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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스(J.Henry Davis): 호주의 첫 선교사

영국신사77 2008. 6. 15. 19:08

                                데이비스(J.Henry Davis) 호주선교사

 

  부산시 동구 좌천1동 763번지(부산진교회)에는 호주장로교 최초의 선교사 데이비스(Davies) 추모비가 있다. 마산시 합성2동 1번지(창신대학)에도 순직기념비가 있다. 그의 묘는 부산시 중구 동광동 5가 26번지(本町 5町目 26, 복병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멸실(滅失)되었다. 멕케이(Macay, 1892)부인, 베어드(Baird,1894)애기, 아담슨(Adamson, 1895)부인 등 9기의 선교사 묘도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져 보다 깊이 있는 연구와 고증을 통하여 “부산선교성지” 복원이 요청된다. 자료에 도움을 주신 이상규 교수(고신대)께 감사드린다.


                          데이비스(1856-1890)의 성장 배경과 내한 과정

  조셉 헨리 데이비스(Davies, Joseph Henry, 한국명: 德培時)는 1856년 8월 22일 뉴질랜드 왕가라이(Wangarai)에서 출생하여 1860년 호주(Melbourne)로 이주했다.

 

  1881년 3월 멜버른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코필드(Caufield Grammer)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에 취임했다.  

  울프(J. R. Wolfe) 주교의 호소문을 읽고 한국 선교를 결심하여 빅토리아
장로교회로 이적하였다. 영국 에딘버러(New College)대학에서 단기 신학교육을 받고, 1889년 5월 13일[33세] 호주로 돌아가 8월 5일 목사 안수를 받았다. 청년연합회(The Fellowship Union in the State of Victoria) 파송 선교사로 메리(Mary) 누이와 함께 멜버른을 출발 했다.

  내한(來韓) 경로는 1889년 8월 21일 오후 기차 편으로 멜버른을 떠나 시드니에 도착하여, 8월 28일 치난(Tsinan)호 증기선으로 브리스베인(Brisbane)을 경유하여 9월 2일 다윈(Darwin)항에 도착했다. 9월 12일 오후 3시 호주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출항하여 9월 21일 오전 7시 홍콩에 도착, 해변 휴식과 런던선교부를 방문했다. 9월 28일 투키오(Tokio) 배편으로 비가 오는 가운데 홍콩을 떠나 9월 30일 아침 일찍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그리고 1889년 10월 2일 이른 아침 부산에 도착하였으며, 일본인 거주지를 돌아본 뒤 오후 4시 부산을 출발하여 남․서해안을 돌아 10월 4일 오전 11시 인천에 도착했다. 10월 5일 말을 타고 서울에 도착하여,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최초 선교사로 미국 선교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한국 활동과 서울-부산 도보 과정

   서울에 도착한 그는 다음날(10월 6일)
언더우드가 설교하는 외국인 연합예배에 참석하였으며, 한국어 공부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10월 8일 월세로 집을 빌렸으며, 11월 3일 외국인 연합예배에서 “고난 받는 종”에 대하여 설교하고, 11월 5일에는 학교에서 첫 성경 강의를 했다.

 

  1890년 1월 1일에는 헤론(Heron), 기포드(Gifford) 선교사와 대 축호전도를 했다.

  1월 7일 영국 총 영사(서리) 힐러(Hillier, Walter C., 禧在明)를 만났으며, 그를 통하여 1월 10일  내지(內地) 여행허가를 구한국 정부에 요청하고, 같은 날 독판교섭통상사무 민종묵(閔種黙)으로부터 경기, 강원, 충청 지방을 순회할 수 있는 여행 허가(護照)를 받았다.

  1월 16일 기도회 인도를 마치고, 1월 19일 처음으로 한국인에게 성찬식을 집례 했다. 2월 5일부터 10일까지 경기도 과천, 수원 등지를 순회하며 전도했다. 서울로 돌아와 ‘내가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2월 16일),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으리라’(3월 2일) ‘예수님이 사랑한 제자’(3월 9일) 등의 제목으로 설교도 했다.  L. H.
언더우드는 데이비스에 대하여 “남편과 똑 같은 열정적인 정신, 힘, 언어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두 사람은 완전히 마음이 통하여 협력자로 동역하기를 원했다.”라고 했다.

  그는 서울과 평양 등에 이미 다른 교단이 정착하여 있으므로  부산에 정주(定住)할 계획을 세우고 선교지 개척을 위하여, 1890년 2월 28일 구한국 정부로부터 전라, 경상 지방 여행 허가를 받아 서울-부산 간 장거리 여행을 도보(徒步)로 시도했다.  

  이에 따라 1890년 3월 14일 서울에서 어학선생과 수행원을 대동하고 판매 목적의 성서와 전도지와 키니네(金鷄蠟)약을 준비하고 과천으로 향했다. 중부(中部)지방 행로(行路)는 수원(3월 15일), 천안(3월 18일), 공주(3월 20일), 경천(3월 21일) 등이었다. 이 때 수원 성(城)을 거닐었으며,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둘러싸이기도 하고, 로스역
마가복음요리문답서를 팔았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며, 천안 삼거리의 여인숙에서는 목화솜을 파는 호남지방 상인들과 중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설교도 했다. 공주를 지나는 시골 풍경은 아름다운 라인 계곡을 연상케 한다고 했다. 공산성의 금강(錦江)과 계룡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느낀 것으로 짐작된다.  

  남부지방 행로는 논산(3월 22일)을 지나 만경강을 건너 전주(3월 24일), 오수(3월 25일)를 지나 남원(3월 27일)과 하동(3월 29일) 사이의 지리산 기슭 산악 지역을 통과했다. 전주를 향해 걸어 갈 때에는 많은 비로 인하여 길이 물에 잠겨 장화를 벗고 걸어야 했다. 지리산 지역에서는 호랑이 울음소리도 전해 들었다.

 

  1890년 3월 27일 드디어 서울에서 부산을 향하여 670리를 걸었다고 했다. 이처럼 힘든 여행 중에도 그는 매일 5-6시간 씩 공부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듣고 조금씩 한국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마지막 부산 행로는 진주(3월 31일) 부근을 경유한 것으로 추정되나, 그 후의 경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는 무리한 도보 여행을 하는 가운데,  추운 날씨와 불편한 잠자리, 맞지 않는 음식으로 허약해진 체질에 폐렴과 천연두에, 감염되어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게일(Gale, J. S.)의 도움으로 4월 4일 비 오는 금요일 부산으로 이동하였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일본인 병원(北村)에 입원하여 하룻밤을 병상에서 지내다가 치료도 제대로 받기 전에, 1890년 4월 5일 순직하였다. 임종을 지켜본 게일은 “그는 병원에서 죽어가면서 내게 뭔가를 말하려 했다. 오후 1시 평온한 모습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그의 누이 메리(Mary)에게 편지 했다.


  결국 데이비스의 헌신적인 활동과 순직은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선교를 가능하게 만든 값진  시발점이 되었다.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고, 친목과 교제를 위해 시작된 호주의 청년연합회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조직체로 발전하였다.

 

  후속 사업으로 멕케이(Mackay) 선교사 등이 내한하였다. 또한 여전도회연합회(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 조직의 동기도 부여하였다.

 

 

>> 연결고리 : 선교사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헨리 데이비스(J Henry Davis)와 그의 누님 메리 데이비스

 

                                          호주의 데이비스 선교사

  호주에서 온 데이비스는 남도를 전도여행 하기로 결심하고, 누이를 한성에 남겨둔 채 조선어 선생 한 명과 또 한사람의 조선인 친구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충청도를 거쳐 경상남?북도를 골고루 돌아 부산까지 가는 긴 여정이었다.

 

  부산에 일찌감치 도착한 게일은 여유 있게 선교의 여건을 두루 살피고 있었다. 4월도 초순을 지나 중순을 바라보는 어느 비오는 날 오후, 누가 게일을 찾아 왔다. 서양양반의 심부름입니다 ……. 데이비스가 보낸 쪽지였다. ‘빨리 와주세요 J H Davis’

 

  누더기를 덮어쓰고 있던 데이비스가 구세주를 만난 듯 눈을 번쩍 뜨며 반겼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데이비스 선교사님 어디가 불편하십니까?” “어떻게 아픈지 모르겠어요. 그저 일어날 수가 없을 뿐이에요. 무엇보다도 우선 품삯을 처리할 일이…….

 

  게일은 품삯을 해결하고 쓰러지는 데이비스를 안고 자기 숙소로 옮겼다. 일본인 의사를 불러 면밀하게 조사한 결과, 천연두라고 진단을 내렸다. 거기에다 폐렴까지 악화되고 …….

 

  데이비스는 조선땅에서 숨을 거뒀다. 1890년 4월 15일 그는 마을에서 멀찍이 떨어진 산기슭까지 운구를 했다. 그리고 산골마을 주민 두어 사람을 얻어 매장을 끝냈다.

 

 

 

 

   J Henry Davis 와 그의 누님 데이비스 : 오스트레일리아 빅토이아 성 장로교회에서 파송한 초대 조선 선교사, 32세의 젊은 선교사, 멜버른에서 출생(1857년) 멜버른 대학과 대학원에서 문학석사학위를 받은 뒤 법학공부를 더하다가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졸업후 바로 누나가 선교사로 가있던 인도로가 일년반 일하는 도중, 건강을 잃고 고국에 와서 초급학교를 설립하여 학교일에 열중하던 중, 조선에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호소문을 읽고 조선을 향하여 떨쳐 일어난 것이다. 교단이 어려워 파송이 좌절되기도 했지만, 교회 청년들이 연합하여 그를 파송한다.

 

 

조선에서 묻힌 선교사 데이비스(J. Henry Davies)
Gabriel  2008-05-05 14:54:17, H : 146, V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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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가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는 헨리 데이비스(J. Henry Davies) 목사와 그의 누이 메리(M. T. Davies)였는데, 그들이 한국에 도착한 것은 1889년 10월이었다.

 데이비스는 1857년 빅토리아 멜보른(Melbourne) 시에서 출생하여 멜보른 대학을 마치고 이어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법과대학에 진학하여 법학을 공부하다 중단하고 영국 에딘버러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선교 사역에 뜻을 품고, 자신의 누이가 선교사로 일하고 있는 인도에 가서 누이를 돕다가 건강이 나빠지자 다시 호주로 돌아와 건강을 돌보며 멜보른 시 외각에 초등학교를 세워 아동 교육에 헌신하였다.

  데이비스는 우연한 기회에 한국에 갈 선교사를 구한다는 글을 읽고, 한국에 선교사로 나갈 뜻을 굳히고 길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1888년 빅토리아교회 청년들이 ‘장로교청년성경연구신도협회(The Presbyterian Fellowship Union for Bible Study)’를 조직하고 선교 사역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멜보른 시 투락(Toorack)에 있는 데이비스의 母 교회와 그 인근의 신도협회는 데이비스를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키로 하고, 그 경비 일체를 책임지기로 하였다.

  이들의 후원으로 데이비스는 누이와 함께 한국에 도착하여, 먼저 와서 선교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있던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의 환대를 받으며 한국어 학습에 전념하였다. 한국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데이비스를 가리켜 “그는 활동가요, 다방면에 재주를 가진 믿음의 사람이요, 내한 선교사 중에 뛰어난 인재 중 하나이다”17)라고 술회한 바 있다.

  데이비스는 어학 학습을 계속하면서 장차 어느 곳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할까 생각하던 중에, 서울 지역과 북부 지방은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들이 이미 그들의 선교 구역으로 정하여 사역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남쪽으로 그 눈길을 돌리고 그 쪽으로 답사를 떠날 차비를 서둘렀다.

  그는 그의 어학선생과 수행원 한사람을 대동하고 많은 한문 성경과 전도지, 그리고 말라리아의 특효약인 금계랍(金鷄蠟)이라 불리던 키니네(Kinine)를 다량 갖고 서울을 떠났다. 이 여정은 충청도, 경상도를 거쳐 부산까지 이르는 약 1,000리의 길고 험한 여로였다.

 

  그는 물이 다르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기후가 전혀 다른 거친 광야와 같은 길을 가면서, 기력이 떨어지고 건강에 이상이 오기 시작하였다. 지치고 허약한 체질에, 그는 당시 한국에 유행하던 천연두와 급성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죽음이 점점 임박해 옴을 감지한 그는, 당시 부산에 머무르고 있던 게일(G. S. Gale, 奇一)선교사에게 “빨리 와 주세요”라는 급보를 보냈다.

 

  데이비스는 급히 게일의 집으로 옮겨졌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1890년 4월 15일 병으로 고통당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재하며 선교하기 위해 내한한 선교사 중에 첫 순직자(殉職者)와 순교자(殉敎者)가 되었다.

  서울에서 오빠의 부음을 들은 데이비스의 누이 메리는 크게 실망하고 이내 귀국하여 버려,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한국 선교는 일을 시작해 보지도 못하고 그쳐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슬픈 죽음의 소식을 접한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그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다시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게 되었다. 이 일을 주도한 단체는 데이비스가 순교하던 해인 1890년에 조직된 장로교 부인회였다.

 

  부인회는 신우협회와 합동으로 멕케이(J. H. Mackay) 목사 부부, 멘지(Manzie), 포셋(Fawcett), 페리(Jean Perry) 등 3명의 독신 여성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여, 부산 지방에서 선교를 다시 시작토록 하였다.

 

  데이비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경남 지방 교회의 씨앗이 되어, 호주 선교부가 이 지역에 단단한 선교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혁혁한 선교의 결실을 얻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출처:온누리교회

                                                                                                                                                                   

 

 

 

‘헨리 데이비스’ 부산선교의 첫 순교자

  <편집자주>
  부산 장신대학교 부산경남교회사연구소(소장 탁지일 교수)는 부산의 초기 상주 선교사들에 대한 연구를 3년 기획으로 진행해오고 있다. 부산경남지역에 첫 복음의 씨앗을 뿌린 캐나다 교회의 게일과 하디(2004년), 호주교회의 데이비스(2005년), 미국교회의 베어드(2006년)에 관한 연구를 통해, 부산경남지역 초기 선교역사를 재조명함으로써 지역복음화의 교회사적 의미와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이 글을 쓴 John Brown(변조은) 목사는 호주연합교회소속으로, Melbourne 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호주장로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한국에서 선교사로 12년 동안 (1960.9~1972.7) 마산을 중심으로 사역하는 한편, 부산장신대, 장신대 등에서 신학교육(구약학)에 힘썼다. 귀국 후 다양한 교회사역과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여하면서, 호주연합교회 선교부 총무를 역임하였다.

 

  1978년에 계명대학교와 2001년에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으며, 1992년에는 호주 정부로부터 선교와 국제관계에 대한 공헌을 기리는 호주최고훈장 수여받았다. 현재 호주 캔버라에 거주하며, 경남지역에서의 호주선교관련 사료들을 수집, 연구하고 있다.

 

  요셉 헨리 데이비스 (Joseph Henry Davies, 1856-90) 목사는 1856년 3월 22일 뉴질랜드의 완가나리(Wanganari)에서 태어났다. 데이비스의 가족은 1860년 호주 멜본으로 이주하였고, 그의 부친은 그곳에서 변호사로 성공하였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12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데이비스는 13명의 자녀가 있는 대가족의 가장이 되었다.

 

  데이비스는 11살 때부터 아버지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근무하였기에, 아버지의 동료들은 데이비스가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면 그를 고용하기로 약속하였다. 데이비스는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15살 때에 대학 입학시험을 합격하였다.

  데이비스의 누이인 사라는 남인도의 엘로르(Ellore)에서 성공회 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의 선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데이비스는 사역자가 부족하다는 그의 누이의 편지를 받고, 20세의 데이비스는 직장을 그만두고 인도 선교사로 갔다. 그는 플리머스형제단이 생활비와 기도로써 그를 후원해 줄 것을 기대하였으나, 이러한 후원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이로 인해, 데이비스는 인도에서의 선교사역을 그다지 만족해하지는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선교사들 사이에서도 여러 문제들이 노출되었다. 결국 그는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약 일년 만에 다시 멜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호주로 돌아온 데이비스는 인도에 있는 동안 그를 후원하지 않았던 플리머스형제단과 사이가 멀어졌고, 다양한 교파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였다. 이따금씩 설교를 하였으며, 성공회 소속 목회자들, 특히 컬필드의 성마리아 성공회 교회의 메카트니(H. B. Macartney)목사와 투랙 장로교회의 유잉(J. F. Ewing)목사와 가까이 교제하였다.

  데이비스는 이때에 멜본대학교 문리대에 입학하여 고전학을 공부하였으며, 1881년 3월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883년에는 석사 학위를 받아 그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어학에 있어서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자기의 동생을 포함한 학생들의 개인교사로 일하면서 공부하였는데, 이 경험을 바탕으로 데이비스는 사립학교의 설립을 결심한다.

  데이비스는 사립학교인 컬필드그래머 학교(Caulfield Grammar School)를 세우는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고 그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교사로 부르시고 계시다는 것을 받아드리고 있었지만, 가족의 생계와 관련하여 사립학교를 운영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그는 학교운영을 통해 많은 학생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데이비스는 25살 때에 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그가 교장으로 있었던 7년의 기간 동안에, 이 일이 그의 평생의 사역이라고 인정하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일기에는 계속적인 고민이 보인다. 데이비스가 설립한 이 학교는 후에 명문이 되었지만, 설립당시의 학생수는 고작 12명에 불과하였으나, 6년 만에 학생수가 96명으로 증가하였고, 그 중 32명이 기숙사에 살았다.

  데이비스가 설립한 학교는 점점 성장하였고 학교의 지명도도 차츰 높아졌지만, 데이비스는 학교를 팔고 인도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동생 마리아는 데이비스의 생각에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데이비스가 먼저 가장으로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데이비스는 1887년까지 학교를 계속 운영하면서, 주말에는 교회에서 설교를 하고 전도하였다.

  하지만 동생들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리고 어머니를 잃은 후, 데이비스는 그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학교를 잘 팔기만하면 인도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드디어 1888년 4월 28일에 데이비스는 학교를 정리하였고, 그해 8월 성공회의 바넷(Barnett) 목사에게 교장자리를 맡기고 학교를 떠났다.

  데이비스는 가능한 인도에 속히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성공회 선교부는 데이비스가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 그를 인도에 파송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성공회 멜본 교구의 감독은 목사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6개월 동안 교구내에서 디콘으로 일하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가능한 한 곧 떠나기를 원하였다.

  마침 중국에서 사역하던 성공회 선교부 총무 월프목사가,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도착한 해인 1884년 11월에 한국을 시찰하려고 방문하였는데, 이 방문을 통해 그는 조선인들을 전도할 필요성과 가능성을 본다. 그는 중국 신도 가운데서 한국에 보낼 지원자를 찾았으나, 선교부가 그들의 후원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월프목사는 중국교인들과 호주친구들의 후원을 받아, 1885년 11월에 전도사 두 사람을 부산에 파송하였다. 1887년 가을에 월프목사가 다시 부산 상황을 시찰하려고 갔는데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있는 학자 몇 사람을 만났지만 아직 기독교인은 없었다. 그 이듬해 중국에 주둔하는 성공회의 말틴(J. Martin)선교사가 부산에 갔는데, 이때 기독교에 관심을 보이는 50-60명을 만났다고 하였다.

  1887년에 월프목사가 부산을 시찰한 후에, 호주에 선교사를 요청하는 감동적인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에서 월프목사는 부산선교를 간청하였다. 컬필드교회의 메카트니 목사가 발행하는 월간 선교지 〈국내와 해외 선교사〉에 월프목사의 편지가 실렸는데, 데이비스가 이 편지를 읽고 감동을 받고 부산선교를 자원하게 된다.

 

  그는 그 신청 이유에 대해, 첫째, 인도보다 한국에서 전도하는 일이 더 긴급한 것 같고, 둘째, 인도의 기후보다 한국 기후가 자기의 건강상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셋째, 월프목사가 특히 호주 선교사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신청하자 성공회 선교부는 안수 받은 목사만이 선교사로 파송될 수 있다고 답변하여, 데이비스가 한국으로 가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데이비스는 미국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회를 설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선교회를 통해 한국에 선교사로 갈 수 있는지 알아보게 되었다. 그는 친구인 투랙 장로교회의 유잉목사와 상의하였는데, 유잉목사는 그에게 장로교회의 목사안수를 받고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에 선교사 파송청원을 하도록 권하였다.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가 데이비스의 후원을 보증하였고, 그 조건으로 빅토리아장로교회는 조선에서 선교를 시작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1888년 8월에 데이비스는 영국 에딘버러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그는 1889년 5월에 돌아와 목사 고시를 합격하여, 노회는 1889년 8월 5일에 그를 안수하게 되었다. 8월 17일에 성도 500여명이 멜본 스코츠교회(Scots‘ Church)에 모여 데이비스목사와 그의 누이 마리아를 조선의 선교사로 파송하는 예배를 드렸다. 데이비스는 다음과 같이 이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가장 큰 기쁨 가운데 선교사로 파송된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두렵고 겁도 났지만 감동적인 예배였다. 우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어떻게 우리의 사역이 실패할 수 있겠는가?"

  데이비스는 그의 누이 마리아와 함께 8월 21일에 멜본을 떠나, 28일 시드니에서 배편으로 조선을 향해 떠났다. 데이비스는 1889년 10월 4일에 제물포(지금 인천) 항구에 도착하였는데, 감리교 선교사 존스(George Heber Jones) 목사가 그를 마중하였다. 그들은 10월 5일 오전 8시에 말을 타고 오후 4시 경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서 데이비스는 비슷한 시기에 도착한 선교사 20여명을 만났다. 그는 도착한 다음 날 선교사와 외국인과 같이 예배를 드렸고, 또한 한국어 예배에도 참석하였다.

  그로부터 다섯 달 동안 데이비스는 가정교사를 두고 매일 오전에 한국말을 공부하였다. 오후와 주말에는 원두우(Underwood) 목사 내외분이나 의사 헤론(Heron)이나 감리교선교사 올린거(Ohlinger)목사와 함께 부근 동네나 성밖의 마을에 걸어 나갔다. 때로는 서 전도사와 같이 나갔다 (서전도사란 서상윤 선생이나 그의 동생 서경조 전도사를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런 경우에 서전도사가 전도하든지, 아니면 데이비스목사가 말씀을 전하고 서전도사가 통역해 주었다.

 

  그들이 이렇게 다닐 때에 그의 누이 마리아는 가정집에 출입할 수 있었으나 데이비스는 예의상 들어가지 못하였다. 마리아는 여성을 자유롭게 상대할 수 있었다. 데이비스가 서울에 있는 동안, 말을 타거나 혹은 도보로 서울 인근지역이나 수원까지 내려가 만나는 조선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복음을 전했다. 그는 한국말은 놀라운 정도로 빨리 늘어갔다.

  1890년 3월[44세]에 데이비스는 선교지를 물색하기위해 부산까지 시찰하기로 하였다. 그는 부산에 거주하고 있던 토론토 YMCA에서 파송한 선교사인 제임스 게일(J. S. Gale)목사에게 연락하고, 1890년 3월 14일에 데이비스는 그의 선생인 영생원(일기의 글씨를 정확하게 알아보기 힘들다)과 함께 자기의 짐과 팔려는 책자와 전도지를 말에 싣고 부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9년전인 1881년 7월 24일 그의 일기에는, 인도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도보로 각 마을을 다니며 전도하기로 결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인도가 아닌 한국에서 그와 같은 사역을 감당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데이비스 일행은 3월 15일 수원을 거쳐 20일에 공주와 전라남북도를 거쳐, 26일에 남원과 30일에 하동을 거쳐 31일에 사천에 도착하였다.

  데이비스는 여행을 하면서 마가복음서 등의 책자를 많이 팔았으며, 서툰 한국어로 복음전하기를 쉬지 않았다. 도보여행의 첫 두 주일 동안에 그는 잘 지냈지만, 3월 31일에 사천읍에 도착하였을 때는, 그 지방관리들의 무례한 대접을 받았다. 건강은 점점 약해졌고, 드디어 데이비스는 4월 4일 부산에 도착하였고, 다음날인 4월 5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마지막 순간을 게일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Korean Sketches》, p.249.
 "비가 많이 오는 오후에 어떤 일군이 나에게 쪽지를 갖다 주었는데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었다. “바로 와 주십시오! J. H. Davies.” 나는 우리집에서 약 5리 정도 떨어져 있는 여관에서 그를 발견했다. 그는 햇볕에 좀 그을리고, 도보여행으로 몸은 지쳐있었으나, 상태가 아주 안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그와 같이 온 일군들이 삯을 더 달라며 그를 괴롭히고 있어서,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데이비스는 내 팔에 기대어 우리집까지 걸어왔고, 내 침대에 뉘어 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일본인 의사는 데이비스의 병을 천연두라고 진단하였다. 이 선생과 나는 밤새 간호를 하였다. 다음날 정오경 폐렴 증세가 나타나자 의사는 데이비스가 곧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데이비스는 그 때까지도 의식이 있어 나에게 말을 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오후 한 시경에 평안한 모습으로 하나님 곁으로 갔다.

 

 그 날은 부활 주간 토요일 1890년 4월 5일이었다. 우리가 그의 시신을 산기슭에 있는 외국인 묘지에 매장하였다. (게일은 다음날 데이비스의 누이 마리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일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그 편지가 Edith A. Kerr, 《Th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 in Korea 1889-1941》, 174-75에 기록되어 있다.)

  데이비스는 부산 복병산에 묻혔고, 그의 묘비에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 죽는 것도 유익하다 (To Live Christ To Die Gain)”라고 새겼다. 《초량교회 100년사》, 54.

 

  데이비스는 천연두 예방접종을 멜본에서 할 수 있었으나,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가려는 마음에 접종을 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데이비스는 조선에 6개월을 사는 동안에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기었다.

 

  원두우(Underwood) 는 데이비스에 대하여, “열렬하며 타고난 재능이 있으며, 성인이고 한국에 온 가장 귀중한 선교사 가운데 하나였다.”고 평가하였다. (H. C. Underwood, 《The Call of Korea》, p. 140).

2005.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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