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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헨리 데이비스- 박용규 교수의 이야기 교회사

영국신사77 2008. 6. 15. 22:03

                          ☞ 박용규 교수의 이야기 교회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

 

  한국 교회는 처음부터 순교의 터전 위에 세워졌다. 수많은 외국인 젊은이가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1890년 4월, 호주에서 한국에 도착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조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도 그중에 한 명이다. 데이비스는 동생 메리(Mary)와 함께 은둔의 나라로 달려왔다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뒀다.

 

   1889년 10월, 한국에 도착한 데이비스는 언더우드의 집에서 5개월간 머물면서 한국 선교를 준비했다. 그는 서울과 서북 각 도에 이미 선교가 시작된 것을 확인한 후, 이듬해 3월에 복음의 불모지인 부산으로 향했다. 충분한 휴식도 없이 복음을 전하며 수원, 남원, 하동을 거쳐 부산으로 향하던 데이비스는 부산에 거의 다 와서 천연두에 감염되고 말았다.

 

  4월 4일에 “빨리 와 주세요!”라는 급보를 받고 부산에서 활동하던 제임스 게일(James Gale)이 달려가 그를 병원에 입원시키고 정성스럽게 간호했지만 허사였다. 다음날에 데이비스는 한국에 도착한 지 6개월 만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제임스 게일은 한국인의 도움으로 그를 부산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언덕에 묻었다.

 

  그날에 게일은 데이비스의 여동생 메리에게 편지로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맺었다.

 

  “내가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다만 내가 얼마나 깊이 당신의 슬픔에 동참하고 있는지 하나님은 아실 것입니다. 그는 내가 간절히 보기를 원했던 나의 형제였습니다….

 

                                                                                     -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형제 된 제임스 게일.”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소식을 전해 들은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한국 선교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1890년 5월 7일자 호주 장로교해외선교위원회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선교 사역에 대한 데이비스의 강한 헌신, 학자로서의 탁월한 능력, 놀라운 기독교 삶의 일관성,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데이비스의 매력적인 힘은 성공적인 희망 그 자체로서 새로운 선교를 추진할 수 있도록 대단한 자극을 주었다.”

 

  이듬해 9월 6일에 호주 장로교 여선교회 연합회와 빅토리아 장로교회 청년연합회는 맥케이 부부와 벨 멘지, 진 패리, 파셋이라는 세 명의 여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했다. 그해 10월 12일에 도착한 이들은 부산 초량을 거점으로 진주, 마산 등지에서 선교를 시작해 놀라운 결실을 거뒀다.

 

  조셉 헨리 데이비스의 죽음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부산과 경남 지역의 선교는 요원했을 것이다. 바로 그의 순결한 죽음이 한 알의 밀알이 된 것이다.

 

                                                                                                               박용규/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