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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16장 믿음같이 보이는 믿음이 아닌 것들 - 전병욱 목사

영국신사77 2008. 4. 16. 17:04
 
      
               행 16장 믿음같이 보이는 믿음이 아닌 것들 - 전병욱 목사

  「믿음같이 보이는 믿음이 아닌 것들」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믿음이 아닌 것들이 많습니다. 이런 오해들이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고 오히려 열심을 내면 낼수록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세 가지 에피소드가 나오는데, 첫 번째 에피소드는 루스드라에서 장차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 되는 디모데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거기에서 디모데에게 우리의 상상과는 반대로 할례를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바울이 전도의 방향을 잡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원래 아시아라든지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막으시다가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가는 에피소드입니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유럽의 첫 번째 방문지인 빌립보라는 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을 통해서 우리 믿음의 오해되는 것을 점검하고 올바른 믿음으로 재무장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믿음은 무조건 부딪히는 것인가?

  첫 번째 오해는 믿음은 부딪히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믿음은 투쟁이고 부딪히면 되는 것이다. 믿음과 반대되고 교회와 반대되는 모든 것들과 부딪치는 것, 투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의 성도들은 믿음이 좋게 되면 전투적으로 변화됩니다. 너무 거센 사람들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믿음이 너무 좋으면 남자는 그런 대로 봐줄 만 한데 여자의 경우 여성적인 매력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형제가 어떤 자매에게 매력을 느껴서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그러면 자매들이 부끄러워하고 얼굴도 붉어지고 그래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자매가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할렐루야. 아멘! 기다리고 있었어!’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성도들 웃음) 이 형제가 기겁을 해서 도망쳤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았는데, 이것은 신앙의 올바른 변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마귀들과 싸울지라 하는 투의 자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3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우리가 여기에서 참 당혹감을 느낍니다. 바로 앞장인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주 의제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의 할례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요긴한 것 외에는 짐 지우지 말자, 할례 같은 것 필요없다! 예수를 잘 믿으면 되는 것 아니냐. 구원 얻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결의했습니다. 그 결의의 주동자가 바울 아닙니까? 그런데 그다음 16장에 넘어가자마자 곧장 디모데에게 할례를 베푸는 일이 나옵니다. 일관성이 없잖아요.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원칙을 하나 생각해야 됩니다. 안디옥교회에서 할례가 문제되었던 이유는 할례를 구원과 연결시켰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의 문제입니다.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얘기였습니다. 이럴 때는 선을 확실히 그어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 싸움이기 때문에 이것은 목숨 걸고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16절에 나오는 것은 복음전파의 장애문제입니다. 공연히 유대인 전도에 장애가 될 할례 문제를 그대로 둘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할례 받고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오랜 기간 동안의 전통이 예수 믿는 사람은 술을 안 먹고 담배를 안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사님도 그렇게 따라가고 있고 성도들도 그렇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강도가 와서 저에게 목에 칼을 대고 술 안 마시면 죽인다고 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제가 술을 마실 것 같습니까, 안 마실 것 같습니까? 마셔야지요. 죽으려고 안마십니까? 주시기만 하십시오. 얼마든지 마시겠습니다. (성도들 웃음) 마십니다. 술 먹고 안 먹고가 죽고 살 문제입니까.

  그런데 술 먹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시다. 이 술 마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술 마셔.’ 그러면 그것은 술이 아니라 예수를 부인하는 행동의 표현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는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마시면 안 되겠지요.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한국적인 상황에서는 금주․금연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믿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어기는 것을 배교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술 안 마시고 담배 안 피우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섬기는 것을 믿음의 표상으로 생각하고 있잖아요. 그렇다고 하면 열심히 지켜주어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복음증거에 방해가 된다고 하면 굳이 그런 것들에 투쟁 벌일 필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12절을 보니까 “다른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늘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믿음이라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고 복음의 장애가 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때는 양보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자기의 특수한 권리라 할지라도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진리와, 관계입니다. 사소한 일을 가지고 관계를 깨는 것은 절대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 많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믿음은 오직 믿음만 가지고 가만히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오해는 믿음은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 전에 살폈기 때문에, 알고 있는 내용을 근거로 해서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믿고 가만히 있는다고 하나님이 다 인도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하나님의 응답은 움직일 때, 우리가 발버둥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들과 방향을 바꾸어 주십니다. 신명기 32장11절을 보니까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아기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아기 독수리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독수리가 아기독수리 양육하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들을 이끌어가는 방법들을 살펴보았었지요. 어미 독수리가 갑자기 잘 자라고 있는 아기 독수리의 보금자리를 어지럽히더니만 확 밀어 버립니다. 뚝 떨어지지요. 그럴 때에 그 아기 독수리가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어머니가 미쳤나? 왜 이러나?’ 어미 독수리의 목적은 그것을 통해서 보금자리에만 계속해서 기어 다니는 독수리가 아니라 창공을 나는 독수리로 만들기 위한 뜻 아닙니까? 

  그렇다면 아기 독수리가 해야 할 일은 둥지에서 떨어뜨릴 때 날 수 있느냐 마느냐는 둘째 치고 일단 날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물론 못 납니다. 처음에는 못 날아요. 그러면 다시 어미 독수리가 와 가지고 떨어지기 전에 받아줍니다. 어미 독수리의 목적은 못 날더라도 죽을힘을 다해서 날갯짓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도들은 날갯짓하는 것을 불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하면서 통닭같이 뚝뚝 떨어집니다. 날갯짓 안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고 주님의 뜻을 바라야 된다고 하고 하나님이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하면서 눈 딱 감고 있다가 어미 독수리가 받아주면 믿음이 더욱 강화됩니다. ‘것 봐라! 내가 안 죽는다고 했잖아!’ 그러면서 계속해서 통닭같이 뚝뚝 떨어지는, 그래서 어미 독수리 속 터지게 만드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기도하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여건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 길을 인도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영어식 표현이 참 재미있지요. 영어로 ‘현재’가 present 아닙니까? 그런데 ‘선물’도 present 이지요. 현재라는 말과 선물이라는 말이 똑같습니다. 현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현재라고 주어진 그 시간에 열심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선물입니다.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현재밖에 없습니다. 과거는 추억이고 미래는 준비하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현재밖에 없어요. 현재가 선물입니다. 그러면 현재에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난관이 있다고 하면 발버둥쳐야 합니다. 벗어날 일이 있으면 날갯짓을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도 애쓰잖아요. 사도바울도 하나님의 은혜를 철저히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내용을 보십시오. 16장7절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애쓰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렇게 애쓰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방향만 슬쩍 잡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는 것은 가만히 앉아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기도하고 기도 끝나고 난다음에 돌아와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내가 어디로 가야 될지를 바라보면서 열심히 발버둥치는 모습이 있어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궤도를 수정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길로 확실히 가게 됩니다.
  오늘도 여러분, 앉아서 아무 일도 안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감 줄 거야 하면서 입 벌리고 모습이 아니라 기도하면서 뛰십시오. 무슨 일이든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이끌어주십니다.

                         3.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언제나 평탄하다?


  마지막 세 번째 오해가 있는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평탄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해를 하는 것 같습니다.
  사도바울이 가고 싶은 곳은 아시아, 비두니아 이런 곳이었는데 성령께서 자꾸만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유럽으로 보냈습니다. 빌립보로 보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들잖아요. 하나님께서 이 길도 막고 저 길도 막고 요 길이다 하면서 이끌어 가셨으니까 얼마나 시온의 대로가 열리고 탄탄대로가 열리겠느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빌립보에 들어가면 ‘축 환영!  바울선생 일행 환영!’ 이렇게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안 벌어집니다. 16장12절을 보십시오.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빌립보에 가기는 갔는데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빈둥빈둥 노는 것에 대해서 민망하잖아요.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하도 지루해서 기도하러 나갔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어제저녁에도 아굴람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얘기했지요. ‘사람을 모으기를 원한다면 기도만 하면 사람은 모입니다.’ 성경에 여러 군데 나와 있습니다. 사람을 모으겠다고 마음 먹으면 기도하면 됩니다. 그러면 정말 모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러 가는 길에 루디아를 만나게 했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다 개척만 하려고 합니다. 자기 혼자 힘으로 다 하려고 합니다. 제로베이스(zero-base)에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리 준비한 징검다리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루디아는 징검다리입니다. 루디아를 만났기 때문에 빌립보 전도가 수월해졌습니다. 이미 기존에 있는 틀을 가지고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번 제주선교에 가서도 빌립보와 비슷한 심정을 느낄 것입니다. 대단한 의욕을 가지고 기도하고 준비하고 갔습니다. 어느 마을에 갔는데 전도할 사람도 없고 개밖에 안 보일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게 뭔가 싶을 것입니다. 이때 낙심하면 안 됩니다. 무조건 모여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루디아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십니다. 이런 루디아를 만나야 빠른 시간 안에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1주일 같은 사역은 나의 루디아가 누군지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굉장히 빠른 일이 벌어집니다. 

  또 빌립보에서 있던 사건이 무엇입니까? 귀신들린 여종이 있는데 그를 만나서 귀신을 쫓아내 버렸잖아요.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도 예수 믿게 되었는데 그 사건 때문에 감옥에 들어갑니다.
  잘 보십시오.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 빌립보였는데, 빌립보의 제일 처음의 경험이 감옥경험이었습니다.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거기에서 할일 없으니까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옥문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간수와 온 가족이 예수를 믿습니다. 그 유명한 구절 16장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온 간수가 다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빌립보교회를 세우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잘 보십시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평탄한 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험난한 길이고 썰렁한 길이고 어떤 때는 매 맞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것은 그 길이 바로 열매맺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탄한 데로 이끄신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열매맺는 길로 이끌어 가십니다. 어제도 요셉의 예를 살폈으니까 요셉의 예를 들어보면 요셉이 하나님을 잘 믿고 섬겼을 때에 노예로 끌려가고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에 감옥으로 들어갔습니다. 시편 105편17절에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종으로 팔린 것 자체가 그 온 가족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 경륜입니다. 왜 감옥에 집어넣었습니까? 감옥에 들어가야 바로 앞에 서지요.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통해서 바로에게 직행할 수 있는 고속도로를 열어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닙니다. 열매 맺는 길이고 지름길입니다. 우리에게 잘 해석이 안되는 삶의 많은 부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험난함이 있으면 그때 씩 웃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가 이해 못 하는 이 고속도로로 나를 이끌어 가시는구나.’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더 빠른 길로 인도하시는구나,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이라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할렐루야 아멘하고 부딪히는 것만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을 얻고자 할 때 중심적인 기본 진리 이외에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두 번째 오해가 믿음은 가만히 앉아있는 것 하나님이 무엇 모든 것을 다 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앉아있는 것인 줄 아는데…… 아닙니다! 죽도록 날갯짓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열매 없어도 괜찮습니다. 날갯짓을 하다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납니다. 삶의 현장 속에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 오해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다 평탄하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평탄한 길이 아니라 열매맺는 길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하나님의 거룩한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다같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겠습니다.
  하나님, 부딪히기만 하는 믿음에서, 관계를 통해서 사람 얻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도록 날갯짓하는 종들이 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 열매맺는 길입니다. 어렵더라도 열매맺는 길로 나아가도록 지켜달라고 다같이 기도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성경과의 만남,신학과의 만남 | kaikk
                                                                                                                원문 http://blog.naver.com/kaikk/60010814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