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양화진묘원· 선교사

★4-1.이화학당 설립자 메리 F. 스크랜톤 선교사

영국신사77 2008. 7. 25. 08:58

     ◇ 이화학당 설립자이며 여성교육의 선구자 메리 F. 스크랜톤 선교사 (1832-1909, 77세)


 

 양화진 제1묘역에는 이화학당(현 이화대학교) 설립자이며, 한국 여성교육의 선구자 메리 F. 스크랜톤(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1832-1909) 선교사 묘지가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 벨처타운에서 1832년 12월 9일 출생하여, 1855년 23세에 윌리암 T. 스크랜톤(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여 외아들을 낳았다.

 

 1872년 40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1884년 52세의 늦은 나이에 미국 감리회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여성 첫 선교사가 되었다.

 아들 윌리암 B. 스크랜톤과 함께,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의료선교사로 파송된 희귀한 역사’를 이룩하며 한국에 왔다.

 

 입국 경로는 1885년 2월 3일 53세에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2월 27일 일본에 도착, 잠시 머물었다가 그해 6월 20일 내한했다.

 1886년 5월 31일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당시 학생은 1명이었다. 김부인이라는 어느 고급관리의 작은댁으로 왕비의 통역관이 되려는 야심을 갖고 입학했으나 석 달을 못 채우고 학교를 떠났다. 그 후 ‘별단이’라는 학생이 입학했다. 1886년 11월에는 한옥 교사(校舍)를 완성하여 이사했다.

 1887년에는 학생수가 7명이 되어, 민비는 교육사업의 의의를 인정하고 정부가 승인한다는 의미에서 김윤식을 통하여 “梨花”라는 교명의 편액(扁額)을 하사했다.

 학생수가 늘면서 2층의 붉은 벽돌집을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으며, 스크랜톤 선교사를 대부인이라 호칭했다. 1908년 5월 31일에는 이화학당 초대 ‘메이 퀸’으로 추대되었다.

 이화학당은 표면적으로는 교육기관이었으나, 선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정동제일교회 초대 여성교인은 거의 이화학당 학생이었다. 상동교회에서 전도부인을 대상으로 단기 성경교육을 시작 한 것이 후일 협성신학교로 발전했다.

 1903년에는 수원 삼일학교(매향학교)를 설립하므로, 수원, 공주지역의 지방 선교활동이 시작되었다. 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여성들을 교육할 인력과 시설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여성 선교사업을 계획하고 이에 대한 인력을 지원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스크랜톤 대부인은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여성교육에 진력했다. 그의 저서(단행본)로는 《그리스도 셩교문답》《지구 약론》등이 있다.

 1909년 10월 8일 새벽 상동 자택에서 77세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사-7)되었다.

 “한국의 젊은 여성을 위한 사업(교육, 선교)의 선구자중 한사람이었다. 다년간 충실히 봉사하고 그가 선택한 한국에서 많은 좋은 일들의 향기와 기억을 남겼다.”고 에비슨 박사는 추모했다.

 비문에는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메리 스크렌톤 ( Mary Scranton) 선교사와 이화의 시작 
                                            
-원제:초기 조선 선교와 이화의 시작-

                                        닫혀 진 빗장을 열기위하여

 중국이 1840 년 아편전쟁의 패배로 외세에 문을 열었으며, 일본도 1854 년 페리 제독의 무력 앞에 문을 열게 되었지만, 우리 민족의 문은 굳게 닫혀져만 갔다. 조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던 토마스 ( Robert Thomas ) 선교사는 , 1866 년 , 평양 대동강에서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하였고, 같은 해 , 서울 한강에서는 , 병인양효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이 잠두봉(절두산) 에서 목이 잘라져 한강으로 내던져졌다. 이러한 쇄국정치는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는 길목을 막고 있었지만, 그 닫혀진 문을 열기위하여 중국과 일본에 들어와 계셨던 선교사님들은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고 계셨다.

 멕킨 타이어와 로스 선교사는 평양 대동강에서 이십 칠세의 나이로 꿈도 이루지 못하고 목 베임을 당한 ,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하여 , 중국 선교사로 왔지만, 우리 민족의 선교사로 일하셨다. 당시 압록강 넘어 , 고려 문에 장사하러 오는, 조선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전도하기 시작하였고, 그들과 함께 성경까지 번역 ( Ross 역 ) 하면서 조선 선교를 준비하셨다.

 일본에서도 신사유람단으로 갔던 이수정은 죠지 낙스 ( George Knox ) 선교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 일본에서도 성경을 번역 ( 이수정 역 - 마가복음 )하여 조선 선교를 준비하셨다. 조선 땅에 문만 열려지면 , 복음을 들고 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있었다. 드디어 1882 년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한영, 한불, 한독, 한러.... 외세에 문호가 열리게 되었고,


                                      조선을 향한 아름다운 발걸음

 조선 땅에 문호가 열렸다는 정보가 들려지자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들은 반응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땅에서 사역을 하고 계셨던 멕크레이 선교사는 1884 년 6월 직접 조선을 방문하여 고종황제에게 ‘의사’ 와 ‘ 언어선생 세 사람’ 을 보내달라는 두 가지 윤허를 받아내었다. 이제 조선 땅에 합법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윌리암 스크렌톤의 결심 
 이 정보가 오하이오주에서 병원 문을 열었던 한 젊은 의사에게 들려지게 되었다. 예일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의과대를 나와서 개업을 한 윌리암 스크렌톤 ( William Scranton )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와 부인 세 사람이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조선에 의사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 모든 것을 정리하고 조선 땅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화의 어머니 메리 스크렌톤 ( Mary Scranton) 선교사

 아들 윌리암 스크렌톤 내외가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을 때, 그들의 첫 번째 장벽은 쉰 살이 넘은 어머니였다. 선교사로 가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고, 홀어머니를 본국에 혼자 두고 간다는 것은  더 더욱 어려운 문제였다. 아들이 자신의 문제로 고심하는 것을 알고는 , 메리 스크렌톤 여사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 하나님 저도 조선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해 주세요 ”

 메리 스크렌톤 여사는  단지 아들가족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선교사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녀는 직접 여성 선교부를 찾아가서, 자기를 조선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요청은 참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것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였다. 하나님은 윌리암 스크렌톤 부부와 쉰 살이 넘은 어머니까지 조선 땅에 선교사로 오실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던 것이다.

                                                    조선에 도착하다

 그들은 망망한 대해, 태평양을 20 일 넘도록 항해하여 일본에 잠시 머문 후, 다시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근 한 달간의 긴 항해였다.

 

 스크렌톤은 1885 년 5 월 3 일에 먼저 들어왔고, 뒤를 이어 어머니와 부인은 6월 20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 스크렌톤 선교사 가족은 아펜젤러 가족과 언더우드 선교사의 바로 뒤를 이어 조선 땅을 밟은 초기 조선 개척 선교사가 되었다.



                                                   이화의 첫 학생

 당시 조정은 의료와 학교 외에 선교는 절대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 윌리암 스크렌톤 선교사는 , 9 월 10 일 정동병원을 개원하여 이름을 시병원이라고 이름 짓고 조선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님은 쉰 살이 넘어서 조선 땅을 밟았는데 , 근 일년 동안 한국 말을 배우면서 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에게 하나님은 길을 열어주셨다.

 

 아들 윌리암 스크렌톤이 시작한 병원에 첫 번째로 찾아 온 환자가 , 병들고 가난한 자기 집에서는 딸아이를 도저히 돌볼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님은 그 여자 아이를 집에 대려다가 돌보면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 1886 년 5 월 31 일 ) , 그 여학생이 바로 이화의 첫 학생이 된 것이다.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님은 후에 정동에 기와집을 얻어 학교를 시작하게 되었고, 고종 황제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 1887 년 2 월 )

                                               이화여대 출신 선교사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의 작은 기와집에서 시작한 이화는 100 년을 훨씬 넘겼다. 이 역사의 뒤안길을 돌아보면, 이화는 미션스쿨의 정신을 이어받아 수많은 선교사를 배출하였다.

 

 해방 후에 김활란 총장이 중심이 되어 이화여대에 선교운동이 시작되었고, 전재옥 선교사를 포함한 세분의 선교사가 선두 주자로 파키스탄에 파송되었고, 그 바톤을 이어받은 수많은 이화여대 출신 선교사가 세계 곳곳에 파송되었다.

 얼마 전, 나는 이대기독연합회 2004 년 2 학기 연합예배에 말씀으로 섬기고 온 적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지구촌 곳곳에 나가서 사역할 또 다른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를 보고 왔다.

 

 지금 이화여대에는 선교의 마지막 주자들이 준비하고 있다. 그들의 삶을 통해서 일하실 하나님을 기대한다.

  * 이 글은 2004 년 9 월 이화여대 기독교연합회 모임에서 전했던 메세지입니다.

2004-10-16 22:5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