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를 찾아서] 개신교 성지⑪-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 한국을 사랑했기에 떠나지 못한 '557인의 푸른 넋' |
◈사신조차 넘보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인
대구 남산동 천주교대구대교구청내 성직자 묘역이나, 동산동 3·1운동길을 따라 올라가면 만나는 대구 은혜 정원, 서울 마포나루 양화전 선교사 묘역은 공히 산 사람이 도저히 주지 못하는 마음의 위안과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신기한 힘을 지니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로만 치닫고, 사람 인심은 그저 나 혼자 편하고 즐겁고 또 기쁘면 그만이라는 ‘편의제일주의’로 치닫는데, 그러한 현실에서는 도저히 충족되지 않는 그 무엇을 이곳 ‘죽은 이들의 안식처’인 선교사 묘역에 오면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가서 사신(死神)조차 떼어가지 못하는 삶의 향기, 그리스도의 온기를 지닌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래야 이 혼돈의 시대에 붙잡고 갈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즘 서울행은 별로 힘들지 않다. 대구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가는 시간이나 대구에서 서울 도심까지 가는 시간이나 별반 차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땅값 집값 사람값이 다 싼 대구를 유통 물류 교육 의료서비스의 중심쯤으로 잡고, 서울과 인천을 대구의 날개나 관문쯤으로 여기는 발상의 전환도 가능하지 않겠나 싶은 발칙한 꿈을 꾸며, 서울 마포구 양화진 선교사 묘역을 찾아나섰다. 한양땅에 닿으니 당장, 몇열 종대, 횡대로 사열하듯이 그렇게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 인파를 타고 마포구 합정역에 내렸다. 지하철 합정역(2호선, 6호선) 7번 출구로 내려서니, 어디선가 비릿한 피냄새와 죽음보다 더한 슬픔을 넘어 그리스도의 향기가 실려온다.
◈안식을 취하는 557명 선교사와 그 가족
일찍이 나라의 문을 열어 개화세상을 꿈꾸다가 실패한 3일 천하의 주인공 김옥균의 혼령이 ‘100년간의 고독’을 깨고 살아온 듯한 느낌을 받으며 양화진 선교사 묘역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을 주도하다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이곳 양화진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그의 무덤은 여기가 아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 입구에 들어서니 대구 개신교 성지 ‘은혜 정원’과 성격은 같지만 규모 면에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서울과 대구의 경제력 편차만큼이나…. 대구의 은혜정원이 동산병원 선교 100주년 기념관 앞 부지 일부분에 불과하다면, 마포 양화진 선교사 묘역은 깊고 푸른 성역이다. 묻혀 있는 벽안의 선교사들은 살아생전, 조선사람을 위해서 다양한 갈래로 헌신한 삶의 궤적을 지녔다.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또 다른 생명으로 향하는 하늘 관문임을 느끼며 돌아온 양화진 선교사 묘역은 한때 소유권 분쟁, 지하철로 인한 이전 논란을 거치면서 쓰레기더미였던 시절이 있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헐버트
양화진 선교사 묘역과 연결된 양화진 공원 너머가 바로 천주교 성지 절두산이다. 예로부터 송파진 한강진과 함께 서울을 지키는 삼진(三鎭) 가운데 하나로 나루터의 구실뿐 아니라 외침과 민란에 대비하여 상비군이 주둔하던 양화진은 중국의 적벽이나 다름없는 절경을 지녔다고 해서 한성인들의 여름 별장지로 이름 높던 곳이었다. 그 양화진의 비경을 자랑하는 잠두봉(蠶頭峰)이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절두산(切頭山)으로 바뀐 것은 병인박해와 연관이 있다. 천주교 성지로 유명한 절두산, 조선사람의 나일강인 한강을 피로 붉게 물들인 절두산 성지는 다음에 소개할 예정이다. 양화진 묘역에 묻힌 선교사와 그 가족들은 모두 557명이다. 양화진 동산에 올라서니 어려운 시절, 한국의 은인을 마다하지 않았던 헐버트 묘비가 방문객을 반겨준다. 헐버트는 을사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과 재정권이 강제로 일본에 빼앗기기 직전, 고종의 밀사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파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일본과 이른바 ‘가쓰라태프트밀약’을 맺고, 미국의 이권 보장을 위해 일본의 야망을 묵인하던 상태여서 헐버트는 고종의 밀서를 친일인사들로 구성된 미국 정부에 접수시키지도 못하고 자신의 조국을 원망하며 되돌아왔다. 헐버트는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사실을 한국정부에 알리고, 그것을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외교통로로 활용하기를 권고하였고, 이에 고종은 1907년 헤이그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사람의 밀사를 파견하였다. 헐버트 자신도 헤이그에 가서 유럽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였지만, 일본의 압력으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어달라
헐버트는 루스벨트의 대한정책을 평생 비판하였으며,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87세 노구를 이끌고 내한하였다가 여독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삶을 마감하였다. 헐버트는 “웨스트민스트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고, 그의 유해는 한 살 때 우리 땅에서 죽은 아들 쉘던과 함께 양화진에 묻혀 있다. 헐버트의 옆자리는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피워내는 배움의 터전 배화학당을 설립하고, 학당내에 교회를 설립하여 한국 여성들이 복음내에서 새롭게 발전하도록 평생 봉사한 캠벨의 안식처이다. 헐버트 묘비에서 오른쪽 통로 건너편에는 백정과 억눌린 이들의 편에서 평생 차별없는 복음을 전했던 무어 선교사의 무덤이 있다. 중앙통로쪽에는 한국근대여성교육과 여성전도의 선구자인 스크랜턴 여사의 묘비가 서있다. 스크랜턴 부인은 처음 자신의 집에서 학당을 열었는데, 이게 이화학당의 효시이다. 이곳에 묻힌 첫 안장자는 헤론이다. 헤론은 국내에 들어온 첫 의료선교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1890년 7월 28일 조선 광혜원 제2대원장으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빈민진료에 몰두하던 중 이질에 걸려 운명을 달리했다. 헤론이 묻힌 이후 지금까지 117년 동안, 이곳을 안식처로 삼은 557명 선교사와 그 가족들은 살아생전의 부귀영화보다 하나님 말씀, 복음실천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경상도 땅에 처음 복음의 발길을 전해 준 베어드 선교사는 묘역의 가장 안쪽 아래에 있다.
◈신앙인조차 일반인처럼 곧잘 우(愚)를 범하는 현실
신앙의 자유가 완전히 인정되고, 또 세상에 즐길거리가 너무 흔한 오늘날 신자들은 의심의 올무에 자주 빠진다. 죽음을 이기는 생명, 하늘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이 단순하고 변함없는 진리를 너무나 쉽게 팽개친다. 세상 잣대를 따라 땅투기를 하기도 하고, 남의 눈에 피눈물이 나게 만들기도 하고, 하늘 앞에 거리낄 것 없는 양심을 지키기보다는 등 따습고 배부른 현실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장삼이사들이 다 그렇다. 과거 종교의 자유가 없던 시절에는 그렇게나 얻기 위해 피흘려 투쟁하고, 목숨 바쳐 지켰는데, 그게 왜 그렇게 소중한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냥 넘어간다. 그렇기에 이곳 ‘양화진 선교사 묘역’은 더 특별난 성지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다가오고, 살아가는 것처럼 죽음도 일상처럼 순서없이 다가오는 것임을 예고하는 ‘양화진 선교사 묘역’은 역설적이게도 너무 아름답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의 주인공들은 마태오 복음 9장 24절 말씀처럼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니’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조선땅에서 영면을 취하는 557명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무언으로 우리에게 전하는 말, 주님의 품안에서 믿음으로 봉사하고 남을 위해 헌신하자.
글·사진 최미화기자 magohalm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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