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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돌아가자―성경대탐구 (제5편) 한국의 성경①] 해방전의 성경 번

영국신사77 2008. 7. 8. 22:53

[성경으로 돌아가자―성경대탐구 (제5편) 한국의 성경①]

 

                                        해방전의 성경 번역


 세계 교회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인 성장을 해온 한국교회. 그 성장 뒤에는 하나님의 특별계시(特別啓示)인 성경이 자리잡고 있다. 한국 기독교 역사는 한글성경의 번역과 보급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들어오기 3년 전 이미 조선 민중들의 손에 성경이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글성경 보급과 교회 성장은 이국 땅에서 생애를 바치고 목숨을 내걸었던 이들의 피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사 학자들은 천주교가 개신교보다 100년 먼저 전래됐지만, 개신교보다 교세가 적은 것은 결정적으로 성경을 빨리 보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할 정도다.

 본보는 '한국성경의 대탐구' 시리즈를 통해 한국교회의 근간이 되는 우리말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고 한국교회의 분명한 정체성을 찾아본다.

 학계에는 개신교 성서 번역의 시초를 놓고 여러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첫 번째 의견은 1832년 네덜란드선교회 소속 귀츨라프가 충청도 지역에서 한국인의 도움으로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다는 것. 그러나 주기도문을 성경 전체로 볼 수 없는데다 자료마저 남아있지 않아 근거가 미약하다.

 

 둘째는 1866년 토머스 선교사 순교 사건이다. 토머스 선교사는 대동강에서 순교할 당시 한문성경을 조선인들에게 뿌렸다. 훗날 이 한문성경을 받은 한 사람의 조카가 기독교인이 되어 레이놀즈와 함께 성서 번역 사업에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한글성경 번역과 직접적 관련이 없어 논지의 근거가 미약하다.

 마지막으로 로스역이라 불리는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1882년)의 발간이다. 이것은 분명한 근거와 영향력을 갖고 있어 우리말 성경의 시초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성경은 현재 한국 성도들이 즐겨 쓰는 개역개정판 성경의 6대조 할아버지쯤 된다.

 ◇최초의 우리말 성경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1882년)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선교사였던 존 로스(1842∼1915)와 존 매킨타이어(1837∼1905), 조선인 이응찬 백홍준 서상륜 이성하 등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한국어 성경이다. 이들은 중문성경 '중국어문리역'을 기본으로 번역 작업을 진행했으며, 1882년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를 시작으로 1887년까지 신약 27권을 모두 번역해 '예수셩교젼서'를 완성했다.

 로스가 중국 선교사로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872년 8월23일이다. 당시 30세였던 로스는 아내 스튜어트가 중국에 도착한 이듬해 3월 출산 후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숨을 거두는 아픔을 겪는다. 갑작스러운 사별을 겪은 로스는 만주 선교에 평생 헌신하게 된다. 그러던 중 윌리엄 목사로부터 "6년 전 토머스 목사가 대동강에서 한국 선교를 위해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들어가다가 순교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선배 선교사의 한국 선교 열정에 감동을 받은 로스는 결혼 1년 만에 겪은 사별의 슬픔을 딛고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대로 아시아의 마지막 땅 조선에 복음의 문을 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조선인과 로스의 운명적 만남은 18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스는 1875년 선교부의 지시에 따라 중국 유현(維懸)에서 매킨타이어와 동역했다.

1876년 한국어 공부를 위해 어학선생을 물색하던 중 봉천(현 선양)에서 월 4냥의 월급을 주는 조건으로 한국어 교사를 만나게 된다. 그가 바로 이응찬이었다. 당시 조선은 엄격한 쇄국정책 속에서 외국인과 접촉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으며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2년 후인 1878년 봄까지 이응찬과 동향 친구 몇 명이 로스와 요한복음, 마가복음 번역 작업을 진행했으나 주변의 고발 위협으로 잠시 중단하게 된다.

◇복음 전도·한글 보급 계기 마련한 '선각자'=성경 번역 작업은 매킨타이어와 같이 진행됐다. 성경 번역 작업은 말씀 연구, 신앙 공동체 형성으로 이어졌고 이들 초기 멤버들은 의주교회의 초석이 됐다.

 

 1879년 3월에는 한국인 번역자 중 한 명이 세례를 요청했는데 이것이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세례 사건이다. 안타깝게도 자료에 이름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그는 묵묵히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를 마음에 품은 한국 기독교 역사의 산증인일 것이다. 말씀의 능력은 복음에 무지한 조선인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도구로 만들었다. 이후 백홍준과 전직 관리, 서울 출신 학자 등이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이들은 나중에 목숨을 걸고 성경을 가슴에 품은 채 조선 땅에 입국한다.

 1879년 로스가 2년간의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으로 떠난 사이, 매킨타이어는 이응찬 등 조선인과 함께 성경을 번역했다. 로스는 1881년 9월부터 1886년 가을까지 5년 동안 매킨타이어 번역팀이 만들어놓은 신약전서 번역 원고를 수정하고 다듬었다. 번역에 따른 비용은 영국성서공회(BFBS, 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와 스코틀랜드성서공회(NBSS, 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가 지원했다. BFBS의 자료에 따르면 1883∼86년 조선에 보급된 한글성경은 총 1만7609권이었다.

 숙명여대 이만열 명예교수는 "초기 선교사가 입국 전 이미 로스가 번역한 성경으로 개종한 조선인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면에서 로스는 성경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개종자를 배출해 낸 선각자"라면서, "특히 성경이라는 획기적 계기를 통해 조선 민중에게 한글을 보급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했다.

 성경 번역은 "파나마운하를 하나 파는 것과 맞먹는 일"이라는 게일 선교사의 말처럼, 10년 이상 걸린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완역이 가능했던 것은 자신의 인생을 아낌없이 헌신한 두 선교사와 번역에 동참한 한국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교사의 헌신적 자세는 글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 어떤 것도 한글성경 사업에서 나를 떼어놓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이제 나의 모든 영혼은 그 안에 있다…."(매킨타이어의 'The Corea Version', 1881).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2008.07.03 18:23:40

  [성경으로 돌아가자―성경대탐구 (제5편) 한국의 성경①]

 

                                          우리말 희귀 성경 뒷얘기


 "원본을 찾아라!"

 대한성서공회는 한동안 우리말 성경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와 '예수셩교젼셔'의 원본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웠다. 6·25 후 성서공회 건물 화재로 귀중한 자료를 상당수 상실했기 때문이다. 대한성서공회는 당시 '몇 억원을 주고서라도 원본을 찾아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애타게 원본을 구하고 있었다.

 희귀본이라 할 수 있는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는 당시 3000여부가 반포됐었다. 다행히 이 책은 미국성서공회 귀중도서 자료실에 2권, 영국성서공회 자료실에 2권이 소장돼 있었다.

 대한성서공회는 이 사실을 알고 영국성서공회에 2권 중 하나를 보내줄 것을 수년간 요청했다. 그렇게 10여년 간 끈질기게 요청하자 마침내 영국성서공회는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동반자 관계를 지켜온 것을 고맙게 여기며 귀 공회에 이 책을 선물로 드린다"는 반가운 편지와 함께 1998년 원본 1권을 보내왔다.

 '예수셩교젼셔' 역시 소장하지 못하다가 1987년 우연히 성서공회 창고에서 양장 제본되어 있는 원본을 찾아냈다. 이 원본은 현재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성서공회 창고의 콘크리트 금고에 안전하게 보관돼 있다.

 이들 원본의 특징을 보면 절 표시가 전혀 없으며 띄어 쓰기도 되어있지 않다. 다만 '하느님' '쥬' '예수' 등 존경하는 이름이나 칭호 뒤에 빈칸을 두는 대두법(擡頭法)이 적용되어 있다. 짙은 평안도 사투리가 많이 쓰인 것도 특징이다. 종이는 그 무렵 사용하던 당지나 한지를 사용했으며, 외줄 끈으로 네 번 꿰매 제본했다. 참고로 '셩교'는 성교(聖敎)의 개화기 발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