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언더우드와 부인 홀튼 의료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선교사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 출생, 1872년 그의 나이 13세 때 미국으로 이민.
뉴욕대학 입학, 1880년 뉴욕대학 재학중, 뉴 브룬스위크에서 미국의 전국 신학교연맹의 정식 창립을 보게 되었고, 그 후 이 연맹은 해마다 신학교가 있는 곳에서 대회를 가지며 신학도들의 목표를 설정해 나갔다. 그 해 초에 프린스턴 신학교 학생들은 새로운 결의를 행동으로 옮기기에 이르렀다.
“진정한 선교부흥운동이 있어야만 되겠다. 그것은 교회에서 특히 신학생들 중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선교문제에 대하여 각 신학교 사이에 어떤 연락 통신기관이 있어야겠다.”
“사역자는 금식기도일을 정하고 선교에 일생을 바치는 특별기도를 시작하자”
언더우드는 신학교와 신학생들의 순수한 정열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본질적으로 선교에 있다. 선교열이 모자란다는 것은 곧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뉴욕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뉴 브른스위크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는 인도를 선교지로 삼고 준비하고 있었다. 회화를 할 정도로 인도말을 배웠다. 애도니람 저드슨에게 많은 도전을 받았다. 그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뜨거움을 느꼈다.
1883년 10월[24세], 그는 뉴 브룬스위크 신학교의 대표로 코네티커트 주 하트포드 신학교에서 열린 신학교 연맹 대회에 참석했다. 뜨겁고 아름다운 모임이었다. 각 신학교 대표로 모인 젊은이 한사람 한사람의 모습은 거룩한 사명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들 한 사람 한사람의 영혼은 이를 바 없이 향기로웠다. 빛나는 눈에 뜨거운 심장은 어떠한 일이라도 감당해내고 남음이 있으리라 믿어졌다. 언더우드도 눈물로 세계를 가슴에 품고 기도했다.
1883년 신학교연맹대회 때 처음으로 알버트 울트만스 박사가, 조선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선에 누가 복음을 들고 갈 것인가 … ? 1,300만 민족이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채 ,가난과 질병과 학대 속에서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드디어 문호를 열었습니다. 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언더우드는 동양권의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미 인도를 작정하고 준비하고 있던 터여서, 누구인가 조선으로 갈 사람이 따로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권유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무반응이었고, 개인적으로 친구에게도 권유해 보았지만 가는 사람이 없었다.
왜들 이럴까? 헌신을 맹세한 사람들이 왜들 미온적이고 부정적일까? 복음의 처녀지, 주님이 기다리시는 그 땅으로 갈 선교사가 이렇게도 없다는 말인가? 그때 돌연히 강력한 반문의 소리가 그의 내면을 두드렸다.
“너는 왜 못가느냐 ?”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나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히 메시지였다. “그렇다. 왜 나는 못가는가?” 그리고 그는 또 한번의 희생을 치루었다. 인도말을 배우고 준비해 온 것을 모두 조선을 위해 포기해야 했다.
그는 조선을 선교지로 정하고 나서 교회와 선교부에 요청을 했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거절당했다.
그 때 뉴욕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조선의 길은 막혀 있고 열려있는 문은 있고, 그래서 거기로 가기로 하고 편지를 봉하고 우체국에 마악 집어넣으려고 하는 순간,
“그래 조선으로 갈 사람이 없다는 말이냐? 조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소리가 쟁쟁하게 들려 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편지를 호주머니에 집어넣게 했고, “다시 선교부로 가봐라. 어떤 방법이 있을 것이다. 포기하지 말고 다시 한번 시작하여라” 는 소리가 …….
그는 장로교 본부가 있는 센터 스트리트 23번지를 향해 떠났다. 그는 거기에서 엘린우드 박사를 만났다. 엘린우드 목사는 역시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장로교 본부 회의때 언더우드는 조선 선교사로 임명을 받게 된다
1884년 7월 28일[25세], 호리스 G.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본부가 임명한 최초의 선교 목사가 되었다. 임명되고도 즉각 입국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라, 거의 다섯 달을 더 있다가, 그해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행 기선을 타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이수정을 만나 조선어를 배운다. 그리고 1885년 4월 역사적인 조선행 기선을 타게 된다. 미쓰비시 선박회사의 “체료 마루호” … 역사적인 배 … 그 배에는 아펜셀러 부부와, 조선의 실정을 살펴보기 위해 파견된 미국 회중교회 선교본부의 테일러 박사와 스쿠더 박사도 함께 있었고, 마침 고종의 특사로 일본을 방문한 뒤 귀국길에 올라 있던 묄렌도르프도 그 배에 함께 타고 있었다.
* 언더우드 목사는 병원에서 의사 일을 돌보며 또한 조선학생들에게 의학을 가르치는 일, 고아원 운영, 사전 편집 … (후배들을 위한 조선어 사전) 언더우드 목사는 열심히 노력하여 선교사들 중 가장 조선말을 잘하게 되었다.
아펜셀러 선교사와 함께 북부를 전도여행 하며 황해도 솔내에 있는 교회를 둘러보고 믿는 자들을 만나기도 하며 의주, 평양에 들어갔다.
1887년 9월 27일[28세] 집 사랑채에서 첫 예배를 드린다. 14명의 선교사들과 선교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이 예배가 새문안교회의 첫 예배였다. 서상륜과 백홍준이 그 교회 첫 장로가 된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서상륜과도 끊이지 않고 연결하여, 그를 통해 복음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며 … 지속적으로 연결을 한다.
1888년 11월에 전도여행에서는 조선인 그리스도인을 뽑아 지방 책임자로 맡겨놓았다. 평양, 의주, 장연 ……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책자도 팔면서 선교의 터를 닦아 놓았다.
학교운영 (연세 대학) 총각 선교사로 와서, 후에 조선 의료선교사로 온 자기보다 8살이나 연상인 릴리아스 홀튼과 결혼하게 된다. 28세의 나이로 36세의 릴리아스 홀튼과 결혼하여 사역의 활기를 더하게 된다.
언더우드는 신혼여행을 전도여행으로 해서 북부로 떠난다. 가는 곳마다 구경 인파 …….
그가 의주에 머물러 있을 때 세례를 받겠다고 몰려온 사람이 100여명이나 되었다.
이때에 맹활약한 조선인 일꾼이 서상륜이었다. 그는 선교사들 보다 더 많은 회심자를 만들었다. 선교사보다 몇 배의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교는 한사람의 헌신된 일꾼을 키우는 것이라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는 언더우드에게 찾아와 존 로스 목사의 소개장을 내어놓으면서 호소하였다. “한시도 쉬지 않고 전도하여 입교자를 많이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줄 목사님이 없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이 간절히 세례를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를 부끄럽게 한 사건이었다. 그 당시 선교사들은 그들의 앞날을 위해 묵묵히 복음과는 상관없는 병원 사역이나 학교사업만 하고 있었다.
조선엔 포교가 금지가 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땅에서 세례식을 거행하게 된다. 그때 34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는 헤론과 함께 조선 예수교 문서회를 조직하여 문서선교에도 열을 올렸다.
명성황후 주치의·언더우드의 부인 홀튼 의료선교사
릴리어스 스티어링 홀튼(Lillias Stirling Horton, 好敦)은 1851년 6월 21일 미국 뉴욕주 앨버니(Albany)에서 출생했다. 시카고 여자의과대학에서 약학을 공부했다. 이 학교는 후에 노스웨스턴대학교 의학교가 되었다.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임명되어 1888년 3월 27일 37세로 내한하였다. |
명성황후 주치의·언더우드 부인 홀튼 의료선교사
◇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홀튼(Horton, 1851-1921)은 애니 엘러스의 후임으로 제중원의 제2대 부인과장과 명성황후의 시의(侍醫)로 1888년 3월 27일부터 사랑의 인술을 펼쳤다. 그의 의술은 왕비에게 확신을 주었기 때문에, 곧 명성황후의 마음을 샀으므로 시의가 되었다. 명성황후는 외국인 부인들을 대접할 때는 늘 홀튼을 함께 초대하였다.
◇ 언더우드와 결혼
1888년 가을 서울에서 H. G. 언더우드와 약혼하여, 1889년 3월 14일 38세에 당시 30세인 언더우드와 결혼하였다. 언더우드는 미국에서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다른 여자와 약혼했었지만, 그 여성은 선교에 대한 관심과 이상이 없었으며, 약혼자와 함께 한국에 오기도 거절하였다.
언더우드 부부 결혼 배경에는 이른바 “아기소동”과도 관계가 있다. 아기소동 이란 ‘외국인들은 한국 어린이들을 몰래 데려다 잡아먹으며, 그 눈알을 빼서 사진을 현상하는데 쓴다.’는 허무맹랑한 헛소문을 퍼트려 사회를 혼란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격분한 군중들은 선교사들의 앞잡이가 남의 집 자식들을 꾀어간다 생각하고 그들을 마구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였다.
선교사들이 성찬식을 거행할 때 집례자가 떡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이는 내 살이요 내 피라”고 하신 예수님 수난에 대한 성찬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밖에서 몰래 엿듣고 실제로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오해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 때 병원은 아이들을 잡아 죽이는 장소로 잘못 인식되었으며, 외국인들이 아이 고기를 먹는 것으로 오해된 시기가 있었다. 이렇게 군중들이 격분할 때에, 외국인 의사가 거리에 모습을 보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홀튼은 가마를 타고 병원을 왕래하며 일을 계속했다. 성난 군중들은 홀튼의 가마꾼을 위협하였으므로, 나중에는 가마꾼도 나오지 못했다. 이같은 상황 아래에서도 그녀는 병원을 향하여 걸어 다녔다. 이럴 때 언더우드는 홀튼의 안위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위험 속에서도 홀튼을 호위해 주었다.
O. R. 에비슨은 홀튼에 대하여, “복음을 설교할 때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의 안전과 평안이 위태로울 때 대담해지고 강해졌으며, 자기 자신의 안전에 대하여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한국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으며, 어떤 형태로든지 국가적으로 발전시켰고, 그녀의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 영향력을 주었다”고 했다.
이들 부부는 결혼 후에도 신혼여행 겸 전도 순행으로 개성, 평양 등지를 거쳐 강계,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경유하면서, 한국의 인정 풍속과 언어 습관을 배우면서 강도를 만나고 화재와 자연의 위협도 경험하였다.
1894년 이후 이들 부부는 양화진에 여름 별장을 지어놓고, 여러 해 동안 지낸 일도 있었다. 이 부분을 홀튼은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1894년 여름 청. 일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강변에 있는 언덕 위에 여름 별장을 지을 만한 아주 아름다운 장소를 살 기회를 얻게 되었다. 75달러밖에 하지 않아, 미국의 경우와 비교하면 엄청나게 싼 값이었다. O. R. 에비슨, F. S. 밀러 선교사와 함께 각각 조그마한 방갈로를 지었다. 덕분에 가족들은 수년간의 여름 동안 피서를 갈 수 있는 장소를 마련했다.
언더우드는 이곳에서 많은 일꾼들을 접견하였으며, 성경 번역을 할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한강에서 수영도하고, 절벽 부근의 아름다운 곳에서 차와 생강 빵이나 과자를 먹었다.
저녁에는 배를 빌려 타고 강 위에 비치는 달빛을 보며 노래를 부르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의 저서 한국의 언더우드(Underwood of Korea)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그녀는 1921년 10월 28일 언더우드 사후 5년만인 70세에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 제2묘역(다-10)에 안장되고, 묘비는 1923년 5월 31일 그의 아들 원한경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비문에는 “大美國人 元杜尤牧師夫人 好敦之墓”라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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