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성지순례/이스라엘[종합]

키부츠 생활

영국신사77 2008. 5. 9. 17:26
키부츠 생활
2005.08.25 22:23
http://tong.nate.com/travel/3988406

키부츠 생활

새내기 발런티어

따스한 햇볕을 즐기려는 듯 잔디 위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었다.
"Hi, Are you a new volunteer?"
"Yes, I am."
3월 초순 한국의 날씨는 아직 쌀쌀하기에 내가 입은 옷은 두툼한 것이었다. 잔디에서 옷 벗고 일광욕을 즐기는 그들은 활기가 넘쳐 보였고 어쩐지 나의 겨울옷은 칙칙하게만 느껴졌다. 옷 입은 사람이 벗은 사람 앞에서 초라해 보이다니 이상하네. 자 기죽지 말자.
일광욕을 즐기고 있던 발런티어들은 새로운 발런티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얼마 후 발런티어 매니저를 만나서 방을 배정받았다. 다음날은 매니저가 키부츠를 구석구석 소개해 주고 어디서 일할 것인지도 알려주었다.
처음 온 낯선 땅에서 적응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흥분과 기대감으로 에인 하로드 키부츠 생활은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생활 자체가 지금까지 내가 지낸 도시와는 많이 달랐다.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실수하지는 않을까 긴장이 되었다. 서양사람들은 모두가 키가 큰 줄 알았는데 의외로 키부츠의 사람들은 그렇게 키가 큰 것 같지는 않다. 젊은이들은 그렇지 않지만 키가 작은 노인들이 많아서 마치 우리나라 노인을 보는 것 같다. 나의 작은 키에 대해 약간 염려를 했지만 그들의 키가 한국사람 수준이라 키 때문에 주눅들 필요는 없었다.
처음 배정 받은 일은 식당의 켈림(dish washer)이었다. 식기 세척기를 통과한 그릇을 정리하는 일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그릇이 한꺼번에 쏟아질 때는 감당할 수가 없을 정도로 바쁠 뿐만 아니라 일이 끝나고 나면 '아이고 허리야'가 저절로 나왔다.
며칠간 양계장에서 일을 했다. 새벽 6시부터 12시까지 양계장에서 계란 담는 일이었다. 닭이 계란을 낳으면 계란은 컨베이어에 의해 자동적으로 닭장에서 한곳으로 모아진다. 모아진 계란은 무게에 따라 등급이 나뉘어지고 이 계란을 계란판에 담는 일이 나의 몫이었다. 때로는 따끈따끈한 온기가 전해지는 금방 낳은 계란도 있었다. 첫날에는 내 손 힘이 센지 계란껍질이 약한지 계란을 많이 깼다.
계란을 계란판에 옮겨 담는 일은 식당 일보다 몇 배는 쉬웠지만, 양계장에서 솔솔 풍겨 오는 냄새는 참기가 어려웠다. 나는 농촌생활, 전원생활을 낭만적으로만 여겨 왔는데 양계장에서 며칠간 일해 보고 나서 만만히 생각할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기계화가 되어도 냄새를 없앨 수는 없지 않은가. 동물들에게 화장실 이용법(?)을 일일이 가르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농촌에서 닭 소 돼지를 키우는 농부들의 희생이 아닌들 고기 한 점이 어떻게 내 입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도시출신이 새삼 느낀 고마움이었다.

실험정신으로 가득 찬 세계

안식일 저녁, 식당의 수도꼭지에서는 물 소다수 포도주스가 나왔다.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포도주스를 보자 초등학교 다닐 때 재미있게 보았던 「어깨동무」와 「소년 중앙」이 생각났다. 70년대 어린이 잡지의 단골 기사 중의 하나는 2천년대가 되면 우리의 생활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하는 것이었다. 참 꿈 같은 이야기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가 되면 자동차는 물론 비행기 자가용이 등장하고 힘든 일은 컴퓨터와 로보트가 도맡아서 한다. 수도꼭지만 틀면 우유와 주스가 나오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풍성한 음식과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주스가 나로 하여금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 같은 나라를 기억나게 하다니.
아름드리 나무와 잔디, 아름다운 꽃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 그리고 아담한 집들. 키부츠는 정말 이상적인 사회로 보였다. 빈부의 차이가 없고 모든 사람이 동등한 사회가 키부츠의 이념이라고 한다. 그들의 생활 깊숙한 곳을 들어가 본다면 나름대로 문제는 있겠지만 키부츠는 대단히 실험적인 사회이고 또 나름대로 그 실험에 성공한 사회처럼 보였다.
키부츠 곳곳에는 가로 세로가 약 1미터쯤 되는 나무로 짠 상자가 있는데 거기에는 오렌지, 자몽, 포멜론 등 열대 과일이 가득 담겨 있어서 누구든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었다. 돈을 내지 않고도 마음껏 맛있는 과일을 먹을 수 있다니 여기가 낙원일세 그려! 서울은 수박 값이 금값이라 먹기도 어렵다는 편지를 받으니 가족 생각이 난다. 웬만큼 가까운 거리여야 가져다주지!
키부츠멤버 중에서 미리암이라는 여자를 알게 되었다.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하나로 땋은 미리암은 건축 설계사이다. 키부츠 내에는 그녀가 설계한 건물도 있다고 한다. 그녀의 초대를 받아 집을 방문했다. 우리 같으면 밥 먹을 시간인데 미리암은 자기 이야기 보따리만 풀고 저녁식사 준비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같이 있던 미리암 남편이 슬그머니 사라지더니 콜보(가게)에 가서 무엇을 사온 것 같다. 그제야 미리암은 남편이 사온 빵과 오이 토마토 아보카도 치즈 등으로 식탁을 차리는 것이다. 아보카도(Avocado)라는 열매는 껍질이 짙은 초록색으로 약간 단단하지만 껍질을 벗기면 속은 마가린처럼 부드러워서 빵에 발라먹으면 고소한 맛이 난다.
저녁식사가 준비되었다고 부르는 미리암을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5분만에 저녁식사 준비 끝!
'우리는 한끼만 먹으려 해도 밥하고 찌개 만드느라 주부들이 한두 시간은 족히 부엌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세상이 모두 다 그런 것만은 아니구나, 아 불쌍한 한국의 여성들이여!'

히브리어 배우기

여비만 있으면 키부츠에 가서 일하고 이스라엘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교수님의 이야기에 나는 이스라엘에 가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이나 키부츠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고 모교의 류태영 교수님이 농대와 축대 출신 졸업생들을 보내고 있었다. 크리스천인 나는 성경의 땅 이스라엘에 한 번 가보고 싶었고 한국 밖의 세상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겁도 없이 키부츠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키부츠에 머물면서 주변을 여행할 수 있었다. 그 장소들이 모두 성경에 나오는 실제 장소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오랜된 언어 중의 하나인 히브리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왕이면 히브리어를 배우고 싶었다. 키부츠에서는 일하면서 히브리어를 배우는 울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유대인이 아니면 울판을 들어가기는 불가능했다. 다행히 선배들의 도움으로 울판이 있는 브엘쉐바 근처의 미쉬마르 하네게브라는 키부츠로 옮기게 되었다.
울판은 초급(알렙반) 중급(벧트반) 고급(김멜반) 세 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학생들은 전체가 60여 명으로 일본인 2명과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대인이었다. 이스라엘로의 이민을 생각하고 미리 탐사차 온 친구, 유대인의 정체성을 찾아보려고 온 친구, 그냥 놀러 온 친구 등 울판에 온 이유도 사람만큼이나 다양했다.
내가 속한 알렙반에는 미국 2, 캐나다 1, 남아프리카 3, 이탈리아 1, 프랑스 2, 이란 2, 아르헨티나 3명 등이 있어서 나까지 포함하면 전 대륙에서 골고루 온 다국적 클래스가 형성되었다. 이탈리아 친구는 노래를 너무너무 잘한다. 유명한 성악가 뺨치는 그의 노래에 우리는 앙코르를 외쳤다. 그런데 자기네 동네사람들은 모두 그 정도 노래실력은 가지고 있다나!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히브리어로 히브리어를 가르친다. 참으로 재주도 좋다. 선생님은 자기를 가리키면서 "아니 에즈라"를 반복한다. 모두들 선생님 이름이 에즈라임을 눈치채고 자기의 이름도 똑같은 방법으로 해본다.
"아니 혜신"  Good! 나도 훌륭한 히브리어를 한마디 한 셈이다.
어린이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이들과 히브리어를 하면 아무래도 부담이 적을 것 같아서 아이들에게 히브리어 단어를 배우기로 했다. 세 살짜리 꼬마지만 한국나이로는 네다섯 살이니까 곧잘 말을 잘하는 친구들이다. 개구쟁이 탈에게 물었다.
"마제?(What is this?)"
모래 장난을 하던 탈이 모래를 가리키며 "수카르"라고 대답했다.
'야 이 녀석아 너 나한테 사기칠래? 수카르는 설탕이잖아. 그 정도는 나도 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네.'
아이들의 상상력을 믿으면 큰일난다.
울판에서는 격주로 일과 공부 시간이 바뀐다. 한 주는 오전에 일하고(6:30 - 12:00) 오후에는 공부하고(13:00 - 16:00) 다음 주에는 오전 공부, 오후 일이 된다. 일하는 시간은 발런티어 때보다 줄어들었지만 하루가 바쁘게 지나갔다.

'노동은 신성하다!' 를 외치며

주방에서 일하게 되었다. 껍질 깎는 기계를 거쳐 나온 감자 당근 양파를 손질하는 일이다. 어떻게 기계로 껍질을 깎는지 궁금했는데 기계의 원리를 알고 보니 참 간단했다. 기계의 원통 내부는 몹시 거칠게 되어 있어서 감자를 적당량 넣고 돌리면 감자가 거친 면에 부딪혀서 껍질이 벗겨진다. 그런 후 감자의 홈을 칼로 일일이 파고 썩거나 좋지 않은 부분을 도려낸다. 꼼짝도 안하고 쭈그리고 앉아서 단순작업을 했다. 아마도 내 평생 먹을 분량의 감자를 손본 것 같다.
그래도 감자 다듬기는 생선에 비하면 양반일에 속한다. 한나절을 생선 비늘을 다듬는 일도 했다.
집에서는 생선이나 육류를 먹어만 봤지 징그러워서 한 번도 만져 본 적이 없던 내가 온통 생선비늘을 뒤집어쓰고 다듬게 될 줄이야. 같이 하던 발런티어는 조금 깨지락거리더니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도망을 가 버렸다. 녀석의 뺀질거림이 잠시 나에게도 갈등을 안겨다 주었지만 그까짓 생선 만지고 나서 샤워하면 그만이지 도망갈 만큼 엄청나게 힘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워를 하고 나서도 생선냄새가 코끝에서 쉽게 가시지가 않았다.
여자들도 군대를 갔다 와서 그런지 이 동네는 도대체 여자가 연약하다고 생각하지를 않는다. 나같이 연약한 여자(?)에게 그 무거운 감자며 당근 상자를 운반하라고 시키다니. 주변을 돌아보아도 도와줄 사람은 보이지 않고. 할 수 없다 젖먹던 힘을 써 보자. 우차차차... 키부츠에서 나는 점점 강한 사람이 되어 간다. 그러나 몸무게는 반비례로 줄어들었다. 키부츠 생활 시작한 후 삼개월만에 백화점에서 동전 넣고 몸무게를 달아보았다. 무려 3Kg이나 체중이 줄었다. 내 자신이 깜짝 놀랐다. 2개월 후에는 또 2Kg이 줄었다. 아무래도 빵이 밥보다 힘을 못쓰는 모양이야.
새벽이면 참새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한순간에 갑자기 지저귀기 시작한다. 5시 30분에 일어나기 위해서 알람을 맞추어 놓지만 영락없이 5시 29분이면 잠이 깬다. 천하의 늦잠꾸러기라도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부지런해지지 않을 수 없는 생활리듬에 적응이 된 것이다. 키부츠의 소리가 있다. 새벽이면 새소리가, 저녁 무렵이면 착각 착각 소리를 내는 스프링쿨러의 스프링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키부츠의 잔디를 늘 푸르게 만들어 주는 스프링쿨러의 시원한 물줄기. 그러나 키부츠 경계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눈을 씻고 보아도 초록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운 고향

발런티어들은 가족과 친구 사진을 침대 머리맡에 잔뜩 붙여놓는다. 외국 갈 때 가져가는 준비물(?) 중에 가족과 친구 사진이 있는지를 알지 못했던 나는 가지고 간 사진이 없어서 붙일 것도 없었다. 가족과 친구들이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나도 남들처럼 사진을 붙여볼까.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의 얼굴. 그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사진을 볼 때면 갑자기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가슴에서 올라왔다. 전혀 도움이 안된다. 벽에 붙였던 사진을 떼었다. 한국노래를 들어도 반응은 마찬가지. 한국노래도 듣지 않기로 했다. 차라리 보지 않고 듣지 않는 것이 좋겠다. 더 이상 한국은 생각하지 말아야지.
한국말이 고프다. 한국으로 편지를 쓰고 오는 편지를 읽으며 배고픔을 달래지만 허기는 가시지 않는다.

사랑하는 딸 혜신아, 건강하게 잘 있느냐?
네가 지난 가을에 캐어 둔 칸나를 심어 꽃이 피었고 네가 가지를 싸매어 준 장미도
꽃이 한창 피었다. 화단에 심겨진 칸나와 장미를 돌보며 엄마는 너를 보듯 꽃을 본단다.

먹구름도 없는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여름 소나기가 쏟아지듯, 감정의 동요를 미처 느끼기도 전에 두 눈에서는 굵은 눈물 방울이 편지지 위로 떨어졌다.
아주 오래된 한국신문 아니 구문 꾸러미를 예루살렘에 사는 선배로부터 얻어왔다. 허겁지겁 읽어 내려갔다. "구직, 돈 빌려 드립니다"까지 한 글자도 빠트리지 않고 읽었다. 라면만 먹고사는 것이 지겨워서 자살했다는 청년의 기사를 읽었다. 바보. 참고 살지. 그 라면이 먹고 싶어 죽겠는 사람도 있는데. 싱싱한 풋고추에 고추장을 듬뿍 찍어 먹는다면 얼마나 맛있을까!
꼬마 친구들과 친해졌다. 내가 맡은 어린이집에는 3살짜리 꼬마들 7명이 있다. 처음에는 책상도 의자도 침대도 모두모두 작아서 마치 난장이집을 찾아간 느낌이었다. 오전에 일을 할 경우에는 아이들을 깨우고(미쉬마르 하네게브 키부츠에서는 아이들끼리 잠을 잔다) 세수하고 옷 입히고 아침먹고 놀고 식당에 가서 점심식사 받아오는 일을 한다. 오후에 일을 할 경우에는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시간이라 정리정돈과 청소를 한다. 먼저 세탁소에 가서 아이들의 옷을 찾아온다. 단정하게 옷을 개키어 각자의 옷장에 넣는다. 손바닥만한 작은 구두는 빨간색, 검은색, 색깔별로 구두약을 칠해서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정성스럽게 닦는다. 간식을 준비하고 탈, 오데드, 미할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 깨운다. 미할은 가끔씩 침대에 지도 그리기를 잘한다. 그럴 때면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자기 침대로 데리고 간다. 탈은 항상 머리를 침대 구석에 처박고 궁둥이를 하늘 높이 올린 채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한다. 옷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고 간식을 주면 오후 네 시. 부모들이 데리러 오면 아이들은 좋아라 달려나간다.

유대인의 삶을 배우며

울판에서는 이스라엘과 키부츠에 관한 주제로 세미나가 열린다. 세미나는 영어, 불어, 스페인어로 나뉘어 진행된다. 이스라엘 포크송과 포크댄스도 배운다. 일주일에 한 번 식당 앞에서 저녁이면 키부츠鎺은 흥겨운 포크댄스를 춘다. 포크댄스는 손에 손을 잡고 크게 원을 그리고 스텝에 맞추어 빙빙 돌거나 파트너를 바꾸며 춤을 춘다. 나이든 중년과 젊은이 그리고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서 춤을 추는 모습에서 키부츠의 독특한 성격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키부츠에서 이런 포크댄스 행사를 많이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키부츠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때가 3월이었는데 이스라엘 고유명절이 자주 돌아왔고 그들의 전통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3월부터 부림절(푸림) 유월절 독립기념일 칠칠절 명절이 줄을 이었고 10월이 되자 설날 속죄일 초막절 하누카 명절이 계속되었다. 다양한 명절을 지내면서 전통을 지키는 그들의 끈질김을 경험할 수 있었다.
6월. '예루살렘의 날'을 맞이하여 울판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갔다. 6일 전쟁에서 예루살렘을 되찾은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오전에는 예루살렘의 구도시 신도시를 두루 둘러보았다. 키부츠 멤버 중에 한 사람이 우리를 안내해 주었는데 버스 안에서 그는 히브리어, 영어, 불어, 스페인어 순으로 설명을 했다. 모국어만 유창하게 할 줄 아는 나로서는 그 사람의 수개국어를 하는 능력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울판 선생들도 2-3개 국어는 할 줄 안다. 그래야 다양한 나라에서 온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으니까.
오후 5시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야외극장으로 갔는데 전국의 키부츠 울판 학생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야외극장 무대 뒤로 확 트인 유대광야가 보이는데 호연지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헤르쪼그 대통령이 축사를 했고 식이 끝난 다음 세계각국에서 온 유대인 학생들의 노래와 춤으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 살던 사람들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스라엘에 와서 서로 어울린다는 사실이 경이로웠고 이방인인 나는 왠지 코끝이 찡해졌다.
7월. 매월 한 번씩 여행을 가는데 텔아비브 대학의 디아스포라 박물관으로 견학을 갔다. 박물관의 시설이 한국과는 비교도 안되게 뛰어났다. 단순히 사진이나 그림을 전시한 것이 아니라 생동감 있는 시청각 자료를 최대한 이용하고 있는데, 입구에는 수없이 많은 TV 모니터에 유대인의 얼굴이 나타난다. 유대인들의 다양한 얼굴이 몇 초 간격으로 바뀌는 이 화면을 통해서 박물관을 들어서는 순간 여기는 유대인의 모든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이구나 라는 기대감과 독특한 인상을 준다. 박물관 구석구석마다 스크린이 있고 주제별로 자료그림이 나오며 헤드폰을 통해서 영어나 히브리어 중 선택해서 설명을 들을 수도 있다. 2천년간 디아스포라(離散이라는 뜻)로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 내가 유대인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박물관을 본 후에 텔아비브의 해변가로 나갔다. 지중해가 시원해 보였다. 왜 바다는 고향을 떠올리게 할까.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노래가사가 생각났다.

총리와 악수를

페레스 총리가 키부츠를 방문했다. 키부츠에서 가장 한가한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유치원 어린이와 우리 울판 학생들이 총리 환영을 빙자한 구경을 갔다. 흰 남방 차림의 총리는 수행원도 몇 안되고 일행은 초라하게(?) 보였다. 앞에 서 있던 꼬마들과 수상이 악수를 하고 나에게도 악수할 수 있는 차례가 돌아왔다. 내가 "샬롬"이라고 인사하자 그는 "보케르 토브(Good Morning)"라고 대답해 주었다.
함께 공부하는 소냐는 아르헨티나의 모델 출신이다. 그녀는 미리 친구에게 카메라를 주고 페레스 총리와 악수하는 장면을 찍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현상된 사진은 정말 근사했다. 총리와 웃으며 악수하는 소냐. 모델 출신이니 얼굴 받쳐 주지. 모델은 역시 달라. 소냐의 멋진 사진을 보니까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사진을 잘 찍었으면 '이스라엘 페레스 총리와 악수하는 필자' 뭐 이런 류의 타이틀이 붙은 사진을 써먹을(?) 때가 있을지도 모를 것을. 아깝다.
그 당시에는 페레스 총리가 누구인지 잘 몰랐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아랍간의 해묵은 감정으로 두 민족이 서로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있을 때 두 민족은 거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1993년 이스라엘과 PLO가 반목을 중지하고 평화협상의 테이블에 마주 앉게 된 데는 페레스와 라빈 총리의 역할이 컸다. 두 민족간의 평화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일상에서 접해 본 나는 라빈 총리와 페레스 외무부장관(1993년 페레스는 외무장관을 지냈다)이 콤비가 되어 평화협정을 이루어 낸 이후 두 사람의 팬이 되었다. 라빈과 페레스는 두 김씨처럼 오랜 기간 정치적 라이벌이었다. 그렇지만 둘은 중동평화라는 과제를 놓고 힘을 합쳐 이스라엘 우익의 반대를 무릅쓰고 평화의 길을 개척했다. 나는 페레스와 라빈을 존경한다. 서로 다른 민족간에도 평화를 이루었는데 같은 민족끼리 평화를 이루지 못한 우리의 지도자를 보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영원한 자유인 베드윈

8월. 목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휴가기간이다. 매주 목요일이면 브엘쉐바에서는 베드윈시장이 열린다. 울판 학생들과 함께 베드윈시장을 다녀왔다. 베드윈은 이 지역의 아랍계 유목민으로 주로 양을 치며 유목생활을 하는데 이제는 정착하는 숫자가 늘어난다고 한다. 넓은 공터에 천막을 치고 열리는 목요장은 어렸을 때 본 시골장을 연상시켰다. 아랍인 특유의 상품도 있지만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물건이 대부분이어서 약간은 실망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독특한 분위기를 즐기며 이것저것 만져 보고 흥정도 해 보았다. 바나나 껍질로 만든 챙이 달린 모자를 하나 샀다. 5세켈을 부르는데 4세켈로 깎았다. 다른 친구는 12세켈 부르는 물건을 깍아서 7세켈에 샀다. 유럽친구들은 물건 흥정하는 것을 신기하고 재미있어 했다.
울판에서 하루 날을 정해 베드윈 집을 방문했다. 트럭에 올라탄 우리는 울퉁불퉁 포장도 안된 길을 덜컹거리며 갔지만 모두가 시원한 공기와 황량한 광야에 흥분해 있었다. 이십 분쯤 달렸을까 베드윈 집이 보인다. 울판 매니저와 잘 알고 있는 베드윈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랍차를 대접받았다. 집안에는 가재도구라고 할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아랍인 특유의 장신구를 주렁주렁 단 베드윈 여인의 손톱은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어 그들의 생활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브엘쉐바 근처에는 베드윈이 특히 많다. 천막이나 양철의 오두막에 사는 그들을 처음 보았을 때는 '에그 어떻게 저런 곳에서 사나'하는 애처로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현대문명의 혜택을 받지 않고도 전통적인 방법으로 사는 그들이 미개해 보이기보다는 어딘지 현대문명을 초월해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가지고 산다. 베드윈은 냉장고 TV 에어컨 라디오가 없다. 그래도 사는 데는 불편이 없다. 현대의 이기를 거부하고 그들처럼 살아야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이 들 때는 그들을 생각한다. 단순하게 하는 것도 멋있잖아. 소유가 많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휴가 중에는 늦잠 자고 느긋하게 일어나려 했지만 뜻대로 안된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조용한 키부츠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이곳에 올 때만 해도 푸르던 석류가 어느새 탐스럽게 익어서 유혹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예쁜 놈으로 두 개를 따 가지고 왔다.

이번 주에 키부츠에서는 두 쌍의 결혼식이 있었다. 신부는 하얀 원피스를 신랑은 하얀 남방을 입고 키부츠 잔디밭에서 결혼식을 했다. 요란하지 않지만 모두가 축하해 주는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 잔디에 테이블을 옮겨다 놓고 모든 키부츠 사람들이 함께 저녁을 먹으며 축하해 주었다. 식당의 벽면을 스크린 삼아 신랑신부의 다정한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가 상영되었다. 돈내고 돈먹기 식의 시장바닥 같은 누구네 결혼식과는 너무나 다르다. 새 출발하는 두 사람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치러진 소박한 결혼식. 사람 사는 모습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사막을 바꾸는 사람들

9월. 미쉬마르 하네게브 키부츠의 창립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다. 울판학생을 포함한 회원 전체가 아쉬켈론 해변으로 1박2일 야유회를 다녀왔다. 어른 회원의 숫자만 5백 명이니 아이까지 합치면 대규모 야유회였다. 밤에는 숯불을 피우고 닭고기 바베큐 파티가 벌어졌다. 수백 마리 닭을 굽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니고 사람들 표정도 즐겁기만 하다.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 1946년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네게브에 사람들이 모여서 개간하고 마을을 일구었다. 그리고 오늘 개척 1세대와 2세대 그리고 3세대가 함께 모여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이들이 위대해 보였다. 미쉬마르 하네게브는 '네게브를 지키는 자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초대 총리인 벤구리온은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네게브의 스데 보케르(Sde Boker) 키부츠로 가서 일했다. 그는 사막을 남겨 놓는 것은 인간의 수치라고 말했다. 벤구리온 무덤이 있는 세데 보케르에서 보이는 사막은 광활하다. 사막 앞에서 자연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작게만 느껴진다. 그런데 그런 사막을 바꾸어 놓는 사람들이 있다.

투박한 뚝배기 같은 키부츠 사람들

키부츠를 떠나 도시에서 살아보니 키부츠 멤버가 도시사람보다 여유 있고 느긋한 생활을 한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시골 사람과 서울 사람이 어딘지 다르듯이 키부츠닉과 도시인은 느낌이 다르다. 먼저 키부츠닉은 복장에서 차이가 난다. 촌스럽다고 말하기보다는 세련되지 않은 자유로움이 있다. 단순하게 마음대로 입은 옷은, 옷을 입었다는 표현보다 걸쳤다고 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지.
이스라엘 사람은 대체로 맨발에 샌들 신는 것을 좋아하지만 키부츠닉은 거의 예외가 없다. 전형적인 키부츠닉의 모습을 보자면 이러하다. 짙은 청색의 작업복, 배가 좀 나오고, 반바지에 맨발과 샌들. 키부츠 아이들은 맨발로 다니기를 좋아한다. 원시적인 것 같지만 맨발로 걷는 감촉은 꽤 괜찮다. 흙은 뜨거워서 걸을 수가 없고 잔디를 밟으면 상쾌함이 느껴진다.
키부츠닉은 뛰는 법이 없다. 점잔을 빼기 위해서가 아니라 뛸 만큼 급한 일이란 없으니까. 식당 앞에는 재미있는 자가용들이 많다. 우선은 아이들이 타고 온 자전거가 있고, 노인들이 타고 다니는 일인용 꼬마 자동차가 있다. 엔진과 운전석만 있는 작은 차로 뜨거운 햇빛을 막는 덮개가 운전자의 머리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안식일에는 모두 일손을 멈추고 쉬었다가 또 일주일 동안 열심히 일을 한다. 이스라엘 전체적인 분위기가 워낙 겉치레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키부츠는 특히 형식과 치장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내가 본 키부츠 대표간사의 사무실은 낡은 책상 의자 전화기 컴퓨터 그리고 키부츠에서 생산한 농작물 사진이 걸려 있는 검소한 방이었다. 대표 사무실이 아니라 수위실이 아닐까 생각이 될 정도였다. 키부츠의 대표간사라도 안식일이 되면 순서에 따라 앞치마를 두르고 식당에서 일한다. 키부츠 안에서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