聖經Bible말씀敎會예배 * 선교사

" 역사적 사료로 증명된 충격적인 성경기록의 사실성/구약의 놀라운 정확성

영국신사77 2008. 3. 21. 00:42
" 역사적 사료로 증명된 충격적인 성경기록의 사실성/구약의 놀라운 정확성(1)-Jeffrey Grant "Signature of God"중에서 "

                      구약의 놀라운 정확성(1)

  비기독교 학자들이 1세기 이상 끊임없이 성경을 비판해 왔지만 성경은 역사상 씌어진 책 중 가장 정확하고 권위 있는 것으로 인정을 받으며 아직 건재하다. 언론매체도 성경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비난해 왔다. 그러나 지난 세기에 발굴된 역사적 문서와 사료들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씌어졌다는 것을 확증해 주었다. 성경에 기록된 수천 년 간의 역사적 인물과 사건들을 모두 다 입증할 수는 없지만, 소개되는 확실한 증거들로 이제는 지적인 독자들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책에 대한 신뢰성을 확립할 수 있다는 확신을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을 상세히 살펴보면, 성경의 저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는데 매우 신중하고 정확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의 기자들은 사건을 기록한 시대에 실존한 인물들이었다. 지난 1세기 동안 진행된 성경기록에 대한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인 비교연구 결과로 이스라엘과 주변국을 통치한 41명의 왕의 존재가 파악되었다. 이 사실은 동시대에 발간된 다른 문서와 사료들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성경에 기록된 수 천 건의 진술과 인물, 사건들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확인되어 졌지만 고대 문학작품에는 그 정도의 수준으로 증명된 역사적 기록들이 거의 없다.

  지난 150여 년 간 대다수 성경비판가들은 모세가 창세기와 모세오경의 저자라는 성경적 사실을 부인하는 문헌비평(Documentary Hypothesis) 입장을 지지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창세기에 나타난 다양한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 여호와, 아도나이 등 )으로 보아 서로 다른 5명의 저자가 이 책을 구성했다고 하며, 비판가들은 예수 출현 약 600년 이전에 어떤 저자가 다섯 가지 기록물을 하나의 책으로 재 편집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의 역사를 주의 깊게 고찰하면 널리 가르쳐온 이 이론은 모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종교와 역사에 관련된 어떤 주제도 재기와 의지를 갖고 심각하게 논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적적인 출애굽 사건을 기리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과 같은 축일을 유대인 조상들이 기념하지 않았다면,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는 후대 유대인들이 복잡하고 힘든 그러한 종교적 규례를
지킨다는 것이 가능한지 자문해 보라. 국가적 축일은 시대를 거치면서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되어진 것이다. 만약 이집트로부터 기적적인 해방이 없었다면 이런 축일이 어떻게 전승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입법자 모세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이집트로부터 구원한 기적과 행하신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것을 기억하라고 하였다.
 
  " 너희의 자녀는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였으나 저희가 오늘날 기억할 것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징계와 그 위엄과 그 강한 손과 펴신 팔과 애굽에서 그 왕 바로 와 그 전국에 행하신 이적과 기사와 또 여화와께서 애굽 군대와 그 말과 그 병거에 행하신 일 곧 그들이 너희들 따를 때에 홍해 물로 그들을 덮어 멸하사 오늘까지 이른 것과 또 너희가 이곳에 이르기 까지 광야에서 너희에게 행하신 일과.......너희가 여화와의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목도 하였느니라 ( 신명기 11: 2 - 7, NKJV )

  무명의 한 편집자가 천년 후에 5권 토라를 만들어, 이란에서부터 시리아 등 다양한 지역과 사회계층에 산재해 있는 유대인들에게 접근하여, 전에는 기리지도 않았던 축제일들을 적용시키려 했다면 그는 사기꾼으로 널리 소문이 났을 것이다. 유대 랍비와 학자들은 누구도 본적이 없는 그런 책의 출현에 반대하는 강력한 논쟁을 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토론과 논쟁이 있었다는 어떤 기록도 발견되지 않았다. 무명의 저자가 토라를 만들었다는 비판이론은 어불성설이다.

  앗시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10개 부족에게 족쇄를 채워 앗시리아( 현재 이라크-이란 )로 끌고 갔다. 앗시리아는 바벨론 유수로 진공 상태가 된 지역의 인구를 복원시키려고 B.C. 700년경에 사마리아인들을 이스라엘의 웨스트뱅크로 유입 시켰다. 후일 사마리안들은 이스라엘의 중심부까지도 이동해 왔다. 예수의 사역기간에도 진행된 유대인의 바빌론 유수로부터의 귀환으로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과 반목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사마리인은 오늘까지 수천 년간 이를 질투하면서 자신들의 토라판을 지키고 보존하면서 모세의 토라 5경을 사실로 인정한다
  토라가 권위가 없고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면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을 증오하면서 토라의 역사적 정확성과 권위를 인정할 수 있겠는가? 유대인의 적수인 사마리아인들이 모세 5경의 진실에 동의하는 것은 우리는 위대한 이스라엘의 법 수여자 모세가 기록한 원본 판을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비판가들은 예수 출현 5세기 전에는 기록방식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모세가 문서를 기록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B.C 2000년 경 것으로 추정되는 함부라비 법을 기록된 유명한 흙석주를 포함한 수 많은 고대 사료들의 발굴로, 모세 이전 수 세기 전에 기록방식이 이미 널리 활용되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제시되였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자신의 저서 "Polymnia"의 section c 89에서 출애굽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 이 민족(이스라엘민족)의 기록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은 홍해의 해안에 거주하다가 시리아 해안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 지역은 모두 이집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렸다."


  B.C. 54년에 출생한 이교도 역사가이며 지리학자인 스트라보는 모세의 지도아래 단행된 유대민족의 출애굽과 유대인의 역사를 확인해 주었다. 그는 "예루살렘의 믿을 만한 거주자와 사원에서 보고한 많은 것 중 가장 신뢰성 있는 것은 이집트인들이 현재 유대인들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모세라고 불리는 사제는 하 이집트라고 지칭되는 지역을 통치하였는데, 유일신을 섬기는 대단위 집단과 함께 그 곳을 떠나 유대로 오게 되었다. ( Strabo, Geography, lib. Xvi., c.2 )" 라고 서술하고 있다.

 

 

" 역사적 사료로 증명된 충격적인 성경기록의 사실성/구약의 놀라운 정확성(2)-Jeffrey Grant, "Signature of God" 중에서 "

                             구약의 놀라운 정확성(2)

                               시나이사막의 식량과 식수
  많은 비판가들이 시나이와 같은 건조한 사막은 출애굽에 기록된 것 같이 거대한 양 떼를 수용할 수 없다고 한다.
  1860년 W. Holland는 시나이반도 대부분 지역을 탐사했다. 그는 불모의 땅으로 황폐하고 건조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시나이 일부 지역에서 대단위로 양 떼를 축사하는 것을 발견했다. 만약 기온이나 강수량이 약간만 바뀌어도 얻을 수 있는 목초의 양은 오늘날 조건에서 생산되는 것 보다 훨씬 증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지금은 사막인 티고원의 북동부 넓은 지역이 예전에는 경작지였을 것이 확실하다. 수에즈만은( 수에즈만과 사해를 인위적으로 수로를 연결하였음 )
과거에는 현재보다 좀 더 북부쪽으로 거의 50 마일 정도 확장되어 있어서 팔레스타인의 산들은 수목으로 제법 �여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과거에는 상당한 양의 강우를 만들어 내는 지역이 존재했었고, 이는 시나이에 많은 이슬과 강우를 초래했을 것이다.

  아마도 과거 시나이반도 자체는 좀 더 숲으로 우거졌을 것이다. 반도의 채소와 목초량이 현재도 너무 낮게 평가되어 있다. 현재 강우량보다 약간 많은 비가 내려도 거대한 양의 목초 생산이 가능해 진다. 나는 시골의 지표면, 특히 와디 지역은 한 줄기 비에도 놀랍도록 무성하게 변화하는 것을 여러 번 지켜 볼 수 있었다. ( W. Holland, Recent Explorations in the Peninsula of Sinai, 1869 ) " ( 느브가넷살, 벨사샬과 다리우스를 포함한 ) 과거 수세기 동안 고등비평에서 총체적으로 실존을 부인했던 수많은 성경적 인물들이 현재 역사적 혹은 고고학적 발굴로 믿을 만한 것으로 입증된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과거에 성경의 정확성을 비판하는 시각은 창세기 14장에 등장하는 사건-- 아브라함의 소규모 군대가 5인의 동방 왕들이 연합한 동맹군을 격퇴하는 이야기..을 경멸하며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다. 비판세력은 이런 성경적 기록을 뒷받침 할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중동지역의 고고학적 조사가 진행되어 과거 사건의 상세한 부분도 사실로 입증되는 놀랍고 엄청난 증거들이 속출되고 있다.
  넬슨 글룩박사는 현세기에 팔레스타인 고고학을 주도하는 학자로 인정 받는 사람이다. 히브리유니온 대학 총장이었던 그는 이와 관련된 탐사에서 새롭게 발견된 증거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동방 왕들에 의해 야만적으로 일소되기 전까지 또 다른 높은 수준의 문명이 B.C. 21세기와 19세기 사이에 번영했었다.

  고고학적 증거물에 의해 생명력을 갖게 된 성경기록에 따르면, 동방군은 아쉬타로이스에서 칼나임 시대에 트랜스 요르단을 전역을 관통하여 시리아 남동부 지역과 네게브에서 시나이의 가데시바니아에 이르는 모든 시와 마을을 약탈했다. (창세기 14: 17) (Nelson Glueck, Rivers in the Desert [New York: Farrar, Straus, and Cudahy, 1959], p 11 )."
  글룩박사는 고고학적 기록을 위해 이스라엘 지역 탐사에 수년 간 시간을 바쳤다. 그는 많은 발굴 결과를 놓고 "증거를 탐사할 수 있는 곳은 어느 지역을 다 조사해도, 성경은 확실히 총체적으로 믿을 만 한 것이다. 사실상 어떤 고고학적인 발굴도 성경적인 참고가 필요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고고학적 탐사를 할 때 성경에서 정확하고 자세하게 언급된 곳이나 명확한 한계를 지은 곳에서 하나씩 결실을 보았다. 게다가 성경기록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따라 진행한 탐사는 자주 놀라운 발굴로 유도해 주었다. 이런 탐사는 거의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한 성경의 역사적 기억으로 구성된 방대한 모자이크를 한 칸씩 구성해 가는 형세였다 ( Nelson Glueck, Rivers in the Desert [New York: Farrar, Straus, and Cudahy, 1959], p31 ). "라고 평가하였다.

  지난 150년 동안 중동지역에서 펼쳐진 탐사와 발굴은 성경말씀에 대한 정확성과 신뢰성에 획기적인 빛을 던져 주었다. 추가되는 유물과 더불어 우리는 성경에 있는 놀라운 말씀에 새롭고 흥미로운 확신을 갖게 되었다. 2장에서는 이런 발견물 중 가장 비중 있는 것과 이런 증거가 주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의미를 나누어 보고자 한다.

                           느브가넷살왕의 바벨탑 비문
  아담과 이브 시대로부터 바벨탑사건으로 언어를 혼란 시킨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결행이 사람들을 흩기 전까지 "온 땅의 구음이 하나요 언어가 하나였더라 (창세기 11: 1 )"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지구의 모든 사람들 언어를 혼잡게 하셨다( 창세기 11: 9 ) 그래서 사람들은 이웃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지구 전체로 흩어지게 되었다.
  하늘까지 닿는 바벨탑을 건축하려고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죄에 찬 자만심으로 운집했다. 이에 따른 하나님 심판으로 바벨탑 및 바벨론 시가 붕괴된 것을 모세가 기록하였다. 바벨탑의 잔재로 유리가 남았는데( 일종의 유리 원석을 형성하는 녹는 물체), 이는 하나님에게 대항하여 자만한 인간들이 하늘까지 닿으려고 새벽에 세운 바벨탑을 하나님께서 붕괴시킬 때 거대한 양의 열을 사용하신 것을 암시한다.
 
  언어의 기원을 연구하는 언어학자들은 지구 전체의 수 천 개 방언과 언어를 고대 과거의 언어기원에까지 거슬러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알프레도 트럼베티교수는 모든 언어의 공통적인 기원을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양언어의 위대한 학자 중 하나로 꼽히는 막스 뮬러는 모든 인간 언어는 하나의 기원으로 역추적 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오토 제퍼슨 교수는 처음 언어는 하나님에 의해 사람에게 주워졌다고 주장한다 ( Joseph Free, Archeology and Bible History [ Wheaton: Scripture and Publication, 1969 ] )

  프랑스 정부는 바빌론의 유물에서 발견된 설형 문자 기록에 대한 보고를 받기 위해 오퍼트교수를 파견했다. 그는 느부가넷살 왕이 쓴 긴 기록문을 번역하였다. 이 기록에서 느브가넷살왕이 갈대아 언어로 "언어탑"을 의미하는 발지파(Barzippa)라는 말로써 탑을 언급한 것이 보여진다. 헬라인들은 바벨탑의 멸망을 기술할 때 동일한 "언어탑"을 의미하는 단어로 볼시파(Borsippa)를 사용했다. 느부가넷살의 이러한 기술로 보아 볼시파는 창세기에 모세가 기록한 바벨탑과 명백하게 동일시된다.
  느부가넷살왕은 당대 보다 16세기 이전에 바빌론의 초대 왕 니므롯에 의해 건립되었던 고대 바벨탑의 기초를 재건하기로 결정하였다.
느부가넷살은 그것을 샤레즈 사원(Temple of the Spheres)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 탑을 붕괴 시킨 후 1천년 동안 탑은 원래 높이와 장대한 외관 면에서는 축소되었고, 거대한 기초 (460피이트 X 690 피이트)만 남은 채로 바빌론 외각에 269피이트 높이로 서 있었다. 오늘날 잔존물은 2,300 피이트 넓이의 평지 위에 약 150피이트 높이로 축소되어 있다. 느브가넷살은 금과 은으로 꾸민 장대한 외간을 지닌 바벨론시의 재건을 시도했다. 그는 갈대아신을 기념하여 가장 낮은 형태로 바벨탑을 다시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느브가넷살은 구운 진흙 벽돌의 딱딱한 표면 위에 막대한 재정을 들여 금, 은, 삼나무, 전나무 등으로 바벨탑 기초 부분을 새로 입히려 했다. 이런 벽돌에 느브가넷살왕의 인장이 새겨져 있다. 바벨탑 유물의 기초부분에서 발견된 이런 사료들을 통해, 느부가넷살왕이 수 천 년 전에 자신의 언어로 고대에 있었던 가장 흥미로운 사건을 확증한 것을 알 수 있다.


                바벨탑에 서술된 느부가넷살왕 시

내가 발견하고 건립한 영원한 집인 탑이여
나는 은,금, 다른 금속과 돌, 에머럴드 벽돌, 전나무, 소나무로써
그 외관을 완성시켰다.
땅의 기초인 그 집을
나는 바빌론의 가장 고대적인 기념비로 지어 끝을 맺었다
나는 구리로 싸인 벽돌로 된 끝 부문을 높이 찬양한다.
이 건물은 이 땅의 일곱 빛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볼쉬파, 가장 기릴 만한 것이여
고대 왕이 그것을 세웠으나 완성을 보지 못했다
고대에 사람들은 지시하는 그들의 말 표현이 없어서
완성을 포기해야 했다
그 때 이후로 지진과 천둥으로 태양에 말린 진흙이 다 분쇄되었다.
벽돌은 쪼개지고 내부 흙은 무더기로 흩어졌다.
메로다취, 위대한 신이 나의 마음을 동요 시켜 이 건물을 복원하게 하였다.
나는 위치를 바꾸지 않았고 기초를 옮기지도 않았다.
축복된 달에 상서로운 날에
나는 원래 벽돌 뭉치와 타버린 벽돌 주위에 주랑을 세웠다.
나는 둥근 형으로 개조해서 키틸 주랑에 나의 이름을 새기어 넣었다.
나는 끝나도록 손을 쓸 것이고 탑 끝을 찬양할 것이다.
고대에 그랬던 것 처럼 나도 그 완성을 찬양할 것이다.


  이 기술문을 호퍼트교수가 번역하였고 윌리암 로푸터스씨는 그의 저서 Travels and Researches in Chaldea and Sinai (London; James Nisbet, 1857,p.29)에 이 흥미로운 비문을 번역했다
  믿기 힘든 놀라운 기술로 창세기의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 중 하나를 기록한 성경의 정확성이 확인되었다. 이교도 왕인 느부가넷살은 스스로 "이전의 왕이 이것을 지었으나 그는 그 끝을 완성하지 못했다"라고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 기록은 하나님이 바벨탑 최초 건립자들이 탑의 윗 부분을 완성하지 못하게 했다는 성경 기록의 진실성을 확증해 주었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느브가넷살 왕이 지적한 것으로, 고대 왕이 탑을 완성시키지 못한 이유가 다음과 같기 때문이라 점이다.
    "고대시대에 사람들은 지시하는 그들의 말 표현이 없어서 완성을 포기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은 언어를 통제하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바벨탑에 관한 성경적 기록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을 돌을 대신하여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 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로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창세기 11:2 - 9 )."

  "고대의 왕이 그것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끝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 이후 사람들이 그것을 포기했다." 라는 느브가넷살왕의 진술과 창세기 11장 7절의 모세의 기록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와 비교해 보라.
 
  좀 더 놀라운 것은 이교도 왕이 밝히기를 탑의 끝을 완성할 수 없었던 이유는 지시하는 표현이 없어서 탑의 완성을 포기했다고 밝힌 구절이다.
 
  느부가넷살의 이런 표현은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힘으로 땅의 언어를 혼란케 하신 것과, 사람을 땅 위에 흩으신 것(창세기 11: 2- 9)으로 기록한 창세기의 역사적 사건을 명확하게 입증해 주는 것이다. 느브가넷살왕의 기술은 성경의 기록된 사건을 정확하게 기록됐다는 것을 강력하게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역사적 사료로 증명된 충격적인 성경기록의 사실성

                   / 구약의 놀라운 정확성(3)-Jeffrey Grant, "

                          구약의 놀라운 정확성(3)

                          요셉과 7년 기근
 7년 풍작에 이어진 7년 흉년사건에 대한 성경 기록 (창세기 41:29 – 30)을 확인해주는 흥미로운 기록이 19세기 사우디아라비아 남동부에서 발견었다. 현재 지명으로는 민주예맨의 하드라마우트 해안으로, 이 곳의 한 성곽의 대리석판에서 요셉 당시 기근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 발견되었다.

 조사 결과로 이 기록은 예수의 탄생 약 1800년 이전에 씌어진 것으로, 야곱과 열 두 아들에 관한 성경의 기록에 대응되는 시기이다. 슐텐스 교수가 이 기록을 아랍어로 기술하였고, 후일에 찰스 포스터교수가 영어로 번역하였다.
번역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오랜 기간 이 성에서 편히 거주하였다:
우리는 욕심도 없었고 포도원의 주인이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수 백마리 낙타가 매일 저녁 우리에게 돌아왔고
낙타의 눈에도 이곳은 쉼터로서 매우 좋은 듯 보였다.
우리 양은 낙타 수의 두 배 였고
느리게 이동하는 소도 흰 양과 같이 많았다.
우리는 이 성에서 7년을 아주 안락하게 살았다.
____그런 생활을 다시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상황인가!
악마의 해가 스쳐 지나가는 그 때에 황폐한 시기가 들이 닥쳤다.
또 다른 해가 지나갔다.
우리는 다시는 좋은 시절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되어 버렸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발이 있거나 굽이 있는 동물도 남아 있지 못했다.
하나님께 감사히 여기지 않고 먹는 사람은
삶의 터전에서 몰살되지 않으려는 노력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

  고대의 이 시는 풍년 뒤에 따른 기근과 흉작의 시기에 찾아든 황폐함을 기록하였다. 시는 기근이 7년간 계속된 것을 암시한다.

  고대 아라비아의 이 시는 이집트 총리로서 요셉이 정치하던 시기에 일어난 중동 지역의 7년 풍년과, 뒤이은 7년 흉년에 관한 성경적 기록의 정확성을 독립적 증거로서 확증해 주었다. 다가올 기근을 대비하여 풍년 시기에 남은 곡식을 수거하여 비축한 요셉의 현명한 정책을 모세는 기록하였다.
 
    “요셉이 애굽 땅에 있는 그 칠 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축하되
     각 성 주위의 밭의 곡물을 그 성 중에 저장하매 (창세기41: 48).”

  또한 모세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애굽 땅에 일곱 해 풍년이 그치고 요셉의 말과 같이 일곱 해 흉년이 들기 시작하매 각 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애굽 온 땅에는 식물이 있더니 애굽 온 땅이 주리매 백성이 바로에게 부르짖어 양식을 구하는 지라 바로가 애굽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요셉에게 가서 그가 너희에게 이르는 대로 하라 하니라. 온 지면에 기근이 있으매 요셉이 모든 창고를 열고 애굽 백성에게 팔새 애굽 땅에 기근이 심하며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창세기41:53–57 )”

  창세기에서 기술된 바와 같이 이집트에 7년 기근이 매우 심각하여 요셉은 행정부 수반으로서 주변 국가의 모든 거주자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비축된 곡식을 양식으로 거래하는데 매우 신중해야만 했다. 요셉은 곡식이 동이 날 위험성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금과 은을 받고서 이집트 곡식을 팔 수는 없었다. 기근이 절정에 이르자 곡식은 금이나 돈보다 훨씬 큰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지난 세기에 벌였던 탐사로 성경에 기록된 사건을 확인해 주는 수 많은 흥미로운 고대 사료들을 중동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예맨 출신의 아랍인 에븐헤샴은 영국인 탐험가 크루텐던씨에게 창세기 41장에 씌어진 이집트 기근 시대에죽은 부유한 예맨 여인의 무덤을 보여 주었다. 심한 홍수로 1850년 경에 이 예맨 여인의 무덤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 무덤에는 아름다운 보석으로 장식한 부유한 귀족 여성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었다. 시신의 목에는 7 색깔의 진주가 감기어 졌고 손과 발은 7개 팔찌,반지, 발목 장신구 등 비싼 보석으로 장식되었다. 그녀의 무덤에는 값진 보물로 가득찬 관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귀중한 보물은 그녀가 남긴 마지막 글을 새긴 석판이다. 이 글은 이집트의 7년 기근 시기에 남아있던 비축된 양식을 요셉이 얼마나 신중하게 처리했는지를 보여주어, 성경기록을 사실로 확증해 주었다.


  요셉이 통치하던 당시 기근을 당한 예맨 사람의 기록

  하나님 당신의 이름으로,
함야의 하나님 두쥬 세파의 딸인 나 타야는
나의 종을 요셉에게 보냈습니다.
종의 귀환이 지체되어 나는 내 여종을 보냈습니다.
밀가루를 가져오게 하려고 은을 실려서:
식량을 조달 받을 수가 없어서 나는 금을 실어 여종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받지 못하여 다시 진주를 보냈습니다.
역시 식량이 도착되지 않아 그것들이 밀가루가 되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어서 나는 여기서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누구든지 이 소식을 듣는 사람은 요셉이 나를 불쌍히 여기도록 해주시오.
나의 장식물로 몸치장을 할 수 있는 어떤 여인도
나 같은 죽음으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reported in Niebuhr’s Voyage en Arabie, PL.LIX. Translation by Rev. Charles Forster )

  이 고대의 비문은 금으로도 이집트의 곡식을 살 수 없다는 예맨의 아랍귀족여인의 애절한 불평을 잘 나타내고, 또한 이집트의 귀중한 곡식을 매매하는 대가로 금을 제시하는 이방인의 어떠한 호소에도 응하지 않는 요셉의 결연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런 태도는 자신의 도덕성을 흔드는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요셉의 청년기에 보여준 결단성을 상기시켜 준다. 기근의 비극적 역사는 적은 양이라도 식량을 구하려고 거래 댓가로 귀중한 금속과 사치품을 교환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출애굽사건을 증명하는 고대 사료
  이집트에서 보냈던 노예생활로부터 유대인을 초자연적으로 구출한 사건을 다룬 출애굽기의 성경기록은 가장 기적적이며 경이적인 사건의 하나이다. 기독교 목사나 평신도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대민족을 특별한 민족으로 창출한 주요 사건들을 입증하는 증거와 이를 확인을 해주는 많은 고대 사료와 역사적 기록들이 있다

  모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해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외에 보해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 중다한 잡곡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니(출애굽기 12: 37-38 ).”

  유대 역사가인 프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고대 제사장이며 학자인 메네소와 케레몬이 이집트 역사에서 요셉과 모세를 유대인의 지도자로 칭했다고 한다 ( Flavius Josephus, Jpsephus Against Apion. I., 26,27,32 ). 요세푸스 기록에 의하면, 이집트인들은 유대인이 부정하다고 믿어서 이들을 증오하였고 유대인들이 이집트 땅에서 집단 탈출한 전설을 기억한다고 하였다.

  메네소와 케레몬은 유대인들이 이집트의 신을 비롯한 이집트의 관습을 일절 거부했다고 기술한 것이 흥미롭다. 이교도 역사가들이 유대인이 유월절에 희생양을 잡는 표시로 희생물로써 동물을 잡는다는 것을 인지했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 역사가들은 이스라엘인들이 “시리아 남동쪽”( 고대 팔레스타인의 이집트식 이름 )으로 이주해서 들어간 사실을 확증해 주었다. 메네토는 기록하기를 람세스 아들이며, 세토스의 아버지인 아메노피스가 제 18왕조 말기를 통치하였는데 그의 재위기간 중인 B.C. 1500년과 1400년 사이에 유대인이 갑작스럽게 이집트를 탈출했다고 하였다.

  이같은 기록은 출애굽 사건이 약 B.C. 1491년 경에 발생했다는 구약 성경의 연대기적 날짜를 사실로 증거해 주는 것이다.

  수년 전에 다각적인 조사를 끝낸 후에 나는 디오도러스 시큐러스 도서관에서 40권으로 된 한 질의 책을 발견하였다. 디오도러스 시큐러스는 B.C. 80년에 태어나 예수의 출생 약 20년 이전에 사망한 시실리의 아규리움 출신의 그리스 역사가였다. 그는 고대사건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중동지방 전역을 여행하였다. 기록하지 않으면 영원히 잊어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들을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그는 이러한 가치 있는 기록들을 재편집했다. 디오도러스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고대 이집트에 큰 재앙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재앙의 원인을 하나님 탓으로 돌렸다. 그 하나님은 그 땅에 사는 이방인들 때문에 이집트인들을 벌하곤 하였다. 이 이방인들은 자신의 신을 예배할 때 그들의 의식과 예식을 거행했다.”

  이집트인들은 이방인들이 자신의 땅에서 밀려 나가지 않으면 재앙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 일에 관해 다른 저자들이 우리에게 말한 것처럼 이방인들이 이집트에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나라를 떠나게 된 그 이방인의 가장 탁월하고 진취적인…….이집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시대에는 거주지가 아니었던 현재 유대라고 불리는 곳으로 물러난 사람들…..이런 이주민들을 모세가 이끌었는데 그는 지혜와 전술에 매우 능하였다. 모세는 이들에게 법을 주었고 그는 또 모든 것을 주장하고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유일한 하나의 신만 있다고 하여 신의 어떠한 이미지도 만들지 못하는 법을 제정했다 ( Diodorus Siculus, Library of History, lib.1., ap Phot ).”

  이 장에서 다룬 역사적 기록과 역사적 사료들은 성경의 역사적 정확성을 입증해 주는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벨탑과 이집트의 7년 기근과 같은 기적적인 사건을 평가할 때, 이런 사료의 발견은 구약성경 기자들을 정확한 역사가로서 신뢰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들을 제공하고 있다.

 

 

                                                                                                              출처:다락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