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초로 양화진에 묻힌 헤론(John W. Heron:惠論)선교사
존 헤론(John W. Heron:惠論, 1856-1890)은 1856년 6월 15일 영국에서 출생하여,
1872년 그가 16세 때 미국으로 이민왔다.
먼저 헤론이 한국의 선교사가 되려고 작정했을 때, 어떤 장벽이 있었나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네 가지 큰 장벽
1. 친구 : 헤론이 한국의 선교사가 되려고 작정했을 때,
오래 전부터 의사의 길을 함께 하자고 약속하고 같은 길을 걸어온 그의 친구는
실망과 배신감까지 나타내며 헤론의 뜻을 돌이키려고 한동안 고심했다.
2. 학교 : 테네시주 메리빌 대학과 뉴욕종합대의과대학을 졸업했는데,
이민 11년만에 종합대학 의과대학 개교이래 최우수 성적의 영예를 안고 1883년에 졸업.
목사인 아버지의 감사 기도. 모교에서 후배 양성(의사)을 위해 교수사역을 해 줄 것을 제안.
끈질기게… (안정되고 장래가 보장된 튼튼하게 다져진 길.
의미도 있고, 보람도 찾을 만한 일로 생각하기 쉬운… )
3. 해티 : 존스보로 의과대학 교수의 딸, “코리아가 나라 이름이에요.?
존 헤론의 앞길은 열려 있어요. 존은 그 놀라운 실력을
이 넓은 나라, 이 많은 인구를 위해 쓰여져야 해요.
존은 더 많은 사람, 더 큰일을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곧 이어지는 해티의 갈등 … 존의 기도 …
"주여! 이 여인을 나의 아내로 허락하신 것이라면
그 마음을 열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코리아를 사랑하게 해 주시고, 함께 가게 해 주시옵서소."
해티의 결심 … 본격적으로 방해 하고자 했다.
해티의 코리아 연구 … "코리아 위험, 미개, 더럽기 짝이 없고,
가난, 굶어 죽는 일이 태반, 일본이 노리고 있고 중국도 계속 손을 뻗치고 있고,
러시아도 한몫 보겠다고 하고, 왕실의 권력다툼은 치열 ……."
존.W.헤론
4. 장로교 선교본부 : 조선이 선교 개척지라는 정보는 일본에 가 있는 선교사들을 통해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반대 의견은 '정치 정세가 시끄럽고 박해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외지 선교본부의 수석총무는 '조선 입국은 시기상조'라고 발표하였다.
헤론의 결심과 선교부.
그러나 이러한 모든 어려운 장벽들이 있었지만,
세계를 품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 장벽을 제거해 나가게 된다.
1. 엘리우드(F. F. Ellinwood) 목사의 핍박은 키리스천에게 축복이라는 설교
2. 프레데릭 마퀸드가 1884년 2월 유산 5천 달러를 기부하였고,
그 외 이름 없는 기부자들이 앞다투어 헌금함으로써 조선 선교의 틀이 짜여져 갔다.
3. 1883년 일본 주재 녹스(George Knox)선교사의 편지
"이곳 일본에 조선 유학생이 30명이며, 그중 두 학생이 세례를 받았고,
그 밖에도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목사 두 사람과 의사 한사람만 있으면 사업개척이 충분.
내년 4월까지는 선교사가 조선땅에 상륙해야 함.
우리 교회에서 할 수 없다면 다른 교회에서라도 그 자원자를 찾아 주실 것.”
4. 미국 신앙부흥 운동 (선교운동) : 미국 남북전쟁의 상처후
무디(Dwight L. Moody)의 부흥운동으로 다시 선교의 불길이 타 올랐다.
5. 길버트 리이드 중국 선교사 편지 (1884년 4월 14일):
“ 지금 조선 선교지의 즉시 점유를 계속 열망.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교사와 의사의 자격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사나 의사는 선교를 목표로 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와야 합니다.
교사는 영어를 가르치기에 충분한 서적을 가지고 와야 하겠고,
의사는 각종 약품과 의료기를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금년 가을까지는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두 사람을 꼭 파송하여 주십시오.
...만일 사람을 곧 파송하여 몇 달 동안 일본에 머물게 하면서,
그곳에 있는 선교사들 및 조선사람들과 의논하고 연구하면,
여러 가지 준비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 조선에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된다.
헤론의 결심
당시 헤론의 모교 의과대학에서는 헤론에게 의학부에 머물러 더 연구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헤론은 병들어 죽어가는 가난한 나라에 가서 생명을 살리는 운동을 해야 한다며,
미 북장로교 선교부를 방문해 한국 의료선교사로 지원했다.
지원서를 접했던 미 북장로교회는 깜짝 놀랐다. 촉망 받는 유능한 의사가
낙후된, 그것도 위생시설이 열악한 곳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겠다는 말에 모두들 놀랐다.
“의약품과 의료기기 얼마를 준비할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떠나겠습니다.”
선교부에서는 다른 지원자가 없었기에,
그를 1884년 4월, 미국에서 한국으로 파송하는 “장로교파 최초의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으며,
같은 해 해티 깁슨[Hattie(해리어트 Harriet) Gibson]과 결혼했다.
그리곤 선교부는 더 지켜보자고 말했다. 그러나 헤론은 빨리 가기를 원했다.
“조선에 제일 먼저 도착하는 선교사가 되고 싶다” 고 말했다.
본부는 일본에 머물러 정세를 살펴보라는 것이었다.
1884년 4월 헤론 부부는 일본에 도착한 뒤,
이수정과 헵번의 안내를 받으며 헵번의 집에 얼마동안 머물며,
한국어도 배우고 선교사로서 필요한 자질을 배우며.
당시 조선의 정치 상황이 불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1885년 6월 20일 한국땅에 들어 왔다.
헤론의 입국
헤론은 비록 한국 선교사의 선두주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한국 의료선교에 큰 공을 쌓았다.
처음에는 제중원에서 의사로서 진료에만 임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도만이 신앙의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고 믿고, 이미 법률로 예배행위가 금지됐는데도 서울에 도착한지 일주일후만인
1885년 6월28일 밤 알렌부부, 스크렌튼 의사의 어머니 등과 함께 예배를 시작했다. 비록 외국인
중심의 예배였지만, 한국에서의 첫 예배는 제중원에서 시작되었다. 예배가 공식 금지되었던
한국땅에서 첫 예배를 드렸던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헤론의 빛나는 사역
그후 헤론은 알렌이 사임한 후인 1887년 9월, 제중원 원장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고종 임금의 시의(侍醫)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하여 혜참판(惠參判)이라 불렸다.
헤론은 이처럼 그 많은 업무를 자신이 떠맡게 되었지만, 이럴 때마다 그는 이것도
하나님의 큰 축복이라며 열심히 일했다.
헤론이 한국 선교는 자신의 몫으로 알고 본국에 보낸 서신중 이런 내용이 있다.
“단순히 나 자신의 의학 기술을 시행하는 데에 있지 않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돌아가신 구세주를 이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열망합니다”
이처럼 헤론은 위대한 의사는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데 힘을 쏟았다.
헤론은 제중원 원장으로 취임한 뒤 점점 바빠지기 시작했다.
전임자 알렌이 다소 관료적인 권위를 갖고 진료를 한데 비해, 헤론은 그렇지 않았다.
바로 한국의 가난한 환자를 진료하는 일이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란 신념을 갖고 임했던 그의 사역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이러한 일로 제중원은 점점 확장되고 있었다.
참으로 장한 일을 했던 헤론은 그 누구보다도 책임감이 강한 의사였다.
헤론은 제중원 원장이라는 직책으로만 그의 사명을 한정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인들이 영과 육이 함께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늘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주일이 되면 제중원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자신은 의사였기에 예배 인도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렌튼 등이 했다.
스크렌튼은 목사이면서 의사였기에 이들과 함께 돌아가며 설교하고 주일 예배를 인도했다.
이 예배는 제중원이 구리게(명동)로 이동한 뒤에도 계속 진행됐다.
일본에서 이수정이 발간했던 마가복음만으로는 말씀과 전도에 부족함을 느꼈던 이들인지라,
1887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헤론, 스크렌튼, 알렌 등은 모여 성서를 번역하기로 했다.
이들의 노고는 우리나라 성서번역작업의 기초를 닦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후 1889년 10월 호주 장로교회에서 파송받은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 선교사가
서울에 도착하자, 선교사 공의회가 조직됐고 초대 회장에 헤론, 서기에는 데이비스가 선임됐다.
이들은 1890년 6월 새로 한국에 도착했던 선교사들을 대거 참여시켜
대한성교성회(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창설했다.
헤론의 의연한 임종
헤론선교사는 가방에 항상 성경책 · 진료기· 비상약품 등을 챙겨 다녔다.
서울에서는 그래도 의료 선교사들이 있어 전염병 퇴치운동에 큰 보탬이 되었지만
시골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안타까워했던 헤론은 제중원 입원 환자들을 간호사에게 맡기고,
따갑게 내리쬐는 태양볕을 받으며 진료가방을 챙겨들고
100리이상 떨어진 시골지역을 다니며 전염병을 치료했다.
그러나 결국 그도 전염병 때문에 쓰러졌다.
급히 스크래톤 박사가 휴가를 앞당겨 병원에 도착했다.
헤론은 자기가 이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책임감으로 무리를 했던 것이다.
스크랜톤 박사는 게일에게 남한산성에서 선교사들과 함께
휴가중이던 헤론의 가족을 급히 데려오라고 했다.
이처럼 헤론은 한국에 온 지 5년만인 1890년 7월 26일에, 자신의 병원인 제중원에서
부인과 두 딸을 남겨 놓은 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그 무더운 7월, 입원해 있던 한국인 환자도 울고, 동료 선교사들도 울었으며,
그를 알고 있는 정부 고관들도 울고 말았다.
그는 모든 고통을 자신을 구원한 예수님께 맡기고,
조용히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천사의 안내로 하늘로 향했다.
헤론은 죽기전 자신을 향해 눈물흘리고 있는 부인의 손을 잡고,
두 딸과 한국인 환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위해 그의 생명을 바치었습니다. 주님을 믿으십시오!”
이 얼마나 훌륭한 유언인가!
그의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쓰여 있다.
헤론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자, 그의 시신을 안장하는 것이 문제였다.
원래 외국인들이 사망하게 되면 인천 제물포의 외국인 묘지로 가야 하지만,
날씨는 가차없이 모든 것을 푹푹 썩게 하는 7월인지라, 인천까지 시신을 운구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와 논의 끝에 양화진을 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고 한국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묘지로 허락되지 않았다.
양화진은 본래 언더우드 선교사 등이 자기네 주거지로 삼으려고 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정동 미국공사관 구내에 임시로 매장토록 하고, 안에 임시로 묘를 설치하니,
시민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외교적인 차원에서 미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 5개국 공사의 공동 명의로
양화진을 외국인 묘지로 청원하고, 알렌의 도움으로 헤론이 사망한지 3개월만인 1890년 10월 24일, 정부의 허락을 받아, 4대문밖 버려진 땅이었던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 양지바른 땅에, 헤론의 시신을 안장하게 되었다. 이때 헤론 묘지의 관리인은 최봉인(후에 서교동교회 설립교인과 초대장로로 임직)이었다.
한편 헤론의 미망인 해티와 두 딸은 이역만리 한국에 남게 됐으나, 그들을 도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캐나다 선교사로 1889년 부산에 상륙해 선교 활동하던 평소 헤론과 가까웠던 친구 게일(JS Gale) 선교사가 독신이어서, 1892년 헤론선교사 미망인과 결혼을 하고 어린 두 딸(5살 Sarah Anne과 3살 Jessie Elizabeth)도 가족이 됐다.
게일과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으며, 부인 해티는 1907년 8월 두 딸과 한국을 떠났다가 스위스에서 돌아왔으나, 1908년 3월 부인 해티가 결핵을 앓다 먼저간 헤론 선교사의 곁으로 훨훨 날아가 버렸다. 선교부에서는 그녀를 첫 남편 헤론이 묻혀있는 뒷자리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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