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聖地 · 선교사/1.國內 성지순례歷史교회文化탐방

강화 교산교회, 김상임 전도사

영국신사77 2008. 7. 23. 01:49

강화 교산교회, 존스 기념예배당과 옛 교회 (박물관 예정)

 

강화 지역에 예수의 복음이 전래되고 교회가 선 것은 대한 감리교의 모교회 격인 인천 내리교회에 의해서였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상륙하자 인천 내리교회를 세워 놓았고, 1892년에 그의 후임으로 존스(G.H.Jones 조원시 趙元時 1988.5.9 서울도착) 목사가 부임해 왔다. 존스 목사는 내리교회에 부임하자 인접 도서인 강화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그 즉시 실천에 옮겨 강화 선교를 시작했으나, 강화 관.민의 냉대로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 내리 교회 안에서는 전도의 방편으로 장조계를 조직한 바 있었으나 얼마 안 가서 계도 실패하고 교인도 잃고 말았다고 한다. 50명의 계원중 유독 이승환이라는 성도 한 사람만이 남아 계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 이승환 성도는 강화 서사(양사)출신으로 제물포에 가서 술집을 경영하면서 내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다 보니 강화 고향에 있는 이승환의 어머니도 이들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되고, 믿음이 생기자 존스 목사에게 세례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강화 선교의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존스 목사는 한복으로 변장하고 야음을 이용해 또 다시 강화에 올 수 있었다. 우선 서사 뒤쪽에 배를 정박하고 사람을 동리로 보내 정탐케 했다. 그러나 동리에 들어와 세례식을 행한다면 그 집을 불사르고 큰 봉변을 당하리라는 제보였다. 소요를 원치 않았던 존스 목사는 이승환 성도에게 노모를 배로 안내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아들은 어머니를 업고 상당한 거리의 개펄을 건너 존스 목사의 배에 올랐다. 마침 달밤이라 달빛을 이용해 예문을 읽어가면서 무사히 세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선교초기의 선상 세례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강화도에 최초의 복음의 씨가 떨어진 것 이다. 그 후 이승환 성도는 제물포의 술집을 정리하고, 고향 양사로 돌아와 보다 건전한 직업인 농사일을 하면서 전도에 힘썼다. 존스 목사는 가오하 양사를 당시 제물포교회와 함께 2대 선교 거점으로 보고 1893년 가을 이명숙 전도사를 강화 담당자로 파송하였다. 초기에는 교인 4-5명이 모여 이승환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가정교회로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자 교인은 즉시 배로 증가해 10여명에 이르렀다. 이제는 하나의 어엿한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1893년 말에는 존스와 스크랜톤(W.B.Screanton, 시란돈 施蘭敦) 두 선교사가 이미 강화교산교회에 와서 유숙한 바 있고, 내리교회 백헬란 전도사는 6차례에 걸쳐 10주간을 머물면서 강화 전도에 힘쓰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강화교산교회는 1893년을 교회 창립원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창립된 다음 해인 1894년에는 이미 교항리에 초가 12간을 구입해 교회를 이전하게 되었다. 이승환씨는 그후 매서인이 되어 전도에 힘쓰다가 1898년에는 아펜젤러 목사로부터 강화 교산교회 계삭회 소속으로 권사 직분을 받는다. 술집 주인 이승환이 변하여 어엿한 권사님으로 존경받게 된 것이다. 이승환 권사는 더욱 전도에 열중했다. 주로 강화, 인천, 옹진지역을 중심으로 전도하다가 1901년 이후부터는 주로 영종, 삼목, 용유등 인근 도서를 돌면서 몇 개의 교회를 세운다음 1908년경에 영국 성서공회를 통해 이민해 가고 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하튼 강화 지역 교회들은 이승환 권사를 통해 복음이 최초로 전래되었다는 데서 그의 공로를 오래도록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존스 기념예배당과 옛 교회 (박물관 예정)

 

창립 110주년 존스기념 예배당

 

창립 110주년 존스기념 예배당

 

창립 110주년 존스기념 예배당 봉헌예배

 

구 교회

 

구 교회

 

구 교회

 

옛 교회  종탑

 

구 교회 내부

 

김상임 전도사 공덕비      

 

강화의 양반 중 선상세례의 과정에 감명을 받은 이가 있었다. 벼슬을 하지 않고 초시 신분으로 교항(현 교산)에 서당을 차려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던 김상임이 바로 그다. 김초시는 이승환 모자에 대한 존스 선교사의 사려 깊은 행동을 본 이후 한문성경을 전해받고 읽은 가운데, 자신이 찾던 ‘정감록’의 ‘십승지지’란 주요 비결이 바로 성경의 ‘십자가지도’ 임을 깨닫고 개종을 결심한다. 이후 김상임이 마을의 가신과 산당을 불사르고, 말씀 공부에 집중한 결과 교산교회 신앙공동체의 교인 수가 급증하게 된다. 서민층 일색이던 신앙공동체에 양반층이 합세하며 강화교산교회는 복음을 전 지역으로 확산시키게 된다. 김상임은 존스 선교사의 배려로 인천의 신학회와 평양의 신학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02년 4월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감리회의 한국인 3대 목사후보가 됐으나, 목사안수를 몇 달 앞두고 전염병이 창궐한 마을의 심방을 갖다가 감염돼 55세를 일기로 소천한다. 이후 교산교회 성도들은 김상임을 강화의 바울로 부르며 그의 신앙의 길을 따르며, 연이어 홍의교회(1896)를 거쳐 고부교회(1897) 상도교회(1899) 등 강화 전 지역의 교회개척을 위해 헌신하며 강화 어머니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게 됐다.

 

김상임 전도사 공덕비  후면  

 

 

교회내부

 

교회내부 제단

 

교산교회 역사 전시실 (교회현관)

 

1917년

 

강화군 교산리교회 역사, 1917.5. 박봉래 목사 편찬  

 

 강화군 교산리교회 역사, 1917.5. 박봉래 목사 편찬

 

1925년 교적부 

 

1943년

 

1943년

 

1950년 교적부 

 

1950년 당회록

 

1952년 교회일지 

 

1962년

 

1967년

 

1967년

 

1968년 

 

리브가 권사

 

1939년 개역성경

 

역대 담임목사

 

역대 담임목사 

 

교회 100년사  

 

김상임 전도사         

 

깅화중앙교회 역사자료관에 가면 강화선교의 개척자인 김상임전도사 사진을  볼 수 있다. 이는 최초로 공개된 귀중한 자료이다.

이은용장로의 노고로 김상임전도사의 손자인 김예기목사께서 기증하신 사진이라고 한다

 

김상임 전도사 묘

 

김상임 전도사 생가, 현재는 직계자손이 살고있다.    (출처- http://cafe.daum.net/coreasan1)

 

교항교회 (현 교산교회)에 김상임 전도사가 자기 집과 토지를 바친 문서 (강화중앙교회 역사자료관)

 

교항교회 (현 교산교회)에 김상임 전도사가 자기 집과 토지를 바친 문서 (강화중앙교회 역사자료관) 

 

존스 선교사 (조원시 선교사)

 

조원시 목사의 노년기 모습

 

김찬희 박사가 입수, 지난 7월18일 인천내리교회에서 열린 '내리교회 창립 12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공개 했다.

 

조원시 (존스) 선교사 흉상, 인천 내리교회

 

조원시 (존스) 목사는 1888년 5월에 약관 20세의 나이로 선교사로 내한하여 약 5년간 배재학당에서 교편도 잡고 문서출판 사업도 하다가 1892년부터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아펜젤러가 선교의 터를 닦았다면 조원시 목사는 그 터 위에 전도와 교육 전반에 걸쳐 괄목할만한 업적을 쌓은 내리의 아버지라 할만한 분이다. 그는 1892년에 한국 최초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개설했고 강화, 연안, 해주, 남양 지방에 전도를 시작했고 1894년에는 한국인 자력으로 교회당을 건축 봉헌했으며 한국 최초의 신학회를 조직하여 이동신학교를 개설했고 1901년 성탄절에는 내동 현 위치에 십자가형 벽돌 예배당을지었고 교인 다수가 하와이로 이민함에 따라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에 파송하기도 했다. 한국 교회 찬송가 보급에도 공한한 그는 그 후 서울에서 신학월보를 창간하고 The Korea Review를 편집발간하였고 서울 YMCA 창립에 공헌했으며 1905년에는 초대 신학당 (현 감신대) 당장에 취임하였다. 조원시 목사는 1919년 5월 뉴욕에서 51세로 별세했다.

 

조원시 (존스) 선교사 흉상, 인천 내리교회

 

강화 지역에 예수의 복음이 전래되고 교회가 선 것은 대한 감리교의 모교회 격인 인천 내리교회에 의해서였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상륙하자 인천 내리교회를 세워 놓았고, 1892년에 그의 후임으로 존스(G.H.Jones 조원시 趙元時 1988.5.9 서울도착) 목사가 부임해 왔다. 존스 목사는 내리교회에 부임하자 인접 도서인 강화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그 즉시 실천에 옮겨 강화 선교를 시작했으나, 강화 관.민의 냉대로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 내리 교회 안에서는 전도의 방편으로 장조계를 조직한 바 있었으나 얼마 안 가서 계도 실패하고 교인도 잃고 말았다고 한다. 50명의 계원중 유독 이승환이라는 성도 한 사람만이 남아 계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 이승환 성도는 강화 서사(양사)출신으로 제물포에 가서 술집을 경영하면서 내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다 보니 강화 고향에 있는 이승환의 어머니도 이들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되고, 믿음이 생기자 존스 목사에게 세례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강화 선교의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존스 목사는 한복으로 변장하고 야음을 이용해 또 다시 강화에 올 수 있었다. 우선 서사 뒤쪽에 배를 정박하고 사람을 동리로 보내 정탐케 했다. 그러나 동리에 들어와 세례식을 행한다면 그 집을 불사르고 큰 봉변을 당하리라는 제보였다. 소요를 원치 않았던 존스 목사는 이승환 성도에게 노모를 배로 안내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아들은 어머니를 업고 상당한 거리의 개펄을 건너 존스 목사의 배에 올랐다. 마침 달밤이라 달빛을 이용해 예문을 읽어가면서 무사히 세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선교초기의 선상 세례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강화도에 최초의 복음의 씨가 떨어진 것 이다. 그 후 이승환 성도는 제물포의 술집을 정리하고, 고향 양사로 돌아와 보다 건전한 직업인 농사일을 하면서 전도에 힘썼다. 존스 목사는 가오하 양사를 당시 제물포교회와 함께 2대 선교 거점으로 보고 1893년 가을 이명숙 전도사를 강화 담당자로 파송하였다. 초기에는 교인 4-5명이 모여 이승환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가정교회로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자 교인은 즉시 배로 증가해 10여명에 이르렀다. 이제는 하나의 어엿한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1893년 말에는 존스와 스크랜톤(W.B.Screanton, 시란돈 施蘭敦) 두 선교사가 이미 강화교산교회에 와서 유숙한 바 있고, 내리교회 백헬란 전도사는 6차례에 걸쳐 10주간을 머물면서 강화 전도에 힘쓰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강화교산교회는 1893년을 교회 창립원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조원시 (존스) 선교사 흉상, 인천 내리교회  

 

존스 선교사 (조원시 선교사) 가족, 1895년 출생한 장녀 캐서린과 부부  

(출처- http://cafe.daum.net/coreasan1)

 

 1905년 하와이 이민을 방문한 존스 목사내외

 

존스 목사의 부인인 벵겔선교사로 인천 영화여학교 설립자이다.

 

존스 목사의 부인인 벵겔선교사 82세때 모습

 

선상세례가 있었던 장소     (출처- http://www.kyosan.zc.bz/)

 

미 감리회 소속으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다음으로 한국을 찾은 존스 선교사는 제물포지방 감리사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에 능통하여 한국어사전 편찬, 한국 역사와 문학, 철학과 종교 분야에 관해서도 깊이 있는 저술을 남겼다. 강화지방 선교역사는 존스 선교사와 함께 그에게 복음을 전파 받은 강화 출신의 주막집 주인 이승환과 관련된다. 본인의 직업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세례를 받지 못하던 이승환이 존스에게 강화에 살고 있는 모친의 세례를 부탁했던 것. 지역 유림들의 반대로 존스 선교사가 강화에 들어오지 못하자, 갯벌에 정박 중인 배에서 한국 옷을 입고 기다리던 존스에게 한 밤 중에 모친을 등에 업고 찾아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승환과 모친이 함께 세례를 받게 된다. 이 장면을 헤스(M.Hess)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기독교를 미워하는 주민들의 난폭한 반대로 세례예식은 마을에서 거행되지 못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존스 박사가 배에서 기다리고 있는 해안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은빛 찬란한 달밤에 한 노파의 기쁨의 잔이 넘쳤으니, 이는 죄 씻음 받은 기쁨의 잔이었다. 그녀는 강화의 겨자씨로 불리었다.”

 

선상세례가 있었던 장소

 

강화 복음의 씨앗이 되는 이승환의 집터

 

제물포에서 믿기 시작하여 고향인 서사면 증산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존스에게 선상세례를 받은 이승환은 과연 강화 선교의 '발판'이었다. 존스는 아직은 선교사에게 문을 열지 않는 강화에 제물포교인 이명숙을 전도인으로 삼아 파송하였으며, 이명숙은 증산동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강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강화의 첫 감리교 신앙 공동체가 탄생되었다. 바로 이것이 '서사교회'(西寺敎會), '교항교회'(橋項敎會),'교산교회'(橋山敎會),'양사중앙교회'(兩寺中央敎會),등으로 불리다가 현재 '강화교산교회'(江華橋山敎會)로 불리는 강화 첫 감리교회의 시작이다.  

 

 강화 복음의 씨앗이 되는 이승환의 집터

 

교산교회 두번째 예배당 터, 김상임 전도사 생가 인근이다.

 

교산교회 두번째 예배당 터 

 

강화 기독교 선교역사


보편적으로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그러했지만 특히 강화의 경우에는 복음의 수용과 전파과정에서 강화 토착인들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외지의 선교사나 전도인들이 불모지 강화에 나타나 복음을 전해서 교회가 설립되기보다는, 강화 사람이 외지에 나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고향을 복음화시키려는 의지에서 복음 전도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감리교회의 강화 선교 개척


한국 교회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기독교 복음이 만나서 이루어진 역사다. 민족의 역사 전통과 교회의 역사 전통이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역사 전통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기독교(개신교) 복음을 받아들인 19세기 말은 민족의 시련과 수난기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 이러한 민족의 시련과 수난의 역사를 뼈저리게 체험했던 강화에서 기독교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강화 기독교(개신교) 복음 선교는 거의 같은 시기에 성공회와 감리교에 의해 개척되었다.성공회의 강화 선교는 1893년 7월에 워너 신부가 갑곶나루에 거처를 마련하고 고아들을 모아 가르친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강화에 있던 조선수사해방학당 교수로 영국인 교관들이 와서 활동하고 있어서 영국성공회 선교사들이 관청과 주민들로부터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20여년전, 신미양요를 통해 미국인들과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던 강화 사람들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강화의 감리교 선교는 선교사들이 아닌, 토착 교인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도 가오하의 정치. 문화.행정 중심이었던 강화읍에서 시작되지 않고 강화 변두리, 서북해안 작은 마을 시루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강화 선교는 급속한 속도로 강화 전역에 확산되었으니, 강화 초기 교인들의 적극적인 복음 수용과 전도활동의 결과였다.


1. 미감리회의 강화 선교

<江都誌>는 강화 감리교회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西曆 一千百九十八年에 合衆國 宣敎師 趙元時君이 自甲串津으로 至南門하니 守門將이 抗拒不人하는지라 回程하야 本都 東北沿岸으로 船行하야 到西寺面 橋項洞하야 金氏家族의게 傳道하야 該地에 敎會堂을 創立하고 敎務를 梢梢壙張하니 東으로 月串, 南으로 砂器里, 東幕, 西으로 注文島까지 敎旗가 遍揚하니라"

연도나 구체적 사건 서술은 교정 되어야 하지만 이 진술은 강화 감리교회 시작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첫째, 미감리회의 존스 선교사가 처음에는 갑곶을 통해 강화읍으로 바로 들어가려 했으나 지방 행정당국의 저지를 받고 실패 했다는점, 둘째, 결국 강화 선교는 강화읍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북쪽에 위치한 서사면 교항동에서 시작되어 그곳으로부터 남쪽으로 확산되었다는 점, 셋째, 교항동의 '김씨 가족'으로 불리는 토착 교인의 개종과 입교로 강화 선교가 가능했다는 점 등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강화 선교는 선교사들의 입성과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강화 북부 토착 교인의 입교와 전도활동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 선교의 시작이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복음 수용과 전도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그러한 대표적인 예를 강화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같은 사실은 선교사들의 강화 접근 실패 과정과 함께 강화 토착 교인 출현 과정을 살펴보면 확인된다. 강화를 한국성공회의 '이오나'로 삼고자 강화에 강력한 선교단을 파송했던 영국성공회는 이미 1893년 봄에 코프 주교가 강화를 방문하고 선교가능성을 파악한 후 그해 7월에 워너 신부를 갑곶나루에 정착시켰다. 같은 무렵 미감리회에서도 강화 선교 가능성을 모색하며 인천과 서울을 왕래하는 뱃길 중에 강화를 방문하였다. 특히 1892년 8월에 열린 미감리회 한국선교회 연회에서 인천(제물포)구역 담임으로 임명받고 인천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서해안 선교에 착수한 존스(G.H.Jones)는 이미 노병일, 김기범, 이명숙, 백헬렌 등 한국인 전도자들에 의해 마련된 선교 터전을 바탕으로 하여 그 영역을 넓혀갔다. 그 과정에서 강화는 그의 강력한 선교개척 희망지역이었다. 당시 한국 선교를 관리하고 있던 스크랜튼은 이미 1892년 말 이전에 존스가 강화 여행을 시도 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스크랜튼이 본국에 보낸 1892년 12월 21일자 서한이다.  "존스 형제는 최근에 제물포로 여행하면서 강화에 들렀습니다. 강화는 [한]강어구에 있는 큰 섬입니다. 그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강화는 80평방마일 되는 곳에 인구 7만이 살고 있습니다. 이 섬은 선교사들에겐 처녀지(Virgin Soil)입니다." 그렇다면 존스의 1차 강화방문은 1892년 12월 21일 이전에 이루어 졌다는 말이다. 스크랜튼이 '최근에'(recently)라는 말을 쓴 것으로 미루어 1892년 11-12월 경에 이 여행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존스의 여행보고를 바탕으로 해서 스크래는은 미국 선교본부에 1893년 선교보고 상황을 써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전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물포와] 이웃해 있는 섬인 강화에는 7만명 주민이 있는데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강화를 얻게만 된다면 우리에겐 값진 보화가 될 것입니다. 사실 발판은 이미 얻어 놓았습니다."  여기서 스크랜튼이 말한 '발판'(a Foothold)이 정확하게 무었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선교기지 확보를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으나 나름대로 강화선교 가능성에 대한 확실한 담보를 얻었음을 암시한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이 '발판'이 바로 서사면의 '토착 교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존스는 이미 1892년 12월 이전에 강화 여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여행이 곧바로 강화선교와 연결되었다는 흔적은 찻아볼 수 없다. 오히려 앞서 <江都誌>에서 언급했던 바, "趙元時君이 自甲串津으로 至南門하니 守門將이 抗拒不人하는지라"는 선교사 입성 거절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존스 자신이 1910년에 미감리회 한국선교15주년을 기념하여 펴낸 <한국 선교 상황>(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 [미감리회]선교사가 제물포 사업을 개척하기 위해 내려갔던 그해에, 그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기 위해 강화를 방문했는데, 강화는 인구 5만 명으로 한강 삼각지, 제물포와 서울 중간에 위치한 큰 섬입니다. 그는 어느 날 갑곶이라 불리는 곳에 상륙하여 3마일 정도 떨어진 도성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성문을 지키고 있던 수비병이 그를 정지시키고 최고 책임자(강화 유수)의 허락없이는 들여보낼 수 없다고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안으로 들어가 거리를 걷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청원서를 써 보냈습니다. 그러나 최고 책임자는 청원서를 손에 들고 나와서, '나는 당신네 서양 선교사들이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소.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당신들이 가져 온 것을 원하지 않소. 당신이 이 섬을 빨리 떠나면 빨리 떠날수록 우리는 좋을 것이며, 당신이 이 섬을 빨리 떠나면 빨리 떠날수록 당신한테도 좋을 것이요.' 하며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거부당한 선교사는 한강으로 다시 돌아와 이교도가 운영하는 여관에서 외롭게 이틀 낮 밤을 지낸 후 제물포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그 선교사'는 존스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존스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갑곶을 통해 강화에 상륙해서 남문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강화 유수가 직접나와 거절하는 바람에 결국 갑곶나루 여관에서 이틀간 묵다가 제물포로 철수하였다. 그렇다면 존스의 첫 강화 접근 시도는 실패로 끝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스크랜튼이 존스의 강화 여행 보고를 하면서, "강화에 '발판'을 얻었다"라고 진술한 근거는 무었일까? 결국 이 '발판'은 앞서 <江都誌>에서 증언한 서사면 교향동에 있었다.


2. 강화의 첫 세례교인


 <江都誌>는 존스가 강화 남문에서 입성을 시도하다가 거절당한 후 다시 뱃길로 북쪽으로 올라가 강화도 서북부에 있는 '서사면 교항동'으로 가서 '김씨 집안'에 전도하여 선교 기반을 마련했다고 증언하였다. 이같은 사실을 증언하는 다른 자료가 있다. 1919년 7월, 존스가 별세했을 때 그의 생애를 기술한 기사가 <基督申報>에 실렸는데, 그 속에 강화 선교에 대한 증언이 있다.  "뎌간에 특별한 일은 죠목사가 강화셩에 드러가서 젼도하려고 셩 남문 밧게 안져셔 강화류수의계 통지한즉 류수가 완고하고 거만된 마음으로 드리지 아니한즉 조목사가 온유한 태도로 겸손히 물너가 셩밧길로 도라 강화군 셔사동리에 당도한즉 외인의 비방함과 핍박이 심함으로 그 동리에 쳐음 밋은 형제 몃 분을 다리고 배를 타고 바다 우에셔 세레를 베프럿스며"  이 기록은 존스가 강화성 남문에서 강화 유수에게 배척당한 일과 서사면 교항에 상륙하였다가 배척받고 그곳 '토착교인'을 배로 불러내 세례를 베푼 일을 시차없이 연결시키고 있으나 두 사건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우선 앞에서 1910년 존스 자신이 쓴 글에서, 존스는 남문에서 배척받은 후 갑곶 여관에서 이틀 머물다가 제물포로 철수하였다고 진술하고, 이어서 "토착 전도인을 한명 보내 복음 소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고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존스가 곧바로 서사면으로 올라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서사면을 방문한 것도 존스가 무작위로 그 곳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세례받기를 원하는 교인이 있어 그의 요청을 받고 서사면을 방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존스의 서사면 방문을 이끌어 낸 '토착교인'이 내리교회 역사에서 나타난 '이승환'이다. 다시 신홍식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러나 [계원] 五十人中에 信者 二人을 엇엇스니 一人은 리승환이라 조원시氏가 江華島에 傳道하랴고 數次 가 보앗스나 傳道할 기틀을 엇지 못한 것은 丙寅洋擾에 法國 美國 兵船이 드러와 接戰하든 곳이라 西洋人을 보면 원수로 녁이고 돌로 치려하며 迎接지 아니하니 傳道할 수 업게 되엿는대 이 때 맛참 리승환氏가 自己 故鄕 江華 西社로 도라가니 그로 인연하여 江華에 傳道門이 열니며 그러케 굿세든 人心이 漸漸 감화되여 全都에 敎가 傳派되엿더라"  인천 제물포 교회(현 내리교회)초기 전도인 김기범, 이명숙이 인천 사람들의 (교회에 대해)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계를 조직했다가 깨지는 바람에 오히려 곤경에 처했는데, 다행히 계원 50명 가운데 교인 두 명을 건질 수 있었고 그 중 한 명이 강화도 서사 출신 이승환이었던 것이다. 이승환은 인천에서 처음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강화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으니, 스크랜튼이 언급한 강화 선교의 '발판'은 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1910년대 초부터 인천을 거점으로 하여 서해안 지역 여성 선교를 주관했던 헤스(M.Hess)는 '강화의 첫 세례교인'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제물포에서 술집을 경영하던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은 하였으나 자기 직업 때문에 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몇 달 지난 후 존스 박사는 강화 북부에 있는 서사로 와서 죽을 날이 멀지 않은 한 노파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노파의 아들이 바로 술집 주인이었는데, 그는 은밀하게 술집을 정리하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보다 건전한 방법인 농사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아들은 늙은 어머니에게 성경 말씀을 들려 주었고 이번에 세례 요청을 한 것도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지, 그 자신은 아직도 세례를 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겼다. 기독교를 미워하는 주민들의 난폭한 반대로 tk 세례예식은 마을에서 거행되지 못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존스 박사가 배에서 기다리고 있는 해안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은빛 찬란한 달 밤에 한 노파의 기쁨의 잔이 넘쳤으니, 이는 죄 씻음 받은 기쁨의 잔이었다. 그녀는 강화의 겨자씨로 불리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이승환의 직업이 술장수였다는 것과, 그가 제물포에서 믿음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직업상 세례를 받지 못하였고, 직업을 정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우선 늙은 어머니에게 전도하여 믿게 한 후,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존스에게 요청하여 존스의 서사 방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때에도 서사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 존스가 마을에 상륙하여 세례를 베풀지 못하고 밤중에 이승환이 어머니를 업고 교항마을을 거쳐 뒤펄개를 지나 존스가 있는 배에 올라 세례예식이 베풀어졌다는 사실등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강화의 '선상세례'이고, 강화의 첫 세례교인은 이렇게 해서 배출되었다. 해스보다 앞서 인천 선교를 개척했던 밀러는 또 다른 글에서 강화의 처음 세례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존스 박사는 강화 선교사업을 시작할 때 처음부터 성공하리라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첫번째로 세례받은 인물은 나이 많은 여인이었는데 그녀의 아들은 제물포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녀도 아들에게서 복음을 듣고 세례받기를 열망했다. 섬 주민들 사이에등에 업고 긴 뻘을 건너 배에 올랐고 거기에서 달빛에 예문을 비춰 읽는 가운데 여인이 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존스 박사측 행위를 보고 한국인들이 감명받아 그들은 존스 박사에게 마을로 들어와 대화를 나누자는 요청을 하였다. 이 방문으로 김씨와 그의 가족 전체가 개종하게 되었다."  이 자료는 서사 주민들의 처음 반응을 보다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으며, 그 반대의 주역이었으나 후에 개종하여 가족 전체가 교인이 된 '김씨'라는 양반에 대한 흥미있는 증언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양반 '김씨'는 바로 <江都誌>에서 언급되었던 서사면 교항동의 '김씨가족'을 의미하며 이승환과 함께 서사면 복음선교의 씨앗이 된 김상임(金商壬)을 말한다. 김상임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3. 시루미 신앙 공동체


제물포에서 믿기 시작하여 고향인 서사면 증산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존스에게 선상세례를 받은 이승환은 과연 강화 선교의 '발판'이었다. 존스는 아직은 선교사에게 문을 열지 않는 강화에 제물포교인 이명숙을 전도인으로 삼아 파송하였으며, 이명숙은 증산동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강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강화의 첫 감리교 신앙 공동체가 탄생되었다. 바로 이것이 '서사교회'(西寺敎會), '교항교회'(橋項敎會),'교산교회'(橋山敎會),'양사중앙교회'(兩寺中央敎會),등으로 불리다가 현재 '강화교산교회'(江華橋山敎會)로 불리는 강화 첫 감리교회의 시작이다. 1917년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橋山敎會沿革>은 교회 시작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一八九四年 兄弟 李城完氏와 그의 母親이 主의 福音을 듯고 믿어 兩寺面 橋項里 뒷바다에서 宣敎師 趙元時氏에게 洗禮를 받음으로 福音의 傳播되기 始作하니라...仝年 長老 趙元時氏의 派送으로 仁川敎會 勸師 李明淑氏가 本郡 증산里에 往來하여 李聖完氏 自宅에서 四五人 兄弟 姉妹가 禮拜하다. 仝年 六月에 至하여 男女敎友가 五十餘名이 되니라"   이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李聖完'은 지금까지 살펴본 '이승환'을 의미하며, 강화의 첫 신앙공동체가 이승환의 자택이 있는 증산(시루뫼) 마을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혀준다. 그러나 '1894년'으로 표기된 것은 수정을 요한다. 다른 자료는 이미 1893년에 증산에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음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우선 1893년-1894년 당시 한국 감리교 선교를 관장하고 있던 스크랜튼의 증언이다. 그는 1893년 12월 12일, 본국 선교본부에 보낸 서한에서 존스와 함께 강화에 다녀온 결과를 보고하였다.  "강화에서는 연회 이전에 한 가족 전체가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 [사업] 개척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하루 밤낮을 지냈으며 그 주변 이웃들과도 만났는데, 그들 중 몇 명은 [기독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곳은 시루미 북쪽에 있습니다.  남쪽 항구에 있는 여관 주인은 이미 잘 알려진 인물인데, 그는 이번에 학습인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기도회를 가졌고 조사를 그 곳에 두어 그를 더 가르치도록 조처하였습니다. 이 섬을 여행하는데 모든 시간을 바칠 수 있는 조사가 필요한데, 현재 우리에겐 1894년도에 이러한 조사를 채용할 재정이 없습니다." 이 자료를 통해 1893년 8월 31일에 열린 한국 선교회 연회 이전에 이미 강화 '시루미'(증산)에서 개종하고 세례받은 한 가족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강화읍 남문으로 통하는 갑곶나루의 여관집 주인이 학습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천과 강화 선교 책임자 존스도 1894년 선교 보고에서 전 해의 사업을 요약하는 중에, "제물포 사업은 아직은 두 거점에서 사업이 확장되어 가고 있는데 제물포항과 강화도에 있는 시리미가 그 거점입니다"라고 보고한 것도 '시루미' 개척이 1893년에 이루어졌음을 증언하는 자료다. 또한 존스 부인의 1894년 보고는 '시루미'사업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제물포에서 약 50마일 떨어진 강화라는 섬의 시루미에서 작은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봄에 그곳 마을을 세차례 여행하였으며 헬렌은 작년 한해동안 여섯차례 방문했습니다. 그곳 사업은 아주 고무적이며 인근 마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세례받은 여인이 6명, 아동 세례 5명이 있는데 이들이 비록 무식한 부류 사람들이나 자신들에게 비추인 빛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시루미에 강력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존스 부인과 백헬렌이 주도하는 여성 선교사가 큰 성과를 얻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답보상태에 빠진 인천 선교 상황에서 방물장수로 위장 침투해 들어가 인천 선교의 전기를 마련했던 전도부인 백헬렌은 강화에도 1년에 여섯 차례 여행하며 복음을 전해 1894년 이전에 여성 세례교인 여섯 명을 얻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존스 부인의 1895년 보고는 지속적인 '시루미' 사업의 내용을 증언한다. "사업을 개척한 두 선교 거점이 있으니, 제물포와 강화의 시루미입니다... 시루미에서는 한 여인이 교적부에서 제명되었으나 다른 한 여인이 추가되어 교인수는 처음과 변동없습니다. 지난 1년동안 저는 시루미를 방문할 수 없었지만 제 조사인 헬렌은 다섯 번 여행하여 모두 10주간 그곳에 머물면서 교인들을 가르치고 다른 마을들을 방문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헬렌의 보고로는 그곳 사업이 날로 번창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고들을 종합해 볼 때 시루미 사업은 남성보다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 세례고인이 이승환의 어머니였다는 사실, 인천 전도부인 백헬렌의 열성적 전도활동 등에서 시루미 신앙공동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즉 존스 부인의 표현대로 시루미 교인들은 사회적으로 '무식한' 부류의 사람들이었으나 신앙적 열정에 사로잡힌 토착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강화 감리교는 당시 사회 상황 속에서 소외당하고 억눌려 살아온 '민중'들과 접촉하는 것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강화선교의 '발판'이 된 이승환의 직업(술집 주인), 학습을 자청한 갑곶나루 여관집 주인의 신분과 존스 부인이 '무식한 부루'라고 표현한 처음 여성 세례교인들의 신분 배경에서 감리교 선교의 민중지향적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이는 강화의 지식인 계층, 양반과 지방 토호를 선교 대상으로 삼았던 성공회의 선교 방법과 대비를 이룬다. 그렇다고 감리교의 강화 선교가 민중 계층에만 제한되었다고 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무식자와 유식자,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공존,공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교회는 모든 계층, 모든 부류의 참여와 나눔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를 구현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교회는 민중의 참여와 함께 지식인, 지도급 인사들의 참여를 요구한다. 강화 감리교회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균형있는 신앙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그러한 균형과 조화는 이미 서사면 최초 감리교 신앙공동체에서 나타났으니, 그 계기는 교항동의 유력한 양반 김상임과 그의 가족들의 개종을 통해 이루어졌다.


4. 교항교회 설립


 앞서 살펴본 <橋山敎會沿革>은 교회 시작을 진술하며 '이성완'(이승환) 모자의 개종과 이명숙의 전도활동을 진술하며 같은 해 사건으로 김상임의 개종과 전도활동을 언급하고 있다.  "李聖完氏가 趙元時 宣敎師의 指導를 받어 美國聖書公會 賣書人이 되어 福音을 傳할 時 兄弟 金商林氏가 서울에 往來中 主를 믿고 姉妹 許조스편氏가 主를 믿는지라"  이승환 모자의 세례와 김상임의 개종을 같은 시기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밀러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환의 고향 집에서 세례를 거행하지 못하게 한 일물이 '김씨'라는 유력한 양반이었으나 오히려 존스 목사의 사려깊은 행동에 감명받고 존스 목사를 초빙하여 대화를 나눈 후 개종한 것으로 되어 있어 이승환 어머니의 세례와 김상임의 개종을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다른 여러 자료에 의하면, 김상임의 개종 및 세례를 이승환 어머니 세례와 시차없이 연결시키기보다는, 김상임도 다른 통로로 기독교를 접하고 탐색하다가 이승환 어머니 세례와 그것을 계기로 선교사와 매서인들이 시루미에 자주 등장하게 되면서 직접 선교사를 만나 대화한 후 개종을 결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상임은 서사면 교항에 근거를 둔 전통 양반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에 전념하여 과거 급제를 통해 입신출세를 도모하던 전형적 유학자였다. 나이 열 다섯되던 해부터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번번히 낙방하다가 사십(1887년)에 비로소 강화부 승부초시가 되었다. 이후 '김초시'는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고향인 교항동에 서당을 차리고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차에 이승환을 통한 감리교 선교가 바로 이웃 마을인 '시루미'(증산)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1902년 김상임이 별세하였을 때 그의 별세 기사와 함께 약력을 기록한 <신학월보>는 김상임의 개종 과정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김 형뎨는 환족의 자손인대 죠션고적 풍쇽대로 글일기와 과거보기로 힘스고 셰월을 보내는거슨 아람답고 큰 사업으로 알앗더니 하로날 우연히 예수교 젼도하는 사람을 맛나니 비로소 진리드럿나니라 그러나 젼도하는 목사 하나 맛나여야 밋기를 쟉졍하겟노라 하여 이에 목사를 맛나니 그 권면하는 말을 깃부히 듯고 예수 밋기를 시쟉하엿난지라"  앞에서 살펴본 <橋山敎會沿革>이나 <신학월보> 기록은 김상임이 선교사(목사) 존스를 만나기 전에 이미 기독교에 대한 정보를 듣고 스스로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의 정체를 알아보려는 결심을 하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을 왕래하며 알 게 되었든지, 아니면 이명숙, 이승환 등 매서인을 통해 알 게 되었든지, 선교사와 교회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그는 직접 선교사를 만나보고 개종을 결심하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존스 선교사를 만나기 전에 나름대로 기독교에 대한 긴 탐색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김상임이 존스를 처음 만난 때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신학월보>기록이 1894년 8월 6일에 존스에게 학습받고, 그해 10월 8일에 세례를 받았으며, 그해 12월 12일에 만진례를 받은 것으로 정리하고 있고 <橋山敎會沿革> 역시 김상임의 개종, 세례를 '1894년' 사항으로 정리하고 있어 그가 존스를 만나 세례를 받은 것은 1894년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상임의 개종은 그가 살고 있던 '교항'마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역유지이자 학자로 영향력있던 '김초시'의 개종은 김씨 문종의 비판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지만, 교항 주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씻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교항의 사대부들 가운데 교인들이 생겨났으며, 이는 '무식한' 부류의 여성과 아이들로 구성된 시루미(증산) 신앙공동체와 다른 성격의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처음에 김상임을 비롯한 교항 마을 교인들은 증산에 있던 이승환의 집에가서 예배에 참석 했는데, 교인수가 늘어 장소가 비좁아 별도 예배처소를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에대한 <橋山敎會沿革>의 증언이다. "於是에 禮拜堂을 建立키로 捐補金 四十원을 거두니 橋項里에 草家 十二間을 賣出하여 敎會를 設置하다"  예배당 건축기금 40원을 마련하는 과정이나, 새 예배당의 위치가 '교항'으로 정해지는 과정에서 김상임을 비롯한 교항 교인들의 입장이 크게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서 서사면의 첫 감리교 신앙공동체는 시루미에서 '다리목'을 건너 김상임의 집 뒤쪽 교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예배당 마련 과정을 스크랜튼은 1896년 연회 보고를 통해 자세히 밝히고 있다. "강화에서는 아주 흥미있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저는 로드와일러(Rothweiler) 양과 함께 그곳을 한번 방문하였습니다. 저는 방문하는 길에 성인 10명과 어린이 1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예배당으로 쓰려고 낡은 집을 한 채 구입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런 의견에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만 상황을 고려할 때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낡은집을] 사용에 적합하게 개축하는 데는 돈이 곱으로 들 것입니다. 그들은 이번 연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후로 계속 도움이 필요한 지방 교회들이 나올 것인데 이에 대한 우리 입장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에 관해서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까요?"  강화 교인들이 헌금 40원으로 구입한 교항리 초가집은 수리비가 곱으로 들어야 할 낡은 집이었던 것이다. 스크랜튼은 기다렸다가 보다 건실한 예배당을 마련하도록 권면했으나 당장 집회 장소가 필요했던 강화 교인들은 자체 헌금을 모아 낡았지만 12칸짜리 초가집을 마련했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그 수리비 지원 여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강화 교인들은 선교사들의 지원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애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1898년의 존스 선교 보고에 '교항교회'교인들이 '예배당당을 마련하는 데 이미 120달러를 사용했다'고 보고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1899년 보고에 교항 교인들이'자립헌금으로 44달러 10센트를 모아 그중 5달러는 전도인 봉급으로 지급하고 있다'고 한 것들이 강화 교인들의 주체성과 자립에 바탕을 둔 선교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강화 감리교회는 처음 출발부터 강한 자립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렇게 해서 설립된 교회는 선교사에 의존하는 교회가 아닌 자치교회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이러한 자립과 자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강화 교인들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복음 수용과 전파라는 자전의 역사가 있었다. 강화는 이러한 3자선교의 구체적 실천장이 되었으며, 이후 강화 감리교회 역사를 규정하는 특징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하여 1893년 8월 이전에 서사면 증산(시루미) 마을의 이승환 모자가 세례받고, 그곳으로 이명숙 권사가 전도인으로 파송되어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 강화 첫 교회는, 1894년 이웃 교항마을의 '김초시', 김상임과 그 일가의 개종으로 큰 힘을 얻었고, 교인들의 자체 헌금 40원으로 교항에 12칸 초가를 구입하여 예배당을 삼게 됨으로서 완전한 교회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증산 마을의 '여성과 아이들'을 중심한 민중 계층과 교항 마을의 '양반 지식인' 계층이 함께 어울리는 아름다운 교회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설립된 교항교회는 이명숙, 이승환, 김상임, 백헬렌등 한국인 전도인들의 헌신적인 전도활동과 존스 목사 부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짧은 시일 안에 강력한 교회로 자리잡게 되었으니, 1897년 2월 10일자 <조선크리스도인회보>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강화 서사면 교항동에 사년전브터 서국 목사 쫀스씨와 죠션 교우 리명슉씨가 비로소 하니님 도를 힘써 젼파하야 작년에는 회당을 셜립하고 쥬일마다 례배하는 교우가 백여명인데 그중에 세례밧은 사람이 남녀로쇼 병하여 삼십륙명이요 학습인이 아해까지 합팔십여명이라 쫀스 목사는 재작년에 고국에 도라가셔 아즉 나오지 아니하엿는대 강화 교우들이 그 목사 나오시기를 형뎨가치 기다린다더라"


강화 교산교회


1. 교회설립과 시대적 배경


한반도 서해안 중심부에 위치한 우리 강화도는 그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반만년 역사 속에 민족적 수난이 있을 때마다 나라를 지켜온 최후의 보루역할을 해 왔다. 또 강화는 각 시대마다 역사적 산 증거로서 많은 유적과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는 데서 이 나라 역사의 축소판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자연적 역사적 여건 속에서 이미 100여년전부터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여 이 지역이 새롭게 거듭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우리 양사지역 교산교회가 1893년부터 최초로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를 세움으로서 수많은 전도의 사역자들을 배출해 냈다는 데서 강화 개신교의 '모교회'라고들 한다. 정치적 쇄국주의와 보수 유학자들의 무서운 핍박속에서도, 자진해서 복음을 들여와 교회를 세우고, 목숨을 건 전도를 한 초기 교산교회 창설자들은 강화지역 교회사 차원에서 뿐 아니라 오늘의 개신교인 모두가 신앙의 사표로 삼아 마땅하다고 본다. 복음의 불모지에서 가난과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를 전한다는 것은 분명 상상을 초월한 고난의 길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감시의 눈이 많은 강화 읍내에는 성경을 들고 접근할 수 조차 없었기에, 이곳 외진 해변가 양사 지역에 먼저 복음의 씨가 뿌려졌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이 어려운 사역을 시작한지가 벌서 1세기가 되었다. 이 뜻깊은 시기를 맞이하여 현실속에 안주해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또다른 깨달음과 사명을 주실 것을 믿는다. 이러한 믿음에서 우리 강화 교산교회가 걸어온 지난 100년 간의 발자취를 뒤돌아보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 보자는 의미에서 이 교회 연혁을 정리해 보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 이곳 강화도는 고려조 이후부터 계속 외세와의 갈등 속에 살아왔다. 특히나 조선조 말엽에는 프랑스 함대와 접전해 병인양요(1866)를 치렀고, 미국 함대와 접전해 신미양요(1871)를 치룸으로서 서양인과 그들 종교에 대해서는 무서운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많은 역사 기록들은 "당시 강화도민들은 서양 사람만 보면 돌로 치고 복수를 하려는 험악한 상황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시대양상에 불과할 뿐 하나님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역사하고 계시었다. 오히려 서양인과 기독교에 대한 깊은 오해를 풀어주시고 이곳을 복음의 전초기지로 삼으셨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섭리일 뿐 인간의 힘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만약에 강화도민들이 13세기의 삼별초적 배타성을 발휘해 기독교를 박해했더라면 당시 인천, 강화지역에 작은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던 초대 교회는 여지없이 붕괴되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 강화도민의 회심과 복음 수용, 이것은 분명 한국에서 빛어진 "바울의 다메섹 사건"으로 보아도 좋을 것 이다. 실로 강화 땅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한 관문으로서 성별된 땅이요, 축복받은 땅이라 여겨진다. 이번 강화선교 100주년을 기해 하나님의 더 크신 사랑과 은총이 모든 교회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2. 교산교회의 창립


가. 이승환 모자의 결신과 복음전래(1893년)

강화 지역에 예수의 복음이 전래되고 교회가 선 것은 대한 감리교의 모교회 격인 인천 내리교회에 의해서였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상륙하자 인천 내리교회를 세워 놓았고, 1892년에 그의 후임으로 존스(G.H.Jones 조원시 趙元時 1988.5.9 서울도착) 목사가 부임해 왔다. 존스 목사는 내리교회에 부임하자 인접 도서인 강화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그 즉시 실천에 옮겨 강화 선교를 시작했으나, 강화 관.민의 냉대로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 내리 교회 안에서는 전도의 방편으로 장조계를 조직한 바 있었으나 얼마 안 가서 계도 실패하고 교인도 잃고 말았다고 한다. 50명의 계원중 유독 이승환이라는 성도 한 사람만이 남아 계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 이승환 성도는 강화 서사(양사)출신으로 제물포에 가서 술집을 경영하면서 내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다 보니 강화 고향에 있는 이승환의 어머니도 이들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되고, 믿음이 생기자 존스 목사에게 세례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강화 선교의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존스 목사는 한복으로 변장하고 야음을 이용해 또 다시 강화에 올 수 있었다. 우선 서사 뒤쪽에 배를 정박하고 사람을 동리로 보내 정탐케 했다. 그러나 동리에 들어와 세례식을 행한다면 그 집을 불사르고 큰 봉변을 당하리라는 제보였다. 소요를 원치 않았던 존스 목사는 이승환 성도에게 노모를 배로 안내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아들은 어머니를 업고 상당한 거리의 개펄을 건너 존스 목사의 배에 올랐다. 마침 달밤이라 달빛을 이용해 예문을 읽어가면서 무사히 세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선교초기의 선상 세례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강화도에 최초의 복음의 씨가 떨어진 것 이다. 그 후 이승환 성도는 제물포의 술집을 정리하고, 고향 양사로 돌아와 보다 건전한 직업인 농사일을 하면서 전도에 힘썼다. 존스 목사는 가오하 양사를 당시 제물포교회와 함께 2대 선교 거점으로 보고 1893년 가을 이명숙 전도사를 강화 담당자로 파송하였다. 초기에는 교인 4-5명이 모여 이승환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가정교회로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자 교인은 즉시 배로 증가해 10여명에 이르렀다. 이제는 하나의 어엿한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1893년 말에는 존스와 스크랜톤(W.B.Screanton, 시란돈 施蘭敦) 두 선교사가 이미 강화교산교회에 와서 유숙한 바 있고, 내리교회 백헬란 전도사는 6차례에 걸쳐 10주간을 머물면서 강화 전도에 힘쓰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강화교산교회는 1893년을 교회 창립원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창립된 다음 해인 1894년에는 이미 교항리에 초가 12간을 구입해 교회를 이전하게 되었다. 이승환씨는 그후 매서인이 되어 전도에 힘쓰다가 1898년에는 아펜젤러 목사로부터 강화 교산교회 계삭회 소속으로 권사 직분을 받는다. 술집 주인 이승환이 변하여 어엿한 권사님으로 존경받게 된 것이다. 이승환 권사는 더욱 전도에 열중했다. 주로 강화, 인천, 옹진지역을 중심으로 전도하다가 1901년 이후부터는 주로 영종, 삼목, 용유등 인근 도서를 돌면서 몇 개의 교회를 세운다음 1908년경에 영국 성서공회를 통해 이민해 가고 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하튼 강화 지역 교회들은 이승환 권사를 통해 복음이 최초로 전래되었다는 데서 그의 공로를 오래도록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나. 김상임 일가의 개종과 강화의 복음화(1893-1902)


서민층인 이승환 씨의 가족과 그의 동류인 부녀자들로만 구성된 초기 교산교회는 성장 부흥에 한꼐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 설립을 위해 이미 다른 측면에서도 역사하고 계시었다고 할 때, 교산리의 유력한 양반 김상임 씨가 바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인물이었다. 김상임씨는 1848년 강화 양사 출신으로 16세에 이미 동몽과의 과거를 보아 상을 받은 준재로 성균관에서도 수학한 바 있고, 40세(1887년)에 승부 초시에 합격한 이름있는 양반이었다. 그는 과거 공부를 위해 서울을 자주 왕래하면서 기독교인과 자주 접할 기회가 있었고, 또 적지 아니한 관심을 갖고 있는 터였다. 그러던 차 이승환 모친의 선상세례를 계기로 선교사의 사려깊은 행위와 헌신적인 열의를 보고 많은 감명을 받게 되었고, 선교사와 매서인들이 양사에 자주 드나들면서 직접 선교사를 만나 대화 할 기회를 갖게 되자 김상임씨는 혼연히 기독교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김상임 씨의 개종은 그의 문중만이 아니라 강화지역 복음화를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김상임 초시는 본래 성실하고 민첩한 분으로 기독교로 개종하자마자 주변의 비난도 개념치 아니하고 가신(家神)과 사당을 불사르고, 믿음과 말씀공부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이러한 김상임 성도의 적극적인 행보는 교산교회를 그 즉시 50명으로 부흥시켜 놓았고, 그와 친분있는 강화지역 지도급 인사들이 연이어 개종해와 강화 복음화는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져 갔다. 김상임 성도는 1894년 10월에 존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좀 더 믿음이 돈독해지자 1896년 5월부터는 교산교회의 담당자의 직분을 맡을 수 있었다.  1896년 홍우동에 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교산 교회에서 수도한 박능일 씨가 담당자로 파송되었고, 이때 초신자로 종순일, 권신일 씨가 입교했다. 1898년에는 본토 전도사 직분을 맏아 무려 10여 곳의 교회(개교회와 가정교회를 포함한 숫자인 듯 함)를 다스리며 선교 사업에 열중했다. 1899년에 존스 목사가 인천 우각동에 한국 최초의 신학회를 개설하자 김상임 전도사는 김기범, 김창식, 최병헝, 이명숙 등과 함께 지방 전도사 8명중 한 사람으로 신학회에 적을 두고 강의를 들었다. 이때의 강사진은 노보을(魯普乙, W.A.Noble), 조원시(존스), 서원보, 아펜젤러 등 미국인 선교사들 이었다. 여기서 김상임 전도사는 한국 최초의 신학과정 이수자가 된 것이다. 또 1900년에 평양에 신학회가 개설되자 김상임 전도사는 김경일, 박능일, 권신일 등 강화인 5명을 데리고 2년급 전도사 과정을 이수했다. 김상임 전도사에 인도되어 결신 입교한 강화인들중 박능일, 김봉일을 중심한 지도급 인사들이 모여 "주안에서 하나되어 복음을 전파하자"는 뜻에서 이름 끝자를 모두 한 일(一)자를 넣어 개명하고 서로 의형제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동참한 이들은 권신일, 종순일,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박현일, 황도일, 제씨 등이며, 김봉일은 자기의 두 아들에게까지 은일, 환일로 개명시켜 놓았다. 이들 전도인들의 모임을 외지에서는 초대교회의 '강화 오 걸일:五 傑一'이라 칭하지만 실은 '오 걸일'이 아닌 '십 걸일:十 傑一'이 넘는 인원이 동참했고 그후 一자로 개명 결신한 분은 6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거의가 직접 간접으로 김상임 전도사를 통해 결신한 분들로 강화지역은 물론 서울, 경기 전 지역에 걸쳐 개척 전도인으로 크게 활약함으로서 초대 한국 개신교의 초석들이 되었다. 1900년 전후만 해도 한국 개신교가 복음의 거점을 확보한 곳이라고는 아직 10여곳에 불과했다. 또 이 무렵에는 예수교인에 대한 박해와 조소가 극심한 때였다. 이 같은 악조건 속에서 10여명의 십자가 군병들이 자진해서 대오를 짜고 나서는 기적같은 현상이 이곳 강화에서 이루어 졌다. 이들은 분명 하나님이 내세운 복음의 전초병들이었다면, 이곳 강화는 예수님이 당초에 제자들을 불러모았던 갈릴리 해변과 유사한 고장인양 싶기도 하다. 여하튼 그후 이들 <십 걸일>들은 주안에서 결의형제하고 나서 복음 전파를 행동으로 옮겼다. 1900년에 강화읍 잠두 교회가 설립 될 때에도 인도자는 역시 박능일씨이며, 초신자는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김봉일 씨였다. 또 같은 해 교동교회가 섰을 때도 권신일 씨(1907년 목사 안수, 순위9)를 파송했다. 1905년 박현일 씨(1914년 목사 안수 순위 50)는 덕적도에 군인 신분으로 들어가 복무하면서 덕적 중앙교회를 세우고 초대 사역자가 된 후, 1909년에 도이명 선교사의 어학 선생으로 이임해 갔고, 그 후임으로 종순일(2대), 허진일(3대), 최족일(4대)목사 등이 연이어 덕적도에 들어가 교회를 개척한 사실이 있다. 종순일 목사는 1899년부터 강화 남부지역 선교를 시작해 1901년에 초지 부근에 기도처를 마련하고 피미교회를 세웠으며, 1903년 북도의 진축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후 강화 길상면에서 전도를 해 선두교회(1904년)와 선두중앙교회(1907년)를 설립하고 초대 담임자로 시무한 바 있다(1916-1926년) 결국 교산교회의 박능일 목사에게서 전도 받은 종순일 목사는 일생을 강화, 옹진지역 복음화에 선도적 역할을 하면서 한 평생을 보낸 것이다. 이처럼 '一'자로 개명 결의한 위의 '십 걸일'들은 거의가 목사 장로 등 성직의 길을 걸었지마는 특히 권신일, 최족일(1915년 목사, 안수순위 60) 두 분은 3.1운동에 깊이 관련되어 수감 휴직되는 수난을 겪기까지 했다. 이처럼 강화교회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면서 많은 후배들을 양성해 온 김상임 전도사는 그 공로를 크게 인정받아 1902년 4월에 집사 목사 안수자로 내정되어 있었다. 한국 감리교에서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3번째로 목사 후보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영예의 안수식을 한달 앞두고 졸지에 세상을 뜨는 비운을 맞는다. 교회에 열병환자가 발생하자 그 환자를 심방한 후에 그 병에 감염되어 55세를 일기로 하나님께로 소천하고 만 것이다. "네 이웃을 위해 목숨을 버리면 그 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느냐"하신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이행했다고나 할까. 사실 당시의 감리교단은 하나의 큰 일꾼을 잃은 것이 애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02년의 신학일보는 김상임 전도사의 사망소식과 아울러 생애 선교업적등을 무려 3페이지에 걸쳐 소상히 보도해 주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그분의 교계 활동이 어떠했던가를 가히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3. 고난속에 성장해 온 교회(1903-1970)


1903년 본 교회는 김경일 씨가 서구역 전도사가 되어 1907까지 순행시무하게 되고, 김상임 전도사의 차남 김우제 씨는 읍구역 제 2대 전도사로 파송되어 갔다. 1906년부터는 김상임 전도사의 장자인 김홍제 권사가 전담하여 교회를 처리해 갔고 전도사로는 방족신, 조내덕 양씨가 차례로 순회하였다. 이 때에 손승용씨가 읍구역 제 4대 전도사로 파송되면서 본 교회는 읍구역으로 편입되어졌다. 이 때까지 부임해 온 감리사로는 시란돈(스크랜톤 1900년 한국 선교지방 감리사), 조원시(존스 1888년 5월 9일 서울도착, 1901년 한국 서지방 감리사), 기이부(奇怡富 케이블 able,Elmer M. 1899년 9월 29일 서울도착, 1905년 한국 서지방(인천, 부평, 강화, 교동, 남양, 황해 및 연안구역 등) 교역자는 모두 8명(목사 1)에 불과했다. 1914년 한국인 최벙헌 목사(1902년 5월 18일 서울에서 모인 미감리교 선교연회에서 무어감독에게 집사목사의 안수례를 받음)가 서지방에 부임해 왔으나, 이 때는 일제의 핍박 속에 교회가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침체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1915년에 김홍제 전도사와 그의 부인 하덕신 씨가 깊은 영적 체험을 함으로서 오히려 교인수가 증가할 수 있었고, 제 2차 초가 8간의 예배당을 증축하여 교회의 면모를 새롭게 해 놓았다. 1916년에 벙커목사(1886년 7월 4일 서울에 도착)와 김유순 목사가 본 지방순회 목사가 되고, 김봉일 전도사와 그 부인 허나오미 권사가 수시로 본 교회를 왕래하여 대 예배와 사경회를 인도하자 교회가 부흥해 교인수가 70여 명에 이르렀다. 1917년 에는 읍내교회의 박봉래 목사가 본 교회 언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자료를 수집해 '기독교 대한감리교 교산교회 연혁'을 편집해 놓았다. 그는 연혁 서두에서 "대개 기독교회가 서울에서 시작하여 인천에 설립되고 강화에 본 교회가 설립 된후 전도(全島)에 전파되니라"라고 전제하고, 그 당시까지의 교회 연혁을 개괄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 후 본 교회 담당자로 시무한 바 있는 신응균 목사가 1970년 2월에 이것을 재 편집해 놓고 다른 곳으로 이임해 감으로서 오늘날까지 귀한 교회사 자료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에는 남북 감리회가 통합됨에 따라 본 교회는 '기독교 대한 감리회 강화구역 교산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930년대 이후 교회가 소강상태에 있었으나, 1950년에 박승도 전도사가 연회로부터 파송되고, 구역이 또 다시 나뉘어 '중부연회 강화지방 양사구역 교산교회'로 개편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었으나, 뜻밖에 6.25동란의 비극을 맞고 말았다.  수복이후 다시 부흥을 가져와 신도수가 증가해 90명에 이르렀다. 1956년 에는 안광남 전도사의 주선으로 교단 본부로부터 100만원의 건축보조금을 받아 건축 자재를 구입할 수 있었다. 1958년 최창묵 목사가 부임한 후 김용기 권사가 교산리 산 201번지의 대지를 기증(1,320평중 1,000평은 52만원에 매입하고 320평은 기증받음)하자, 1959년 4월 김봉기 장로를 기성회장으로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온 교회가 2년간에 걸쳐 예배당 건축에 전력하던 중 교회가 거의 완공될 무렵 담임목사와 김봉기 장로 그리고 김정기 권사가 동시에 교회를 떠나게 되어 교인들은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되었다. 1961년 신응균 전도사가 부임하면서 예배당을 완성하고 봉헌식을 올렸다. 1963년 덕하리에 기도처를 설치하고, 교인 일부가 분리하여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1964년에 17평의 주택을 건립하고, 1968년에는 최윤영 권사를 기성회장으로해 37평 규모의 교육관을 1년에 걸쳐 완공해 놓았다. 1970년에는 교회 옆의 밭 234평을 매입해놓았고, 동년 3월에 신응균 목사가 서울로 전임해 가면서 후임으로 임종락 목사가 부임해 왔다. 1977년에 "또 다시 30평의 성전을 증축했고(기성회장:김용기 권사), 1979년에는 슬라브 양옥으로 목사관을 신축했다. 1981년 구역회의 결의로 교산교회의 명칭을 '양사중앙교회'로 변경했다. 1982년에는 '새마을 유아원'을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1991년까지 9회에 걸쳐 약 300명의 졸업생을 길러내고, 원아수의 격감으로 부득이 폐쇄시키고 말았다. 1985년에는 담임자 임종락 목사의 성역 30주년 및 회갑기념 예배를 드렸고, 그 다음해에는 '교회요람'을 창간 배포하고, 아울러 일부 낡은 건물을 철거하면서, 24평 정도의 슬라브 양옥식당도 건축하였다. 1994년 구역회에서 교회명칭을 '강화 교산교회'로 다시 변경하였다. 

(출처- http://www.kyosan.zc.bz/)


진해 웅천교회

 

주기철 목사의 고향인 경남 진해에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교회가 있다. 주 목사는 13세 때인 1910년 12월 25일 경남 진해시 성내동 소재 웅천교회로 나와 예수를 믿게 됐다. 웅천교회는 1900년 세워진 것 외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1889년 호주장로회에서 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를 파송했다. 데이비스는 한국에 온 지 1년만에 도보 선교여행 후유증과 천연두로 부산 부근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호주장로회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이를 근거로 호주장로교단의 활약이 두드러졌고 경남지방 특성상 그들의 영향으로 웅천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현재 웅천교회에서는 주기철 목사의 생가를 복원하고, 기념 수련관을 건립하기 위해 ‘주기철 목사 생가복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글·이주희 기자)

 


주기철 목사 생가, 현재 공터인 생가는 복원 작업이 추진중이다.

 

진해 웅천 주기철 생가, 교회 기념관  (출처- 매일신문사 정우용 기자/200701)

 

 주기철 목사가 웅천교회 집사일 때 기록한 헌금록,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 전시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 시절(1922-25), 앞줄 중앙이 주기철 전도사 

 

웅천교회 마당에 있는 주기철목사 순교기념비 (사진·김용두 기자)  

 

< 마산 문창교회 >

 

마산 문창교회       (출처- http://cafe.naver.com/ma77)


1889년 호주장로회에서는 데이비스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를 파송했다. 데이비스는 한국에 온 지 1년만에 도보 선교여행 후유증과 천연두로 부산 부근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호주장로회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경남 지방 어머니 교회’라는 별칭이 붙은 문창교회는 바로 이같은 배경으로 마산시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다. 1901년 창립시에는 마산포교회였다가 1919년 신축예배당을 추산동으로 옮기면서 문창교회로 교회명을 바꾸었다. 주기철 목사가 부임한 1931년 7월은 교회내부 사정으로 어려운 시절이었다. 주 목사는 1936년 평양 산정현 교회로 떠날 때까지 교회 안정에 힘을 쏟았다. 이를 기념해 문창교회 역사관에는 무학산에서 주 목사가 기도하던 십자가 모양의 금 간 바위를 축소 보관하고 있다.

(마산=글·이주희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마산 문창교회         (출처- http://cafe.daum.net/mcem)

 

마산 문창교회 역사 자료

 

마산 문창교회 역사 자료

 

마산 문창교회 역사 자료

 


마산 문창교회, 두번째 목회한 1950년대 교회모습

 

마산 문창교회 역사 자료

 

문창교회 선교지

 

문창교회 후원교회  

 

 

< 부산 초량교회 >

 

초량교회


초량교회(부산광역시 동구 초량1동 1005번지)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목사안수를 받은 뒤 처음으로 부임해 사역(1926∼1931)한 곳이다. 1892년 미국 선교사인 윌리엄 베어드 목사에 설립된 초량교회는 1920년 호주 선교부 소유의 초량동 땅에 교회를 지으면서 급성장했다. 일제시대 임시정부 소속 광복군을 지원하기 위해 비밀모임이 초량교회에서 자주 있었는데, 그중 윤현진 집사는 임시정부의 재무차장이 되어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 상해에서 병사하기도 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해 교인 중 많은 이들이 투옥되거나 교회에서 추방된 사람이 많아 고등계 형사들로부터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이때 교인명부와 헌금 등 교회성도들 사이에서만 은밀히 통용된 자료가 초량교회 역사관에 잘 보관돼 있다. (부산=글·이주희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초량교회

 

초량교회

 

초량교회 약사                (출처- http://www.choryang.org/)

 

1892.11.7   미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 부처께서 영선현에 거주지를 정하여 5월경에 주택          을 건축하고 옆에 지은 사랑방 예배처소를 개방하여 본격적인 선교활동으로 영선           현교회(초량교회 전신)를 설립하다. 

1902   예배당 아래의 영주동 사무소를 매입하여 주일학교로 사용중 영선현교회를 이곳으          로 옮겨 영주동교회로 명칭을 바꾸다 

1912   제1대한득룡목사 부임

1913   제1대 김주관장로 장립(당회조직:교세40명)

1915   제2대 정덕생 목사부임

1920   호주선교부의 소유인 초량동1005번지의 대지 689평을 매입하다

1921   매입한 대지위에70평 붉은 벽돌 건물공사를 착수하다.

1926   제3대 주기철 목사 부임(교세250명)  

 

교회 내 역사관 자료

 

교회 내 역사관 자료

 

교회 내 역사관 자료

 

교회 내 역사관 자료

 

교회 내 역사관 자료

 

초량교회 주기철 목사가 쓰던 강대상


1926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초량교회 담임목사가 된 주기철 목사를 기리는 유품이 초량교회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역사 전시관에 있다. 바로 주기철 목사가 쓰던 강대상(사진). 1926년부터 1931년까지 시무한 주기철 목사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전시관에 보관된 노회록과 직원회록에 보면 주기철 목사의 활동내역이 자세히 나와있다. 부임 후 주기철 목사는 주일학교 활성화에 힘을 쏟았다. 또한 교회 형편이 어려운 마산교회(문창교회)로 가기 위해 초량교회에서의 6년 사역을 내려놓았을 때 성도수 200명이 채 안됐던 교회는 배가 넘는 400여 명의 성도가 있는 교회로 성장해 있었다. 선교사 베어드 목사에 의해 설립된 초량교회는 영선현, 영주동, 초량으로 옮기는 과정을 통해 한강 이남의 어머니 교회로서 부산지역 선교와 민족 복음화의 구심점으로 지난 112년간 말씀을 지켜오고 있다. (부산=글·이주희 기자/사진·김용두 기자)

 

<사진으로보는 초량교회,   출처- http://blog.daum.net/jjjmanjjj >

 

1892년대 초량마을

 

초량교회 전신 교회 

 

배위량 선교사 부부

 

1910년 부산 거주 호주 선교사들

 

1895년 선교사들의 무덤

 

1922년 붉은벽돌 초량교회

 

1930년대 교회 내부

 

1940년 초량교회가 최초로 개척한 산리교회 제직회록

 

산리교회

 

1930년 주기철 목사

 

1931년 경남 주일학교 대회

 

1931년 주기철 목사

 

1934년 주기철 목사 친필

 

1940년대 제직회원

 

안창호 선생 초량교회 방문

 

1940년대 제직회원

 

신사참배를 거부한 초량교회 조수옥(趙壽玉) 여전도사


“초량교회라면 경남의 신사참배 투쟁의 거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초량교회는 1892년에 세워진 경상남도에서 제일 큰 교회입니다. 그때 교회의 성도수가 약500명 이었습니다. 권찰이 50명정도, 집사가 10명 정도였습니다. 이약신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경찰의 압력에 못 이겨 사임하고 평양으로 옮겼죠...... 남겨진 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양 장로를 중심으로 장로진이 건실한 신앙위에 서 있었습니다...... 조수옥 증언 53,54쪽...”  조수옥 여전도사는 1914년 12월1일 경남 하동군 하동읍 읍내동에서 출생하여 20세가 되던 해에 결홍 하였으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1935년,22세때) 남편의 외도로 파혼하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통영에서 간호사, 봉재교사로 일하다가 1937년 6월 25세의 젊은 나이로 사천군 삼천포 교회에서 전도부인으로 시무하게 되었다. 그 후 삼천포교회는 총회결의에 따라 신사참배 강요를 섰으며 한편 삼천포 시에서는 전교인을 신사참배 시키기 위하여 강제 소집하였으나 조전도사는 끝까지 반대하여 경찰서장으로부터 추방명령을 받았다. 1938년 11월 초량교회는 갈 곳 없는 조 전도사를 전도사로 받아 드려 시무케 하였다. 그 당시 초량교회에서는 강루식 집사를 위시한 많은 교인들이 산리기도처에 비밀리 모여 기도하는 등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교회 저변에 깔려 있었다. 조 전도사는 이에 동조하여 작은 모임이 있을 때 마다 음성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39년 8월에는 남의 눈에 띠지 않기 위하여 부산 수영 해수욕장에서 모임을 갖고 신사참배 반대 운동 모의를 하였다. 이때 참석한 인사로는 한상동 목사, 사모 김차숙, 한정교 목사, 사모 이정, 윤술룡 목사, 이인제 전도사, 백영옥 집사, 김현숙 전도사, 배학수, 조수옥 등 이었다. 1940년 1월 초량교회를 사면하고 부산 호주 선교부 소속 부산지방 순회 전도부인으로 위촉받아 전도 활동을 계속하였다. 계속되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과 운동자금 지원 등으로 1940년 9월 20일 새벽 4시 초읍동 자택에서 검거되어 북부산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 후 1941년 8월25일 평양형무소로 이송되었으며 그때 같이 구속된 인사로는 여러사람이 있었으나 초량교회와 관련된 인사로는 제3대 주기철 목사, 방계성 장로(주기철 목사 시기 당회 서기). 제6대 한상동 목사, 손명복전도사(초량교회 설립 산리 기도처 전도하, 해방후 온천교회 초대 교역자) 등이 있었다. 조수옥 전도사는 1945년 8월 17일 해방과 동시 축옥하였다. 1945년 12월 이약신 목사의 권면으로 마산 인애원(仁愛院)을 설립하여 많은 불우 청소년을 양육 하였으며 현재의 경남종합사회복지관이 그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전국여전도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정부 및 가종 단체의 위원 또는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86년 5월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였다. 경남지방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거점이 였던 초량교회, 그 시기 초량교회에서 시무하였던 교역자들, 주기철 목사 방계성 장로 손명복 전도사 한상동 목사 등과 함께 오랜 세월 환란 풍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온 조수옥 여전도사는 초량교회 115년 역사 속의 한떨기 아름답고 신선한 꽃으로 자리 잡고있다. 그는 2002년 10월 2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평양 산정현교회 > 

 


주 목사가 목회하던 평양 산정현교회

 

1936-1944년까지 주기철 목사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사용하던 강대용 성경 

 

 산정현 교회 주기철 목사 장례식 장면   (출처- 매일신문사 정우용 기자/200701)

 

평양 산정현교회 교인들 

 


평양 산정현교회

 

1996년 현재 남한에는 평양 산정현교회를 모체로하여 뿌리를 두고 있는 산정현교회가 4개 교회이다. ① 서울 용산구 후암동 406-5에 소재한 산정현교회는 1907년의 장로교 처음 조직인 독노회의 정신적, 역사적 맥을 수진자들에 의하여 이어오는 교회로 위에 기술한 연혁의 역사성을 가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② 서울 서초구 서초동 494-3에 소재하고 있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에 속해있는 산정현교회는 1964년에 후암동 산정현교회에서 분립해나간 교회이다.

③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10-2에 소재하고 있는 산정현교회는 평양에서 수진자들과 혁신복구적 의견의 차이로 마찰을 빚다가 수진자들이 덕이 안되는 마찰을 피해 산정현교회를 떠나자 그곳에 남아 예배드리던 이들이 6.25가 일어나자 남하하여 세운 교회로 통합측에 속해있다.

④ 부산 사하구 괴정3동 284-3에 설립된 산정현교회는 6.25사변으로 피난온 평양산정현 교회 교인들이 서울로 올라와서 후암동 산정현교회를 설립하기위해 임시로 회현동에 적산가옥을 얻어 예배드릴때 부산에 잔류한 일부교인들에 의하여 설립된 교회로 현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에 속해있다.  

 


양지 총신대 100주년 기념 예배당, 주기철 목사 기념 기도실이 있다

 


총신대 기념 예배당 내 주기철 목사 기념 기도실

 


양지 한국 100주년 순교자 기념관 뜰 주기철 목사 추모비

 

경남지역의 기독 유적지 , 국민일보 2003-04-09


부산·경남지역은 짙은 향토색 때문에 기독교 유적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할 몇몇 교회가 있다. 부산진교회와 함께 부산 기독교의 한 축을 차지하는 초량교회. 1892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 베어드 선교사가 영선현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시작됐으며 교회에 역사전시관이 설치돼 있다. 특히 1926∼32년 교회를 담임했던 주기철 목사가 사용한 강대상도 잘 보존돼 있다. 군항 진해에서는 웅천교회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 주기철 목사의 신앙이 싹튼 곳이기 때문이다. 1897년 태어난 주기철 목사는 1910년 예수를 영접했다. 주 목사는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연희전문으로 진학했다. 그러나 안질에 걸려 1년만에 낙향했으며 1919년 웅천교회에서 집사 직분을 받았다. 이 기간에 주 목사는 인생의 진로를 바꾸게 된다.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은혜를 받고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초량교회에서 위임목사로,1931년 문창교회에서 목회했다. 특히 초량교회 시절, 신사참배 거부안을 경남노회에 제출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마산 문창교회 역시 부산· 경남지역을 답사할 때 꼭 찾아봐야 할 곳. 영남지역의 모교회다. 독립운동가이며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 목사가 시무한 교회며 주 목사가 1931∼36년까지 이곳에서 사역했다.

 

주기철 목사 생가 복원 작업

 

경남 진해시 성내동 웅천교회(담임 오성한 목사)에 설치된 '생가복원운동본부'는 웅천1동 주 목사의 생가터 등을 매입, 생가를 복원하고 수련원을 설립하기로 하고 모금에 들어갔다. 주 목사가 태어난 집은 현재 공터로 있으며, 유년기 살았던 생가는 남의 손에넘어갔다. 생가복원운동본부는 생가복원, 기념관.수련원 설립 등을 통해 이곳을 신앙교육과 순교수련 등의 훈련장으로 삼을 계획이다. 본부측은 현재 주 목사의 사료를 찾고 있다. 현재 주 목사를 다룬 저작은 200여권이 발행돼 있으며 논문은 300여편에 달하나 각 지역 도서관이나 개인 소장 등으로흩어져 있는 실정이다.

 


한국 순교자 기념과의 주기철 목사 사진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 

 

 

주기철 목사의 생애

 

1. 성장기

주기철(1897~1944) 목사는1897년 11월 25일 경상남도 창원군 웅천면 복부리(현재 진해시 웅천 1동)에서 주현성씨의 4남 3녀 중 네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웅천은1595년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 시(소서행장)가 웅천성에서 수많은 왜군을이끌고 조선병사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비운의 역사현장이기도 하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일제가 웅천에 다시 침략해올 것을 우려했던 주목사 일가의 어른 주기효는 민족 수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힘을 길러야 한다면서 이곳에 1906년 개통학교를 세웠는데 어린 기철은 이학교에 입학,투철한 민족정신과 남다른 민족애를 키웠다.  주씨 가문의 큰형 주기원이 1907년에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하여 한일 합방으로 전국이 우울했던 그 이듬해 1월 7일에 학습을 받고 10월 5일에 입교를 하기 시작하여 온 식구들이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웅천교회에 있는 당시의 생명부 기록에 의하면 주기복(주기철 목사 아명)은 1910년 12월 25일 성탄절에 형님의 권면으로 성탄절 행사를 즈음하여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 주현성은 1914년부터 출석하기 시작하여 조재선(주현성의 처), 주기원(주현성의 장남), 황덕황(주기원의 처), 주국영(주기원의 장남), 주영민(주기원의 2남), 주영숙(주기원의 3남), 주영옥(주기원의 장녀), 주수원(주기원의 2녀), 양호아(주국영의 처), 주기정(주현성의 3남), 주용선(주기찬의 장녀), 주재용(주기찬의 장남), 주영우(주기형의 장남), 주기용(주현관의 3남), 주영혁(주기채의 장남), 주영문(주기채의 2남), 주길선 (주기채의 장녀), 주말순(주현식의 2녀), 주상신(주기우의 장녀) 등의 기록을 볼 때 주씨 가문이 대거 웅천교회를 출석했던 것이다. 이즈음 그의 맏형인 주기원은 이곳에 웅천교회를 세워 목회활동을 시작했는데 어린 기철은 이교회에 열심히 다녀서 `소년 목사'라는 칭호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기복은 13세의 나이인 개통학교 5학년 때에 웅천교회에 나갔다. 그는 웅천교회에서 민족의식과 애국심, 신앙심을 키우며 큰 꿈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개통학교 7년과정을 마칠 무렵, 그는 당시 부산에서 우연히 춘원 이광수 애국강연을듣고 (강연내용-  "여러분, 나라는 망했습니다. 젊은이들은 비탄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닙니다. 부지런히 배우고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분발을 하면 우리도 세계의 일등 국민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과 용기를 가지고 국운을 개척하는 선봉이 됩시다. 민족 운동가 남강 이승훈 선생께서 설립한 오산학교에서는 구국의 도량이 될 전국의 인재를 모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민족 교육의 전당, 오산학교에 와서 공부하십시오. 뜻이 있는 곳에 반드시 길이 있습니다." )  감동을 받아 춘원이 교장 대리로 있던 평북 정주의 오산 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한다. 오산학교에 진학한 그는 그곳에서 민족 지도자인 이승훈을 비롯, 조만식, 서춘선생등을 만나 철저한 민족교육과 함께신앙교육을 받았다. 주기철은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그해 4월 선교사들이 세운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입학한지 몇달도 채 안돼 지병인 안질이심해져 학업을 중단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할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낙향한 그는 웅천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면서 동시에 교남학교에서 교편을잡으며 야학과 청년운동에도 정열을 쏟았다. 이즈음 그는 김해 교회 이기선 목사의 중매로 안갑수와 혼인을 한다.

2. 성령체험과 목회의 길

주기철은 1920년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해 뜨거운 성령체험을 한뒤 목사가 되기로 결심, 22년 3월 평양장로회신 학교에 입학했다.  어느날 스승 남강 이승훈 선생이 평양신학교를 방문하였다. 남강도 이 학교를 다녀었다. 그는 독립운동 33인 중 한 분으로 3년 가까운 옥고와 여러 차례의 옥고를 치렀고 오산학교도 불질러버려 새로 학교를 세우느라 모교를 오랜만에 찾았고 그의 나이가 60이 넘은 노인이 되어 버렸다. "기철 군, 자네는 여기 신학교를 마치고 나서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계속하게나. 그런 다음에 우리 오산학교를 자네가 맡아 달라는 말일세."   기철은 스승의 부탁에 호응하지 못해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두 사람은 헤어졌다. 남강 선생이 교문을 떠나는 모습이 기철의 눈에 쓸쓸하기 그지없이 보였다. 기철은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그에게 주어진 기회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마포삼열 교장을 비롯, 배위량, 왕길지, 곽안련, 나부열 등 쟁쟁한 교수진으로부터 철저한 신학교육을 받게 된다. 당시그는 출신도 별로 나뉘어 있던 기숙사 제도의 맹점을 학교당국에 시정토록건의, 혼합방식을 채택토록 하는 선도적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신학교 재학시절 양산읍 교회 전도사로 시무한 그는 1925년 12월 신학교 졸업과 함께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초량교회 위임 목사로 부임을 했다. 첫 부임지인 초량교회에서 그는 헌신적이고도 정열적으로 목회활동을 한다.

3. 신사참배 거부

 주기철은 1925년 12월 22일(화), 평양 신학교를 19회로 졸업하게 되었다. 졸업 대표로 답사를 했다. 주기철은 1926년 봄에 부산에 내려가 초량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곧이어 초량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었다. 만 28세의 어린 나이에 33년의 전통을 가진 부산에서 제일 큰 교회 목사가 된다는 것이 그에겐 부담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는 잘 준비된 목사였음에 틀림이 없었다. 주기철 목사가 초량교회에 부임하기 전 1925년 10월에 서울에서는 조선신궁, 다시 말해 소위 일본 황실의 신을 모신 사당이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이때부터 일본인 경기도 지사의 명령으로 서울 안에 있는 각급 학교의 학생들은 차례로 조선신궁에 가서 참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신사참배를 하라는 것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이러한 일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을 미리 예견하고 교회와 노회에서 이 일은 우리가 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하였다. 이유는 첫째가 하나님께 범죄행위요, 둘째, 우리 나라 국민이 일본의 천황을 숭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경남 총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의 기수가 되었던 것이다. 어떠한 시험과 핍박이 와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경성하여 싸워야 한다고 호소했다. 당시 그는 구덕산 기슭에 자기 기도처를 정해 놓고 수시로 밤샘 기도를 했는데 이튿날 내려 올 때 온몸이 비를 맞은 듯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고전해진다. 또 외출도 하지 않으면서 설교원고를 집필, 완성된 원고를 토요일 밤까지 수십번씩 낭독해 암송한 뒤에야 주일 설교에 나섰다고한다. 그는 또 이때 신사참배가 기독교 교리상 어긋난다며 `신사참배반대 결의안'을 경남노회에 제출, 정식 가결을 받아 내기도 했다. 그는 1936년 마산 문창교회에 이어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해 갔는데 이즈음 일제는 신사참배라는 무기로 한국교회의 목을 죄어오기 시작했다. 일제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교인들을 모조리 구속하고 고문하는 잔악성을드러내기 시작했다. 탄압이 계속되자 당시 평양에서 열린 제 27회 장로회총회에서는 굴욕적인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무기력하게 신사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주목사와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일부 목회자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군의 총칼 앞에 당당히 맞섰다. 주기철 목사의 초량교회 사역 가운데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유치원을 개원했다는 것이다. 1931년 3월 20일 제1회 유치원생 10명을 배출시켰던 것이다. 어릴 때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요즘도 교회가 하기 쉽지 않은 유치원을 당시에 시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사람을 키울 줄 아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유치원을 개설한 일은 조국의 미래를 내다 볼 줄 아는 눈이 있었던 지도자적인 기질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어릴 때의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분이었다. 나이 30세에 이러한 안목을 가졌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에 유치원은 오늘날은 유치원이 흔하여 유치원을 나오지 않은 아이들이 없지만 당시엔 유치원이라는 이름조차 몰랐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주기철 목사가 설립했던 유치원은 지금도 초량교회에서 삼일유치원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치원을 운영 중이다. 어느날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사님을 초빙해 가려고 사람들이 왔다.당시 마산 문창교회는 여러 가지 갈등으로 당시에 교회가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목사님, 목사님이 아니시면 우리 교회가 다시 세워지기 힘든 위치에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오셔서 교회를 안정시켜 주시고 저희들을 먹여 주십시요."라는 요청에 주기철 목사는 하나님의 부름받은 몸이 지금보다 어려운 교회에 가서 섬기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안정되고 인정받던 초량교회를 사임하고 마산 문창교회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교인들은 대성통곡을 하며 목사님을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는 "이 교회는 안정이 되고 좋은 교회니 내가 없어도 되고, 힘들고 어려운 교회가 있으니 하나님의 부름인 줄 알고 떠난다"고 하면서 성도들을 안정시키고 마산 문창교회로 부임해 갔던 것이다.이러한 수고와 노력으로 마산 문창교회를 평안하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마산 문창교회에서의 주기철 목사의 사역 중에 꼭 기억할 만한 일은 그가 어디를 가든지 미래에 기둥이 되는 인재들을 양성하는 일에 부단한 노력과 수고를 아끼지 않았음이다. 나라가 튼튼해지는 일이 인재를 양성하는 일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어느날 멀리 평양에서 그의 스승이었던 고당 조만식 장로와 김동원 장로가 산정현교회 대표로 주기철 목사를 찾아왔다. 오랜만의 만남은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얼마나 그리워하고 보고 싶었던 얼굴인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전한 후 조만식 장로가 오게 된 목적을 밝히며 평양 산정현 교회로 초빙하게 되어 주기철 목사는 평양으로 향하게 된다. 당시 평양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마산 문창교회를 두고 가는 섭섭함이 있었지만 순교의 땅인 평양의 부름을 받아 가게 된 것이다.

4. 투옥 생활

주목사는 1938년 부터 1944년 마지막 순교를 할 때까지 모두 5차례 총 5년 4개월 간의 투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옥중에서 몽둥이 찜질, 채찍질, 쇠못 밟기,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추가루 뿌리기, 발바닥 때리기 등 상상도 할 수 없는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신앙적 변심을하지않았다. 7년 동안 구속과 석방을 거듭하며 안질, 폐병, 심장병 등이악화돼 폐인이 되어갔지만 감옥에선 언제나 평화로운 얼굴로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감사찬양을 했다고 한다. 5번째로 구속돼 형무소에 갇히기직전 자택에서 늙은 노모와 처자, 20여명의 평양산정현 교회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그는 생애 마지막 설교를 남긴다. "우리 주님 날 위해 십자가 고초 당하시고 십자가 지고 돌아가셨는데 나 어찌 죽음이 무섭다고 주님을 모른체 하리이까. 오직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전에 찍어야 시퍼렇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이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드려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5. 유언과 순교

그는 투옥된 이후 취조와 고문을 혹심하게 당했다. 그로 인하여 그의 몸은 약해지고 드디어 그는 옥중에서 순교를 하게까지 되었다. 때는 1944년 4월 13일이었는데 그날 사모님과 마지막 면회시에 남긴 말을 다음과 같다. "어머님 뵈옵구 싶구려...미음도 먹고 싶소...나는 가나 산정현 양떼들은 어찌하리이까?" 이때 사모님되시는 오정모 집사님은 "그는 염려하지 마십시오"하고 위로하였다. "그러면 안심하겠소. 어머님을 많이 위로해 드리시오." 이 말을 최후로 사모님과는 작별했다. 1944년 4월 21일 금요일 밤 9시 숱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몸은 평양형무소의 한 귀퉁이에서 그날 밤 9시 30분에 주목사님은 4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내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붙잡으소서"하시고 웃으며 운명하셨다.

 

그는 첫 번째 부인을 사별하고,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하는 등 개인적으로 고난도 많았지만, 신앙적인 나라 사랑을 굳건하게 지킨 기독교 민족주의 목회자의 대표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의 맏아들 주영전 전도사도 1950년 6.25 기간중 공산당에게 살해당하는 순교의 길을 걸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 국민장을 추서하였고,  1986년 국립묘지에 안장토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