 영적으로 황폐하게 된 지경에 이른 비참한 앞날에 대해서 고뇌해야 할 때였습니다.
자기만 배부르고 편안하면 모든 문제는 없다는 식으로 사는 사람들. 우리가 그러합니다. 나와 내 식구들의 문제만 보입니다. 우리 교회의 문제만 해결되면 된다는 생각.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보는 눈이 점점 좁아집니다. 우리 자신만 죽어서 하늘에 가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삽니다. 왜 그럴까? 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찾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은 누구일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잘 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는 여러 개의 동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동네에 가면 가난한 사람들이 정부의 복지 혜택을 최대로 받고 삽니다. 그런데 어느 동에 가면 여전히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신음하며 아무런 도움을 받지도 못하고 어떻게 도움을 구해야 할지조차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국가의 녹을 먹고 일하는 복지과 공무원들이 직접 나아가서 필요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찾고 살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시간만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물질적인 위기가 왔다면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를 고민할 기회입니다. 여러분의 가족 가운데 아직 구원받지 못한 가족이 있다면 이 도시에 허다한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번 주에도 저는 동네를 한 바퀴씩 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 모른 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을 주관하는 어둠의 권세가 너무 엄청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들려주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동안 나는 참으로 악하고 무정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목회자이든 설교자이든 집사이든 그러한 타이틀이 복음을 전해야할 동기라면 위험합니다. 자신이 사회복지사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호소에 응답해야만 한다면 복지사가 아니면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119대원이기 때문에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해야 한다면 평범한 시민은 그냥 보고 지나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시민들이 복지사처럼 살아가고 119대원처럼 생각하고 경찰관처럼 행한다면 이 사회가 조금은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일이 아니면 나 몰라라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어서 지옥에 갈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만나고자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여러분은 선교사이며 설교자이며 그리스도의 대사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공포스런 적그리스도의 세상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자기 가족에게조차 그들의 영적인 필요를 주고자 고민하여 찾아가지 않고 있다면 여로보암을 손가락질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멸망할 백성들의 미래는 아랑곳 않고서 자기 아들만 살려 달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우롱하는 죄입니다.
“이 아이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해 주리라!” 이것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구한말 시대에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들 가운데 주님의 마음을 품고 순수한 동기로 왔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린니 데이비스라는 자매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믿음이 좋은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을 심방하여 돌보고 복음을 전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녀가 성장하여 조선 땅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헌신하려고 했는데, 그녀에게는 의지할 곳이 없는 연로한 홀어머니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머니를 남겨 놓고 혼자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어머니는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하는 외동딸의 간절한 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어머니가 데이비스를 불러서 말합니다.
‘데이시비스야! 너랑 나랑은 천국에서 만나면 되잖니, 네가 그 땅에 가서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내가 먼저 가 있는 하늘나라로 이끌고 오렴!’.
그래서 어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을 먼 곳으로 보내어 줍니다. 데이비스가 1895년 한국 서울에 도착하고서 9일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게 됩니다. 린니 데이비스가 고향을 떠난지 몇일이 못 되어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습니다.
린니 데이비스는 역시 선교사로 왔던 해리슨 선교사와 결혼을 해서 3명의 자녀를 낳았는데요, 그 아기들이 풍토병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고, 자기의 몸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전도 여행을 하다가 쓰러진 남편을 몇 해가 못가서 땅에 묻은 아픔을 겪으면서도 일생동안 어머니의 유언을 간직하며 많은 혼들을 돌보며 헌신하다가 그녀도 이 땅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리니 데이비스가 왜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더 중요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여로보암의 아들은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평가하시기를 여로보암의 아들 외에 모든 사람들은 무덤에 들어갈 가치조차 없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여로보암은 가장 중요한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했습니다. 눈 먼 선지자 아히야가 속아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일꾼을 마귀를 숭배하는 점쟁이쯤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선지자가 눈이 멀었다고 해서 하나님도 눈이 멀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을 속이면 하나님도 속인다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문제가 닥치면 먼저 자신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잘한 것을 크게 확대해서 보려고 하지 말고, 마땅히 징계 받고 연단 받아야 할 것이 무엇이었는지 살펴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연단과 징계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연단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더 유용하게 쓰임받기 위해서 성장하도록 허락되는 시험입니다. 그리고 징계는 잘못에 대한 댓가이며 바로잡음의 목적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과대평가도 과소평가도 다 헛됩니다. 있는 그대로 행한 그대로 악하거나 의롭거나 정직한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변장이나 가면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죄입니다. 문제를 더 야기시키는 꼴이고, 마귀에게 더 간교하게 이용당하게 될 뿐입니다.
여로보암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가장 악한 일을 범했으며 하나님을 등 뒤로 버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 죽으셨고 생명을 주신 분을 등 뒤로 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치 똥을 치워 버리듯이 완전히 치워버리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이 땅에서 그렇게 될 것입니다. 복음을 거절한 사람은 죽어서도 영원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루가 지나면서 해야 할 가장 소중한 결단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내일로 미루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는 성도는 이 세상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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