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풍 목사 아내인 윤함애 사모가 딸 이사례 권사에게 남긴 유언
선교 기념관 상징 탑
이기풍 목사 제주 선교 기념관
이기풍 선교관은 1만6백여 평의 대지에 연건평 2천여 평의 규모로 동시에 2백50명이 숙식을 할 수 있는 숙소동을 비롯해 4백20석의 대예배실, 50석의 소예배실, 40석과 20석 규모의 회의실을 등을 갖춘 예배동과 식당과 사무실 등을 갖춘 사무동이 자리잡고 있다. 이밖에도 부대시설로서 캠프파이어를 할 수 있는 야외집회장과 등산로 등을 갖추고 있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추었다. 98년 5월에 개관한 기념관은 제주도의 자연석으로 건축 해발 4백고지에 위치, 수목이 수려한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리는 '자연친화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북제주군에서는 우수건축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고 이기풍 목사의 선교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잇는 전시실도 예배동 내에 마련하고 있다. 선교 한국 역사 자료와 함께 이기풍 목사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해서 전시하고 있는 이 전시실에는 10대 총회장을 지낸 이 목사가 고퇴를 들고 있는 기념사진이 눈길을 끈다. 이 자료는 이 목사의 막내딸인 이사례 권사가 기념관에 기증한 것이며, 이 사진을 이용해 이목사가 세운 성안교회에서 만든 기념패도 귀한 자료로 소개된다. 이밖에도 각종 기념 사진과 자료들을 수집 전시하고 있다. 특히 이 전시관과 관련 광주에 있는 이목사의 묘지를 이장할 계획도 세우고 있어, 이 목사의 선교정신과 순교신앙을 한자리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기념관 입구에서 만날 수 있는 '이기풍목사 선교기념비'도 있다. 제주도 고유의 돌로 세운 이 기념비에는 "이기풍목사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최초 일곱 목사 중 한 분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제주선교사로 마태복음 4장15-16절 말씀에 사로잡혀 제주가 동양의 예루살렘이 되는 것을 꿈꾸며 1908년부터 1915년까지, 1927년부터 1932년까지 제주선교에 헌신하였다. 이 기간동안 이기풍목사와 동역자들이 제주성안교회를 비롯하여 금성 삼양 조천 성읍 모슬포 용수 한림 세화교회를 설립하면서 제주복음화의 초석을 닦았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이제 제주에 복음의 빛을 비추어 주신 성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기풍목사의 선교와 순교정신을 기리며, 새로운 세기에 제주복음화와 세계선교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고 신앙 후손들의 뜻을 새겨 놓았다.
이기풍 목사가 세운 교회들
이기풍목사는 또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로서 제주도에 복음의 씨앗을 뿌린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나 그가 우학리교회라고 하는 남해안 작은 섬마을 교회에서 목회했으며, 이곳에서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순교를 당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다. 행정구역으로는 전라남도 여천군 남면 우학리 233번지. 여수항여객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1시간 여 들어가면 그림처럼 다가오는 섬, 금오도(金鰲島). 교통이 발달된 지금도 서울서 열차로 꼬박 6시간이 걸렸고다시 하루 네차례밖에 다니지 않는 배를 1시간이나 타야만 닿을 수 있는 땅이다. 일제의 수탈이 기승을 부리던 1908년. 그해 4월 우학리의 몇몇 사람들은 당시 제당(祭堂)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예배당을 지었고 1925년에는 길선주목사를 모시고 사경회를 개최했으며, 유치원도 운영하는 등 교회는 날로 부흥했다. 1908년 서울이나 「뭍」의 어느 도시가 아니고 뱃길 먼 작은 섬에 교회가 세워지고 날로 부흥했다고 하는 사실은 새삼 놀라운 사실이 아닐수 없다. 주민 4백여 명에 지나지 않지만 9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우학리교회(이해석목사)에는 지금도 매주일이면 1백30명이 넘는 교인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 주일학교 학생까지 합하면 교인은 2백여 명에 이른다.마을 주민의 50퍼센트가 이 교회 교인인 셈이다. 이 교회에는 공개되지 않은 몇가지 자료들이 있다. 931년부터 기록된 당회록과 이기풍목사가 시무할 당시 사용했던 「양은」으로 만들어진성찬기들이 그것이다. 당시 순천노회 변요한목사가 소장하고 있다가 교회에 모내온 떡그릇과포도주잔, 잔받침 등 빛바랜 모습들이 세월이 흐름을 소리없이 말하고있다. 당시 당회록에는 이기풍목사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여러군데 있는데, 이 당회록을 통해 이기풍목사에 대해 이제까지잘못 알려진 부분도 드러나 교회사가들의 관심도 끌 것으로 예상된다. 이기풍목사는 칠순이 넘는 노구를 이끌고 1934년 아무도 가기를 싫어했던 이 곳 섬마을로 들어와 복음을 전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맞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였던 이기풍목사는 과로와 고문으로 1942년 6월 20일 별세했다. 이기풍목사의 시신은 그가 마지막으로 시무했던 우학리교회가 내려다 보이는 마을 공동묘지에 안장됐으나, 1953년5월 9일 광주기독묘지에 이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교문사 刊 기독교대백과사전)그러나 이 교회 당회록은 1955년 4월24일 주일에 기기풍목사를 이장하기로 결의했다고 적고 있다. 물론 당회록에는 이기풍목사의 부임에서 취임, 세례집전 등 자세한 목회 활동상황들을 세세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우학리교회가 작성한 연혁은 이렇게 적고 이싸. 『1937년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며 대한민국 초대 목사인 이기풍목사 시무(당시70세).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수차례에 걸쳐 여수경찰서에서 심문을 당하시고 유치장에 수감되었다가 병고로 일시 출감. 1942년 6월 20일 75세로 우학리에서 소천. 1955년 4월 24일 이장.』당시 묘지를 이장하는 일을 직접 담당했던 오모집사는 『당시 아내가임신중이었으며, 그 때 낳은 아들이 만으로 마흔두 살이어서 그 때 일은 잊을 수가 없다』고 증언했다. 당회록을 소장하고 있는 명충길장로(남면 부면장)는 『당시 노회에서우학리교회는 그 역사가 오랜만큼 당회록의 보관도 중요하니 책임있게 보관하라는 지시가 있었다.』며 당회록을 소중하게 보관해온 지난날을 회고했다. 한편, 우학리교회에서 44년동안 장로로 시무했던 김정우장로는 이기풍목사의 알려지지 않은 또 한 장의 사진을 공개해주었다. 순천시 낙안교회에서 있었던 결혼식에서 이기풍목사가 주례를 한 것으로 짐작되는이 사진ㅇㅇ서 이기풍목사는 깊게 패인 눈으로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지금의 우학리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측에 속해 있다. 한국교회분열사는 작은 섬마을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장로교회가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분열되면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 교회는 합동측을 택했으며, 이후 합동보수로 다시 개혁측으로 교단 소속을 달리했다. 1925년 중국인들이 벽돌을 구워 지었다는 교회당, 이기풍목사와 그 교인들이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온몸으로 거부했던 당시의 교회는 교인들이 불어나면서 이들을 수용하지 못해 헐고 1976년 지금의 건물로 새로 지었다.
제주 성내교회(이기풍 목사 최초교회)
성내교회 내 기념비
2007 아라동에 새로 건축한 100주년 기념 성안교회 투시도
1908년 3월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 목사는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9월 조선 독노회에 '원입교인 9명, 회집교인 20명, 제주 토박이 김홍련이 전도인으로 자청하였다'라고 보고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렇게 세워진 제주도 최초의 교회가 성안 교회였다. 성안교회는 계속 발전하여 1984년 선교 100주년 기념과 교회창립 76주년을 기념하여 이기풍 목사 선교 기념비를 세웠다.
이기풍 목사의 선교 초기 중심교회이자 제주 최초의 교회인 제주성안교회 뜰에는 이기풍 목사 선교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이 목사의 일대기가 자세히 기록된 선교기념비는 1984년 교회창립 76주년을 맞아 성도들이 직접 세운 것으로 제주선교역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최초 일곱 목사 중 한 명인 이기풍 목사는 13년 동안 제주선교에 헌신하며 제주성안교회를 비롯해 삼양 내도 금성 등 10여 개의 교회를 설립, 제주복음화의 초석을 닦았다. 하지만 일제가 강요한 신사 참배를 앞장서서 거부하다가 투옥되어 고문 끝에 77세의 일기로 순교했다
성읍교회, 1909년에 이기풍 목사가 설립한 교회이다
제주 금성교회, 1923년 건축된 구교회이다. 금성교회 1908년 이기풍 목사가 처음으로 순회예배를 드리고 사역하던 교회로 1907.3. 조봉호 전도사에 의해 전도된 이도종, 양석봉 성도 등 8명애 의해 첫 예배를 드린 제주 최초의 교회이다
금성교회 현재 모습, 1994년에 신축 되었다
이기풍 목사가 개척한 서귀포 법환교회의 신축된 교회 모습, 월드컵기념교회로 지워졌다
이기풍 목사
이기풍 목사는 1865년 평양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1883년까지 개인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괄괄한 성격으로 싸움과 술을 좋아해서 젊을 날을 허송세월하면서 서양선교사들을 박해했다. 특히 그는 1890년 어느날 평양서문통 네거리에서 노방전도를 하던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크게 다치게 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원산으로 피난을 했다. 원산에서도 그는 신자들을 박해하는 등 못된 짓을 골라했다. 그러던 차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전군보라는 전도인의 전도를 받고는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며 기독교인이 되기를 결심한 것이다. 그후에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지난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여 용서를 구했다. 1894년 그는 슬왈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했다.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매서인으로 함경남북도를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했다. 이어 1902년 부터 1907년까지는 황핼 안악,문화, 신천, 해주 등지를 도며 조사로 시무했다. 한편 이때 마펫 목사의 권고를 받고 1903년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길선주,양천백 등과 함께 최연소자 신학생으로 입학하여 학업에 열중했다. 그가 졸업하던 해에 독노회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서경조,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방기창, 송린서 등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안수를 받은 이기풍 목사는 이 독노회의 결의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임명되어 제주도로 떠났다. 부인 윤씨와 함께 인천항을 출발하여 목포를 경유해 제주도를 가려고 했다. 목포에 도착해 보니 마침 풍랑 너무 심하여 목포에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제주도를 향해 떠나 난항을 거듭한 끝에 1908년 봄에야 제주도에 도착했다. 한편 그의 부인 윤씨는 선교사 이길함의 양녀이며 숭의여학고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로서는 엘리트 여성이었다. 한편 이때는 이미 정부가 기독교의 선교를 허락한 때이었지만 1899년의 신축교난으로 제주도 주민들이 기독교에 대해 갖은 편견은 여전히 가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수차례 주민들의 위협을 당해야 함을 물론이고 굶주림과 생활고까지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직 복음 전파에만 전심전력을 다했다. 뒤이어 총회에서는 그를 돕기위해 전도인 이관선 김홍련을 제주도 선교는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11년 10월 전라노회에가 결성되어 제주도는 1912년부터 전라노회 관할이 되었다. 이기풍 일행은 주민들의 온갖 핍박과 방해공작 속에서도 성내교회를 비롯삼양 내도 금성 한림 협제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 1918년 그는 전라노회의 부름에 따라 광주 북문안교회 초대목사로 전임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초창기 교회발전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한편 그는 1920년 전라노회장 및 총회 부총회장에 1921년 제10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막중한 책임과 왕성한 활동중에 그는 신병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성대가 막혀서 말이 작 나오지 않는가 하면 관절염, 귀병 등으로 심한 고생을 하게되었다. 그래서 일단 목회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와 요양을 하기도 했다. 1923년 그는 다시 전남 순천교회 목사로 청빙을 받아 부임했고 1924년 고흥교회로 전임되었고 1927년 다시 제주도 성내교회 위임목사로 청빙되어 재차 부임하였다. 1913년에는 전남 벌교교회로 파송되었고 1934년에는 그는 칠순의 노구를 이끌고 아무도 가기 싫어하는 도서벽지 여수군 남면 우학리에라는 작은 섬에 복음을 전파하려 들어갔다. 이외에도 이기풍은 돌산 완도 등지의 도서지방으로 순회 전도하면서 교회개척에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의 치하에서 민족교회가 심한 박해와 시련을 겪을 때에는 과감히 일제에 대항하여 교회를 굳건히 지켰다. 이러던 중 1936년을 기점으로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 그는 이에 정면으로 맞서서 극력 반대했다. 이에 일제는 그에게 미제의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순천노회 산하 오석주,나덕환,김 상두, 김순배 목사등과 함께 1938년 체포당했다. 칠순의 노구를 지탱하기도 힘든데다 일경의 심한 취조와 고문은 그에게는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광주형무소로 압송되기전에 졸도하여 벙보석으로 출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기풍은 과로와 고문등으로 이미 건강이 심히 악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칠순의 나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회복되기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의 마지막 사역지인 우학리 교회 사택에서 1942년 6월 20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했다. 그의 유해는 우학리에 안장되었다. 그러다 11년 후인 1953년 전남노회 주선으로 광주 기독묘지에 이장되었으며,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4회 총회에서는 그의 부인 윤씨에게 표창을 주었다. 1962년 12월 25일 신여성으로서 평생 이기풍 목사의 성역을 도와 헌신한 부인 윤씨도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딸 하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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