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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타지키스탄 선교사 이종분
(1) 남편·남매 둔 평범한 주부에 “러시아로 떠나라” 선교 명령
2008.03.06 21:20:40 | |
'복음의 불모지 중앙아시아 타지키스탄 한국 최초의 여선교사(64).' 이 문장은 하나의 '명령부호'처럼 내 심장을 뛰게 한다. 그러나 예전에 내게 선교사란 이름은 낯설기만 한 단어에 불과했다. 특히 러시아 연방, 구 소련은 언제나 차가운 눈보라가 매섭게 치고 있는 동토의 나라, 그러면서 영화 '닥터 지바고'의 하얀 눈덮인 벌판과 '백야'의 아름다운 밤하늘이 애뜻하게 떠오르는 곳이었다.
"소련으로 가라."
1991년 고등학교 3학년 아들과 중학교 3학년 딸, 그리고 한 평생을 함께해 온 남편을 둔 평범한 주부였던 나에게 하나님께서 러시아로 선교를 떠나라고 명령하셨다. 새벽에 일어나 쌀을 씻을 때 하나님께서는 계속 "소련으로 가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섬기는 나였지만 그 말씀만큼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은 평신도 권사였다.
"학군이 좋은 지역으로 이사를 다닐 정도로 자녀교육에 악착을 떨었던 제게 아이들을 두고 먼 곳으로 선교를 떠나라니요. 그것보다도 제게 그런 능력이 없어요. 절대로 갈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다음 말씀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그렇게 자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내가 아이들을 데려가겠다. 내가 너의 자녀를 양육할 것이니 너는 나의 자녀를 양육하라."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던 하나님의 음성이 떠올랐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홀홀단신 낯선 나라로 떠나는 나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그러나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선 신앙생활을 하려면 가정을 돌보며 조신하게 해야지 지나친 것이 아니냐며 만류했다. 나도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나 이후 하나님께서는 몇 번의 환상을 보여주셨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셨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라는 다짐을 했다.
1992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선교지 답사를 위해 러시아 모스크바로 갔을 때의 일이다. 답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하바롭스크에 기착했다. 한데 한국행 비행기가 다음날 아침에나 있어 하룻밤을 꼬박 공항에서 지새야 할 처지가 됐다. 그때 고려인 한 사람이 다가왔다. 그는 나와 한국어도, 영어도 통하지 않았다. 그나마 몸짓언어가 통하는 것 같았다.
"비행기는 내일 아침에 있는데 어디 묵을 숙소라도 있나요?"
하나님이 이렇게 예비해 주시는구나!감사함을 느끼며 그를 따라나섰다. 그러나 그 감사는 몇 시간 후 원망과 두려움으로 변했다. 고려인 남자는 낡은 트럭에 짐을 싣고 한 시간, 아니 두 시간이 넘도록 허허 벌판을 달렸다. 눈덮인 평야만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평원 위로 해가 지고 있었다. '혹시 이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친절했던 태도에 나쁜 의도가 있었던 걸까?'
그의 건장한 체구가 갑자기 위협으로 느껴졌다. 차창밖에 칠흑같은 어둠이 깔린 후에 멀리 오두막집이 보였다. 자동차가 그 집 앞에 멈췄다. 불안과 공포가 엄습해왔다. 그 순간 불빛이 새어나오던 오두막집에서 반가운 한국말이 들렸다.
"와 이제 오노?"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집에서 나와 분명한 한국말로 자신의 아들을 반기는 것이었다. 불안감은 반가움으로 변해 "할머니 어떻게 한국말을 할 줄 아세요?"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한국사람이 한국말 하지 않으면 무슨 말 하노?"라며 고향의 맛을 물씬 풍기는 김치와 막 지은 밥을 차려 주었다. 할머니는 낡은 성경책을 꺼내 보여주며 자신도 예수님을 믿는다며 다음날 아들이 공항까지 데려다 줄 거라고 말했다. 그날 나는 어느곳에 있든지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예비해 주신다는 것을 다시한번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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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종분 (2) 첫 선교지 두샴베 내전 발발 |
타지키스탄은 광활한 대륙이었다. 첫 인상은 '황폐함' 그 자체였다. 여름엔 섭씨 50도, 겨울엔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기후였다. 전기 공급이 열악해 사람들은 더위와 추위에 그대로 노출됐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회교 근본주의자들과 정부간의 갈등으로 긴장이 감돌고, 마피아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처음 파송받은 곳은 타지키스탄의 수도 두샴베였다. 그곳엔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온 최윤섭 목사가 선민교회를 이끌고 있었다. 내전의 소용돌이에 처한 회교국가에서, 독일 침례교회를 제외하고 유일한 개신교 교회로 사명을 다하고 있었다. 난 한국과 이곳을 오가며 선교활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1993년 발생한 내전으로 두샴베에서의 사역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타지키스탄에 거주했던 한인 1만여명 가운데 7000여명이 인근 공화국으로 피란갔다. 두샴베에서는 계속 사역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한국으로 철수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데는 분명히 목적이 있을텐데 포기할 수 없었다. 비로소 홀로서기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타지키스탄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 후잔으로 이동했다. 후잔에 도착해 다행히 고려인 알라를 만나게 되었다. 알라는 한국말을 잘하고 성경도 조금 알고 있었다. '가라하신 주께서 미리 준비하셨구나'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에 용기를 얻고 교회 장소를 물색했다. 지역에서 가장 큰 19학교 강당을 임대하기로 했다. 500명쯤 들어가는 장소였고 의자도 있었다.
1994년 5월 7일. 후잔에 도착해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알라를 통해 지역주민들에게 교회 나오기를 청했다. 커다란 강당에 7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서 5:16)의 말씀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강당을 꽉 채운 예배광경을 상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알라가 통역을 해주었다.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무술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 청년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 태권도를 가르치면 좋을 것같았다. 태권도 사범이 곧 사역지로 합류하기로 했다. 지역신문에 광고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한 남자가 찾아왔다. 건강하고 험악하게 생겨서 보기만해도 움츠러들었다.
"저는 가라데를 가르치는 사범인데 내 제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주세요. 지금 청년들이 모여있으니 같이 가봅시다."
그는 나와 알라를 자동차에 태워 체육관으로 데려갔다. 체육관에는 흰도복을 입은 청년들이 많이 있었다.
"가르쳐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꼭 예배를 드린 후에 운동을 하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알라의 통역을 들은 청년들은 괴성을 질렀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현같았다. 무서웠다. 그러자 사범이 손을 내밀어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한국 지도를 꺼내어 보이며 설명했다.
"한국에도 모슬렘 성전이 7군데나 있어요. 이 청년들은 알라 신을 믿어요. 그렇지만 태권도를 가르쳐 주세요."
"미안하지만 전 태권도를 보급하러 온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예배를 드리고 원하는 사람에게 태권도를 가르칠 것입니다."
그 사범은 알겠다며 인형을 선물로 주었다. 알라 신에게 기도하는 인형이었다. 나도 선물을 주겠다고 말했다. "이 선물은 꼭 목에다 걸어주고 기도를 해주는 것이 예법"이라고 말했다. 나는 키가 작아 의자 위에 올라서서 가지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사범의 목에 걸어주고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었다.
그의 제자들이 못마땅한 태도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죽으면 죽으리라. 내가 예수님을 부끄러워하면 예수님도 나를 부끄러워하실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곳을 빠져 나오는데 왜 그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통역하던 알라는 내 행동에 시종 놀란 표정이었다. 담대함이 어디서 생겨났는지 나도 놀랐다. 매 순간 하나님께서 용기를 부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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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종분 (3) 다리 염증 환자 기도로 치료 마을 주민들 교회 출석 기적 |
고려인 알라의 여동생 나리사는 후잔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내가 기도해준 사람이었다. 알라가 오른쪽 다리의 염증으로 잘 걷지 못하는 여동생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해서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다음날 아침, 나리사는 전화로 피고름이 흐르던 다리가 깨끗해졌다고 알려왔다. 얼마나 기쁘던지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100번도 넘게 외쳤다. 이후 나리사는 헌신적으로 교회 일을 도왔다.
1994년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교회 설립 허가를 받기 위해 경찰서에 갈 때 나리사가 동행했다. 경찰서 안에 역겨운 냄새가 진동해 순서 기다리기가 힘겨웠다. 긴 의자에 앉아 있는데 모슬렘 전통복을 입은 한 남자가 자꾸 옆으로 다가앉았다. 내가 피해도 그 남자는 계속 다가앉았다.
"가까이 오지 말아요."
나리사가 야단을 쳤지만 그 사람은 "난 이슬람 지도자인데 저 여자에게서 사람을 끄는 이상한 힘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나리사는 "저 분은 기도로 병을 고치는 사람이다. 당신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리사의 이 말이 온 동네에 퍼져 다음 주일,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나오는 기적이 벌어졌다. 7명의 성도로 시작한 교회에 사람들은 줄지어 들어왔다. 그것도 들것에 실려서 또는 업혀서 환자들이 많이 왔다. 속으로 겁이 났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말씀으로 설교했다. 한인회장인 세라핌이 통역을 하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설교를 하다 보니 뭔가는 모르겠지만 세라핌이 다른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공산당이 전쟁에서 이겼고, 김일성 주석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나쁜 의도를 숨기고 통역을 자청했던 것이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 찬송가 405장을 불렀다. 눈물이 났다.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이 너무나 답답했다. 울면서 찬송하며 속으로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런데 울다 고개를 드니 모든 사람이 다 일어나서 울고 있었다. 그들이 왜 우는지는 몰랐다. 아마도 내가 불쌍해서 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웬일인가? 이들이 방언을 하며 손을 들고, 또 어떤 이는 가슴을 치며, 어떤 이는 춤을 추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일은 들것에 실려온 사람이 일어서는 것이었다. 성령의 역사에 너무나 놀랐다. 예배가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몰려와 입을 맞추고 포옹을 해서 당황했다.
이렇게 기쁨과 용기가 샘솟았던 가슴은 며칠 후 또다시 내려앉았다.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숙소인 아파트 3층 창문에 누군가 돌을 던져 유리가 와장창 깨졌다. 별일 아니라 생각하고 하루를 지냈다. 그 다음날 저녁 9시쯤 누군가 열쇠로 아파트 현관문을 열려고 했다. 누구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또 다른 열쇠를 바꿔가면서 문을 열고 있었다. 전화를 걸어 나리사에게 알리려고 했지만 불통이었다. 전화 줄을 밖에서 끊은 것이다.
"강하고 담대하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문을 힘껏 걷어찼다. 그리고 "누구냐!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야!"라고 소리쳤다. 얼마나 세게 문을 찼던지 문이 흔들흔들했다.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이 아니고 적어도 네다섯명 같았다. 얼마나 놀랐는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날 짐을 싸들고 교회로 갔다. 교회에는 1인용 침대가 겨우 들어갈 만한 조그만 방이 한 칸 있었다. 그러나 교회도 안전하지 못했다. 며칠 후 저녁 8시쯤 되었는데 술 먹은 남자들이 찾아왔다. 자기 아이를 찾으러 왔다는 것이다. 이리저리 교회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난 무서워서 그날 당번인 로딜을 찾았다. 로딜이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찾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다. 고막이 터지는 것 같았다. "나보다 로딜이 더 위대하냐?" 성령님의 음성이었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담대함이 생겼다.
"당신들 누구야? 왜 함부로 교회 안을 뒤지는 거야? 나가!"
타지키스탄 말로 소리쳤다. 덩치 큰 남자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슬슬 도망치듯 가버렸다. 그 이후로 나와 우리 아이들 입에서는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우리 주 하나님'이란 말이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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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종분 (4) 태권도 통한 선교 큰 반향 4개월만에 1000여명 몰려 |
선교지의 하루는 유수처럼 빨랐다. 그래도 어떤 날은 고국이 그리워 시간이 멈춰버린 날도 있다. '하나님 저는 이 나라 말도 잘 못하는데 언제 이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요?' 교회에 나와 풀 죽은 모습으로 성경을 읽었다. 그때 갑자기 한 성경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8∼20)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이 가슴에 요동쳤다. 학교를 다닐 수 없는 가정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게 하시며 '이때를 위해 내가 너를 준비했노라'고 말씀하셨던 주님을 기억했다. 선교사의 꿈도 없던 나를 이곳에 보내신 주님을 기억하고 다시 새 힘을 얻었다.
태권도를 선교의 도구로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리라는 계획을 좀더 구체화시켰다. 이들에게 신학교육을 시켜 목회자로 길러낼 계획을 세웠다. 태권도를 배우기 위해 몰려오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수련 조건으로 교회출석을 의무화했다. 또 단급심사 때 성경암송과 신앙기준을 척도로 삼았다. 순박한 신앙 때문인지 복음의 흡수력은 엄청나 기적과 회심이 잇따랐다. 4개월 만에 1000여명이 모이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1994년 7월, 45명이 21일동안 합숙하며 성경공부하는 '미스바' 집회를 가졌다. 45명 전원이 성령충만하고 방언을 받았다. 두 달후 '아카데미'를 개설했다. 참가자들은 40일동안 말씀공부와 찬양, 태권도 훈련을 받았다. 지역주민들의 호응은 놀라웠다. 술 담배 마약을 하는 젊은이들이 동네에서 사라졌다며 교회에 고마워했다.
그해 11월, 2년과정의 후잔 순복음 신학교를 설립했다. 지원 자격은 '미스바'와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 고백하는 자여야 했다. 23명이 입학했고 이들 중 15명이 졸업했다. 감사한 것은 순복음 대구교회에서 졸업생 전원을 초청해 한국에서 졸업식을 치러주었고 관광도 시켜준 것이다.
한국에서 태권도 선교사 이용일씨가 오면서 태권도 선교는 급속히 확산되는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던 어느날 태권도 선교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당신은 신성한 스포츠를 왜 종교에 이용하는 것입니까?"
어느날 타지키스탄 정부관계자는 나를 시청의 한 사무실로 불러 무서운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하나님께 기도해 지혜를 얻었다. 나는 그에게 태권도를 통해 일어나는 사건들을 책임지겠다는 서약서를 써준다면 나도 태권도를 선교에 이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태권도는 급소를 찌르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운동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로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싸움하는 데 도구로 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배 없이는 이 운동을 가르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책임자는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만 돌아가 보라고 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지혜로 고비를 넘기면 또 다시 어려움은 다가왔다. 무슬림 강경파들은 교회가 임대하고 있는 학교장에게 선민교회를 내보내지 않으면 교장직을 해임하겠다고 위협했다. 우리는 예배드릴 장소가 없어질 것을 걱정했다. "보내셨으면 책임져 주세요!" 하나님께 울며 금식하며 기도했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현재 교회 건물로 사용하고 있는 39유치원을 내게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기도 응답을 받은 후, 후잔시장을 찾아가 "내가 믿는 하나님께서 39유치원을 주겠다고 약속하셔서 찾아왔습니다. 그곳을 저에게 주면 다시 건물을 짓겠습니다."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한 분 아닌가?"
"맞습니다. 내가 믿는 분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역경의 열매] 이종분 (5) 시청 스포츠 담당자 도움 무슬림 국가에 교회 건축 |
“39유치원을 당신에게 임대해주겠소. 대신 교회가 아닌 미션센터라고 부르세요.”
후잔시청의 스포츠 당당자는 믿기지 않는 말을 하고 있었다. 뛸 듯이 기뻤다. 할렐루야!이슬람 국가에서 교회 허가를 받은 셈이니 얼마나 기쁜가. 1년 반에 걸쳐 순복음 대구교회의 도움으로 성전을 아름답게 건축했다. 교세는 점점 번창해 치칼레스카, 가포르, 가락쿰, 가니바담, 차일록, 다바쌀, 나우, 브랄리타스, 술룩타, 아시트, 자파라파 등에 교회를 세웠다.
신학교를 졸업한 주의 종들을 그곳으로 내보냈다. 이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했다. 한껏 중앙아시아 선교로 부풀어있던 어느 날, 총을 든 경찰관들이 교회에 들이닥쳤다. 상부의 지시로 오늘부로 교회를 폐쇄시키니 나가라고 했다. 그들은 긴 각목 두 개를 엑스자로 만들어 교회문에 못질했다. 그리고 “뜯으면 감옥에 가게 될 것”이란 으름장을 놓고 돌아갔다.
나는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각오로 각목을 뜯어냈다. ‘내일이면 경찰에 끌려 가겠구나’라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러나 경찰은 오지 않았다. 다음날 후잔, 치칼레스카에 원인 모르는 내전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하루 하루를 하나님의 은혜로 보냈다.
1997년 4월.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나를 이곳에 보냈는데 이 나라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를 골똘히 생각했다. 이 나라는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후 몇 년 동안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했다. 새것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아파트 벽이 너무 지저분해서 도배하고 싶었지만, 같은 무늬의 벽지를 다량으로 구할 수 없었다. 이집 저집에서 벽지를 사다가 서로 다른 무늬로 도배하고 한참 웃은 일이 있다. 경제적으로 이런 상황이지만 교육을 시키면 이 나라의 상황이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나라 최초의 사립학교 설립을 결심했다. 모든 건물은 국가소유였다. 2000평의 운동장, 교실 24개가 있는 2층 건물을 600달러에 20년 임대하기로 계약했다. 기아대책기구와 여의도순복음교회 김영준 장로님, 이순생 권사님의 도움으로 난방시설, 화장실 등을 전면 리모델링했다.
교사들을 모집했다. 국가가 주는 월급의 5배를 주기로 했다. 장기간으로 볼 때 학교 운영비를 한국의 선교헌금으로는 충당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모험을 결심했다. 학생수업료를 매월 20달러로 정했다. 이 금액을 받지 않으면 학교를 운영할 수 없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시장 월급이 3달러였을 때였다. 사람들은 교육비가 비싸서 누가 오겠느냐고 걱정했다.
그러나 학생 100명을 모집했는데 423명이 지원했다. 러시아어로 배우는 학급, 타직어로 배우는 학급으로 나누고 교사들도 두 분류로 나누었다. 가난한 나라 타지키스탄에서 고액의 교육비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에 현지인도, 정부 관계자들도 놀랐다. 국민의 5%는 아주 잘사는 것 같았다.
선민학교의 교사, 학생 모집도 무난히 끝났는데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다. 이 나라는 매년 정부로부터 학교운영 허가를 받아야 했다. 문교부의 한 장학관이 전화를 해왔다. 학교 벽에 페인트로 쓴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를 지우지 않으면 라이선스를 발급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말은 진리인데 어떻게 지울 수 있습니까. 나는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지웠다가 라이선스를 받고 다시 쓰면 되잖소.”
학교 교사 43명, 교장 1명, 교감 3명 전 직원이 63명인데 모두 나에게 그 글씨를 지울 것을 간청했다. 미술교사는 지웠다가 허가를 받은 후 더 아름답게 써놓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난 라이선스를 못받는 일이 있어도 지울 수가 없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학교 라이선스 문제로 교사들과 갈등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문교부 관계자는 “오늘 문교부 차관이 학교를 방문한다며 교문 앞에 나와 기다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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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종분 (6) 선민학교 찾아온 문교부 차관 “좋은 학교 세워줘 감사” 격려 |
문교부 차관은 친척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이 지역에 외국인이 세운 이 나라 최초의 사립학교가 있다고 해서 방문했다고 했다. 그가 웃으면서 한 다음 말에 내 가슴은 또 철렁 내려앉았다.
"교문 옆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누가 써 놓았지요?"
'주님, 이 학교를 세운 것이 제 뜻이었나요? 하나님의 뜻이었나요? 하나님 뜻으로 세워졌다고 믿고 담대히 나가겠습니다.' 나 역시 웃는 얼굴로 "왜 그 말이 잘못 되었습니까?"라고 물었다.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내전으로 많은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입었기에 이런 포근한 말이 필요합니다. 참 잘 썼습니다."
그의 말이 믿어지지 않아 다시 한번 얘기해 달라고 했다.
"아주 좋아요. 시설도 좋고요. 이런 학교를 세워주어 고맙습니다."
나는 차관을 수행했던 장학사 두 명에게 "들었지? 알았지?"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들은 얼굴을 돌렸다. 다음날 라이선스를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믿고 나가면 반드시 통쾌하게 해결해 주시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셨다.
선민학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성경을 가르쳤다. 모슬렘 국가에서 어떻게 성경을 가르칠 수 있을까? 이 나라 구소련 시대의 과목 중에 '하나님은 없다'는 과목이 있다. 이것을 이용해 우리는 성경과 코란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했다. 교사 자격증이 있는 교회 전도사들이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 문교부에서 "언제 코란을 가르칠거냐?"고 물으면 "성경 교육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보고한다. 사실 성경에서 배울 것이 얼마나 많은가. '선민학교에 가면 예수쟁이가 된다며 모슬렘 강경파들은 자녀를 그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래서인지 자녀가 선민학교에 다니는 것을 공개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교직원의 40%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교사들은 부유층 자녀들을 가르치고, 월급도 타지키스탄 안에서 제일 많이 받기 때문에 다른 학교 교사들보다 경제적으로 넉넉했다. 또 졸업생의 99%가 대학에 진학하고 있으며 그 중 70%는 외국 대학으로 갔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는 전학년 발표회를 갖는다. 학부형, 문교부 장관과 지도자급들을 초청한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퍼지고 성탄 축하송을 할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곤 했다. 지난해 12월25일에는 더 감사함이 넘쳤다. 1학년부터 시작해 11학년을 졸업하는 학생들이 선민학교의 역사를 연극으로 무대에 올렸다. 남녀학생 대표가 큰 화환을 내게 걸어주며 "이런 학교를 세워주어 감사하다"고 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선민학교는 날로 번창했다. 경시대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학교가 1등을 차지했다. 이 나라 독립기념일 행사가 있을 때마다 후잔시로부터 한국적인 것을 준비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부채춤과 소고춤을 선보이기도 했다. 복음성가에 맞추어 소고춤을 추고 태권도 시범도 보였다. 주지사, 시장들, 귀빈들과 시민들에게 환대를 받았다. 입학식, 졸업식에는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연주했다. 하나님의 딸로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감사를 드렸다. 내가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딴 것 같았다.
우리 학교가 하는 모든 프로그램을 다른 학교들도 따라하기 시작했다. 교장은 이 나라 문교부 커리큘럼도 우리를 따라온다고 말했다. 이후 터키, 독일, 러시아, 타지키스탄 사람이 세운 사립학교가 설립됐다. 지금 타지키스탄 안에 8개의 사립학교가 세워졌는데 정부와 공동으로 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학교는 선민학교뿐이다. 2007년부터는 학교 이름을 '함다스치'(타직어로 국제학교)로 바꿨다.
이 학교에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난 것만큼 사탄의 방해도 컸다. 1998년의 일이다. 몇년 만에 한국에 도착, 김포공항에서 짐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에 "다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잘못 들었겠지'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예 오지 말게 하시지 비싼 비행기삯을 물고 바로 돌아가라니, 내가 무슨 착각을 한거지'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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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종분 (7) 경비원, 살인후 시신 교내 은닉 학교 이미지 실추 막으려 온 힘 | |
오랜 만에 가족들과 만나 기뻤지만 "가라, 가라, 가라"는 소리가 자꾸 들렸다. 가족들은 급히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나를 보고 어리둥절했지만 일주일 후에 있는 비행기를 타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타지키스탄으로 가는 항공은 일주일에 한번뿐이었다. 비행기 값이 너무 아까웠다. '이럴 거면 오지 못하게 하시지…'라며 이런 저런 불평과 불만 속에 타지키스탄에 도착했다. 공항에 고려인 의사 세르게이가 마중나왔다.
"선교사님. 문제가 생겼어요. 학교버스 백미러를 누가 한밤중에 떼어갔어요."
보통 밤에는 자동차를 학교 밖에 세워놓지 않는다. 자동차 타이어는 물론이고 윈도 브러시를 떼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윈도 브러시는 비가 올 때만 달고 다녔다. 자동차에 히터가 없어 겨울에 운행할 때는 석유난로를 차 안에 피워놓고 다녔다. 이런 상황에서 구입한 러시아제 트럭을 개조해 만든 버스는 우리에겐 귀중한 재산이었다.
선민교회에 도착해 사건 당일 경비원을 불렀다. 당일 경비는 34세의 눈이 많이 나빠 두꺼운 안경을 끼고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가포르 교회 파주 집사가 부탁해서 채용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파주 집사가 3개월 전에 행방불명이 된 상황이었다. 경찰에 신고하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당신이 한 일이지요?누구와 함께 했지요?"
나의 유도신문에 경비원은 자기가 변상하겠다고 대답했다.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바로 "파주 집사가 어디 있는지 당신은 알고 있지요?"라고 물었다. 그는 "파주는 빚이 많다. 석달 전에 빚쟁이들이 학교로 찾아와 실랑이를 벌이다 돈을 안갚는다고 죽였다"고 했다. 너무 끔찍한 말이었다. 학교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다니. 나는 누가 왜 죽였는지보다 그 시체가 어디 있는지가 궁금했다. 혹시 학교 안에 시체를 은닉했으면….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생각할수록 경비의 대답이 어설펐다. 그 사람들이 파주집사를 어떻게 죽였냐고 물으니 경비원은 "얼굴은 모르고 그들이 철사로 뒤에서 목을 졸라 죽였다"고 했다.
"얼굴을 모르는데 어떻게 가느다란 철사가 보이지요? 당신이 죽였지요? 시체는 어디 있어요?"
계속 다그치자 경비는 사색이 되며 학교 지하실 안에 묻었다고 실토했다. 난 바닥에 주저앉았다. 기가 막혔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신학생들을 불러 경비원을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3개월 전에 실종자를 당신들에게 신고했는데 오늘까지 못 찾았지요? 그 사람은 죽었어요. 그가 어디서 죽었는지 비밀로만 해주면 내가 범인을 넘겨주겠어요."
나는 경찰서장에게 살해장소가 학교라는 사실을 비밀에 부친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경비원을 넘겨주었다. 경비는 파주 집사가 무슨 일이든 자신에게만 시키고 야단을 쳐서 화가 나 그를 살해해 지하실 바닥에 시체를 묻고 시멘트로 발랐다고 자백했다. 경찰들이 현장에 도착해 지하실 바닥을 팠다. 지독한 냄새로 경찰들이 할 수 없다며 코를 막고 야단들이었다. 나는 마음이 급해 '다 저리 비키라'며 직접 현장을 지휘했다.
이후 경찰서를 방문하니 경찰들이 양쪽으로 줄을 서서 나를 맞았다. 서장의 명령이었다고 했다. 외국인으로 타지키스탄에 자신이 세운 학교를 지키려고 애쓰는 모습과 경찰보다 더 치밀하게 사건에 대처한 것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당시 '학교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누가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겠는가?' 하는 생각에 온 힘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때 '다시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여름에 사체썩는 냄새가 진동해 더 큰 문제가 생길 뻔했다. 전능하신 하나님, 고맙습니다. 지금도 늘 문제는 계속되고 있다.
1년 반동안 라이선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 관계자들이 뒤로 다른 것을 요구하지만 들어주지 않아 계속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학교이므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 싶지 않아 계속 버티고 있다. 꼭 승리할 줄 믿고 오늘도 기도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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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종분 (8) “부흥집회때 설교는 하되 예수라는 말은 하지말라” |
수 세기 동안 이슬람 전통이 뿌리내려 복음의 불모지로 남아 있는 중앙아시아 타지키스탄에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보내셨으니 그 뜻을 이루시리라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997년 7월14일을 잊을 수 없다. 치칼레스카시 시장의 도움으로 타지키스탄에서 부흥집회를 열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고건일 순복음대구교회 목사님이 강사로 오시고, 선민학교, 선민신학교 학생들의 태권도 공연, 부채춤, 소고춤을 준비했다. 2만여명이 들어가는 치칼레스카시 공설운동장의 수리도 마쳤다.
그런데 치칼레스카 시장은 막상 대회를 앞두고 "주지사가 허락을 하지 않는다"며 난처해했다. 시장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반대가 극심했다고 했다. 극단적인 이슬람 교도들의 테러시위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며, 폭탄테러 등 돌발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며 집회를 만류하는 것이었다.
큰일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나를 이곳 사람들에게 보내셨는데 복음을 듣게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장에게 "이미 집회를 위해 공설운동장 수리도 다 했는데 못하게 하려면 수리비를 내놓으라"며 강하게 밀고 나갔다. 그러자 "설교만 하지 말라"고 했다. 설교하러 한국에서 목사님이 오시는데 어떻게 설교를 하지 말라고 하느냐고 하자 시장은 "그럼 설교를 하되 예수라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통역에게 '예수'라는 말이 나오면 '하나님'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명목상으로 공식적인 허가를 받았다.
집회 첫날이었다. 운동장 주변에는 긴장감이 돌았다.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몰려왔다. 보안책임자들이 놀라는 표정이다. 치칼레스카시의 경찰들, KGB를 다 동원해도 모자라 이웃 시의 경찰, 정복 사복 형사들이 모여들었다. 사실 이슬람권이므로 이 집회의 성공률은 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2만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운동장이 채워지는 것이다. 상상을 초월한 인파였다.
성회 두번째, 세번째 날은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고건일 목사님은 "이 선교사, 우리는 잠실체육관에서 하루 집회를 해도 일년을 준비하는데 어떻게 옥외 집회를 3회씩이나 준비했어요?"라고 말씀하셨다. 난 "먼 곳에서 오셨는데 어떻게 하루만 복음을 전하겠어요. 적어도 3일은 해야 사람들이 골고루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라고 말했다.
이 나라에서는 좀처럼 무지개를 볼 수 없는데 집회 후 소나기가 쏟아지고 무지개가 떴다.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알려주신 것이다. 신문에는 타지키스탄 개국 이래 가장 많은 인파가 모였다고 보도됐다. 정말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우리를 책임지시는 분이시다. 순종하고 따르면 기적의 도구로서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돌리게 됨을 확신한다.
후잔에 있는 선민교회는 98년 2월1일자로 무슬림 강경파들에 의해 폐쇄됐다. 그래서 버스를 이용해 교인들을 치칼레스카 교회로 수송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 때 KGB들은 비밀리에 예배에 참석해 우리 상황을 본부에 보고했다. 나와 나를 돕는 사람들, 신학교를 졸업한 전도사들 모두 사진을 첨부하여 신상명세서를 기록, 요주의 인물로 리스트에 올렸다.
그해 7월 후잔에서 80㎞ 떨어진 가나바담에 교회를 설립하여 빠흐름 전도사를 교육자로 파송했다. 지금까지 102명이 선민신학교를 졸업했고 이중 16명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들은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에서 목회 활동을 하고 있다. 금년에는 우라추베, 브스톤에 빠흐름 목사와 퓌리우스 전도사를 파송시켰다. '오늘은 타지키스탄, 내일은 세계로'라는 목표 아래 신학생들은 매일 기도하고 있다.
선민교회 본교회와 지교회 성도들은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때 한 자리에 모인다. 성도가 많아서 한 자리에 들어갈 장소가 없다. 후잔시에서 제일 큰 장소가 8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인데 우리 교인은 절반도 못 들어가 계단에 서 있고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있다. 지난해부터 교인 모두가 함께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을 달라고 기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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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종분
(9) 현지 정부와 공동운영 병원 체제·인식 차이로 큰 곤욕 | 2008.03.16 18:08:34 |
1993년부터 국제구호단체인 한국 기아대책 타지키스탄 지부장으로서 사역을 넓혀갔다. 당시 많은 주민들이 피부병, 결핵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목숨을 잃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1999년 기아대책기구로부터 약품, 의료침대, 의료소모품, 의료기구 등이 담긴 40t짜리 컨테이너를 받아 의료선교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의료선교에 탄력이 생길 무렵 치칼레스카 시장이 병원 공동운영을 제안했다. 기존 병원 건물은 낡아 비가 새고, 담장이 무너져 거의 허물어진 상태였다. 가난하고 병들고 또 어설픈 의술 때문에 장애인이 되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고 구원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아대책에서 매년 2만달러를 지원해주기로 했다. 초음파기구, 엑스레이, 정형외과 기구, 혈액분석기와 제부(弟夫) 김영준 장로님이 기증한 CT촬영기 등을 정부에 신고하고 국가와 합작하는 병원허가를 받았다. 병원건물은 정부 소유였지만 입원실, 수술실을 리모델링했다. 난방시설이 없어 신생아들이 페렴에 걸려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난방시설 공사도 새로 했다.
2000년 4월8일. 랜디호그 국제기아대책기구 대표, 정정섭 한국기아대책기구 회장, 치칼레스카 시장과 오버라스 주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병원 개원식을 했다. 이날 나는 치칼레스카시 명예 시민권을 받았다. 감격스러웠다. 한국의 인천길병원, 강북삼성병원, 성남중앙병원 등에서 초청한 한국인 의사 8명이 우리 의료진의 연수교육을 맡아주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병원비는 무료라고 하지만, 사실 부자는 제대로 치료를 받고 가난한 사람은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우린 병원비를 유료로 했다.
하루는 검찰이 와서 모든 장부를 압수했다. "기아대책기구를 통해서 받은 의료기에 대한 세금을 지불하지 않았는데 왜 병원비를 유료로 하는가?"라며 한밤중에 세 군데나 끌려다니며 조사를 받았다. "우리 병원은 현지 의사들과 함께 무의촌에 무료진료하러 다닙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의료비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 정부가 부탁했고, 우린 예수님의 사랑으로 한 것입니다. 최소한의 유지비는 받아야 합니다. " 그러나 420달러의 벌금을 물었다. 너무 억울했다.
하루는 이상한 명령이 내게 전해졌다. CT촬영기를 오버라스 주 병원에 설치하라고 했다. 보사부장관이 와서 오픈식을 한다고 했다. 건물은 국가가 다 수리하고 모든 이동경비도 제공한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그대로 했다. 그 당시 이 나라에 CT촬영기는 이것 한 대였다. 결국 CT촬영기를 국가에 넘겨주었다. 잘 사용하라고 부탁했는데 결국 두 달도 못가서 고장나 지금까지 못 고치고 있다.
그후 어느날 KGB의 높은 사람이라는 사람이 소환장을 주며 "내일 아침 첫 비행기를 타고 수도 듀샨베로 가라"고 했다. 검찰총장의 소환장이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다음날 나리사와 함께 첫 비행기로 듀산베에 갔다. 공항 트랩을 내리자마자 선글라스를 끼고 까만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 두명이 내 양팔을 잡고 자동차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굉장히 불쾌했다. '내가 무슨 죄가 있길래…' '잘못한 것이 없는데…죽으면 순교다'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평안했다. 나리사는 통역을 해준다며 내 옆을 지켰다.
"이종분, 난 너를 잘 알고 있어. 1992년에 누구의 초청으로 타직에 들어온 줄 난 알고 있다. 목사이면 교회나 할 것이지 병원은 왜 하는 거지. 의사도 아니면서…."
신경질적으로 생긴 남자는 "우리나라는 너를 필요로하지 않는다며 돌아가라"고 했다. 마음이 씁쓸했다. 사실 이들이 나를 미워하는 까닭이 있었다. 병원환자는 많고 진료환경도 호평을 받았지만, 지역 관계자들에게 뒷돈을 주지 않았다. 검찰심문을 받는 동안 나리사는 내게 계속 말하지 말라고 눈을 껌뻑인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라는 말씀을 잡고 소환장을 그 남자에게 보이며 "당신이 이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아니다"라고 했다. 나는 "아닌데 왜 당신이 심문을 하느냐?"고 소리쳤다. | | |