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선교사 · 신앙偉人/韓國기독교 역사와 교회사

★★ 한국 선교 역사 120년 개략

영국신사77 2008. 6. 4. 23:03
                                                            한국 선교 역사 120년 개략
                                                                                                               Mission Possible/한국선교역사  2007/10/17 13:04
                                                                                     
                                                                                                                                                           한국선교역사120년
 

  1884년 일본주재 미 감리교선교사 맥클레이가 입국해 고종을 알현하고, 의료 및 교육 사업
                실시에 대한 선교허가 받는다.
 
              9월 미국 북 장로교 의료선교사 알렌이 한국 주재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내한한다.
                    이후 알렌은 갑신정변에서 중상 입은 민영익을 서양 의술로 완치시켜 왕실의 호감을
                    얻어 선교에 큰 도움을 받는다.

  1885년 4월 5일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한국
 
                           인천 제물포입국해 본격적인 한국 개신교 선교를 시작.
 
              4월 10일에는 알렌에 의해 광혜원이 설립(국립 병원으로 설립, 후에 재중원으로 개칭함)됨.
 
              8월에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최초의 근대 교육 기관인 배재 학당을 설립한다.
 
              9월에 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톤이 정동 제일 병원을 개설 한다.

 1886년 5월말 여성 선교사 스크랜톤이 최초 근대의 여성교육 기관인 이화학당을 설립함으로써
                       선교사들은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7월 11일 노춘경, 일명 노도사라 불리우는 그는 언더우드 목사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인으로 한국 내에서 세례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887년 1월 서경조, 최명오, 정공빈 등 3명이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 받고,
 
              9월 27일 로스와 한국인 신자 14명이 참석하여 언더우드에 의해 새문안 교회가 설립되었다.
 
              10월 아펜젤러가 서울로 입성하여, 한국 최초의 감리 교회인 정동 제일 교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1889년 언더우드 부부는, 신혼 여행 중 서북 지방을 순회 전도하면서 의주에서 김이련,
              김관근 부자 등 의주 교인 33명에게, 이른바 요르단 강 세례를 주었다.

 1896 년 최초의 기독교 학생 운동체인 '협성회'가 서재필에 의해 조직되었다.
              협성회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마음을 굳게 세워 의기와 용맹을
              기르고, 학생들 사이에 동창 의식을 길러 서로 권면하고 마음과 힘을 합하여 국가에
              봉사하며, 배운 대로 전국 동포에게 전하는 데 있었다.

 1897년 10월 신앙 훈련과 함께 선교와 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감리교 엡�청년회 조직되었다.

 1899년 4월 미국 실업가 세브란스의 기부금과 아펜젤러 의사의 노력으로 세브란스병원
                    설립되었다.

 1901년 5월에는 미 감리회의 김창식, 김기범 등이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 받았다.

 1903년 아펜젤러 선교사가 성서 번역 위원회의 참석차 목포로 가다 선박 충돌사고로 순교하였고,
 
              10월에는 사회주의 계열의 반 기독교 운동에 대해, 교회는 변호와 적극적 사회 운동을
                            추진하는 황성 기독교 청년회인 YMCA게일 선교사에 의해 창립되었다.

 1904년 9월 남 감리회에서 김흥순을 감리교 최초의 전도사로 허가하였다.

 1906년에는 4월 평양 길선주 목사에 의해 새벽 기도회 공식적으로 시작하였다.

 1908년 3월 한국인 목사 길선주의 주례로 세례식이 거행되어,
                    한국인 목사로서는 최초로 201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또한 남감리회와 간도 선교회를 조직하여 이화춘 선교사를 북간도에 파송 하였고,
 
             10월에는 호가르트 정령 내한으로, 구세군의 한국본영 창설하여 한국선교를 시작하였다.

 

1909년 7월에는 구세공보가 창간되었으며, 점점 식어 가는 부흥 기운을 되살릴 수 있는 새 계기를

                    마련키 위해 전국적으로 백만명 구령 운동이 일어났다.

 

              9월 장로교의 최관흘 목사를 시베리아 선교사로, 이선관 여사를 제주도 여성 선교사로,

                    한석진 목사를 동경 유학생 선교 목사로 파견하였다.

 

              10월에는 구세군, '구세신문' '구세군가'를 발간하였고, 구세군 사관 학교도 설립하여

                     선교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1911년 3월에는 성결교의 '복음가', 안식교의 ‘찬미가’가 발행되었고,
 
              4월에는 구약성서 발간으로 성경전서 완역이 간행되었다.
 
 
 1914년 1월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브라운 리가 한국 최초의 유치원인 이화 유치원 개원한다.

 1919년 3월 1일 교회가 주도적 역할을 한 관계로 극도의 탄압과 피해를 입으며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난다.
                          또한 금주(禁酒) 동맹회 절제 운동과 수원 제암리 교회 방화 학살사건 발행한다.
                                  이로 인해 재암리 주민 30여명이 학살 되었다.

 1920년 4월에는 김활란 전도단이 창립되었고
 
              5월에는 YMCA, 평양 신의주, 성진 등 지방 조직이 확대되었으며,
 
              6월에는 감리교 중심의 금연 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31년 5월 29일 평양 장로회 신학교에서 기독교 증험론을 발행하였고,
 
              6월 14에는 한국에서 최초의 기독교 감리회에서 여목사의 안수가 이루어졌다.

 1933년 1월 20일에는 기독교 감리회의 면려 회보와 감리 회보가 발행되었다.

 1934년 6월 한국 감리교 선교 50주년 기념식을 배재 학교에서 대규모 기념 행렬로 거행하였다.
 
             10월에는 장로교 선교 50주년 기념 대회를 개최하였다.

  1938년 신사 참배 강요로 교회 수난이 심화되었고, 기독교계 학교들이 계속 폐교되었다.
 
               2월에는 신사 참배 반대 운동과 신앙 수호 운동의 지도적인 역할을 한 주기철 목사가
                    평양감옥에 구금되고, 장로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난다.
 
               9월 10일 일제 총독부가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강요하였다.
 
  1944년 4월 21일 금요일밤 9시에  위와 같은 항거 끝에  주기철 목사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1946년 38선 이북에서는 공산당의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고,
 
             9월에는 KNCC(한국기독교 연합회)가 창립 되었다.
 
             12월에는 연희대학 ·이화여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 되었고,
                    서울 신광 여· 중고 등 많은 기독교계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신사 참배 거부로 폐교됐던 많은 학교들도 재 개교하게 되어,
                    기독교 교육 진흥의 기틀이 되었다.

 1948년 4월 20일 김양선 목사의 교회사 자료 수집으로 한국 기독교 박물관이 남산에 개관하였고,  
 
                           KSCF(한국기독교 학생 전국 연합회)가 창립되고,
 
                           KNCC라는 기독교 방송국 설립 준비가 이루어졌다.

 1952년 12월 15일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가 부산과 서울에서 전도 집회를 열었다.

 1957년 11월 1일 한국 대학생 선교회(CCC)가 김곤준 목사에 의해 창립 되어, 전국의 모든 대학
                     캠퍼스에 전임 강사를 파송하여 활발한 전도와 제자화 운동을 일으키고 있다.

 1984년 8월 15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개신교 100 주년 선교 대회 예배를 드렸다.

 1989년 4월 28일에는 교계 원로 목사 10명의 제창으로 각 교단 증경 총회장 및 기관단체 대표들이
              함께 회동, 기도회를 갖고 창설을 협의하여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를 설립하였다.

 2000년 8월 14~18일 한국 세계 선교 협의회(KWMA)의 주최로,
                                 2000년 세계 선교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였다.
 
Posted by lam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