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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 [閔泳翊]

영국신사77 2008. 6. 14. 07:03

민영익 [閔泳翊]

 

1860(철종 11)∼1914. 조선 말기의 문신·개화사상가·예술인.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우홍(遇鴻)·자상(子相), 호는 운미(芸楣)·죽미(竹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 사호(賜號)는 예정(禮庭)이며, 아호·당호 40여 개를 사용하였다.

태호(台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송씨(宋氏)이다. 1875년(고종 12) 승호(升鎬)와 그의 아들이 죽은 뒤 양자로 입양되어, 민비의 친정 조카로 이른바 ‘죽동궁(竹洞宮) 주인’이 되었다.

187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 참의가 되었으며, 개화당 인사들이 그의 사랑에 자주 출입하였다. 1881년 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經理統理機務衙門軍務司堂上), 별기군(別技軍)의 교련소당상으로, 1882년 7월 임오군란 이전까지 윤웅렬(尹雄烈) 등과 별기군의 실질적인 운영 책임자였다.

신식군대와 구식군대 사이의 갈등과 마찰로 인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민씨척족세력의 거물로 몰려 가옥이 파괴당하였다. 그리고 군란 진압 후 박영효(朴泳孝)를 정사로 하는 사죄사절이 일본으로 파견될 때, 김옥균(金玉均) 등과 함께 비공식 사절로 3개월간 일본의 개화 진행 상황을 시찰하였다.

이어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權知協辦交涉通商事務)로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해관사무를 교섭하였다. 그리고 1881년에 신설된 통리기무아문이 1882년 외아문과 내아문으로 개편될 때, 김옥균과 같이 부교사협판(富敎司協辦)이 되었다.

1883년 5월 주한 미국 공사 푸트(Foote, L.H.)가 내한하자, 그 해 6월 이에 대한 친선사절 보빙사(報聘使)의 정사로 임명되어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곳에서 대통령 아서(Arthur, C.A.)를 두 차례 만나 한글로 작성된 국서를 주며, 양국간의 우호와 교역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어 세계박람회·시범농장·방직공장·의약제조회사·해군연병장·병원·전기회사·철도회사·소방서·육군사관학교 등 공공기관을 시찰하였다.

특히, 워싱턴에서 내무성 교육국 국장 이턴(Eaton, J.)을 방문하여 미국의 교육 제도에 대해 소개받았다. 그리고 교육국사(敎育局史)와 연보를 기증 받았다.

그 밖에 우편제도·전기시설·농업기술에 관심을 보였는데, 뒤에 우정국 설치, 경복궁의 전기설비, 육영공원(育英公院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 등을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뒤에 주한 미국 공사 푸트를 통해 육영공원 교사 선발을 국장 이턴에게 의뢰하여, 뉴욕의 유니온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의 신학생 헐버트(Hulbert, H.B.)·번커(Bunker, D.A.)·길모어(Gilmore, G.W.)의 3명이 파한되었다.

또한, 볼티모어시에서 가우처(Goucher)여자대학 학장인 가우처를 만나 뉴욕 감리교 선교부에 조선에 대한 선교 기금을 희사할 것을 요청하여 선교사 파견의 교두보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The Smithsonian Institution)에 조선 약용 식물의 표본을 기증하여 최초의 문화 교류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타작기·벼베기기계·저울 등 농기구 18품을 구입하여 귀국하였다. 당시 부사는 홍영식(洪英植), 서기관은 서광범(徐光範), 수행원은 변수(邊樹, 邊燧)·유길준(兪吉濬) 등 개화파 인사들이었다. 1884년 5월 유럽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그 뒤 혜상공국총판(惠商公局摠辦)·이조참의·금위대장·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884년 10월 친군영(親軍營) 실시 뒤 우영사(右營使)로 있으면서 개화파를 압박하였다. 그런데 그 해 12월 개화당의 김옥균 등이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서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전신에 자상(刺傷)을 입었다.

그러나 홍영식의 도움으로 구출되어 미국인 의사 알렌(Allen, H.N.)의 치료를 받아 3개월 만에 친군영에 복직되었다. 그 뒤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파견하였다.

1885년 초 임오군란 후 청나라에 납치, 유폐된 흥선대원군의 회국 의사를 표명해 온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과 대원군의 귀국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톈진에 가서 대원군의 회국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 뒤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로서 지리국(地理局)·군무국(軍務局)의 총판을 겸직하고, 이어 한성부 판윤과 병조 판서를 지냈다.

1886년 정부의 친로거청정책(親露拒淸政策)을 반대하는 한편,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이러한 사실를 밀고하였다가 정치적 위협을 느껴, 1887년 내탕금(內帑金)을 가지고 홍콩과 상해(上海) 등지를 전전하였다.

귀국하여 통위사(統衛使)가 되었고, 1888년 6월 연무공원판리사무(鍊武公院辦理事務)로서, 학교의 운영 담당 위원이 되어 한규설(韓圭卨)·이종건(李鍾健) 등에게 실무를 맡도록 하였다.

1889년 5월 관세를 담보로 외무 고문 데니(Denny, O.N.)와 프랑스 은행으로부터 200만냥의 차관 계약을 맺어, 그중 130만냥으로 종래 차관을 청산하고, 나머지 70만냥으로 정부재정을 재건해 보려고 하였으나, 위안스카이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어 판의금부사, 1894년 선혜청당상이 되었으나, 그 뒤 고종의 폐위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홍콩·상해 등지로 망명하였다. 그 후 일시 귀국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친일 정권이 수립되자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행서에 능하였으며, 많은 묵화 중 묵죽도(墨竹圖)·석죽도(石竹圖)가 전하며, 필세와 화품이 뛰어났다. 인영(印影)을 즐겨, 중국 문인화의 대가이며 전각(篆刻)으로 유명한 오창석(吳昌碩)과 30년의 교류중 300여 개의 인장을 받아 썼으며, 그 가운데 213개가 ≪전황당인보 田黃堂印譜≫와 ≪오창석인보 吳昌碩印譜≫에서 확인된다.

≪참고문헌≫ 日省錄
≪참고문헌≫ 承政院日記
≪참고문헌≫ 高宗實錄
≪참고문헌≫ 甲申日錄
≪참고문헌≫ 梅泉野錄
≪참고문헌≫ 大韓季年史
≪참고문헌≫ 使和紀略(朴泳孝)
≪참고문헌≫ 陰晴史
≪참고문헌≫ 近世朝鮮政鑑(朴齊炯)
≪참고문헌≫ 湖巖全集 Ⅲ(文一平)
≪참고문헌≫ 日韓그리스도敎交流史(吳允台, 新敎出版社, 1968)
≪참고문헌≫ 韓國開化史硏究(李光麟, 一潮閣, 1969)
≪참고문헌≫ 開化黨硏究(李光麟, 一潮閣, 1973)
≪참고문헌≫ 新朝鮮史(朴殷植, 博英社, 1975)
≪참고문헌≫ 한국사 14·16(국사편찬위원회, 1975)
≪참고문헌≫ 韓國史講座 Ⅴ-近代篇-(李光麟, 一潮閣, 1982)
≪참고문헌≫ 閔泳翊의 藝術과 生涯(金晴江, 月刊文化財 8,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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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 [閔泳翊]

 

개요

1860(철종 11)~1914.

한말의 정치가.

민영익
민씨세도정권의 중추적 인물이다. 본관은 여흥. 자는 우홍(遇鴻)·자상(子相), 호는 운미(芸楣)·죽미(竹楣)·원정(園丁)·천심죽재(千尋竹齋)이며, 사호(賜號)는 예정(禮庭).

 

 초기 관직생활

 아버지는 태호(台鎬)이며, 어머니는 송씨이다. 1875년(고종 12) 민승호(閔升鎬)가 폭사한 뒤, 양자로 입양되어 민비의 친조카가 되었다. 187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조참의를 거쳐, 1879년 도승지·호조참판에 이르고 1880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정계에 진출한 뒤에 개화파 인사들과 어울리면서 개화사상에 호의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881년 경리통리기무아문군무사당상(經理統理機務衙門軍務司堂上), 별기군의 교련소당상을 역임했는데, 1882년 임오군란 때까지 윤웅렬(尹雄烈)과 함께 별기군의 사실상 책임자로 있었다. 임오군란의 수습책으로 제물포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으로 사절단을 파견할 때 김옥균과 비공식사절로 동행하여 일본의 개화된 문물을 보고 돌아왔다. 이후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로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해관사무를 교섭했다.

 

                                     미국 방문과 그후의 활동

 1882년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다음해 5월 주한공사로 L. H. 푸트가 조선에 오자, 조선정부는 친선사절로 보빙사(報聘使)를 미국에 파견했다.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하여 부대신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수행원 유길준·고영철(高永喆)·변수(邊燧)·현흥택(玄興澤)·최경석(崔景錫) 등 8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은 1883년 7월 하순 인천을 출발해 나가사키[長崎]·요코하마[橫濱]·샌프란시스코·시카고·워싱턴을 거쳐 뉴욕에 도착했다. 9월 18일 미국 대통령 C. A. 아서를 접견하고 국서를 전달했다. 그후 보스턴으로 가서 세계박람회와 공업 제조회관을 비롯하여 여러 공공기관을, 뉴욕과 워싱턴에서는 정부 각 기관을 시찰하면서 미국 제도에 관한 각종 지식을 습득했다. 그가 미국 방문기간 동안 얻은 지식들은 뒤에 우정국(郵政局) 설치, 경복궁의 전기설비, 육영공원, 농무목축시험장 설립·운영 등의 실현 계기가 되었다. 그뒤 유럽을 통해 귀국한 뒤 혜상공국총판·이조참의·금위대장 등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이전에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개화파와는 거리를 두었다.

 

 개화파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킬 때 제거대상자로 지목되어 큰 부상을 입었으나, 홍영식의 도움으로 구출된 뒤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인 H. N. 알렌의 치료를 받아 3개월 만에 회복되었다. 그뒤 친군영(親軍營)에 복직했다.

 

 청나라가 친러시아적으로 되어가는 조선에서 민씨척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임오군란 때 납치한 흥선대원군을 돌려보내려 하자, 1885년초 청나라에 들어가 이홍장(李鴻章)을 만나 이를 반대하는 민씨정권의 입장을 밝혔다. 청나라의 반대로 협상이 결렬되자 홍콩·상하이[上海]를 전전하다가 귀국했다. 귀국 후 협판내무부사·병조판서가 되었다. 1888년 연무공원판리사무(鍊武公院辦理事務), 1894년 선혜청당상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글씨와 그림에 조예가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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