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 역사
(초기 한국선교사들을 통해 배우는 교훈)
1.머리말
중국과 일본사이에서 늘 괴롭힘을 당하는 힘없고 의지할 데 없는 작은 나라였다.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등 열강들은 조선과의 통상을 주장하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조선은 내부적으로도 수구파와 개화파등으로 나뉘어져 분열과 싸움의 위기상황가운데 있었다.
그로부터 12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한국은 세계에서 경제규모 10위안에 드는 나라, OECD회원국, 선교역사 120년만에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나라, 세계50개의 대형교회중 25개이상이 한국에 있으며, 인구 중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20%가 넘는 세계에서 비슷한 류를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특이한 나라로 인식된다.
최근의 한류열풍은 언론의 플레이가 아니며, 중국에서 피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야말로 열풍이다. 한국영화와 드라마는 언론과 생활속으로 파고 들었고, 삼성 LG는 부의 상징처럼 되고 있다.
2002년 월드컵을 통해 온 민족이 하나되는 모습을 전세계에 보여준 짜릿한 감동이 아직도 남아있다.
중국으로부터 늘 영향을 받기만 했던 힘없던 한국이, 36년이라는 일제식민지배를 경험하며 고통가운데 눌렸던 이땅이,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민족상잔을 겪으면서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다시 시작한 한국이 어떻게 오늘날 이처럼 우뚝 서게 되었을까?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까지 기독교가 한국사회, 경제, 정치, 교육, 문화등 사회전반에 미친 영향은 상상을 넘어선다. 물론 오늘날 기독교가 많이 세상과 불의와 타협하여 욕을 많이 먹고 있긴 하다만..
초기 한국에 복음을 들고 와서 생명을 바친 많은 외국의 선교사들, 이 땅의 사역자들.. 그들이 땀과 피를 흘려 헌신한 기초위에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세워졌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헌신과 생명의 열매를 먹고 있는 것이다.
이 짧은 시간안에 한국기독교역사에 대한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어서 1910년 한일합방이전까지에 focus를 맞추어서 나누려고 한다.
나름대로 열심히 연구해보면서 이 땅에 온 초기선교사들과 우리의 선조들에 대한 감사와 감동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은둔해 있던 조선을 세우셨는지, 어떻게 복음으로 이 땅을 회복시키시고 부흥케 하셨는지 참 기가 막힌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면서 함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오늘 몇가지 주제를 가지고 시대별로 정리해서 나누려고 한다. 주님께서 동일한 감동과 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 1.경교와 2.조선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 귀츨라프 그리고 3.최초의 순교자 토마스선교사를 살펴본다.
중국 당태종때 베리우스파는 중국으로 선교사를 파송한다.
1세기(100년) 이상 왕성하다가 쇠퇴한다. 중국에서 경교(景敎)라고 불렸다. 서안 비림박물관에 대진 경교 유행비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초기에 한국으로 경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경주 불국사지에서 발견된 돌십자가를 통해 경교의 영향이 미쳤을 가능성이 언급되어진다. 경주 불국사의 석굴암등 대부분의 불교유적에 경교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사진-서안 경교비)(사진-경주 돌십자가) -귀츨라프(K.F.A Gutzlaff,1803~1851. 네덜란드선교회).
관리들이 이를 금지시켰다. 한달간 정박한후에 외국과 통상할수 없다는 통보로 인해 한국을 떠나야했다. 항해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어쨌든 조선방문은 하나님의 역사였다. 이 땅에 뿌려진 하나님의 진리의 씨가 소멸되리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미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는 이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한편 이날을 오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도를 애써 전파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우리는 한국당에 광명의 아침이 찾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귀츨라프의 방문이 선교와 직접적으로 연결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씨를 뿌리는 수고와 간절한 염원이 마침내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사진이 참 멋있지 않냐? 그 당시에 먹을 게 없었는데 그가 심은 감자가 유용하게 음식으로 쓰여졌다 전해진다. (사진-귀츨라프,기념교회) -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윌리암슨을 만나면서 한국선교에 대해 눈을 뜨게 되고 한국에서 온 두명의 천주교신자들을 만나서 성경을 전해줬을때 기뻐하는 그들을 보면서 한국선교를 소망하게 된다.
그 당시 한국에는 천주교가 박해를 받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성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 두 달 반의 한국선교여행(황해도)을 하게 되고 성경배포를 하였다. 주민들이 성경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 다시 들어갈 때를 기다렸다.
1866년 미국의 무장된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도착했지만, 배가 무장된 상선이었기에 병사들의 폭탄에 의해 좌초되고, 배에서 내리기 전까지 갖고 있던 성경을 한권 한권 뭍으로 던졌다.
토마스와 일행들은 뭍에 끌려내리게 되고 군인들에 의해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의 나이 27세.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병사에게 성경을 전해주며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한다.
“오! 하나님,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조선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아직도 복음을 알지 못하던 땅, 뒷날 그의 죽음 위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질, 훗날 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던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순교의 피를 흘린 것이다. (사진-토마스,토마스의 무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 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받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였스나 이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받아왔노라" (사진-박춘권)
그리고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를 비롯한 많은 미국선교사들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하나님은 국제간의 통상등을 사용하셔서 복음의 문을 여셨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 다르다. 어쨌든 이로써 조선은 복음의 씨앗을 받게 되었다. 이때까지 어떠한 열매도 없었지만 분명히 복음의 씨앗은 뿌려졌다. 그것이 자라서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사진-토마스기념교회)
이를 알기 위해서 만주에서 사역하던 로스와 멕킨타이어선교사, 그리고 이들과 함께 한 서상륜등 한국사역자들, 일본에서 성경을 번역한 이수정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교사가 한국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사역자들과 성경이 만주와 일본에서 이미 세워지고 번역되어서 한국으로 먼저 들어왔다. 한국은 기독교를 자주적이며 자발적으로 수용했다.
이것은 다른 나라들에 복음이 들어가는 것과는 사뭇다르다. 다른 나라는 기독교가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처럼 이용되었다.
-존 로스, 멕킨타이어 선교사
이처럼 한국선교를 위해 숨은 사역자들이 많이 있었다. 윌리암슨은 로스에게 토마스선교사의 순교사실을 알려주며 한국선교에 대해 도전하게 되고 1874년 로스선교사는 고려문이라는 청과 조선의 국경으로 가서 한문성경을 배포하였지만 주의를 끌지 못한다.
한 상인이 찾아와서 그에게 성경을 전해주게 되고, 훗날 그의 아들인 백홍준이 로스에게 침례를 받게 된다. 오늘 우리가 뿌리는 씨앗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진-존로스)
1887년 마침내 최초의 우리말 신약전서인 '예수셩교젼셔'발간됨.
"한국인 학자가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나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라고 로스는 고백한다. 로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한국사역자들의 수고가 컸다는 얘기다. 그래서 ‘로스역’이라 하지 않고 ‘예수셩교젼서’라고 부른다. (사진-예수셩교젼서)
서상륜은 의주를 대상으로 전도하다가 체포령이 내려 동생 서경조가 있는 솔내로 내려와서 힘껏 전도하여 당시 58세대 중 50세대가 예수를 믿게 되어 순전히 한국인들의 힘으로, 주체적이고 자립적으로, 한국최초의 신앙공동체인 소래교회(솔내교회)를 창설하게 된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교회가 세워진 것은 선교역사상 흔하지 않은 일이다. 이후에 서상륜은 계속해서 전도하여 많은 이들이 믿게 되자 1885년 언더우드가 한국에 들어온 것을 알고 찾아가서 침례를 베풀어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교회와 침례받을 자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언더우드는 이때 본국에 보낸 선교편지에 이렇게 썼다. “그 무렵은 씨를 뿌릴 시기였음에도 동시에 우리는 첫 열매들을 거둘 수가 있었습니다.”
동생 서경조는 1887년 1월 서울에서 언더우드에게 침례를 받고 그 후 그는 성직자의 길을 결심,한국 장로교회 최초의 목사 7인 가운데 한사람이 된다. (사진-서상륜, 소래교회,지도, 한국장로교 최초 목사 7인)
비록 현재 한국이 서구의 나라들과 어떠한 접촉도 철저하게 격리시키고 있지만, 그 쇄국은 곧 무너질 것이고, 또한 한국인들은 중국인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
작년(1979)에 모두 학식있는 4명의 한국인이 침례를 받았으며, 이들 외에도 기독교의 본질과 교리를 탐구하는 11명의 다른 사람들이 있고, 현재 동일한 수의 사람들이 한국민족을 위해 성경과 기독교문학을 준비하는 우리의 문서사업을 위해서 7-8일이 걸리는 우리 선교본부까지 기꺼이 올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에 기독교회를 향해 열려있는 새 민족, 새 나라, 새 언어가 있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당인 솔내[松川]교회 창립자. 선교사. 의주(義州) 출생. 1876년 행상으로 만주 뉴좡[牛莊]에 갔다가 로스 목사를 만나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어 세례를 받고 헤이룽장성[黑龍江省]에 사는 동포에게 전도하였다.
1884년 국내에서 전도하려고 의주로 돌아와 한국에서 최초의 종교집회를 가졌다. 그뒤 체포령이 내려 황해도 솔내로 피신, 1887년 동생 경조(景祚)와 함께 국내 최초의 교회인 솔내교회당을 세웠다. 의주출생. 한국장로교회 최초 7명의 목사 가운데 한 사람. 일찍 부모를 여의고 독학으로 한학을 공부하였다. 1878년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접하였다. 1884년 황해도 장연의 솔내[松川]로 가, 형 상륜(相崙)과 함께 한국 최초의 교회를 건립하였다.
1900년 솔내교회에서 목사와 장로의 회합을 조직하고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어 해서지방의 교회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0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한국 최초의 목사로 안수할 때 다른 6명과 함께 목사가 되었다. 로스는 서상륜, 백홍준등에게 성경책을 짊어지고 한국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백홍준이 성경책을 등에 지고 우장을 출발하였다. 그는 10일 만에 의주 건너편에 있는 씨하지라는 마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사정을 살펴 보는대로 역시 성경책을 그냥 가지고 들어가기란 매우 어려움을 알았다. 백홍준은 가지고 온 책을 한장씩 한장씩 종이로 풀었고, 그 종이를 말아가지고 노끈을 꼬았다.
다음은 낡은 종이를 많이 사다가 그 속에 책을 감추고 끈으로 묶어 마치 종이를 사오는 것처럼 가장하여 국경을 넘었다. 집에 도착한 그는 성경으로 된 노끈을 종이로 펼쳐 다시 책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 책을 가지고 의주를 중심하여 위원과 강계 등지를 다니면서 전도하였다. 그를 통해 10여명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백홍준은 로스가 고려문1차 여행때에 성경을 전해줬던 사람의 아들이다.
그가 아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여 백홍준은 만주로 건너가 로스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그 후 로스와 성서번역작업을 같이 했고, 이후 1887년 언더우드가 새문안교회를 창립할 때 서상륜과 함께 초대장로로 추대되었다. 그후로 마펫,게일선교사등을 안내하며 순회전도집회를 다니다가 1892년 체포되어 모진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목에 칼을 쓴 채 죽었다. 이것이 한국 개신교 사상 최초의 순교사건이었다. 1874년 만주 고려문(高麗門)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영국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선교사인 J.로스(한국명 羅約翰)와 J.매킨타이어(한국명 馬勤泰)를 만나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선교사들의 체류지인 뉴좡[牛莊]에서 그들에게 한국어와 역사 등을 가르쳐 주고 자신은 영어를 배웠다. 1876년 이응찬·이성하 등과 함께 세례를 받고, 선교사들과 함께 한문 성경을 한국어로 옮기는 성서번역작업에 착수하였다.
1887년 H.G.언더우드가 서울 정동의 자기 집에서 14명의 신자와 함께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창립하면서 서상륜(徐相崙)과 함께 장로로 추대되었는데, 이 교회가 새문안교회의 전신이다.
그후로도 선교사인 S.마펫, J.게일 등의 안내자로서 순회전도집회를 주선하다가, 1892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옥중에서 목에 칼을 쓴 채 죽었다. 이것이 한국 프로테스탄트 사상 최초의 순교사건이었다. 1883년 이성하가 성경을 등에 지고 봉천을 떠났다. 그는 압록강 건너편까지 이르렀으나 성경책을 그대로 가지고 무사히 들어설 것 같지 아니하여 잠시 밖으로 나가 주위의 사정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이성하의 거동을 수상히 여긴 주막집 주인이 방안에 놓아 둔 짐짝을 풀어보니 그 속에 국가에서 금지하는 책이 있어 너무나 겁에 질린 집 주인은 일부는 불에 태워 없이하고 나머지는 전부 압록강 물에 내던지었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로스 선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던져진 압록강물을 마시는 한국 사람들은 생명수를 얻게 될 것이고, 불에 탄 성경재는 한국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그 예언이 응하여 오늘날 한국교회는 세계속의 교회로 서게 된다. 이성하는 한국인 최초로 침례받은 4인중의 한명이며, 로스를 도와 성서번역사업에 힘을 썼다. 그는 성경을 몰래 숨기고 귀국하여 의주 서울 등지에서 비밀리에 전도를 하여 복음의 씨를 뿌렸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백홍준의 아내와 함께 서상륜의 중재로 압록강에서 행해진 언더우드의 침례식에서 침례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여자세례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1874년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와 함께 중국 동북성으로 가서,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J.로스와 알게 되었고, 이어 로스의 처남인 J.매킨타이어(한국명 馬勤奉) 선교사도 사귀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아내는 백홍준의 아내와 함께 압록강에서 행해진 H.G.언더우드 집례의 대세례식에서 세례를 받고 한국교회 최초의 여자세례교인이 되었다고 전한다
다음은 이수정의 편지의 일부이다. “여러분의 나라는 기독교국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보내주지 않으면 나는 다른 나라가 그들의 교사들을 신속히 파송하리라 생각하며, 또한 그 가르침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을까 하여 걱정하는 것입니다.
비록 나는 영향력이 없는 사람이지만 여러분들이 파송하는 선교사들을 돕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편지가 미국 선교잡지에 소개되면서 미국선교본부는 언더우드를 선교사로 임명, 파송하게 된다. 피선교지의 사람들이 선교사를 요청하여 선교가 시작된 예는 선교역사가운데서 보기 드문 현상이다.
한국인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복음의 수용에 대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사람을 만난다는 게 선교사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와 힘이 되었을까? 사역을 해 보지만, 이런 주도적인 몇 사람을 통해 사역이 힘있게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등 최초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성서로, 같은 해 만주 봉천에서 로스 목사와 백홍준이 만든 누가복음과 함께 최고(最古)의 한글판 성경이다. 한국에 들어가기 전에 일본에 들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피선교지의 언어로 이미 성경이 번역되어 있음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선교지에 가서 성경을 번역하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한국인에게는 이미 그 나라 말로 성경이 번역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는 사정이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그런고로 우리 땅에서는 복음의 씨가 속히 자라 열매를 거두기가 아주 손 쉬었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한아름씩 들고 한국으로 들어갔다. 이수정은 또 윤치호등 일본에 온 유학생들에게 전도하여 85년 7명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 도쿄 유학생회의 모체가 되었다. 이듬해 귀국하였다가 수구파(守舊派)에게 살해되었다. (사진-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
이후 1883년 민영익을 대표로 한 견미사절단이 미국으로 간다. 거기에서 민영익은 미감리회의 가우처박사를 만난다. (사진-민영익을 대표로 한 견미사절단)
미감리회는 1884년 스크랜튼(Wm. B. Scranton)박사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그리고 스크랜튼의 어머니인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이 한국선교사로 임명한다. 미 장로교회는 1884년 헤론(John W. Heron)을 한국최초의 선교사로 임명한다.
뒤이어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한국최초의 복음선교사로 임명된다. 하지만 한국땅에 가장 먼저 상륙한 선교사는 중국선교를 목표로 1883년 선교지로 떠났던 의사 알렌(Horace N. Allen)이었다.
미국공사관의 공의로 한국에 입국함
1885년 4월, 왕실은 알렌에게 한국최초의 서양 근대식병원인 국립병원 광혜원을 세우도록 허락한다. 이 광혜원은 후에 제중원으로 이름을 바꾸며 미국 실업가인 세브란스의 건축기금으로 현재의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이 되었다.
알렌은 왕의 어의가 되고, 광혜원은 이후에 들어오는 많은 선교사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보호막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같이 하나님은 국제수호통상조약이나 국내의 여러사건을 통해 선교사들이 들어오게 하시고, 사역을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을 통하면서도 인간이 계획하지 못했던 방법을 통해서 그의 목표를 이루어가셨다.
“우리는 부활주일에 여기 왔습니다. 이 날에 죽음의 철장을 부수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매고 있는 줄을 끊으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는 빛과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언더우드는 독신이었고, 아펜젤러는 임신중인 아내와 함께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현지사정의 악화로 아펜젤러는 아내와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2개월후에 입국하게 되고, 언더우드는 알렌의 도움으로 서울에 들어오게 된다. (사진-언,아,기도문)
- 미 장로회의 첫 번째 복음파송선교사.(사진-언더우드1,2, 새문안교회, 벽돌교회, 그리스도신문, 언더우드관, 언더우드가계도, 언더우드가족, 언더우드 일가, 언더우드 일가의 무덤, 노춘경) 한국명 원두우(元杜尤). 1885년 아펜젤러와 함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어 한국에 와서 광혜원(廣惠院)에서 물리·화학을 가르쳤다. 한국선교를 결정한후 약혼자에게 한국으로 같이 가자고 했을때 no라고 하자 약혼을 파기하고 혼자서 한국으로 입국하였다.
이후 광혜원 여의사로 온 릴리아스 호턴과 결혼하고, 신혼여행으로 벽지순회전도여행을 다녀온다. 잘생겼다. 엘비스 프레슬리인줄 알았다. 1886년, 언더우드에 의해 국내에서 최초로 침례를 받은 사람은 노사도라고 불려지는 노춘경이다.
그는 알렌의 집에 갔다가 책상위에 있는 한문으로 된 성경과 책 한권을 몰래갖고(훔쳐서) 집에 가서 탐독하다가 예수를 믿기로 작정을 한다. 그리고 언더우드에게 와서 침례를 받고싶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침례를 법적으로 금지하였다.
복음에 불타오르던 언더우드는 다른선교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춘경에게 침례를 베푼다. 어느날, 한밤중에 서상륜이 언더우드를 찾아온다. 서상륜은 만주에서 로스선교사와 함께 성경을 번역하고 국내로 들어와서 황해도 솔내에 솔내교회를 세운 장본인이다.
서상륜은 솔내에 침례받기를 원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면서 침례를 베풀어주기를 부탁한다. 그 때 언더우드는 이렇게 말한다. “누가 조선땅을 잠자고 있는 땅이요 미개한 나라라고 일렀는가! 누가 조선사람들을 게으른 백성이요 무지한 민족이라 하였는가!”
언더우드는 조정의 강압적인 태도로 인해 쉬이 결정하지 못하고 몇 개월이 흐르고.. 서상륜은 훗날 한국최초의 7인목사중 한사람이 되는, 동생 서경조를 비롯한 3명을 데리고 언더우드에게 다시 나타난다.
“목사님, 목사님이 못오실 것 같아서 세례를 받으러 저희들이 올라왔습니다.” 세례를 베풀고, 이로 인해 언더우드는 담대함을 갖게 된다. “목사님, 솔내에는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이 또 있습니다.”
서상륜의 요청으로 얼마 후 언더우드는 솔내로 가서 세례를 베풀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세례가 금지되어 있어서 당시 중국영토였던 압록강까지 가서 세례를 집례한다. 70여명이 세례를 받은 것으로 나와있다.
언더우드는 단지 세례만 주었을 뿐이다. 이미 국내에는 자발적으로 믿고 전도하는 성도들과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1887년, 14명의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한국최초의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시작된다.
그리고 솔내교회의 서상륜과 백홍준은 새문안교회의 초대장로가 된다. 1889년에는 기독교서회(基督敎書會)를 창설, 1897년《그리스도신문》도 창간, 1900년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였으며,
1915년에는 경신학교(儆新學校)에 대학부를 개설, 연희전문학교(오늘 연세대학교)로 발전시켰다. 성서번역위원회를 만들어 한글성서완역하는데 기여하다. 그는 "사람이 일을 아니하면 세상사는 재미가 없다"고 하면서 많은 일을 했다.
1916년 신병으로 귀국, 미국에서 죽었다. 그의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한국선교와 교육등에 헌신하였다. 언더우드의 부인 L S 호턴(한국 이름 호돈·好敦)은 광혜원 의사와 명성황후 시의(侍醫)로 인술을 펼쳤고,
언더우드 2세(한국 이름 원한경·元漢慶)는 3·1운동 당시 일제의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을 폭로해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며, 연희대학교 명예총장이 된다. 언더우드3세(원일한)는 선교사요 교육학가로서 연세대학교에서 교수로, 총장서리로, 전쟁때에 UN통역으로 한미간 우호증진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얼마전(2002년) 언더우드4세는 지난 120년동안 한국에서 언더우드일가가 해야 할 일을 다했다면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그들의 삶과 전부를 조선을 위해 기꺼이 바쳤다.
양화진에는 언더우드 4대의 묘역이 있다. 비문에 “언더우드 일가의 정신과 공적은 우리 겨레의 사랑과 함께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고 적혀있다.
기독교기업인 e-land는 언더우드를 기념하여 옷의 브랜드로 만들기도 했다. 언더우드 한사람을 통해 한국초기 기독교와 교육, 사회전반에 걸쳐 많은 변혁과 변화가 있었다. 그 한사람뿐 아니라 그의 아내, 아들, 며느리, 손자, 손자며느리, 증손자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위해 그들의 생명을 바쳤다. 양화진에는 언더우드 일가의 무덤이 있다.
1887년 언더우드, J.S.게일 등과 함께 성경 번역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는 암기 위주인 한국의 교육방식을 이해중심적인 교육방식으로 고치는 데도 크게 공헌하였다. 언더우드와 함께 YMCA를 설립을 주도했다. 그의 행적은 서울에만 머물지 않았다.
교회가 출범하기 전인 4∼5월에는 평양을 답사, 선교요충지임을 확인하고 돌아왔고 88년 봄에는 정부의 소환명령으로 중도 포기했지만 언더우드와 함께 북부지방 전도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이후에도 수차례 여행에 나서 평생 조선팔도중 6개 도에 걸쳐 7천2백리길을 돌았다고 하니 당시 교통사정등에 미루어 그 열정이 놀랍기만 하다. 1902년 목포(木浦)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회의에 참석차 배를 타고 가다가 목포 앞바다에서 충돌사고로 익사하였다.
마포구 양화진외국인묘지에 묻혔다. 아펜젤러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있다.‘사자처럼 우람하고 여인처럼 우아한가 하면, 주님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용감하게 덤벼드는 정열의 감리교인 아펜젤러. 평생을 두고 이웃만을 섬기며 주님을 증거한 하나님의 사람,
아펜젤러. 아펜젤러의 딸인 앨리스 아펜젤러는 조선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아이이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아버지가 생명을 바친 조선으로 다시 들어와서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 총장을 지내며 이화여대의 기초를 마련했다.
앨리스 아펜젤러는 1950년, 한국전쟁을 넉달 앞두고 66세의 나이에 이화여대 학생들에게 설교하다가 죽음을 맞는다. 그의 묘비에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노라 (Not to Be ministered Unto But to Minister)”고 쓰여 있다. 아펜젤러의 막내도 이화여대 교수로 선교에 헌신하였다.
선교본부에 조선으로 파송을 요청한다. “의약품과 의료기기 얼마를 준비할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조선으로 떠나겠습니다.”
1884년 장로교 최초의 조선선교사로 임명받는다. 일본으로 갔다가 알렌과 언더우드,아펜젤러가 조선으로 입국한 후에 조선땅을 밟는다.
알렌의 뒤를 이어 2대 광혜원 원장을 맡아서, 생명을 아끼지 않고 환자들을 돌보다가 죽음을 맡는다.
“조선과 조선사람들을 더 ..더..뜨겁게 사랑하고 싶소. 그동안 다하지 못한 것...”
병원의 조수들,집안일을 돕던 일군들 모두 불러모았다.
“나를 사랑해주고 도와준 친구들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 한분 한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그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다만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1890년 7월 26일 헤론은 죽음을 맞는다. 정부에서는 양화진언덕을 허락해준다. 헤론은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첫번째로 묻힌다.
양화진은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들과 외국인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 (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라고 쓰여 있다. 헤론의 아내와 자녀들도 계속해서 한국의 선교를 위해서 삶을 드렸다.
1886년, 메리 스크랜톤은 1명의 거지 여자 아이를 시작으로 여자학교를 설립한다. 그것이 오늘날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이다. 오늘날의 연세대, 이화여대등도 처음엔 몇 명으로 시작했다. 설립한 이의 비전이 결국 성취되어지는 것을 본다. 스크랜톤의 말이다.
“..나는 믿고 있다. 이곳에서 이 땅 조선의 여인들이 인간의 권리를 찾는 문이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바라는 것, 말씀을 믿고 바라는 그것이 실상이 되어 든든한 건물이 세워지고, 그 건물속에서 어느나라 여성보다도 당당한 딸들이 늠름하게 걸어나올 날이 있을 것이다. 이 일은 주님께서 시작하신 일이다.”
메리 스크랜톤의 비전이 오늘날 성취되어서, 이화여대뿐 아니라 한국의 여성 기독 교육에 큰 변혁을 가져왔다. 비문에는
“오늘 이 땅에 자유 사랑 평화의 여성 교육이 열매 맺으니,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사진-메리스크랜톤,이화학당,비문, ) 스크래톤선교사(Scranton, B. William, 1856-1922)
스크랜톤은 버림받은 계급, 가난한 사람들, 그늘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조선사람을 향한 병원을 시작한다. 1885년, 세워진 무료병원이 제동병원이다. 고종임금은 스크랜톤의 한국이름인 시린돈의 ‘시’자를 따서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한다. 스크랜톤은 상동교회를 세우고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의료로, 교육으로 삶을 드렸다. (사진-시병원, 상동병원교회, 알렌과 스크랜톤)
호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
그는 교육 선구자로서 23년 간(1886-1909) 봉직하면서 한국의 문화, 역사 등 각 분야에서 한국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열정적 선교사였다. YMCA창설을 주도했으며,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고종의 외교고문, 밀사로 활약하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되기도 했다.
한국전통노래인 아리랑을 서양악보로 적은 사람도 헐버트였다. 태어난지 1살이 지났을뿐인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묘비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헌신한 헐버트... ”이라는 추모비와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ister Abbey)”는 어록이 있다.
아들 셔우드 홀은 조선에서 태어났다. 의사요 선교사로서 1932년 크리스마스 씰을 시행하여 결핵퇴치운동을 벌였다. (사진-크리스마스 실) 위 실은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실로 첫 해(1932-33)의 남대문과 두번째 해(1933-34)의 미국의 실을 모델로 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는 소년 소녀의 모습 (사진-셔우드홀,셔우드홀부부,홀과 거지들,평양병원,셔우드홀부부,최초의X-mas 실, 비문) 아버지,어머니,아들,딸,며느리 모두 양화진에 묻혔다.
이에 무어선교사는 교회내의 백정차별을 없애고, 오히려 서민과 백정들을 향한 사역에 헌신하여 서민과 백정선교의 열매를 많이 맺었다. 1894년 승동교회를 세운지 4년이 지났을때 세례받은 108명중 30명이 백정출신이었고 1898년 132명의 백정이 세례를 받는다.
1920년 백정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뜨거워져서 40%가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 일반인들의 자녀들중 5%만이 교육을 받았음을 볼때 대단한 변화였다. 그의 묘비에는 우리말로 “조선 인사를 사랑하였고 또 그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를 원하였다.”라 기록되었다. 그리고 영문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충성된 종, 아름다운 인격과 정신의 소유자, 한국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라는 기록도 있다.
한국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원인이 한국인에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원인이 나한테 있음을 알았습니다.아무리 수고하고 정성을 다해 일을 한다고 해도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나의 교만과 완악함과 신앙의 부족을 회개합니다”
한 선교사의 고백적인 기도가 발단이 된 이 운동은 그후 평양일대와 전국 각지의 부흥운동과 회개운동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운동의 불길이 점화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목사가 또 외국선교사를 미워한다는 것을 회개하였을대 회개와 부흥의 역사는 전국 각지로 퍼져가게 되었다. 사역자가 먼저 회개하고 무력함을 고백할 때 그때 인간의 역사는 그쳐지고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된다. (사진-하디,길선주,장대현교회1,2, ㄱ자교회, 하디무덤)
이후에 계속되는 부흥에는 항상 성경이 중심이 되었다. 한국기독교에는 ‘말씀사경회’라는 독특한 모임이 있었다. 말씀의 기초위에 한국의 기독교와 교회는 견고히 세워질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동일하다. 성경이 기초이다.
그리고 한국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등 교회를 설립하고 전도하는데 한국인들의 주도로 되어졌다. 1907년 대부흥성회가 있었던 장대현교회는 한석진을 비롯한 한국인들에 의해 세워진 교회였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복음을 받고 가만히 있을수 없었다.
생명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고, 교회를 세웠다. 로스선교사가 선교본부에 보낸 편지를 다시 보자. “또한 한국인들은 중국인보다 천성적으로 꾸밈이 없는 민족이고 보다 종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는 그들에게 기독교가 전파되면 곧바로 급속하게 퍼져나갈 것으로 기대한다..”주도적이며 자발적인 태도로 복음을 수용하고 가까운 이들에게로 가서 전도했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때로는 한국에 온지 한달만에 죽기도 하고, 아내를 잃어 세 번씩 결혼하기도 하고, 1살된 아들이 먼저 죽어 떠나보내며 아리랑을 부른 선교사도 있었다. 자기들 생명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다. 선교사들 당대에서만 아니라, 그들의 아내,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한국사랑은 특별했다. 우리는 지금 그들의 헌신을 먹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생명을 드려 섬길 사람들은 누구인가?
-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외지선교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 독노회 창설로 조직을 정비한 장로교의 첫 사업중의 하나도 이기풍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한 일이었다. 이어 1900년에는 한석진목사를 일본 유학생 선교사로, 최관흘 목사를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선교사로, 이듬해에는 김영제 목사를 북간도 선교사로 보내 동포선교를 벌였다.
물론 감리교도 만주에 이화춘목사 배성식·손정도 목사 등을 파송했고, 기타 교파들도 자체 선교를 일찍부터 벌였다. 산동성 선교를 위해 1913년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인을 정식 선교사로 산동성에 파송했다.
선교사를 받아들인 피선교지가 이처럼 빨리 선교사를 파송한 선교역사는 드물다. 로스의 예언이 적중했다. 오늘날 한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제 2의 선교대국이다. (사진-장로교초대 7인목사중 한석진-왼쪽아래,이기풍-왼쪽두번째-을선교사로파송, 이기풍-우학리교회)
이는 스크랜톤 여사가 이화동산에 씨 뿌렸기 때문이다.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ister Abbey)” (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언제나 나의 청진기도 그들의 심장소리와 함께 두근거렸다. 나는 아직도 조선을 사랑한다”
주님이 명령하매 한국에 기꺼이 왔고, 다시 명령하매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갔다. 그는 위대한 신앙, 위대한 사랑, 위대한 자비의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 급성맹장염으로 죽음. "사람은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은 거리를 왕래하며. 육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실천하셨다' |
'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 > 韓國기독교 역사와 교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 연표(2)<1940-1970년> (0) | 2008.06.05 |
---|---|
★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 연표(1)<1884-1939년> (0) | 2008.06.05 |
한국 기독교 전래-감리교의 전래 (0) | 2008.06.05 |
★★ 한국 선교 역사 120년 개략 (0) | 2008.06.04 |
기독교의 전래 (0) | 2008.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